어린 부처님/ 송규호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 날이다. 변산반도 내소사의 숲속 놀이터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이를 위한 나들이가 아니라 부녀자들의 흥겨운 봄놀이인 것이다.
내소사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가인봉의 중턱 높다란 곳에 자리한 청련암에의 길이 생각보다 순탄하지 않다. 암자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산으로 에워싸인 골짜기는 서쪽만이 뚫려서 멀리 펼쳐진 서해 바다다.
그런데 텅 비어 있는 암자의 방문에는 자물쇠가 잠겼다. 그리고 꽃 한 송이 피어낼 구석도 없는 좁디좁은 텃밭에 상추만이 너붓너붓 자라고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암자에 배낭을 맡겨두고 산마루를 향해 오른다.
저 봉우리와 이 능선을 오르내리다가 되돌아와도 암자는 여전히 쓸쓸하기만 하다. 평소에 상추쌈을 좋아하는지라 한물이 지난 상추를 네댓 잎 솎아 내어 점심 맛을 돋운 것이 자칫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문틈으로 시줏돈을 밀어 넣고 막 떠나려 하는데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아이가 시들시들 힘없이 올라온다. 다가와서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무거운 발목을 타달거린다. 하필이면 이 어린이 명절에 어린이 혼자 여기까지 올라온다는 것이 아우래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너, 혼자서 왜 왔지?”
“여기가 우리 집인디.”
힘없는 대답이다. 아예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는 시들한 반응이다. 어쩌면 가정환경이 자아낸 버릇에선지도 모른다. 계절에 뒤진 아이의 바지와 저고리가 몹시도 무겁고 피곤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먹을 것이라고는 남새밭의 상추와 물뿐 아무것도 없다.
“그럼, 아버지가 스님이란 말이지?”
아이는 쥐어준 과자 봉지를 벗기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빠는 볼일이 있어서 정읍에 나갔다면서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한다.
“그럼, 엄마는?”
“나갔어요. 안 와요. 다섯 살 때 나갔어요.”
아니는 아래 정의 놀이터에서 사람 구경만을 하다가 그대로 되돌아온 것이다. 어린이에게는 방문을 열 열쇠가 없다. 그리하여 물로 배를 채우며 한데에서 새우잠으로 아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절에서는 아직도 많은 어머니들의 치맛자락이 ‘니나노’ 가락을 타고 어지럽게 휘돌아가고 있을 텐데….
날마다 절로 내려가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 엄마의 얼굴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이의 일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도 아물아물 사라져 가는 그리운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나 보다.
어린이! 말만 들어도 귀엽고 토끼처럼 발랄한 이름이다. 이들은 때 묻지 않아서 사랑스럽고 구김살이 없어서 밝기 그지없다. 그런데 여기 이 아이는 마치 고목에 붙어사는 매미처럼 암자를 오르내리며 나날을 보낸다. 성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이 아이는 두 손 모아 비는 합장도 입에 붙은 염불도 모른다.
저녁에 올리는 청련암의 종소리는 ‘변산 팔경’의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누가 저 종을 울릴 것인지…. 설사 은은히 울려 퍼지는 메아리 속에 시방정토가 열린다 할지라도 아이에게는 시디신 산딸기나 구겨진 그림책만도 못할 것이다.
언제던가 동해안의 죽변에서 만난 아이는 멀리 수평선을 눈여겨 비켜보고 있었다. 그는 생선을 가득 싣고 돌아올 만선의 꿈속에 아빠의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흔한 장난감 하나 없는 이 암자의 아이에게는 무지개를 잡으러 뛰어다닐 벌판이 없다. 그리고 아궁이에 지필 나무깽이를 꺾어 나르기에도 너무나 부드러운 팔다리다.
떠나려고 배낭을 메고 일어서도 아니는 말이 없다. 움쭉도 하지 않는다. 숙명적인 버릇으로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도 절로 내려가서 여인들 속에 엄마의 모습을 비춰보려는 그리움에 잠길지도 모른다. 어두운 한밤중에도 산짐승의 울부짖음에도 두려움을 모르는 어린 부처님이다.
내려가는 길목 숲 속에서 멧새가 운다. 엄마의 소식이라도 귀띔해 줄 듯이 암자 쪽으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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