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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252

인술의 견학 김홍신 고유번호 0356번의 성별란엔 -우-표시가 되어 있었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0356번에게서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등뒤로 내비치는 브래지어 끈이 살점을 조일 것만 같았다. 마주앉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미스 나병환자-같은 걸 선발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이 여자가 최고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이렇게 깨끗한 피부를 가진 미녀에게 고유번호가 붙어 있다는 게 상담원 성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0356번이라면 상당히 고참 환자에 속할 뿐 아니라 천 번 이내의 환자라면 늙은이가 되었거나 반 정도는 이미 죽어버린 환자들의 번호였다. 0356번이라면 적어도 17년이나 된 환자의 번호였다. 나병력(癩病歷) 17년이라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콧구멍이 하나이거나.. 2021. 9. 30.
대역인간 김홍신 「간음한 자 일어나라. 」 예배당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간음한 자 일어나라. 」 그의 목소리는 공포로 변질되어 교인들의 고막을 건드렸다. 창 쪽에 앓아 있던 그녀는 두려움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살갗이 일시에 경련하며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얼굴의 미세한 혈관과 땀구멍에 돌기가 솟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간음한 자 일어나라. 」 그녀는 아랫도리가 축축히 젖어오는 것 같아 무릎에 힘을 주었다. 스커트 사이로 찬바람이, 알 수 없는 손가락이. 무엇인지 경직된 것들이 밀고 들어올 것 같았다. 그가 강단을 내려섰다. 그리고 단거리 선수마냥 발끝을 세웠다. 그 주위로 폭력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그를 험상궂게 만들었다. 그는 뛰었다. 교회당이 쾅쾅 울렸다. 뛰면서 그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 2021. 9. 30.
무죄 증명 김홍신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길고 느리게 암청도 앞 바다를 훑고 지나갔다. 철석거리는 바다가 잠시 목청을 낮추었다가 사이렌의 여음과 암청산의 메아리가 엷어져가자 다시 제 목청을 뽑으며 철썩거렸다. 바다는 밤새 울 것처럼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지서의 불빛을 피해 어물창고 옆으로 모인 서너 명의 장정들은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알아보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파도소리 속에서 노 젓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배가 나루에 닿지 못하도록 뱃전을 밀어내며 장정들은 차례차례 배 위로 뒹굴 듯한 몸짓으로 올라갔다, 배는 서서히 장대 끝에 밀려났고, 어둠은 배를 삼킬 듯 짙어졌다. 돌섬을 돌아 양식장으로 꺽이는 물길에 장정들은 드럼통의 뚜껑을 열었다. 역한 기름 냄새가 밤바람에 날려 금세 장정들의 코 속을 헤집고.. 2021. 9. 30.
어떤 시작 김지원 푸른 파도에 두둥실 실려 윤자는 부신 태양을 향해 누워 있었다. 처음 몸을 잠글 때는 선뜻하던 바닷물이 이젠 정감 있는 온도로 마치 살아 있는 듯 기분 좋게 윤자의 몸에 닿았다. 귓가에 찰랑이는 물결, 젖은 코끝을 스치는 바람, 멀리 시야 한 귀퉁이를 빠져나가는 돛단배며 모터보트의 단조로운 기관소리, 또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영어, 남미어. 또따또따, 발라솰라, 웨익웨익, 가려 들을 수조차 없이 각각 지껄이는 말들의 먼 꿈결같은 소리...... 태양이 눈부시어 윤자는 파도에 씻긴 눈썹을 잠에 취한 사람처럼 겨우겨우 열었다 닫았다 하며 아, 이것이 진정한 나의 평화다 하는 느낌이었다. 정일은 어디 있는가. 윤자는 몸을 일으켜 정일을 찾았다. 정일은 아까처럼 비치파라솔 밑에 앉아 무언.. 2021.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