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단편소설2122 6. 신라의 푸른 길 신라의 푸른 길 -윤대녕 혹은 내가 투구게처럼 갑갑하게 느껴지고 이 한 줌 하찮은 삶도 갑자기 자갈밭을 갈고 있는 보습처럼 못 견디게 더워져서, 마침내 삶의 화두가 뻗쳐 올라와 물집 투성이인 얼굴이 되었을 때 다시금 나는 떠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석굴암 본존불상 아미타불과 경주에서 강릉까지 가는 7번 국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불현듯 행장을 꾸리고 나는 정말 투구게 같은 모습으로 남 몰래 어깆어깆 길에 올랐다. 나는 경주에 가서 석굴암 본존불을 알현한 다음 동해로 가서 삼촌을 만나볼 셈이었다. 삼촌은 내게 있어서 하나의 생불(生佛)이었다. 나는 그렇게 두 개의 부처와 그 광배(光背)를 참견해야할 것만 같았다. 또한 그 두 개의 부처 사이를 잇고 있는 7번 국도를 조선 사람.. 2022. 3. 1. 5. 새의 초상 새의 초상(肖像)-윤후명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팔색조와 아마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팔색조를 찾아 그 작은 섬에 갔다가 그녀를 만났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리라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은 없었다. 하기야 예감이란 한낱 쓰잘데 없는 기대나 우려에서 오는 나약한 정신의 소산이라고 볼 때, 나는 분명히 어떤 예감이나마 가졌어야 했다. 나는 그만큼 지쳐 있었고 또 허물어져 있었다. 내가 팔색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 뭍을 떠나 낯선 섬에 발을 들여놓았을 무렵이었다. 팔색조. 이름 그대로 몸 빛깔이 여덟 가지로 알록달록한 새라고 했다. 그러나 그 새가 이름난 것은 알록달록한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워낙 희귀조라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는 듯했다. 새에 대해서 조예도 없을 뿐.. 2022. 3. 1. 4. 돈황의 사랑 돈황(敦煌)의 사랑 윤후명 나는 여전히 그놈의 쇠 침대에서 잠이 깼다. 낡았지만 언제나 꿈 없이 잠들 수 있는 침대였다. 한겨울에 냉돌을 어떻게 견딜까 걱정하던 차에 우연히 고물장수의 리어카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흥정을 벌였을 때, 아내는 차라리 그냥 스폰지 삼단요가 어떻겠느냐고 내 소매를 끌어 잡아당기기조차 했었다. 세방에 침댄 무슨 침대예요, 그건 침대라고 할 수도 없는 고물이에요. 아내는 그런 두 가지 뜻으로 눈짓을 했었다. 그러나 남대문 시장에서 두툼한 스폰지를 사다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덮으니 제법 번듯한 침대가 되었다. 그리고 유난히도 추운 그 해 겨울이었지만 그놈의 좁은 쇠 침대에 둘이서 껴 붙어난 결과 냉돌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냉기를 피하는 데는 그보다 더 안성마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 2022. 3. 1. 3.누란의 사랑 누란(樓蘭)의 사랑 윤후명 그 방에서의 동거(同居) 생활은 지지부진한 가운데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누란(樓蘭)에 대한 어떤 생각에 줄곧 사로잡혀 있었다. 누란은 서역 지방의, 폐허가 된 옛 오아시스 도시국가의 이름이었다. 눅눅하게 습기가 차고, 채광이 되지 않은 그 방에서의 동거 생활은, 그러나 뜻이 같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동서(同棲) 생활이라고 하는 편이 좀더 적합한 표현일 듯싶다. 우리는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기보다 함께 서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어두운 방에 아예 틀어박히다시피 하고 지냈다. 우리들은 나날이 창백한 얼굴이 되어 우리들만의 음험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 상상할 수 있듯이, 육체의 유희에 탐닉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무렵 우리는 그 결.. 2022. 3. 1. 이전 1 ··· 27 28 29 30 3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