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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50. 줄의 운명

by 자한형 2022.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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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의 운명/ 오정순

창조주의 말씀으로 태어난 아담과 하와는 울지 않았지만 탯줄을 끊고 나오는 아이는 울며 태어난다. 인류의 어머니라 해서 하와라 불렀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하와의 죄명은 책임 전가였다. ‘뱀에게 속아서 따먹었습니다.’ 라는 말 한마디로 잃어버린 낙원은 자궁의 형태로 남게 된다. 그 잃어버린 낙원을 찾고 싶은 본능이 예술로 승화되는 것일까.

오래 전, 덕수궁에서 열린 국제 미전 전시장은 누운 여자 나신상의 입체 조형물로 꾸며졌다. 자궁 안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관람객들은 낯 뜨거워 할 틈도 없이 흡수되었다. 줄지어 들어가는 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생스럽게 태어난 아기는 자궁으로부터 쫓겨났다고 생각하면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여 탯줄이 끊기고, 세상에 태어나서, 육상선수는 줄을 끊고 골인을 하며, 큰 행사 때마다 끊는 줄의 의미는 무엇일까.

끊으면서 독립인격체로 태어나고, 인연을 이으며 관계를 돕고, 묶거나 엮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기도 하는 줄의 운명, 씨줄과 날줄로 위도를 가르는 지구상의 한 점에 발을 디디면 금줄로 출생신고를 하고, 이름과 함께 줄과 인연을 맺게 된다.

자궁에 탯줄을 잡고 놀았으니 본질은 생명 줄이라 할지라도 부차적인 의미는 장난감이었다. 성의 본질이 종족보존이고 부차적인 의미가 유희이듯이. 탯줄 장난감을 놓고 주먹을 쥐고 나면 배내옷을 선물 받는다. 그 옷을 줄로 여미였으니 첫 번째 보호이다. 탯줄을 놓고 세상 사람이 되기 위해 모진 고생을 하고 태어난 사람, 우리 모두는 잃고 얻는 경험을 몸소 겪으면서 본능적으로 잃어버린 줄을 잡고 싶어 바둥거릴 것이다. 신생아가 주먹을 꼭 틀어쥐는 의미를 이 시점에서 찾아본다.

아기가 뒤집은 다음 눈이 보이기 시작하면 줄을 좋아한다. 두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잡으려 들고 부드러운 고무줄을 지루한 줄 모르고 가지고 논다.

실뜨기와 고무줄놀이, 줄넘기와 줄다리기, 그네와 팽이치기, 연줄과 같이 줄은 놀이의 도구가 되어 사람을 성숙시키기도 한다.

질서의 줄은 어떠한가. 나란히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줄을 통한 생활 학습이 이루어진다.

메스게임을 통해 질서 있는 줄의 아름다움을 보고, 색실로 수를 놓으며 몰두의 미를 익힌다. 기타와 첼로, 바이올린의 줄은 정서를 다듬기도 한다. 털실로 스웨터를 짜며 사랑을 엮기도 하고, 생각이란 실을 생활이란 천에 땀땀이 박으며 예술의 맛을 익히기도 한다.

줄은 차츰 의미에 부피를 더해 간다. 목걸이로 치장을 하고, 색줄로 머리를 묶기도 하고, 시게 줄과 줄이 긴 가방으로 멋을 부리기도 한다.

세월과 함께 줄도 나이를 먹으며 추억을 갖게 된다. 줄 타며 노래하는 피에로의 애환을 이해하기도 하고, 동아줄을 타고 하늘나라로 오르는 동화를 기억하기도 한다.

내 기억의 우물에서 들어올린 선명한 줄은 서커스단의 외줄 타기이다. 비 오는 날 줄 타는 소녀는 묘기를 보여 주다 떨어져 죽었다는 소문과 함께 아슬아슬한 순간들은 가슴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했다.

다욱 강하게 떠오르는 것은 굴비 두릅 엮듯 손을 뒤로 묶어 끌고 가던 사상범들의 이감(移監) 장면이다. 땀으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주체하지 못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가 힘껏 젖히는 모습은 어린 내게 아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꿈에 본 망자(亡者)의 행렬은 줄을 연상시키는 가장 기묘하고 섬뜩한 장면이기도 하다.

마당 가운데 늘어진 빨랫줄은 사람이 산다는 표시이다. 빨래가 널린 마당은 정겹고, 그 줄은 생활이라는 팽팽한 의식으로 집을 지키고 있다.

철로변의 전깃줄은 도시와 농촌을 잇는 접목의 줄이며 들판의 늘어진 비닐 줄은 허수아비의 대역을 한다.

사람들은 줄을 이용하여 생활 도구로 쓰기 시작하여 문명의 흐름을 타기도 했다. 철사 줄로 옷걸이를 만들고, 새끼줄로 야채를 묶으며, 전선을 길게 늘여 도구를 움직이지 않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변하지 않아도 좋았겠다 싶은 것은 문명의 이기가 죽음을 부른 도구로 사용된 장면이다. 전기밥솥 코드를 잘라 목을 매어 자살한 사건을 보며 튼튼한 줄이 원망스러웠다.

굽이굽이 줄같이 이어지는 산길은 그냥 보아도 편안한데 갈 길 급할 때 한 줄로 이어선 자동차 줄은 대략 난감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줄이다. 돈줄과 권력, 인맥의 줄은 젊은이들에게 갈등의 소지로 남게 된다. 최근 모 정당 소속 의원 몇몇의 줄 바꿔 서기와, 재계에서 정계로 줄을 바꿔 선 장당 대표의 끊고 이은 줄의 매듭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줄로 시작해서 죽는 날까지 줄과 연을 끊지 못하는 우리는 줄에 감겨 삶이 끝난다. 사망신고와 함께 이름 석 자에 줄이 그어지면 이승에서 저승으로 전할 때도 무명 줄로 땅 속에 안치하지 않는가. 보이는 것과의 연은 끊어지고 끊을 수 없는 기억의 줄만 남아 정서의 맥을 잇는다.

한 사람의 정서가 7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소멸된다고 한다. 인류의 시작 이래 오늘까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살아온 우리는 본래의 모습에서 얼마나 많이 변질되었을까. 수많은 가닥의 기억의 줄이 뒤엉켜 단순하게 만든 세상을 복잡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현대인은 거칠어진 손을 감추기 위해 비단장갑을 끼듯, 마모된 인격에도 비단장갑을 끼고 답답해 한다. 끊어야 할 악습과 슬픈 기억, 어두움과 무의식의 노예가 되어 보이지 않는 줄의 조종을 받는다.

손질하지 않으면 변할 수 없는 거친 손과 같이 인격의 비단장갑도 벗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조종도 피할 수가 없다. 퇴행과 방어를 반복하고 끊임없이 실수하며, 인생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와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모체에서도 탯줄을 끊고 떠나지 않으면 세상 사람이 될 수 없듯이 모든 시작은 끊음으로써 새롭게 시작된다.

마지막 가는 사람의 숨 끊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호흡의 고통이 산모의 진통과 흡사함을 느끼게 된다. 집착을 끊고 새 세계로 태동시키는 것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가 보다.

지나간 아무 것에도 크게 미련을 두거나 집착하지 말 일이다. 세상은 시작도 끝도 없는 줄의 연속, 끊고 잇는 영원한 진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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