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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48. 조계사 앞뜰

by 자한형 2022.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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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앞뜰/ 박재식

내가 일을 보는 사무실은 번화가에 있는 고층건물 6층이다. 그러므로 내가 앉은 자리에서 노상 바라보이는 것은 높고 낮은 빌딩의 숲이 끝없이 번져나간 도심의 살벌한 풍경이지만, 바로 창 아래에 조계사(曺溪寺)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취 때문에 하루 낮을 보내는 마음이 한결 쇄락하다. 일을 하다가 문득 지친 눈을 창밖으로 돌리면, 우람한 대웅전의 푸른 기와지붕이 선뜻 시야에 와 닿으며 시원한 그늘을 지어준다. 항시 문이 닫힌 솟을대문에 수문장을 그려놓은 단청 빛깔도 그러하거니와, 절의 이쪽 경계를 막아 높다랗게 둘러친 고풍한 돌담이 제법 고궁(古宮)의 뒤안 같은 호젓한 옛 정취를 자아준다. 도회의 한가운데서 잠시나마 이런 멋스러운 분위기에 젖어본다는 것이 얼마나 희안하고 흐뭇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눈여겨 내려다보는 곳은 그러한 풍치보다 본당 앞의 별로 넓지 않은 뜨락이다. 그것이 잔디밭이거나 화단으로 꾸며진 뜰이었다면 나의 눈길을 그처럼 자주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뜰 가운데에 아름드리 노목 한 그루가 떨기 차게 서 있을 뿐, 그림의 여백처럼 하얗게 비어 있는 뜰이 여간 마음을 안온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안국동 앞 한길에서 이쪽 뒷담길로 건너오는 행길 구실도 되는 이 조계사의 앞뜰은, 무심코 내려다보는 눈에 그림책을 넘길 때처럼 차분한 즐거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때때로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무리를 지어 내려와서 사람도 아랑곳없이 뜨락을 서성인다. 누가 모이라도 주게 되면, 어깨나 머리 위까지 마구 올라앉아 파닥거릴 만큼 이 작은 날짐승들은 사뭇 방자 무애하다. 또 뜰을 지나는 선남선녀가 선 채로 두 손 모아 다소곳이 절을 하는 광경을 자주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본당이 있는 북쪽을 향해 드리는 배례는 알 만한데, 남쪽이나 때로는 내가 앉아 있는 서녘을 보고 절을 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나의 시야가 가려진 곳에 따로 불전이나 탑신이 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로는 그저 허공을 향하여 마음속의 부처님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자세 같다. 조금도 작위(作爲)의 태깔이 없는 진지한 것이어서, 이쪽을 보고 다소곳이 절을 하고 있는 여인의 경건한 신심이 곧바로 나의 가슴까지 와 닿는 느낌을 준다. 담장 하나를 사이로 이쪽 행길을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과 견주어 보면 사뭇 딴 세상 같은 탈속한 정경이 잔잔하게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의 이런 느낌은 절 자체의 분위기보다 뜰이 풍기는 시사적(示唆的)인 인상에서 오는 효과가 더 큰 듯하다.

나는 절을 둘러볼 때 그곳에 있는 불당이나 석탑 같은 축조물보다 경내의 뜰에 더 매력을 느낀다. 본당 앞에 바람이 하얗게 쓸어간 빈 뜨락이 넓은 절일수록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 하얀 뜰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정토(淨土)를 연상시켜 주기 때문이다. 속진이 자욱한 도심의 복판에서, 본당 뒤꼍에 현대식 건물의 고층 가람을 두고 그 경내에 즐비한 자동차가 서 있을 만큼 무가내하 세속의 모습을 닮아가는 대본산의 절 마당에, 애오라지 남아 있는 빈 뜰이 숫제 불문의 정토를 간직하는 상징적인 공간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부처님의 열린 마음의 텃밭 같기도 하다. 비둘기 떼가 마음놓고 노닐고, 안식을 찾는 중생이 예불을 하는 빈 뜨락 같은 것이 부처님의 마음자리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그 뜰을 볼 때마다 마음을 비운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나의 경우, 마음을 비운다는 생각은 결코 해탈의 경지를 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당면한 번뇌에서 벗어나 허심탄회할 수 있는 지혜를 갖는다면 나의 삶이 얼마나 떳떳하고 평안할까 하는 생각을 간절하게 해볼 뿐이다. 이 대수롭지 않은 지혜가 없는 탓으로 내 마음은 항시 이렇게 불편하고, 나와 얽힌 세상일이 이처럼 어지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도 가져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늘도 시름없이 조계사의 앞뜰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정경이 마치 대우주 속에 명멸하는 수유의 사상(事象)처럼 나의 시계에 깃들었다가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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