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자를 위하여--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조 없는 지도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 운동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 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들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 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 민복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 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과 명리를 위한 부동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에 능한 직업 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충정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 공정 청백 강의한 지사 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 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 생활의 이욕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와 장사꾼적인 이욕의 계교와 음부적 환락의 탐혹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 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하고 재취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나 환부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개가나 속현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또한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의
고귀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 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에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덕대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부린다고 굶주리고 얻어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태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놓는 것은 분반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 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 자시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단재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 얼굴을 씻기 때문에 탄 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 때문에 낳은 많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백성을 속여 야당의 무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란 뜻이 깃들여 있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 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의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 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의 변절자,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
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 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 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의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사전"을 편찬한
'조선어 학회'가 국민 총력 연맹 조선어 학회 지부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족히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럴 의미에서 좌옹, 고우, 육당, 춘원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 말의 대일 협력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었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은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 특위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벗겨 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 하고 누명만 쓸 바에야 무위한 채로 민족 정기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 숙제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에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다거나 바람이 났거나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도 한번 못 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의 황음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만근 30년래에 우리 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의 남로당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책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다.
감당도 못 할 일을, 제 자신도 율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 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좇으면 한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 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히 깨우치라. 한일
합방 때 자결한 지사 시인 황매천은 정탈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 무완인'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 야록"에 보면, 민 충정공, 이용익 두 분의 초년 행적을
헐뜯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 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의 탁류--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 먹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행색은 딱하기 짝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으로 소일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이
여세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를 위하여 점심에는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 사실 얘기를 하고 초연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로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
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 때 몰려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으로 가는데 길가 숲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내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하였다.
그 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밥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 꼴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는 것도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
소인기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은 있다. 야당에서 권력에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한 사람도 있고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병은 버젓하나 뜻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다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게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은가.
양가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돌의 미학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의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가,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한 가운데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은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다. 파초 잎새 위에
백설을 듬뿍 실어 놓기도 하고, 10리 둘레의 산수풍경을 작은 화폭에다
거두기도 하고, 소쇄한 산봉우리 밑, 물을 따라 감도는 오솔길에다 나무꾼이나
산승이나 은자를 그리되, 개미 한 마리만큼 작게 그려 놓고 미소하는 그 화경은
사실이기보다는 꿈을 그린 것이었다. 이 정신이 사군자, 석수도, 서예로 추상의
길이 달린 것이 아니던가?
괴석이나 마른 나무 뿌리는 요즘의 추상파 화가들의 훌륭한 오브제가 되는
모양이다. 추상의 길을 통하여 동양화와 서양화가 융합의 손길을 잡은 것은
본질적으로 당연한 추세라 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한 마디는 동양미의 가치
기준이거니와, 생명감의 무한한 파동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웃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돌의 미는 영원한 생명의 미이다. 바로 그것의 추상이다.
내가 돌의 미를 처음 맛본 것은 차를 마시다가 우연히 바라본 그
바위에서부터였다. 선사의 다실에 앉아 내다본 정원의 돌이었다. 나의 20대의
일이다. 나는 한때 일본 경도의 묘심사에서 선에 든 적이 있었다. 1천7백 측
공안을 차례로 깨쳐 간다는 지극히 형식화된 일본선은 가소로웠지만, 선의
현대화를 위해선 새로운 묘미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사뭇 유도처럼 메다꽂기도 하고, 공부가 모자라 벌을 설 때는
한겨울이라도 마당에 앉혀 놓고 밤을 새워 좌선을 강행시키는 그 수련에서
준열한 임제종풍의 살활검의 고조를 볼 수 있던 일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이 선의 수행에서 싫증이 났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다실에 가서 다도를 즐기며 정원을 내다보는 것이 낙이 되었다. 일본의
정원 미술은 다실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다도는 선과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묘심사에는 다도의 종장 한 분이 있었다. 나는
가끔 이 노화상과 대좌하여 다도를 즐기며 화경청적의 맛을 배우곤 하였다.
녹차를 찻종에 넣는 작은 나무 국자를 찻종 전에다 땅땅땅 두드리는 것은
벌목정정의 운치요, 찻주전자를 높이 들고 소리 높여 물을 따르는 것은 바로
산골의 폭포 소리를 가져오는 것이라 한다. 일본 예술의 인공성--그 자연을
비틀어 먹는 천박한 상징의 바탕이 여기 있구나 싶어서, 나는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빈객으로서 다완을 받아 좌우의 사람에게 인사하는
법에서부터 잔을 들고 마시는 법, 나중에 골동으로서의 다완을 감상하며 주인을
추어 주는 법을 배웠다--다완이 고려 자기인 경우에는 주인의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 사장이 시키는 대로 차를 권하는 주인으로서의 예의 작법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것뿐이다. 나는 그 다도에도 흥미가 없었고, 그 뒤에 이 다도를 스스로 행해
본 적도 없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 다실에 자주 놀러 간 것은 사장과 더불어
파한으로 농담의 선문답을 하는 재미에서였다. 실상은 그것보다도 다실의
정적미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아담한 정원을 앞에 놓은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이 다실은 무척 맑고 따뜻하였다. 미닫이는 젊은
중들이 길거리에서 주워온 종이를 표백하여 곱게 바른 것이어서 더욱 운치가
있었다. 나중에는 이 다실에 사장과 대좌해도 피차 무언의 행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럴 때 항상 내 눈을 빼앗아 가는 것은 정원 가장귀에 놓인 작은
바위기가 일쑤였다. 나의 선은 이 이끼 앉은 바위를 바라보며 시를, 민족을,
죽음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바위는 그 어떠한 문제에도 계시를 주는 성싶었다.
잔디 속에 묻혀 있는 불규칙한 징검돌은 사념의 촉수를 어느 방향으로든 끌고
비약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서도 다도도 아닌 돌의 미학을 자득하여 가지고 이
이방의 절을 떠났던 것이다. 떠나던 전날 사장은 7, 8명의 귀족 영양을 불러
다회를 열고 젊은 방랑객을 전별하였다.
그것도 이른바 인연인지 모른다. 그 1년 뒤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불교
전문 강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우리의 선과 우리의 돌의
진미를 맛보게 되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월정사의 동향한 1실은 창만 열면
산이요 숲이 있고, 밤이면 물 소리 바람 소리가 사철 가을이었다. 여기서 보는
바위는 인공으로 다스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암석이었다. 기골과 풍치가 사뭇
대륙적이요, 검푸르고 마른 이끼가 드문드문 앉은 거창한 것이어서 묘심사의
인공적이요 온아적정하던 돌과는 그 맛이 판이하였다. 일진의 바람을 몰고
홀연한 자세로 부동하던 그 바위의 모습은 나의 심안의 발상을 다르게 하였다.
나는 여기서 1년 동안 차보다도 술을 마셨고, 나물만 먹는 창자에 애주무량해서
뼈만 남은 몸이 되어 내가 스스로 바위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의 선도
상심낙사하는 화경청적의 다선에서 방우이목우하는 불기분방의 주선이 되고
말았다.
오대산은 동서남북 중대에 절이 있다. 서대절은 초옥수간 잡풀이 우거진
마당에, 누우면 부처도 없는 곳에 향을 사르고 정에 들어 있는 선승은 사람이
온 줄도 몰랐다. 그를 구태여 깨울 것이 없었다. 그름을 바라보고 새 소리를
들으면, 1천7백 측 공안이 아랑곳없이 나도 그대로 현묘지경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대산 상원사에는 방한암 종정이 선연을 열고 있었다. 이따금
마음이 내키면 나는 그 말석에 참하였다.
구름 노을 깊은 골에
샘물이 흐르느니
우짖는 산새 소리
길이 다시 아득해라.
일 없는 늙은 중은
바위 아래 잠든 것을
청천백일에
꽃잎이 흩날린다.
좌선을 쉴 때면 역시 바위를 내다보며 시를 생각하는 것이 좋았다. 바위를
내다보는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우리 선방에도 차를 마신다. 오가피차나 맥차, 그것도 아무런 형식이 없이
아주 자유롭고 흐뭇하게 둘러앉아 농담을 나누면서 마시는 폼이 까다롭지
않아서 별취였다. 창을 열면 산이 그대로 정원이요, 소동파의
'계성편제황장활산색기비청정신'이라는 시구 그대로 화엄의 세계였다. '차는
찬데 왜, 뜨거울까'--차와 차다의 동음을 이용하며 농담선문을 나에게 던지는
노승이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예, 보라찹니다'라고 대답한다. 역시'보리와
보리'의 동음을 이용한 것--이쯤 되면 농담도 선미가 있어서 파안대소였다.
'풍려열뇌증삼계 법우주오대'의 귀로 연구에 끼이기도 하던 월정사의 생활도
미일 전쟁이 터지고 싱가포르가 함락되고 하면서부터는 숨어서 살 수 있는
암혈은 아니고 말았다. 과음의 나머지 나는 구멍 뚫린 괴석과 같은 추상의
육체를 이끌고 오대산을 떠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월정사는 6.25동란에
회신했다 한다. 내가 거처하던 동향일실--방우산장도 물론 오유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젊은 꿈이 깃든 숲 속의 그 바위는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인세의 풍상에 아랑곳없는 것이 아니라, 그 풍상을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열력하면서 변하지 않는 데에 바위의 엄위와 정다움이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 있는 법열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신라인의 꿈 속에 살아 있던 밝고 고요하고 위엄 있고
너그러운 모습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게 한 것은, 이 불상을 조성한 희대의
예술가의 드높은 호흡과 경주된 심혈이었다. 그의 마음 위에 빛이 되어 떠오른
이상인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 거대한 화강석괴를 붙안고 밤낮을 헤아림 없이
쪼아 내고 깎아 낸 끝에 탄생된 이 불상은 벌써 인도인의 사상도 모습도 아닌
신라의 꿈과 솜씨였다.
석굴암의 중앙에 진좌한 석가상은 내가 발견한 두 번째의 돌이다. 선사의
돌에서 나는 동양적 예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지혜의 돌이었다. 그러나,
석굴암의 돌은 나에게 한국적 정감의 계시를 주었다. 그것은 예술의 돌이었다.
선사의 돌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었으나, 석굴암의 돌은 인공이 자연을 정련하여
깎고 다듬어서 오히려 자연을 연장 확대한 돌이었다. 나는 거기서 예술미와
자연미의 혼융의 극치를 보았고, 인공으로 정련된 자연, 자연에 환원된 인공이
아니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예술은 기술을 기초로 한다.
바탕에 있어서는 예술이나 기술이 다 art다. 그러나 기술이 예술로 승화하려면
자연을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공을 디디고서 인공을 뛰어넘어야 한다.
몸에 밴 기술을 망각하고 일거수 일투족이 무비법이 될 때 예도가 성립되고,
조화와 신공이 체득된다는 말이다. 나는 석굴암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돌에도 피가 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 앞에서 찬탄과 황홀이 아니라
감읍하였다. 그것이 불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 예술의 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 자비로운 입 모습과 수렷이 내민 젖가슴을
우러러보았고, 풍만한 볼기살과 넓적다리께를 얼마나 어루만졌는지 모른다.
내가 석굴암을 처음 가던 날은 양력 4월 8일, 이미 복사꽃이 피고 버들이
푸른 철에 봄눈이 흩뿌리는 희한한 날씨였다. 눈 내리는 도화불국--그 길을
걸어가며, 나는 '벽장운외사 홍로설변춘'의 즉흥 1구를 얻었다. 이 무렵은 내가
오대산에서 나와서 조선어 학회의 "큰 사전" 편찬을 돕고 있을 때라 슬프고
외로울 뿐 아니라, 그저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을 때였다. 이 때에 나는
신앙인의 성지 순례와도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찾았던 것이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신라는 서구의 희랍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피가 돌고 있는
석상에서 영원한 신라의 꿈과 힘을 보고 돌아왔다.
돌에는 맹렬한 의욕, 사나운 의지가 있다. 나는 그것을 피난 때 대구에서
보았다. 왕모래 사토길 언덕에 서 있는 집채보다 큰 바위였다. 그 옆에는 삐쩍
마른 소나무가 하나--송충이가 솔잎을 다 갉아먹어서 하늘을 가리울 한 점의
그늘도 지니지 못한 이 소나무는 용의 비늘을 지닌 채로 이미 상당히 늙어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이 바위보다도 작은 판잣집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
살풍경한 언덕길을 가끔 나는 석양배에 취하여 찾아오곤 하였다. 그 무렵은
부산에서 백골단 땃벌 떼가 나돌고 경찰이 국회를 포위하여 발췌 개헌안을 강제
통과시키던 소위 정치 파동이 있던 임진년 여름이다. 드물게 보는 가뭄에
균열된 논 이랑에서 농부가 앙천 자실한 사진이 신문에 실릴 무렵이었다. 그저
목이 타서 자꾸 막걸리를 마셨지만, 술이란 원래 물이긴 해도 불기운이라서
가슴은 더욱 답답하기만 하였다. 막걸리집에 앉아 기우문을 쓴 것도 무슨
풍류만이 아니었다. 이 무렵에 나는 이 사나운 의지의 돌을 발견하였다. 이 세
번째 돌은 혁명의 돌이었다. 그 바위에는 큰 나방이가 한 마리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꾸만 열리지 않는 돌문 앞에 매어달려 울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주먹으로 꽝꽝 두드려 보면, 그 바위는 무슨 북처럼 울리는 것도
같았다. 이 석문을 열고 들어가면 맷방석만한 해바라기 꽃송이가 우거지고
시원한 바다가 열려지는 딴 세상이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이 바위 앞에서 바위의 내력을 상상해 본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 나온 이 바위는 비록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은 아직도 사나운 의욕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라고--. 그보다도 처음
놓여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풍우상설에 낡아 가는 그 자체가 그지없이 높이
보였다. 바위도 놓여진 자리에 따라 사상이 한결같지 않다. 이 각박한 불모의
미가 또한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의 암석미를 맘껏 완상할 수 있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전석불생태라고 구르는 돌에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1장이다.
"김태길편"
김태길(1920__)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
1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문화적 업적에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존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존엄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의리나 염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며,
극악무도한 인간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형태만 갖추었으면 누구나 무조건
존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갓 환상적인 낭만주의적 견해가 아닐까? 우리가
추상적인 사고를 일삼는 동안, 우리는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존엄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나 극악무도한
인간에게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때, 과연 그 나쁜 인간에게서 '존엄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을 것인가?
어떤 극악무도한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사람에게도 존엄한 일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몸소 겪은 극악무도한 인간에 대해서,
예컨대 나에게 파렴치하고 잔인한 행위를 거듭하여 나를 크게 괴롭히고 있는
사람에게서 존엄성을 실감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실감'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 하면,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하나의 사실 판단이 아니라 가치
판단이며, 어떤 가치 판단이 타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실감'이 하나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하는 명제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은 존엄하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높은 도덕성을 발휘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효는
비교적 적을 것이며, 따라서 '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도
크게 제한될 것이다.
실은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달한 소수의 인격자들은 존엄한 존재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엄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의 뜻을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만약,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존엄한다면, 그들은 인간인
까닭에 존엄한 것이 되며, 사실상'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인물들에게만 국한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특수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존엄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사람의 탈만 썼으면 그가 아무리 교활하고 파렴치하며 잔인하다
하더라도 존엄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극히 위선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인 발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이 간직한 어떤
가능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가능성 간직하고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런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존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막연한 표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좀더
분명한 설명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구절의 뜻을 보다 정확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도덕적'이라는 말이 너무나
모호하고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인간'이란, 성현 또는 군자와 같은 뜻은 아니다.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성현 또는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우며, 또 그렇게
많은 성현과 군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도덕적 인간'은
평화스러운 사회 생활을 위해서 요청되는 보통 수준의 덕성을 갖춘 사람을
가리킬 따름이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말과 가장 뜻이 가까운 말은 '성실한 인간'일 것이다.
절대적으로 성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성인 또는 군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성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정상적 환경 속에
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개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며,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는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 특색의 하나는 그가 높은 차원의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되거니와, 높은 차원의 사회생활이 가능한
것은 어느 정도 상대편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서로 남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성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대체 성실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을 제기할 때, 우리들의 상식만으로는
대답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음을 본다.
2
'성실'이란, 쉽게 말하자면 '정성스럽고 참되어 거짓이 없음'을 말한다. '성,
실' 두 글자 가운데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이며, '성'이 유교의
도덕 사상 가운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성'의 개념을 깊이 다룬 유교의 고전으로서 '중용'이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중용'에서는 '성'을 단순한 윤리적 개념으로 이해함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정립함으로써, 윤리의 절대적인 바탕으로 삼을 것을
꾀하고 있다.
'중용'에,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다. 성실하고자 힘쓰는 것은 사람의
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본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체로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 첫째는, 성실을 '천리의 본연'이라고 이해한 주자학의 전통을 따라서,
'성실은 천지 자연의 이법으로서, 만물의 실재와 생성을 좌우하는 기본
원리이며, 이 성실의 원리를 본받아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어 조금도 망령됨이
없도록 살기에 힘쓰는 일은 인간의 도리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둘째는, 정현의 해석을 따르는 것으로서, '본래부터 성실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은 하늘이 낳은 성인의 도요, 수양과 노력으로써 성실의 덕을 닦고자 힘쓰는
것은 범용한 일반인의 도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위에 인용한 '중용'의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면, 둘째 번 해석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용'의 다른 여러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역시 첫째 번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성 또는 성실을 천지 자연의 근본 원리로 보든 혹은 인간적 행위의 세계에
국한된 원리로 보든 그것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
믿는 것이 유교 사상의 전통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자는 지, 인,
용을 덕의 가장 주요한 것으로 가르쳐 왔거니와, 그 지, 인, 용의 공통된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인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 성은 실로 인격을 완성하고
통일하는 기본 원리다.
성을 천지의 도니 자연의 이법이니 하여,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끌어들인다면,
이야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문제를 떠나서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행위의 원리로서 볼 때, 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들의
상식으로도 그 윤곽은 알 수 있음직하다. 쉽게 말해서,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거짓이 없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다만 여기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다
함은 단순히 남을 속이는 일이 없다는 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대할
때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정성을 다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깔려 있으며, 처지를 바꾸어 남의 사정을 깊이
고려하는 너그러움이 있다.
성실의 도는 결코 멀리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의 정' 을 따라서 삼가 생각하고 삼가 행동하는 가운데에 바로 성실이 있다. 그러기에 '중용'에도, '도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다. 사람이 도라고 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도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덕의 근본 원리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실의 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헛되이 먼 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앞에 닥친 일에
관하여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같이 보이더라도, 일거일동을 참되게 함으로써
말과 행동 사이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곧 성실을 실천하는 길이다.
'중용'에,'일상 행해야 할 중용의 덕을 실천하고, 일상 생활에서의 말을
삼감으로써, 행동에 부족함이 있으면 힘을 다하여 애쓰고, 말에 지나침이 없도록
힘써 조심한다. 말은 행동을 돌이켜보고 행동은 말을 돌이켜본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조심을 하고,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앞뒤를
생각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는 지나치게 근엄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성실의 근본 정신이 지나치게 근엄하고 쉴사이없는 긴장 속에
조심만을 거듭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말한다면,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동시에 남에게도 충실한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교적 해석을 따른다 하더라도,
'성실'의 근본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음'에 있는 것이요, 도학자적인 근엄성이나
실수할 것을 두려워하는 위축된 소심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깊은 곳이 옳다고 믿는 바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름아닌
성실의 덕이라고 보아야 한다면, 성실은 참된 용기를 포함하는 것이며, 적극적인
행위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유교의 지도적 사상가들은 성을 지와 인과
용이 그 가운데 포함되는 큰 원리로 보고, 인격의 완성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덕목으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3
'성실'이란, 첫째로 참됨에 대한 사랑이요,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셋째로는 참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강한 용기라고도 해석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해석할 때, '성실'을 인생의 길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라고 숭상해 온 것은 비단 유교 내지 우리 동양만의 전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서 고금의 여러 나라와 여러 시대는 가기 고유하고 특색 있는 윤리
내지 가치의 체계를 발전시켜 왔으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체계에 있어서나
성실은 도덕적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요청으로서 숭상되어 왔던 것이다.
서양의 윤리 사상에 있어서도 '성실'은 올바른 인간 생활의 기본 원리로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숭상되어 왔다.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지는 곧 덕'이라 하여 참된 인식을 매우 중요시했거니와, 그들이
말하는 '지', 즉 참된 인식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일컫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을 위한 실천의 지침으로서의 지혜를 포함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도 근본에 있어서 상통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세기에 들어와서 서양의 사상계를 장악한 것은 기독교였으며,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덕으로서 숭상을 받은 것이 '사랑'과 '믿음' 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사랑'과 '믿음'이 성실한 마음을 떠나서 진실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중세 사상 또는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도 역시 '성실'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를 거쳐 근세로 시대가 바뀐 뒤에도, 철학 사상과 사회 사상에 놀랄
만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의 덕을 숭상하는 정신만은 그대로
이어 내려 왔다. '르네상스'라는 정신 혁명을 일으킨 사상의 흐름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르거니와, 그 휴머니즘의 핵심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굳센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나 권위 또는 화석화한 고정 관념의 굴레를 벗어나서, 인간 자신이
진실로 믿는 바를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기를 결심한 용기가,
르네상스라는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곧 '성실'의 정신에 통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배반하는 것보다 더 크게 '성실'의 정신에 어긋나는 태도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한 르네상스 이래의 시대 정신은 여러 가지
방면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문학과 미술에 있어서는, 종교에 예속되어
있던 종정의 지위를 탈피하여 예술을 위해서 예술에 몰두하는 자주적
예술가들의 탄생을 보았으며, 작가의 눈에 비친 인간과 자연을 있는 모습
그대로 표현하는 세속주의적이며 인간주의적인 새로운 기풍의 대두를 보았다.
새로운 시대 정신이 종교와 교회 내부에서 발휘되었을 때 이른바 '종교
개혁'이라는 큰 운동이 전개되었거니와,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역설한 것은 외면적 형식의 종교를 물리치고 내면적 양심의 종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물질로써 행하는
선업보다도 정신으로써 행하는 신앙이 본질적으로 소중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새로운 움직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역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적 요구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즉 '성실'의 정신이었음이 분명하다.
17세기 이후 새로운 방향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대륙 및 영국의 철학
사상에서도, 우리는 역시 '성실'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배제하고 오직 확실하고 명백한 것만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 데카르트의 '방법론'에서, 그리고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박해의 위협과 많은 돈이나 높은 지위를 약속하는 크나큰 유혹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오로지 자기의 신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서 살다가 죽은
스피노자의 생애에서, 우리는 '성실한' 마음의 극치를 발견한다.
버클리, 로크, 흄 등이 대표하는 '경험론'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합리론'과는 근본적으로 맞서는 철학의 체계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충실하고자 하는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그랬듯이 영국의 경험론자들도 역시
확실하고 명백한 것만을 철학적 탐구의 발판으로 삼을 것을 꾀하였다. 다만,
'확실하고 명백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관해서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이
스스로에게 준 대답이 서로 달랐던 까닭에 결과에 있어서 그들은 크게 대립되는
두 가지의 철학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선천적으로 이성에
주어져 있는 관념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대륙의 학자들은
합리론에 이끌려 갔고, 감관에 비친 경험적 심상이 가장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은 영국의 학자들은 경험론으로 이끌려 갔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자신이 믿는 능력을 따라서 충실하게 사유하고
행동하려고 애쓴 점에 있어서, 모두 성실한 마음의 주인공들이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한층 높은 단계에서 종합하여 근세 철학을
크게 체계화한 칸트에게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가장 뚜렷한 구현을 본다.
칸트의 철학에는 그 모든 방면에 성실의 정신이 깃들여 있다고 보아야
가겠지만, 특히 그의 윤리 사상에서, 그리고 그의 실천 생활에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모범적인 구현을 보고도 남는다.
칸트가 실천 이서의 근본 법칙으로서 정립한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는 가르침은,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과 같은 정신의 표현이요, '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격에 있어서의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한 칸트의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근대 인권 사상의 근본 정신을 철학적 언어로써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저 공자의 가르침이나 인권 사상은 모두 성실한 인간
정신의 산물이며, 성실한 마음 없이 그 참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이다.
현대는 물량 문명의 거센 물결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실할 정도로
어지럽기 짝이 없는 시대다. 인간이 그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다 함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즉 성실성을 잃는다는 뜻도 포함한다. 금전과 권력 또는 헛된
이름의 노예가 되는 가운데, 인간 본연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대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식들은 말한다. 그러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움을 걱정하는 바로 그 심정 가운데 역시 성실을 희구하고 성실을 열망하는
마음은 살아 있는 것이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비틀거리면서도 현대인 역시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성실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철학자들이 각각 자기들 나름의 관점에서 성실의 회복을 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거니와, '성실'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심각한
각도에서 다룬 사람들은 실존주의 사상가들이라 하겠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한 '성실'의 개념은 서양 윤리학에서 보통 말하는 '성실'과 같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유교에서 가르친 '성'과는 거리가 먼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진실되고 속임이 없이 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를'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존주의 사상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으니, 모든 실존주의자들이 같은 뜻의
'성실'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며, 그들이 강조한 역점에도 개인에 따르는 차이는
있었다. 니체와 같이 저속한 물질 문명 속에서 대중화하고 평균화하여 옹졸하게
된 인간의 현재를 초월하고, 인간 자체의 본성을 성실하게 추구하면서 병들고
오염된 인생을 안이와 자기 기만으로 받아들여 어물어물 살아 갈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용감하게 극도의 회의와 허무를 직시함으로써, 다시 절망을 극복하고
참된 창조적 인생을 되찾으라고 가르친 사람도 있었다.
또한, 하이데거와 같이, 퇴폐적인 일상 생활 속에서 평범한 세상 사람으로
타락 해 있는 현재의 나를 단호한 결단으로써 박차고 나와 죽음을 앞에 둔
유한자 인간으로서 무를 용감하게 받아들이는 본래적인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상식과 호기심, 그리고 모호한 생각 등으로 인하여 가려진 비진리의
상태로부터 나 자신을 탈환함으로써 인간 내지 실존의 참모습을 그 본래성과
전체성에 있어서 드러내도록 하라고 역설한 철학자도 있었다.
그리고, 사르트르와 같이, '인간의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는 전제 위에서,
창조자로서의 자유로운 판단으로 가치의 척도를 설정하고, 이 척도를 따라서,
추악하고 타락해 있는 현실을 적극적인 참여로써 성실하게 개조하라고 호소한
사상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르셀과 같이, 나와 나 자신, 나와 너, 나와 신이 서로 교제
하는 공동적 참여 속에서 내가 바치는 '성실'의 정도를 따라서 '존재'의 정도가
좌우된다고 전제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기울여 헌신해야 할 절대자인 신에게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대할 때 신이 내 앞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여,
성실한 신앙으로써 참되고 영원한 희망을 찾으라고 설교한 스승도 있었다.
이와 같이,'성실성'을 힘주어 주장한 실존주의자들이 마음 속에 형성했던
'성실'의 개념은, 그들의 철학 내지 인생의 문제를 바라본 각도의 차이에 따라서
개인적인 차이를 가졌으나, 그들의 사상의 바탕에는 뚜렷이 일치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었다. 돈과 기계와 헛된 이름으로 병든 불량 문명 속에서 타락하고
속물화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우리 인간이, 솔직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용감한 결심으로 바른 길을 선택하여, 인간다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성실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행동할 것을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의 공통된 흐름을 이루었던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 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것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반성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을 어떤 형식으로든
거짓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장래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이기도
한다. 만일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종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 그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니 간섭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이나 매명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실히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한 이해와는 관계가 없는 풍류가들의 예술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한 취미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을 속임 없이 솔직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해도 손색이 없겠다."
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과 격려를 듣고도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에 보내기로
용기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면서, 활자의 매력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나 신문은 항상 필자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들의 수첩에 등록된다. 조만간 청탁서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로부터 청탁을 받는 신분으로의 변화는 결코 불쾌한 체험이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하고, 정성을 다하여 원고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가 안으로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을 전문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으로 전락한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 붓을 들면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의 사실처럼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극을 갈망하는 독자나 신기한 것을 환영하는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의 허세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다. 현학적 표현은 사상의 유치함을 입증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스러움을 증명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조연현편"
조연현(1920__1981)
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혜화 전문 수료. 한양대 문리대학장, 문인 협회
이사장 역임.
초기에는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평론과 수필을 주로 썼다.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여 좌익을 분쇄하는 데 앞장선 바 있으며 순수 문학의
옹호에 공적을 세웠다. 후기에는 현대 문학사의 정립에 힘썼으며 엄청난 양의
평론을 통하여 정력적인 평론가로 정평을 얻었다.
손수건의 사상
남녀를 가리지 않고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쩌다가
손수건을 빠뜨리고 나오는 날이면, 육체의 어느 한 부분을 떼어 놓고 나온
것처럼 어색하거나 꼭 입어야 될 의류의 하나를 빠뜨리고 나온 것처럼
허전해진다. 그만치 손수건은 인간에게 있어 없지 못할 일상적인 생활용품의
하나이다.
한글 학회 발행의 우리말 사전을 보면, 손수건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수건'으로 되어 있고, 문세영 씨 사전을 보면, '땀을 씻는 작은 수건, 손을 씻는
작은 헝겊'으로 되어 있다. 전자는 주로 손수건의 형태와 위치에 대한 설명이고,
후자는 주로 그 용도에 대한 설명으로 볼 것이다. 이 두 개의 설명에서 우리는
손수건이란, 첫째 작은 헝겊으로 된 수건이며, 둘째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며,
셋째 손이나 땀을 씻는 데 사용되는 물건임을 알 수 있다.
손수건은 작은 것이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라는 것은 손수건의
어떤 희생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다는 것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조건은, 물론 손수건의 용도에서 원인된 것이다.
땀이나 손을 씻는 데 반드시 커다란 수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성질의
용도에는 작은 수건으로서 충분하다. 그리고 항상 몸에 지니기에도 작은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손수건은 무엇 때문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까? 그것은 손수건의 용도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수건의 용도는 반드시 손이나 땀을 씻는 것이 그 전부는 아니다. 길에 가다가
흙이나 먼지가 묻는다든지, 음식을 먹은 다음, 혹은 화장을 고칠 때, 또는 작은
상처가 났을 때, 손수건은 가장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손수건은
항상 몸에 지니는 작은 소지품이 되는 동안에, 손수건은 스스로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사람의 소지품 가운데는 자기를 표현하는 물건이 있다. 인장과 지환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전자는 각자의 권리를 표시하는 표현이요, 후자는
각자의 약속을 표시하는 표현이다. 재산의 소유권이 인장으로써 변동되고,
약혼이나 결혼이 지환으로써 표시되는 것은 그러한 일례이다. 이를테면 전자가
인간의 법적 표현이라면 후자는 인간의 정신적 표현으로서 다 같이 자기 표현의
성질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자기 표현으로서의
소지품은 대개 작은 물체로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게 그 일반적인
습관이다. 자기를 표현해 주고 있는 물체는 이미 단순한 물질이거나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소지품은 항상 자기를
아끼는 마음처럼 귀중히 취급되고 언제나 자기와 함께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러는 데에는 늘 몸에 지니는 것이 상책이며, 늘 몸에 지니는 데에는 작은
것이라야만 편리하다. 손수건은 이와 같은 자기 표현의 물체와 같은 조건을
갖추고 나타남으로써 그 최초의 용도와는 다른 자기 표현의 직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몸차림을 한 여성이 조심성스럽게 손수건을 만지거나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항상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
손수건이 그 여인의 손이나 땀을 씻는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그 여인의 감정의
역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손수건은 손이나 땀을 씻는 수건으로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용도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손수건의 용도에 대한 영상은 슬픈 소식을
듣고 남몰래 돌아앉아 흘리는 눈물을 씻는 것, 기차나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안타까운 사람을 보낼 때, 또는 그와 같이 멀리서 오는 그리운 사람을 맞이할
때 안타깝고 그리운 마음으로 손수건을 흔드는 모습... 손수건은 손이나 땀을
씻는 것보다는 이러한 때 더욱 절실히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니었던가? 손이나
땀을 씻는 것이 손수건에 대한 인간의 생리적 육체적 외부적 용도라면 이러한
것은 그에 대해 인간의 심리적 내부적 용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손수건의 용도는 손수건이 인장이나 지환과 같이 자기 표현의 한 직능을 가진
것임을 말하는 것이 된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그 작은 헝겊이.
손수건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내부적 용도에서 바라본다면 손수건과
가장 깊은 관련을 가진 것은 눈물과 이별, 또는 눈물과 상봉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손수건은 눈물을 씻기 위한 것이거나, 그렇기 않으면 이별할 때의
안타까운 심정을, 또는 상봉의 즐거움을 알리는 신호의 표지이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 하면, 손수건은 즐거운 눈물보다는 슬픈 눈물을 닦는 경우가 더 많고,
상봉의 즐거운 신호로서보다는 이별의 슬픈 신호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손수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손수건은
슬픈 눈물을 상징해 준다고 볼 수도 있다. 손수건을 눈물 또는 이별의 상징으로
보아 온 것은 한국 사람들의 오랜 풍습은 아니었던가?
손수건을 눈물 또는 이별의 상징으로 보는 동안, 그러한 손수건은 항상
여성적인 속성이지 남성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사내 대장부' 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여성처럼 함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남성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므로 '여인과 눈물'은
자연스럽게 관련이 되지마는, '남자와 눈물'은 아무래도 긍정적인 자연적 상태는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별 역시 그렇다. 이별이란 말이 헤어진다는 사실의
설명으로서보다는 헤어지는 슬픈 감정을 강조하는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라면,
눈물과 직결되는 이별은 여성적 속성이다.
돌아앉아 눈물을 씻는 남성의 모습이 보기 흉하고, 역두나 부두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남성이 주책머리 없게 보이는 반면에, 돌아앉아 눈물을 씻는 여인의
모습이나, 손수건을 흔드는 여인의 모양이 제 격에 맞게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손수건은 아무래도 남성에게보다는 여성에게 더 어울리는
소지품인가?
남녀를 불문하고, 손수건은 필요불가결의 일상적인 소지품의 하나이다. 누구나
그가 가진 손수건으로써 자기의 손이나 땀을 씻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
손수건에 숨겨진 자기의 감정적 이력을 생각하게 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남성은 아예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남성적인 것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손수건을 꺼낼 때마다 그 손수건에 아로새겨진 자기의 눈물과
이별을 계산해 보는 여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매일같이 빨아서 깨끗한
손수건을 갖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수건에 대한 위생은 그 속에 새겨진
자기의 슬픈 눈물과 이별을 깨끗한 손수건처럼 잊어버리고 싶은 데서일까?
손수건은 나에게는 항상 여인의 마음의 비밀처럼 느껴진다.
친절한 사람들
1971년 여름, 나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 팬 대회에 참석하게 된 기회에,
약 40일 동안 세계 몇몇 나라를 여행한 일이 있었다. 다 알다시피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신생 공화국인 에이레의 수도다.
갈 때에는 자유 중국의 타이베이로 해서 홍콩,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에 들렀고, 올 때에는 미국에 들러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시카고를 돌아
보고, 일본의 도쿄를 거쳤다.
그 중, 자유 중국과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퍽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같은
아시아 국가들일 뿐만 아니라, 전에도 가 본 일이 있기 때문에, 해외 여행이라는
데서 오는 흥분이나 불안은 느끼지 않았으나,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해선 적잖은
흥분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아니, 흥분보다 불안이 앞섰다고 하는 거시 옳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안을 느낀 데엔 몇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언어 때문이었다. 외국을 여행할 때에는 그 나라의 말을 잘 할 수
있거나 혹은 비교적 널리 쓰이는 외국어를 한둘쯤 알아야 의사 소통이 이루어질
텐데, 나는 외국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연히 벙어리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건강 때문이었다. 기후와 음식이 다른 여러 나라를 한 달 이상이나
여행한다는 것은 웬만큼 건강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잘 앓는 병약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까 싶었다.
다음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안락한 호텔에 들고, 영양 많은 음식을 사
먹으며 여행할 만큼 충분한 여비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헐한 호텔과 값싼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40일 동안이나 낯선 여러 나라와 도시를 큰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대해 준 여러 나라 사람들의 친절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마치고
통관 구역에 들어가,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호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비행기 회사측에 로마의 호텔 예약을 부탁했었는데, 내가 홍콩을 떠날
때, 아직 로마에서 연락이 없으니 호텔 예약은 안 된 것으로 알고 떠나라는
전화를 받았었기 때문에, 나의 호텔 걱정은 퍽 큰 것이었다.
그 때, 내 앞에 와서 '미스터 조'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로마의
세관원이었다. 그렇다고 하니까, 편지 한 통을 내주었다. 우표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아마 로마에 사는 사람이 인편으로 보낸 것인 듯한데, 생전 처음
와 보는 낯선 이국 땅,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로마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필시 잘못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뜯어
보았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그것은 내가 탄 비행기 회사의 로마
지사로부터 나에게 온 것으로, 호텔이 예약되었으니 그리 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내가 홍콩을 떠난 후에 호텔이 예약되었기 때문에, 내가 로마에
내려 비행장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것을 알리려고 비행기 회사측에서 온갖
비상수단을 다 썼을 것으로 추축되었다. 비행장의 출입국 수속이 진행되는
장소는 출입금지 구역이므로, 허가된 사람이 아니고는 출입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를 찾아온 한 외국인에게 편지 한 통을 전하기 위하여
회사측과 세관측이 합동 작전을 벌인 셈이다.
다음은 그 호텔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아까 그
세관원에게 떠듬떠듬 그 방법을 물었다. 그는 어디서 로마 시내의 지도를 한 장
가지고 오더니, 내가 가야 할 호텔의 위치에다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는 1. 비행장에서는 택시를 타지 말아라, 2.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라, 3. 테르미니 역에서 호텔까지는 택시를 타라 하고 적어 주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는 영어를 퍽 잘 하는 것 같은데도, '택시를 타지 말아라' 같은
말은 '노 택시'와 같은 식으로 적었다. 이는 자기를 표준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잘 짐작할 수 있도록만 적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가 준 지도와
쪽지를 가지고 호텔까지 잘 갈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택시를 타면 호텔까지 더
수월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왜 그 세관원은 택시를 못 타게 했을까? 나는 그
까닭을 곧 알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시내까지는 거리가 퍽 멀고, 택시 요금도
매우 비싸기 때문이었다. 그 세관원은 나에게, 호텔까지 가는 방법만이 아니라,
경비를 절약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 준 것이다.
나는 이 일로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영상이 선명하다.
이러한 친절은 물론 이탈리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블린에서 회의를 할
때였다. 회의장에서는 통역해 주는 분도 있고, 우리 대표 중에 외국어를 썩
잘하는 분도 있고 해서 별 불편이 없었으나, 혼자 거리에 나가거나 또는
개인적인 용무를 보거나 할 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땐 어디선가
학생들이 몰려와 친절하게 도와 주었다. 어떤 때는 내가 가려는 목적지까지
동행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건 사는 일까지도 도와 주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더블린의 그 친절한 학생들을 생각한다. 나의
눈앞에 떠오르는 더블린은 언제나, 명랑한 얼굴과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대해
주던 그 어린 학생들의 모습으로 꾸며질 것이다.
시카고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혼자 비행장에 내렸는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마중 나오기로 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전보
연락이 잘못된 까닭이었다. 나는 낯선 비행장 한구석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때었다. 은발의 한 노신사가 다가와 쉬운 말로 사정을
묻고,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들자고 하면서 목적지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노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죄스러웠으나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었다.
나는 아마도 시카고란 말을 들으면 그 은발의 노신사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혹은 미국의 어느 은발의 노신사를 만나면 시카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파리에서는 언어가 더욱 통하지 않아 버스나 지하철을 잘못 탄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파리의 시민들은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좀 허비하는 일은 있었지만, 목적지를 못 찾아 크게 낭패를 본
일은 없었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보다도, 친절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란 생각이 늘 앞선다.
이 밖에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즐거운 여행을
한 경험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들은 반드시 그 나라의 관리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인사들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그리고 이름 없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러했고, 특히 어린 학생들이 그렇게 친절했다.
그들의 조그만 호의나 친절은 나에게 인간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해 주었고,
그들이 사는 나라나 도시에 대한 좋은 인상을 깊게 심어 주었다.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외국 사람들이 근래에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우리말을 잘하고 우리 나라의 지리에 밝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마
대개는 우리말을 못 하고 우리 나라 지리에 어두운 사람들일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불리한 조건으로 우리 나라에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모든 사람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름없이 외국인에게
친절히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외국인을 친절히 대하자는 말을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인정의 아름다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국민 외교의 한 구실까지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국 사람에
대한 친절은 경우에 따라선 나라를 사랑하는 한 방법이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친절은 외국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다.
우리 모두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인정을 베풀어
줌으로써 세계에 우리 나라의 인상을 감명 깊은 것으로 심어 주어야겠다.
"김상옥편"
김상옥(1920__)
시조 시인. 호는 초정. 경남 충무 출생. 학교 교육은 별로 받지 않았고 인쇄소
문선공 등으로 소년기를 보냄. 광복 후 부산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상경하여 표구사 아자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음.
16세 때에 시조 "청자부"로 가람 이병기를 놀라게 한 바 있으며 한국 현대
시조를 꽃피운 공로자 중의 하나로 "백모란" "이조의 흙" 등 많은 시조 작품이
있다.
백자 이제
학이 받쳐 든 술잔
여기 술잔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술잔은 적어도 백유여 년을 창공에 높이
떠 물 흐르듯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언제까지나 떠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정말 술잔이 창공에 떠서 물 흐르듯 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떠
있는 바에야 어찌하랴. 일찍이 이 땅에 한 무명 도공이 있어, 그 도공의 슬기가
능히 이러한 이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내 눈앞에 선연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술잔은 정작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이는 그 무명 도공이 나고 살고 또
죽고, 그리고 죽어서 묻혀 있을 그 어느 외딴 산골짜기의 흙임에 틀림없다.
종생토록 고된 노역으로만 다루어진, 그 곰의 발같이 생긴 무디고 억센 손, 그
손으로 이 흙을 빚어 구워 낸 것이 바로 이 백옥보다 흰 술잔이다. 아니, 차라리
희다못해 눈이 시리도록 연푸른 술잔이다.
이러한 도자기의 빛을 애도가들은 영청이라 일컫기도 한다. 과연 그냥 희거나
그냥 푸른빛이 아니라, 오직 푸르름의 잠영, 푸르름의 그리메가 다시 그늘져
비쳐지는 빛이다!
이렇게 희고 푸른 영청 빛을 살리자면 어떻게 하랴? 그것은 파란 하늘빛이
노상 서리고 배어 있을 저 동방의 서조, 학의 날개를 새길 수밖엔 없다. 드디어
도공은, 아니 그 이름 없는 명장은 잔받침에 두 마리 학을 새겼다.
목과 부리는 입체적인 도법, 날개는 음양각에 투각까지 겸했다. 그 솜씨도
자못 빼어나 학과 같이 청수하다. 암놈은 목을 휘어 수놈의 다리 위에 얹고,
수놈은 또 암놈의 뻗은 다리 위에 그렇게 서로 목을 휘었다.
아예 인위란 모르고 오히려 한 자연으로 살아 온 도공, 그는 그가 태어난
골짜기의 흙을 파서 그 골짜기의 물로 빚고, 그 골짜기의 나무를 찍어 구워 낸
것이기에, 정녕 미도 미한 줄 모를 만큼 그저 그대로 자연스럽다. 그가 언제
미를 배웠으며 또 미를 익혔으랴. 그러나, 어찌 미를 모르고서 이같이 지묘한
의장을 구상해 내었을까? 인색한 일인들은 이를 그냥 '우연의 소산'이라 한다.
설령 우연이라면, 그 우연은 누가 닦고 누가 가꾼 우연이란 말인가?
받침으로 새겨진 학은 또 그냥 있지 않다. 좌우에서 마주 보며 활짝 죽지를
펴고 있다. 그리고 또, 펴고만 있지 않고 저 끝없는 창공을 향하여 하냥 날고
있다.
이렇게 날고 있는 두 마리 학의 날개는 말할 것도 없이 오직 한 개의 술잔을
받쳐 들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이 술잔은, 가령 술상 위에 놓였거나, 또 누가
들어서 뉘게 권작하거나 해도, 이미 학은 받침하고 있는 바에는 분명히 어느
심령의 하늘을 날고 있다 하리라.
예로부터 학은 십장생의 하나, 학이 하늘로부터 술을 실어 온다면, 아니,
어떠한 술이라도 이 잔에 한 번 담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장수를
축복하는 불로의 선주! 또 하늘로부터 술을 긷는다면, 이 술잔은 그대로 끝없는
설화의 샘을 길어 올리는 선녀들의 두레박! 이미 내게는 이 술잔으로 장수를
빌어 드릴 어버이도 없고, 나 또한 일적불음이라 대작할 친구도 없다. 그러면서
연전에 이것을 사서 내내 수장하고 있다.
문갑 위에 놓인 이 술잔은 이제 술을 마시는 연모가 아니다. 갈수록 속진에
물들어 가는 마음, 이제 그런 마음을 세례하는 하나의 조촐한 정기이다.
알같이 생긴 연적
조선 시대 자기 중에 그 생김새의 종류가 많기로는 아마 연적을 두고 달리
당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원형, 그 둥근 가운데도 떡
모양이 있고, 또 중심이 뚫린 환형, 곧 또아리 모양이 있다. 물형으론 복숭아
모양, 고기 모양, 새 모양, 두꺼비 모양, 그 밖에도 지붕 모양, 초롱 모양, 부채
모양, 무릎 모양 등, 별의별 것이 다 있다.
골동을 수집함에 있어서도 벽이 있어, 어느 분은 병만을 모으고, 어느 분은
사발이나 대적 같은 주방 그릇들을 모으고, 또 어느 분은 문방구, 그 문방구
중에도 필통이나 연적만을 따로 모으는 기호가들이 더러 있다.
내게도 네모꼴에 청화로 보상화문을 그린 것이 하나 있고, 원형에 호접 한
쌍을 역시 청화로 그린 것이 있다. 이들 둘이 다 연대도 얕고, 그나마 네모 꼴은
입이 깨어져 도무지 실용으론 쓸모가 없다. 그래서 이미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마침내 조그만, 신라의 도금불 하나를 구해서 그 위에 올려놓았더니 아주
안성맞춤 잘 어울린다.
이제는 그 아무짝에도 쓸모 없던 연적이 불상 받침으로서 더욱 값진 구실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쇠붙이와 조선 시대의 질그릇! 이것이 천여 년을 격한
오늘, 외로운 문인의 서실에 와서 그 연분의 기나긴 실끝이 이토록 맺어질
줄이야! 이리하여 이 신라불은 조선조의 꽃무늬를 깔고 나의 방 안을 항시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호접 무늬 있는 것은 빛깔은 그리 좋지 않지만, 금 간 데 하나 없이 완전하다.
이것은 몇 해 전 어느 골동 가게에서 거저 얻은 것인데, 노상 책상에 놓였다가
벼루에 물방울을 떨구는 제 본디의 타고난 구실을 아직도 그냥 되풀이하고
있다.
요 며칠 전, 어느 고물 가게를 지나다가 나는 또 담청을 곁들인 무릎 모양의
백자 연적을 하나 샀다. 그러나 이도 입이 깨어졌다. 이것을 때우려는데 그
조그마한 입을 때우는 품삯이 이 몸뚱이 전체를 산 값보다 더하다.
얼른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사람도 만약 입이 없고 몸만
있다면 폐물이 되고 말 것이니, 연적 또한 이와 마찬가지리라. 그러나 때우는
데는 먼저 몸에 밴 때를 뽑아야 한다 하기에, 때를 뽑으려고 탈지면에
과산화수소를 묻혀 환부를 온통 싸 두었었다. 과산화수소는 환부를 소독하는
약이지만, 자기의 상처에서 때를 뽑는 데도 그만이다. 나의 이러한 거동을 보고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킥킥거리고 웃는다. 꼬마놈은 방 안에서 병원 냄새가
난다고 야단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탈지면을 들어 보고 마음을 죄어도 때는 좀처럼 빠지지
않더니 하루는 거짓말같이 말갛게 때가 빠졌다. 이것을 맑은 물에 헹구어 내어
화대로 쓰는 소반 위에 올려놓았었다. 소반의 검은 칠 빛과 이 담백의 연적
빛이 서로 대조되어 더욱 희고 더욱 검게 보인다. 더구나 형광등 불빛 아래 이
볼록한 무릎 모양의 연적을 보고 있노라면, 홀연히 어느 끝없는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윽고 곁에 앉았던 딸애가,
'사람의 발자국이 아직 한 번도 닿지 아니한 어느 먼 심산 유곡, 그 깊숙한 숲
속에 이름 모를 백조가 있어, 그가 품었다가 놓아두고 간 신비한 알과 같다.'고
하며, 제법 그럴싸한 환상의 날개를 펼쳐, 그 비경에 혼자 찾아든 양 조용히
경이의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아내는 독백으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뇌며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론 딸의 환상에 또한 딸애처럼 경이의 눈빛으로
못내 흐뭇해했다.
사실, 이 연적은 구만리 장천을 난다는 저 대붕의 알은 아니라 해도, 거위나
백조의 알보다는 조금 크고, 타조의 알보다는 약간 작은 것이다. 눈도 코도 없이
다만 물을 머금고 물을 배앝는 두 개의 구멍이 있을 뿐, 이 수수께끼 같은
단순한 형태, 그러나 이는 다름 아닌 지난날의 어느 도공이 그 천명에 순종하던
마음을 태반으로 하여 낳은 한 개 무념의 알, 백자 연적일 따름이다.
"안병욱편"
안병욱(1920__)
철학자. 수필가. 평남 용강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철학과 졸업. '사상계'
주간, 숭실대 교수 역임.
삶의 길잡이로 또는 사상의 안내자로 많은 젊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인물이다. "현대 사상" "사색인의 향연" "철학 노트" "알파와 오메가" 등 많은
저서가 있다.
끝없는 만남
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 만나기 위해서다. 누구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을. 독서는 인생의 깊은 만남이다.
우리는 매일 가족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동료를 만나고 또 이웃을 만난다. 만남이 없이는 인생이 있을 수 없다. 인생을 끊임없는 조우요, 부단한 해후다.
우리는 같은 시대의 사람을 만나는 동시에 옛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옛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가? 책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독서는 옛 사람들과의 깊은 정신적 만남이다.
만남에는 얕은 만남이 있고 깊은 만남이 있다. 불행한 만남이 있고 행복한
만남이 있다. 소비적인 만남이 있고 생산적인 만남, 창조적인 만남이 있다.
'옛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과 만나는 것이요, 그들의 사상과
만나는 것이다. 그들의 정신과의 만남,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서 나의 자아가
심화되고, 나의 인격이 성장하고, 나의 혼이 각성하고, 새로운 정신의 눈이
뜨인다. 새로운 자아 발견과 자기 심화의 법열을 느낀다. 그러므로 진정한
독서는 내가 참된 나를 알고 참된 나를 만나는 희귀한 창조적 행동이다.
어느 옛 어른은 이렇게 노래했다.
'문 닫으면 이 곧 산 속,
책 읽으면 어디나 정토.'
독서 삼매경을 노래한 명시다. 이것은 진정한 독서인만이 가지는 인생의
지극한 환희요, 다시 없는 법열이다.
양서를 펴 보아라. '인생의 깊은 정신적 만남의 행복을 느낄 것이다. 종교의
진리를 말하는 구도자의 음성도 들을 수 있다.' '학문의 깊은 이치를 정성스럽게
전해 주는 스승도 만난다.' '예술의 황홀한 미를 직감시키는 창조의 거장을
발견할 수도 있다.' '자연의 오묘한 질서를 노래하는 시인의 음성에도 접할 수
있다.' '파란만장 속에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소설가의 얘기를 들을 수도 있다.' '
인생의 지혜를 담담하게 가르쳐 주는 스승들의 정다운 목소리를 대할 수도
있다.'
책 속에는 진리의 음성이 있고, 슬기의 샘터가 있고, 이론의 공장이 있고,
사색의 산실이 있고, 말씀의 향연이 있고, 뮤즈의 노래가 있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책 속에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하고, 성실한 진리인을
만나야 하고, 위대한 혁명가를 만나야 하고, 진지한 학자를 만나야 한다.
책 속에는 정신의 동지가 있고 앙모하는 위인이 있다. 이러한 인물들과의
깊은 만남이 나에게 각성과 감명과 영감과 자극과 충격을 준다. 이것이 '나의
존재를 깊은 삶으로 심화시키고 높은 차원으로 비약시킨다.'
만남은 또한 대화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옛 어른들과 무언의 깊은 대화를
나눈다. 그는 나에게 말하고 또 묻는다. 나는 생각하고 또 대답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인생의 깊은 물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다. 인간을 묻고 대답하는
존재다. 물음 없이 대답이 없고 대답 없이 물음이 없다. 나와 너와의 깊은
정신적 만남과 대화가 없이는 나는 성장할 수 없고 발전할 수 없다. 책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나와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누자고 손짓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정신의 향연에 참여해야 한다. 혼과 혼과의 만남, 마음과 마음과의
대화, 이 만남과 대화에서 새로운 정신적 창조가 이루어진다.
책을 읽어라. 위대한 음성들이 조용히, 그러나 간절히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는 그 위대한 음성과 만나서 묻고 대답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정신의 이 풍성한 향연에 흔연히 참여해야 한다.
조화
내가 가지고 싶은 철학이 있다고 하면, 곧 조화의 철학이다. 조화된 생활,
조화된 인간, 조화된 가정, 조화된 사회, 조화된 역사, 어느것 하나도 미 아닌
것이 없다. 조화는 곧 미의 원리다. 서로 성질을 달리하는 둘 이상의 요소가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조화라고 일컫는다.
조화는 진실로 미 그 자체다.
조화는 결코 타협이 아니다. 타협은 내 주장 내 요구와 네 요구가 서로 대립
충돌할 때, 나는 내 주장과 내 요구의 일부를 죽이고, 너는 네 주장과 네 요구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제삼의 어떤 절충점을 발견하다. 그러므로 타협에는
반드시 자기 부정의 요소가 언제나 따른다. 그러나 조화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 위치에서 내 본질과 내 요구를 주장하고, 너는 네 위치에서 네 본질과 네
요구를 내세우되, 그것이 서로 모순 대립하지 않고, 나는 나대로 살고 너는
너대로 살면서, 저마다 자기다운 빛과 의미와 생명을 드러낸다. 이것이 곧
조화다.
조화 속에는 자기 부정의 비극이 없다. 조화는 완전한 자기 긍정의 세계다.
내가 살기 위해선 네가 죽어야 하고, 또 네가 살기 위해선 내가 희생되어야
하는 세계는 조화의 세계가 아니다. 조화는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가 다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화는 곧 생명의 원리다.
모든 존재로 하여금 저마다 제 자리를 얻게 하고, 제 빛을 드러내게 하고, 제
생명을 다 하게 하는 것이 조화의 세계다. 같은 남자끼리 둘이서 걸어간다든지,
같은 여자끼리 걸어가는 광경보다는, 이성끼리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모습이 더 한층 아름답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감이다. 그 경우에,
남자는 키가 좀 크고 여자는 좀 작기가 일쑤다. 또한, 그럴수록 더 조화의 미가
드러난다. 이것은 성의 조화요, 남녀의 조화다.
조화의 원리가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음악의 세계다. 하모니가 곧 음악의
생명이다. 하나의 심포니를 생각해 보면 좋다. 북은 북으로서 큰 소리를 내고,
나팔은 나팔로서 우렁찬 소리를 낸다.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은근한 소리를 내고,
바이올린은 바이올린답게 흐느끼는 듯한 섬세한 소리를 낸다. 클라리넷은
클라리넷으로서, 색소폰은 색소폰으로서 저마다 제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 모든
소리가 저마다 제 소리를 내되 서로 남을 해치지 않고, 아름답게 전체적 통일을
이룬다. 이것이 교향곡의 미다. 이것은 진실로 조화의 극치다. 조화는 다양성의
세계다. 동시에 통일성의 세계다. 다양 속의 통일, 통일 속의 다양, 이것이 곧
조화의 본질이다. 조화는 곧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수려한 산이라도
물이 없으면 섭섭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강이라도 산이 비치지 않으면 어딘지
허전한 감을 느낀다. 산은 강을 부르고, 강은 산을 찾는다. 산은 강 옆에 있어야
빛나고, 강은 산을 안아야 아름답다. 이것이 곧 산수의 조화다.
사람의 신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의 원형을 찾는다면 곧 얼굴이다. 두
눈과 한 코, 두 귀와 한 입으로 구성된 사람의 얼굴에서 우리는 진실로 기능과
작용의 아름다운 조화를 볼 수 있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음식을 먹거나 말을
할 때를 생각하여 보라! 눈은 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귀는 듣는 기능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코는 숨쉬는 일을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은 말하는 일을
다다 저마다 제 자리에서 제 기능과 제 작용을 다 하면서 전체적 생명에
봉사한다. 말할 때 귀가 딴전을 부리거나 음식을 먹을 때 코와 눈이 입에
협력하지 아니한다면, 우리의 전체적 생명의 기능은 파괴된다. 작게는
하루살이의 목숨에서부터 크게는 사람의 목숨에 이르기까지, 무릇 생명은 일대
조화의 체계다. 유기체는 이러한 조화의 원리를 가지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조화는 미의 원리인 동시에 생명의 원리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예로부터 조화의 사상을 가장 강조한 것은 그리스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리스의 철학에서 조화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코스모스'는 동시에 질서 또는 조화를 뜻한다. 얼른
보기에 복잡한 혼돈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듯한 삼라만상의 대 우주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정연한 질서와 아름다운 조화를 보았다. 그러기에, 우주를
뜻하는 '코스모스'란 말이 질서 또는 조화의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되고, 가을이 찾아온다. 춘하추동의 네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한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밝은 낮이 된다. 밤과 낮의 교체는 영원을 두고
변하지 않는 질서다. 눈을 들어 밤하늘을 쳐다보면, 수십 억을 헤아리는 무수한
별들이 저마다 제 위치를 지키고, 제 궤도를 돌되, 결코 서로 충돌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 사람들이 우주를 질서와 조화의 체계라고 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일월 성신인 천체의 운행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귀로써는 그 오묘한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과연, 그리스 사람다운 자유 분방한 사상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은 조화를 곧 정의의 원리라고 보았다. 인간의 몸이
머리와 가슴과 배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듯이 국가는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
계급과, 국토를 지키는 방위 계급으로 되어 있다. 머리는 머리의 위치에서
머리의 기능을 다 하고, 가슴은 가슴의 자리에서 가슴이 맡은 바를 다 하고,
배는 배의 위치에서 배의 할 일을 다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건전한 생명의
구실을 할 수 있다. 만일, 머리가 머리의 직분을 안 하고 가슴의 일을 하려고
든다든지, 가슴이 가슴의 기능을 집어치우고 배의 구실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몸은 파멸될 수밖에 없다. 저마다 제 자리에서 제 직분을 다 하고, 남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가장 올바른 자세다. 이것이 곧 질서요 조화다.
정의란, 별것이 아니고 질서와 조화를 의미한다. 국가의 정의도 마찬가지다.
통치 계급은 통치 계급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잘 하고, 방위 계급은 방위
계급으로서 국토 방위의 직책을 다 하고, 생산 계급은 생산계급으로서 생산에
전력을 기울이되, 서로 남을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저마다 제 자리를
지키고 제 직분을 다 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때, 국가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가장 올바른 모습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자리를 안 지키고 자기의 할 일을 등한히 하면서 공연히
남의 일을 간섭하고 방해하기가 쉽다. 이것이 사회의 정의를 깨뜨린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하는 말을 강조한 데 대하여, 플라톤은 '네 분을
지키라'고 역설했다. 그는 수분의 철학을 주장했다. 저마다 제 자리를 지키고 제
직분을 다 할 때, 사회는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
조화는 미의 원리요 정의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건강의 원리요 행복의
원리다.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 깃들인다. 이것이 그리스 사람들의
부동의 신념이었다. 그들은 정신만의 인간이나 육체만의 인간을 생가지 않았다.
인간은 영과 육, 정신과 육체의 아름다운 통일이요 조화라고 보았다. 영의 이름
아래서 육이 멸시되거나, 육의 이름 아래서 영이 망각되기 쉽다. 우리는 영이
없는 육의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 동시에, 육이 없는 영의 나라에 살기도
바라지 않는다. 육은 영을 무르고, 영은 육을 구한다. 영이냐 육이냐가 아니고,
영과 육이 조화되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건강한 모습이다.
영과 육의 조화를 떠나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구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고도로 분업화한 현대의 산업적 대중 사회에서, 인간은 자칫하면 불구적 인간,
부분적 인간이 되기 쉽다. 한 가지 영역에 전문적 직업인이 되는 결과, 전체적
인간으로서의 조화를 잃어버린다. 머리만의 인간이 생기기 쉽고, 손만의 인간이
되기 쉽다. 인간성의 모든 요소가 조화적으로 발달된 '전인'은 찾아볼 수 없고,
어느 한 요소만이 극단히 불구적으로 발달된 인간을 보게 된다. '전인'이
스러지고 '불구인'이 늘어 간다.
막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의 표어는 '조화'다. 현대인의 비극은 인간이
모든 영역에서 조화를 상실한 사실에 있다. 조화의 상실이 우리의 불행이라면
조화의 회복은 우리가 불행에서 벗어나가는 길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은, 만인이 다 제 멋에 겨워서 살아가되,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하지 않는 일대 조화의 체계를 세우는 데 있다. 만인이 저마다
자기를 실현하고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 저마다 제 소리를 지를 수 있고
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회,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고 통일성 속에
다양성이 있는 사회, 이것이 조화의 세계다.
조화! 이것은 분명히 미의 원리요, 생명의 원리요, 정의의 원리인 동시에,
또한 건강과 행복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고독과 사색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괴테
제일의 탄생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한 번은 생활하기
위하여 태어난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출생하여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
나의 몸뚱이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생명의 탄생이요 신체의
탄생이다. 필자는 이것을 제 1의 탄생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제
2의 탄생이 있다. 자아가 탄생하고 나의 정신이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청년
시대에 이것을 경험한다. 사람은 제 2의 탄생과 더불어 참된 자기가 되고
진실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동물에는 제 1의 탄생밖에 없다. 동물은 정신
탄생과 자아의 탄생을 모른다. 오직 인간만이 제 2의 탄생을 갖는다. 인간은
신체적 존재인 동시에 신체를 넘어서는 정신적 존재다. 인간은 육을 가진
영이다. 우리는 육체의 차원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아와 인격과 정신의 차원에서
살아간다. 여기에 인간의 영광과 존엄성이 있는 동시에 고민과 불안이 또한
따른다.
인간을 동물의 질서에서 엄연히 구별하는 것은 제 2의 탄생이다. "에밀"의
저자 루소는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어머니로부터 하나의 생명으로 탄생하고, 한 번은 인간으로서 사회에 태어난다.'
이것은 인간의 2중 탄생을 간결하게 표현한 명언이다. 탄생에는 언제나 심한
고통이 따른다. 어머니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자식을 낳는다. 제 1의
탄생에서는 한없는 신체의 고통이 동반한다. 제 2의 탄생에서는 신체적 고통
대신에 정신적 고뇌가 따른다. 우리의 정신은 불안의 골짜기를 헤매야 하고,
회의의 안개에 휩쓸려야 하고, 허무의 어두운 밤을 방황하고, 절망의 절벽에
부딪쳐야 한다. 자신 만만한 생의 충실감을 느끼는가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인생의 좌절감을 경험하게 된다. 즉 빛과 어둠의 교차를 체험한다. 그것은 제
2의 탄생을 위한 인간 자아의 악전 고투요 정신적 몸부림의 현상이다.
인생의 의미와 자기의 운명의 부조리에 대해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또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며 생의 목적과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젊은이들은 인생의 이러한 근본적인 위문 앞에 엄숙히 서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시원한 해결과 대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탐구해야
한다. 그는 회의로 잠 못 이루는 밤을 경험해야 하고 자기의 생을 저주하고
싶은 우울한 심정을 느낀다. '나를 이 세상에 이끌어 온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만일 그러한 자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에게 항의하고 싶다.' 이 말은 덴마크의
고독한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의 존재의 우연성에 관해서 항의한
말이다. 이것은 비단 키에르케고르만의 항의가 아닐 것이다. 제 2의 탄생을
경험하는 젊은 혼들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반드시 한 번은 던지게 되는 생의
항의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사에 내던져진 존재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린다면
피투성의 존재다. 게보르펜하이트의 자각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나를 지금
여기에 한 인간으로 내던졌는가?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린다. 불교는 인연이요, 업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것을 운명에 돌리기도
하고 우연에 돌리기도 한다.
실존 철학자들은 이것을 인생의 부조리라고 한다. 내가 지금 여기에 한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데 대해서 아무도 합리적인 해석과 이유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그의 명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인생의 짧은 기간이 내 앞과 뒤에 연결된 영원 속에
매몰되며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조그마한 공간이 나를 알지도 못하고, 또 나도
알지 못하는 무한의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전율케 한다.'
이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실존하는 데 대한 파스칼의 철학적 회의의 말이다.
분명히 인생은 하나의 수수께끼요, 부조리요, 아포리아다. 젊은 생명들이 이러한
문제에 회의와 사색의 눈초리를 돌릴 때 그는 정신의 제 2의 탄생을 겪고 있는
것이다. 청년은 인생의 제 2의 탄생을 맞이하는 시기다.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고 보람 있는 것은 제 2의 탄생이다. 왜냐하면, 제 2의 탄생이야말로
새로운 자아, 참된 자기, '나'다운 내가 태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의
차원에서 생활의 차원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고독에의 향수
인간은 세 개의 눈을 갖는다. 첫째는 밖으로 향하는 눈이요, 둘째는 위로
향하는 눈이요, 셋째는 안으로 향하는 눈이다. 밖으로 향하는 눈은 자연과
객관적 대상의 세계로 향한다. 위로 향하는 눈은 신과 종교적 신앙의 세계로
향한다. 안으로 향하는 눈은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청년의 사색과
관심의 특색은 내향성과 내면성이 있다. 그는 눈을 밖에서 안으로 돌리고
남에게서 자기에게로 돌린다. 청년은 주로 자아와 내면적 세계로 향한다.
그것은 자기 발견, 자기 탐구, 자기 성찰, 자기 응시의 눈이다. 내가 나의 내적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눈이다.
사색에는 조용한 환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색하기 위해서 주위의 접촉에서
격리되어 조용한 장소를 구한다. 더구나 자기 성찰에는 그러한 환경이
요구된다. 고독은 사색하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나를 응시하고 조용히 인생을 명상하는
시간을 가진다. 청년은 고독에의 향수를 느끼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이 말한 바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것과 같다. 고독의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시간이다. 젊은 혼은 고독 속에서 마음껏 꿈을 꿀 수
있고 감상에 젖을 수 있고 상상의 날개를 타고 낭만의 세계를 달릴 수 있다.
내가 나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다. '젊은이는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다.'고
시인 괴테는 노래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젊은 생명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애지자의 정신만이 날개를 가진다'고 플라톤은 말하지 않았던가.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를 향해서, 미를 찾아서, 이상의 세계를 동경하여 한없이
위로 높이 날개를 펴며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꿈은 어디까지나 꿈이요, 결코
현실은 아니다. 이데아에 대한 꿈과 이상에 대한 도취는 현실의 대지로
돌아와야 한다. 꿈은 깨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여러
사상가들이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한 애찬하였다. 고독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지한 사색을 위한 정신의 터전이었다. 니체는 '고독은 나의 고향이다'라고
하였으며, '진리는 호의에서 착상된다'라고 하였다. 니체는 고독한 산보 속에서
사상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칸트도 또한 그러했다. 그의 줄기찬 철학적
사색은 케니하스베르크의 고적한 숲 속을 조용히 산보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철인 스피노자는 홀로 렌즈를 닦으면서 사색을
연마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사람의 인품은
타인과의 접촉에서 연마되고 원만해진다. 모가 진 돌멩이들이 서로 부딪쳐서
둥그런 자갈이 되듯이 규각을 가진 인간은 상호 접촉하는 가운데서 원만한
성격이 형성된다.
그러나 사색에는 고독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고독 속에서 벗어나 현실의 생활로
돌아와야 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남과 교통하는 사회적 실존이다. 우리는
사색을 위해서 가끔 고독의 세계를 갖는 것은 좋으나 고독 속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나와 너와의 생명적 공감의 따뜻한 인간적 대화 속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고독은 정신의 산책처지 영원한
안식처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한 바와 같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것은
야수나 신뿐이다.'
'네 영혼은 피로하거든 산으로 가라'라고 독일의 시인은 노래했다. 우리는
사색과 자기 성찰을 위해서 고독한 환경을 가끔 택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고독은 우리의 안식처는 아니다. 독일의 시인 뤼케르트는 '고독 속에서
살아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정말 고독 속에 혼자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거인이요,
정신력이 비상하게 강한 인간이다. 문호 입센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한 인간이다.' 산에 가면 거리가 그립고 거리에 있으면 산이
그리워진다. 자연 속에 있으면 문명이 그립고 문명 속에 있으면 자연이
그리워지는 것이 사람이다. 고독도 그와 비슷하다. 혼자 있으면 사람이
그리워지고 사람 속에 있으면 고독이 그리워진다. 청년들은 고독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의 고독은 흔히 감상주의로 미화된 고독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고독에 대한 향수를 좋아하는 것이다.
니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정신적 거인만이 진정한 고독에 견딜 수
있었다. 청년의 고독은 애상과 낭만이 짝짓는 세티멘털리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 고독할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군중 속에
섞일 때 더 한층 고독을 느낀다. 서로 따뜻한 대화를 잃어버릴 때 인간은
고독한 것이다. 낯선 군중들 속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처럼 느낄 때 우리는
고독의 비애를 느낀다. 현대인에게는 이러한 고독이 더욱 심해진다. 홀로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많은 군중들 속에서 대화할 벗이 없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고독 속의 고독보다도 군중 속의 고독이 더욱 외로운 것이다.
생각하는 갈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프랑스의 근대 합리론 철학자
데카르트의 이 말은 인간의 본질과 핵심을 드러낸 명언이다. 인간을 동물의
질서에서 엄연히 구별하는 근본 특색은 생각하는 능력에 있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자다. 동물은 본능적 충동으로 살아간다. '먹고 자고 생식하고 죽는다.'
동물의 생은 이 네 개의 단어로 요약된다.
그러나 인간은 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능력이요, 양식의 기능이다. 이성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자연의 빛이다.
'양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되어 있다.' 데카르트 철학의 명저 "방법
서설"의 제일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데카르트가 여기서 말하는 양식, 즉 봉상스란 곧 이성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이성이라는 자연의 빛이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 이성이란 '사물을 바로 판단하고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여 사물에 대해서 옳고 그른 판단을
똑똑히 가져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 머리는 머리가 아니다. 바로 사색하고 옳게
판단할 줄 모르는 이성은 이성이 아니다. 이성의 이성다운 속성은 '생각하는
힘'에 있다. 진리와 허위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이성의 생명이다. 사색하는
능력과 이성의 빛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고 한 데카르트의 호모사피엔스의
인간관은 분명히 인간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해서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그는 인간의 본질을 포기하는 것이다. '코키토
에르고 숨'은 인간이 인간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말이다. 데카르트와 거의
비슷한 사상을 우리는 파스칼에서 본다. 파스칼은 데카르트보다 27년 후에
출생해서 12년 후에 별세하였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파스칼의
말은 너무나 유명하다. 인간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지극히 약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생각하는 힘이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인간의
품위는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게 생각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파스칼은 주장했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사색에 관한 유명한 단장을 몇 개
인용해 보기로 한다.
'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가장 약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사색이 인간의 위대성을 이룬다.' '나는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 것이 있다고 하면 돌멩이나 짐승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품위는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하기로 힘쓰자. 이것이 도덕의
원리다.'
분명히 인간의 인간다운 품위와 존엄성과 위대성은 인간이 이성을 갖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파스칼이나 데카르트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강조하고
선언한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나는 현대인의 사색에 관해서 하나의 위기를 지적하고 싶다. 현대인은
매스컴의 위력에 눌려서 자기 머리로 끈기 있게 생각하는 자주적 사고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매스컴의 복잡한 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같이 신문을 읽어 보아야 하고 라디오를 들어야 하고, 또 TV와 마주 앉고
영화를 보게 된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외부에서 강한 자극을
받는다. 사물에 의해서 나의 사색을 정리하고 나의 판단을 갖기 전에 남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남의 의견을 읽게 된다. 우리의 머리는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기관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전략하기 쉽다. 생각하는 갈대에서
감각하고 수용하는 갈대로 변질한다.
현대인은 자기의 머리로 줄기차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지식'은 많아도 '지혜'는 적다. '의식의 과잉'과 '예지의
빈곤'이것이 현대의 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결합이다. 남의 판단과 의견을 비판과
사고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의 노예요 사상의 종이다. 우리는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의 판단과 의견을 가져야 한다. 옛날의 철학자들처럼
스스로의 머리로 줄기차고 끈기있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에 철인 칸트는 청년들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경고를 잊지 않았다.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자기 발로 서라.' 이것은 사색에 관한 귀중한
헌장이요, 계명이 아닐 수 없다.
생을 위한 사색
우리는 사색에는 반드시 내용이 있어야 한다. 사색은 언제나 무엇에 관한
사색이다. 무를 사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용이 없는 사색은
공허하다. 젊은 생명은 무엇을 위해서 사색해야 할 것인가. 청년은 인생의 제
2의 탄생의 시절이다. 청년의 눈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 남에게서 나에게로
향하고 외적 대상에서 내적 자아로 향해야 한다. 청년의 사색의 초점은 주체적
자아의 자각과 확립에 있다.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를 발견하고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사색하는 것이다.
자아의 발견과 자아의 충실은 청년의 사색과 관심의 중심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22세의 젊은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린이가 주위에서 자기를 구별하여 자아에 각성하게 되려면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거니와 높은 정신 생활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나는 이제야말로
참된 의미에 있어서 자아에 각성하고 깊은 의미에서 나라고 부를 수 있다.
지금까지 나에게 결핍되었던 것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자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신은 바라고 있느냐. 그것을
위해서 내가 죽고, 또 내가 살 수 있는 그러한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야말로 자아의 눈이 떴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나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행동하련다.'
고독과 성실의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자아의 발견을 위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사색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어린아이가 '이것은 나의
집이다. 나의 손이다'하고 '나'라는 말을 쓰려면 여러 해가 걸린다. 자아의
발견과 자아와 타아의 구별은 어린애에게 대단히 중요한 정신적 사건이다. 높은
정신 생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음 속 깊은 자각에서부터 '나는
나다'하고 자아에 각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의 탄생은 깊은 의미에서 진정한 인간의 탄생이다. 그것은
나다운 '나'가 태어나는 것이요, 본래적 자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그것을 그리스어로 옮기어 '그노티 세아우톤'이라고 일기에 썼다. 영어로 옮기면
'Knowtheself'다.
옛날 그리스의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대리석 벽에는 그노티 세아우톤 즉
'너 자신을 알라'라는 인생의 금언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말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자아를 자각하라'는 것이다. 청년들의 사색의 목표는 자각에 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사색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또 의미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인생에서 해야 할 사명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일기에 의지해서 설명하면 내가 그 때문에 살고 또 그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인생의 이념을 발견하는 일이요, 신 또는 하늘이 나에게
정말 바라고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인간은 사명을 느끼는 존재요,
사명을 위해서 사는 존재다. 인간은 사명을 자각할 때 위대해진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다.
우리는 이 역사적 현실 속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또한
내던지는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보람과 빛을 던져 던지는
자유를 갖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인가 보람과 빛을 던져야 하고, 또 던질
수 있는 존재다. 인생은 가치를 창조하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저마다
자기다운 천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우고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자아를 실현하고자 자기의 천분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 있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것처럼 '행복을 얻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 이외의 다른 목적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 밤낮으로 헌신 몰두할 때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생은 곧 창조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 가는 이상
사회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가야 한다. 나의 피땀과 노력으로 인해서 사회의
한구석이 밝아지고 역사의 한 모퉁이가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인생을 성실한
창조의 일터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할 때가 곧 청년 시절이다. 사람은
모두 자기다운 방식으로 천분을 갖고 있다. 둥근 돌멩이는 둥글어서 쓸데가
있고 모난 돌멩이는 모가 나서 쓸데가 있듯이 사람은 각자 개성적 천분을
지닌다. 우리의 할 일은 그것을 올바로 발견하고 꾸준히 키우고 보람 있게
발휘하는 것이다. 사명이란 하늘이 나에게 보낸 명령이요 목숨이다. 그것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인간은 높은 사명을 자각할 때 생활에 일관한 목표가 생기고 정신의 확고한
자세가 선다. 행동의 뚜렷한 원칙이 생기고 튼튼한 신념이 박힌다. 인간은 높은
사명에 살 때 비로소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불의의 타락 속에 전락되지
않는다. 진실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고 인생에 보람을 주는 것은 높은 사명의
자각과 실천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너 자신의 사명을 알라'는 뜻이다.
자아의 자각은 자기의 사명의 자각이다. 젊은이의 사색은 오로지 여기에
집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의 유명한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사색인으로서 행동하고 행동인으로서 사색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인간은 사색한다. 그러나 사색은 사색을 위해서 사색하는 것은 아니다.
사색은 행동을 위한 것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색한다. 옳게
행동하려면 옳게 사색해야 한다.
사색이 없는 행동은 혼돈과 방향 상실의 행동이 되기 쉽고 행동이 없는
사색은 공허와 현실 유리의 사색이 되기 쉽다. 모두가 불완전함을 면치 못한다.
중국의 저명한 유가 사상가 왕양명이 이미 갈파한 바와 같이 지는 행의
시초요, 행은 지의 이루어진 것으로서 지행은 합일해야 하는 것이다. 사색은
행동의 원동력이 되고 행동은 사색의 결정체가 되어야 한다. 옳은 사색에서
옳은 행동이 나오고, 옳은 행동은 사색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저마다 옳게 살기
위해서 옳게 사색하기를 힘쓰자.
"류주현편"
류주현(1921__1980)
소설가, 경기도 여주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 수학. 한때 국방부
편수관 역임.
인간, 역사, 현실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입체적인 구성력으로 다채로운 소재를
소화해 낸 작가이다. 초기에는 단편 소설을 주로 썼으며 1964년 장편 소설
"조선 총독부"를 발표하면서부터는 대하적 기록 문학을 통하여 독특한 역사관을
보여 주었다. 100여 편의 단편과 20여 편의 장편을 발표한 다작 경향의
작가였다.
탈고 안 될 전설
벌써 여러 해 전의 이야기다.
도회 생활에 심신이 피로하여 여름 한 달을 향리에 가서 지낸 일이 있다.
나는 그 때 우연히 만난 젊은 남녀를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마 나의 생애를 두고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며, 필시 그들은 내 메말라 가는
서정에다 활력의 물을 주는 역할을 내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해 줄 줄로 안다.
향리 노원에는 내 형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서울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데도 물이 맑고 산이 높아, 여름 한철에는 찾아오는 대처 사람들이 선경에
비길 만큼, 그 풍수가 아름다운 고장이다.
나는 그 여름 한 달을 형의 원두막에서 살았다. 마침 형이 참외와 수박을
많이 심고, 밭둑에는 높직한 원두막을 지어 놓았던 것이다. 그 원두막에서
낮이나 밤이나 외로이 뒹굴며 시장하면 참외를 따먹고, 졸리면 잠을 자고,
무료하면 공상을 하고, 그것도 시들해지면 원고지에 가벼운 낙서를 하고, 그래도
권태를 느끼면 풀 베는 마을 아이들을 불러 익은 참외 고르기 내기를 해서, 잘
익은 놈을 고른 녀석에게는 잘 익은 놈을, 안 익은 놈을 고른 녀석에게는 씨도
안 여문 참외를 한두 개씩 상으로 안겨 주며 희희낙락, 그런대로 즐거운 시간을
흘렸다.
어느 날인가, 장대비가 몹시 쏟아지는데 뽀얀 우연이 하늘 땅 사이에 꽉 찼다.
줄기차게 퍼붓는 빗발은 열 발자국 앞의 시야를 흐리게 하며 땅을 두드리는
소리는 태초의 음향처럼 사뭇 장엄한 어느 오후였었다.
나는 원두막에 누워서 비몽사몽간을 소요하다가, 빗소리가 너무도 장엄하여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늘과 땅과 공간이 혼연 일체가 된 들판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어떤 물체를 발견하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원두막에서 멀지 않은 밭 언저리로 사람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아 가며, 서두르지 않고 유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여자 한 사람 등에는 분명 바랑을 지고 있었다. 회색 승복이 비에 젖고
있는 작달막한 키의 여승이었다.
나는 흥미에 앞서 경이의 눈으로, 장엄한 자연 앞에 외로이 서 있는 하나의
점을 봤다. 그렇게 태연할 수가 없었다. 한 발 두 발 옮기는 걸음이 그대로
태산 같은 안정이고 초연이었다.
잠시 후, 여승은 발길을 돌려 내가 있는 원두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잘 생긴
코끝에서 빗물이 흐르고 있었다. 유난히 흰 얼굴과 원만한 턱을 가졌다.
여승은 분명코 원두막 위에서 사람이, 그것도 안경을 쓴 도회풍의 젊은
녀석이 내려다보고 있는 줄을 눈치챘으련만, 전연 도외시한 채 서서히 다가와
낙숫물 듣는 처마밑으로 들어서서 비를 긋는 것이다. 관음보살처럼 보였다.
다소곳하게 머리를 숙인 채, 사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그의
그윽한 눈매와 표정은, 인간세의 백팔번뇌가 한두 방울 빗물로 용해되고 있는,
해탈의 경지 그대로였다. 그렇게 느꼈다.
"좀 올라와 쉬시죠. 비가 몹시 쏟아집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여승은 대답도 없이, 고개도
움직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빗물 떨어지는 웃옷을
후르르 떨고 사다리에 한 발을 걸쳤다. 나는 원두막 위에서 몸을 구부리고는 한
손을 내려 보냈다. 여승은 주저하지 않았다. 내려온 손을 잡고 몸을 원두막
위로 올린, 손과 손끝의 접촉은 비정적일 만큼 싸늘한 촉감을 여운처럼 남겼다.
초면의 남녀가 말없이 앉았기란 지극히 부자연스러워 말을 걸어 보았다.
"어느 절에 계신가요?"
"불암사에 있습니다."
불암사란, 원두막에서 10리 쯤 떨어진 산 속에 위치한 조그만 절이지만,
내력은 오래 됐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비가 몹시 쏟아집니다. 이런 비를 맞으시고 어딜..."
"그저 거닐었습니다. 하도 장하게 오시는 비이기에..."
스물 몇쯤이나 될까, 갸름한 얼굴에는 교양미가 깃들여 있고, 흠뻑 젖은
승복은 세련된 여체를 감싸고 있었다.
"불암사에 오신 지는 오래 되셨나요?"
"1년 가량 됩니다."
"서울서 오셨군요?"
"...참외가 많이 열렸습니다."
극성스럽게 쏟아지는 빗발이 무성한 덩굴을 마구 헤쳐 놓는 바람에 희끗희끗
조랑참외가 유난히 드러나 보였다.
나는 이승이 시장기를 느끼고 있음을 눈치채고, 참외를 한 아름 따다가 깎아
주었다. 여승은 담백하고 솔직한 여자였다.
"좀 시장했어요, 아주 달군요."
첫입을 베어 불며 배시시 웃는데, 이가 고르게 희었다.
잠시 후에 여승은 가 보아야겠다고 일어나더니, 원두막을 내려가 표연히
쏟아지는 빗발 속으로 나섰다.
"절에 한번 놀러 가겠습니다."
"구경 오시지요."
이 대화가 그 여승과 나와의 다시는 기약할 수 없는 작별 인사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우연히도 역시 소낙비가 퍼붓는 저녁 나절, 내가
있는 그 원두막을 찾아든 젊은 나그네 하나가 있었다. 서울서 왔다는, 삼십
전후의, 얼굴이 해사한 청년인데, 아깝게도 외쪽 팔이 하나 없었다.
"이 근처에 혹 절이 없습니까?"
"어느 절을 찾으시는데요?"
"글쎄요, 어느 절이라기보다 여승이 있을 만한 절이 혹 없을는지요?"
나는 문득, 며칠 전에 만난 그 여승의 영상이 머리에 떠올라, 그 젊은이를
유심히 살펴봤다.
"전장에 갔다 오셨군요?"
조심스런 내 물음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4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딴전을 보는 그의 표정이 퍽은 쓸쓸했다.
"절을 찾으시나요, 아니면 여승을 찾으시나요?"
"둘 다 찾습니다. 여승이 있는 절이 있으면, 필요한 자료나 하나 얻으려고요."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더 자세히 물어 보았자 생면 부지인 나에게 그가 어떤
간절한 이야기를 해 줄 리도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 며칠 동안 그 여승의
신비롭고도 성스러운 환상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
사나이가 그 환상을 깨뜨려 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따라서, 막상 그
이상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 여인에 대한 나의 존경의 염과 연연한 마음이
여지 없이 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더할 수 없이 신비스럽고 깨끗하며, 꿈을
먹고 믿음 속에서 사는 여인이 아니라, 어쩌면 가장 요망한 여자가 악의
구렁에서 헤매던 끝에 문득 깨달은 체하는 가면으로 승복을 빌려 입어, 구렁이
같은 육신을 가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까닭이다.
청년은 참외를 하나 달래서 달게 먹더니, 대가를 치르려고 했다. 그 얼굴을
보니 괴로움을 질겅질겅 씹는 표정이었다. 나는 돈 받기를 가볍게 거절하면서,
그 사나이에게 불암사를 가르쳐 주어야 옳을 것인가 아닌가를 곰곰 생각했다.
나는 그의 괴로움을 보며 적의를 느끼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요 뒷산에 불암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거기 젊은 여승 한 분이 계시더군요."
젊은이의 얼굴은 꽃구름처럼 밝아지며 생기가 넘쳐 흘렸다. 그는 더 이상
묻는 말 없이 가 버렸다.
잠시 후에 비는 개고 햇빛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러나, 벌써 서녘 하늘에는
저녁놀이 타고 있었다.
이튿날, 황금빛 아침 햇살이 부챗살처럼 펴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참외밭머리에 사람들이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제 본
젊은이가, 며칠 전에 만난 여승과 참외밭머리에서 헤어지고 있었다. 승복 차림의
여인은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석상이 되어 있었다.
별리, 나는 그들의 별리가 어떤 쓰라림을 지닌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진실과 사랑과 참회의 성스러운 자태로 보였다. 나는 그네들이 앞으로
다시 만날는지 안 만날는지는 생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그들 남녀의 서글픈 전설을 뇌리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 구상되지 않을 이 전설을 영원히 탈고하지 않을 작정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신의 눈초리
--문학의 필요성과 그 사명
문학자는 시대의 증인이고 그 작품은 시대의 중언이기를 소망한다. 한 시대의
특성을, 그 시대를 사는 개성 있는 인간을 잘 묘출해 내서 현재를 관조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문학자의 사명이고 문학의 본질적인 권능이다.
인간상이거나 시대 사조거나 그 고유한 특성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작품이면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오랜 생명을 갖게 마련인데, 그런 경우
작품에서 창조된 사회상이나 인간사는 우리가 혐오하는 양상일 수도 있다. 또는
가장 일상적인 권태로운 소시민의 외면적인 조소에서 시작하여, 차원 높은 내면
세계로의 심화를 상징시키는 설득력 있는 꿈의 조형으로 승화되는 예도 있다.
그 어떤 경우거나 문학은 현실적인 토양에서 싹이 돋아난다. 한 시대, 그
인간들에 의하여 창조되고 가꾸어지고 수확이 된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남겨진다. 한 시대의 증인으로 남겨진다. 문학이야말로 작가나 독자가 책임있게
사명감을 가지고 함께 가꾸어 놓아야 할 그 시대의 꽃이고, 다음 세대에 뿌려질
꽃씨다.
현대처럼 인간 자체가 인간들에 의해서 매몰되고 소외된 적도 없다. 인간들의
비명이 기계 소리에 함몰되어 스러져 버린다. 인권과 자유를 가장 숭상하는
체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짓밟는다. 더욱 비명을 지르며 실망한다. 자신들에
의해서 얻어지는 결과에 실망을 한다.
그런 시민 사회의 정신적인 불안은 어떤 외부적인 처방이나 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다. 인간 개개인의 각성이 병들어 가는 자신의 지각 신경을 꼬집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길밖에 없다. 새삼 문학의 역능이
기대된다.
문학은 문학자 개인의 소산이지만 그가 처해 있는 풍토적인 바탕에서 움트고
자라난다. 풍토는 우리 모두가 딛고 서 있는 지층이며 개성이다. 그리고 정신의
바탕이다. 작가의 고발이 과장되더라도, 이념 추구가 비록 공전되고 있더라고 그
특질이 인간의 고뇌이며 인간힘이라면, 그리고 인간성의 재발견에 있다면,
작가나 작품에 대한 사회적인 오해는 정신적인 인색에서 오는 것임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 노하고 고민할 때일수록 마음 속에서 신의 눈초리를
발견한다. 신은 하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 속에 숨어 있다.
불세출의 영웅이 섬약한 소녀의 가슴을 유린할 때도 반드시 그는 신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부딪친다. 사람들이 그 신의 눈초리를 의식할 수 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문학이 필요하다.
문학은 그런 신의 눈초리로서 사람들 가슴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그
눈초리를 대할 때 의식이 필요 없어야 한다. 의식이 필요 없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신과 친숙해진다. 그것은 공감을 뜻한다.
문학은 작가와 작품과 독자의 공감이 일체화됨으로써 비로소 그 준엄한
사명을 다 한다. 그러한 작가. 작품. 독자의 풍요로운 합창으로 이 땅에 문학이
활짝 꽃 핀다면 참 좋겠다.
"송건호 편"
송건호(1927__)
평론가. 충북 옥천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한국 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과 경향신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 저서에 "민족
지성의 탐구"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등이 있다.
역사적 안목의 비판이 실린 많은 평론. 에세이를 발표했으며 한국 지성의
현실과 문제를 일깨우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한국 지성의 어제와 오늘
1
한국의 지식 사회에서 그들의 지성을 사적으로 고찰하면 크게 보아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잇다. 전 단계는 방향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념형 지성의
단계이고, 후단계는 사실지, 바꾸어 말하면 기능형지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지성은 넓은 의미에서 감정이나 의지 같은 인식의 활동에 대해 지각의 작용을
의미하며 이런 경우에는 사물을 지각하는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감각도
포함되나, 일반적으로 지성이라 할 때에는 감각으로 얻은 사물을 재료로
사고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지식을 정리하는 사고 작용을 하는 의식 활동을
뜻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감각과 구별되는 오성이나 이성 같은 작용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좀더 소상히 한국의 지성사를 분석하면 더 많은 몇 개 단계로 구분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제목도 '어제와 오늘'로 되어 있으므로 우선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성의 소유자들, 환언하면 지식인은 그때 그때의 주어진 사회, 즉 시대적
여건에 따라 그 존재가 여러 가지 의미로 등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8.15까지의
한국 지식인을 볼 때 당시의 지식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다. 사회적으로
우선 그들은 식민지 사회에서 선발된 계층, 즉 지식인이라는 점을 들어야겠고
따라서 민족 해방이라는 민족적 꿈을 위해 무엇인가 선각적 활동을 해야만 하는
과제를 메고 있었다. 일제 시대에 대학생 내지 대학 출신 지식인에 대한 사회의
기대가 얼마나 컸었는가를 지금 세대는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한편 일제 시대의 대학은 철저한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고 학문도 영미 계통
아닌 독일 학문의 영향을 받아 강한 이념 지향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학문이 이념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학문이 강한 사상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8.15 전까지의 지식인은 이같이 사회적으로는 존경받는 엘리트였고
학문은 이념 지향적인 성향이 강해 대학 출신 지식인들은 너나없이 사회적
민족적 지도자로서의 긍지가 남달리 강했고 그만큼 자존심과 지조가 강했다는
것이 당시의 지식인이 가진 일반적 이미지 였다.
2
엘리트로서의 지식인이 가진 이러한 이미지는 8.15 후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해방 당시의 이데올로기 과잉 시대에 지식인의 현실 참여는 공과는
별문제로 치고 하여튼 그 시대를 좌우하다시피 했다. 이때의 지식인은 따라서
강한 이념 지향성을 띠고 있었으며 시대 상황이 절박했으니만큼 어느 의미에서
보면 8.15전 이상으로 그러한 성향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지식인의 이러한
성향은 자유당 치하에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시기는 엄격히 따져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때까지는 아직도 일제 시대의 지적 풍토가
우세했으므로 지성에 어떤 본질적 변화란 없었다.
후진국의 지식인은 일반적으로 선진국의 학문을 받아들이는 속에서
지식인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따라서, 후진국의 지성을 분석할 땐 그들이 어떤
선진국의 학문 내지는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가, 바꾸어 말해 어떤 선진국의
문화권에 속하느냐가 문제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 단계의 한국은 일본을
중계로 한 독일 문화권에 속해 있었고 후 단계인 지금은, 압도적으로 미국
문화권에 속한다.
우리 나라 지식인은 미국 문화권에 들어가면서 지성의 성격이나 사회적
구실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측면에서 재촉한 것이 대학의
사회적 기능이 달라지게 되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즉, 전에는 대학이 엘리트
양성 기관이라는 성격이 강했으나 지금은 양적으로 대학이 일제 시대와 비교가
안 될 만큼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즉 양적 팽창의 필연적 한
결과로 대학이 이미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지식인의 대량 양성
기관으로 변한 것이다. 지금은 대학 졸업자가 일제 시대의 중학 졸업자보다도
양적으로 더욱 흔하게 되었다. 그만큼 대학과 대학인이 대중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대학의 기능에서 지적할 또 하나의 점은 학문이 미국의 일부 영향 아래
전적으로 기능화되었다는 점이다. 대학의 '대중화'와 학문의 '기능화'라는 두
가지 변화는 지식인의 지성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어 전단계에 있어서의 지성의
강한 이념 지향성이 기능형 지성으로 질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지성이라는 동일한 어휘 밑에 전 단계와 현 단계 사이에는 이미 개념상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3
지성의 기능화는 여러 가지 경향에서 발견된다. 지난날 지식인이라고 하면
철학. 문학. 역사. 사상 등 다분히, 문화적, 정신적, 사상적인 즉 추상적 지성의
소유자를 의미했다. 옛날 대학생이 즐겨 철학, 종교, 예술 같은 형이상학적
분야에 관심이 많고 그 방면의 독서를 많이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학생은 이러한 관념적 지성에는 거의 흥미를 기울이지 않는다.
대학생의 공부방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지금 대학생이 순수 교양을 위한 독서의
빈약한가를 발견하게 된다.
이제 학문은 점차 기능화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보다 더 실무적이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지식은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먼저 문제된다.
문학이니 철학이니 하는 순수 문학 또는 인문 과목의 전공은 사회에 나가
가난하게 살기 알맞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학생들의 생각이 이렇게 변한
데에는 오늘의 대학 교육이 기능인의 양성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는 사실하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학의 교과 과정을 보면 오늘의 학문이 기능적이며,
따라서 지성이 기능형 지성으로 변하게 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지성의 기능화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적 과제라고 해야 할는지 모른다.
한 세대 전처럼 지식이 한낱 관념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해마다 템포가
빨라지는 오늘의 과학 기술 시대를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며 국제생존 경쟁에
낙후되기 마련일 것이다. 이것은 특히 신생국의 경우 중대 문제이며
신생국일수록 지식의 기능화는 절실한 과제라고 해야 할는지 모른다. 지성의
기능화, 따라서 지성의 효율화가 오늘날처럼 요구되는 시대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성의 기능화는 이러한 긍정적 구실만 하지 않는다. 기능화란 바꾸어
말해 기술화를 뜻한다. 주어진 문제, 일들을 효율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일종의
테크닉학에 불과하다. 주어진 문제, 주어진 일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의 가치
판단에는 소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능형 지성의 소유자는 자기의 배운 자 지식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살릴
것이냐에 보다 더 관심을 쏟는다. 그들은 자기의 지식이 옳게 사용되느냐
악용되느냐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효용을 보다 생각하며 그 지식의 사용이 사회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과연 바람직한 사용이냐 아니냐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지식의 기능화가 빚는 일종의
불가피한 경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짓기의 가치를 기능적--즉 효능적 위주로만 생각하다 보면 그러한 지식인은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모순된 행동을 하면서도 태연자약 아무런 부조리도
느끼지 않으며 따라서 고민도 수치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가령 오늘은 A를
위해 활약하다가도, 기회가 허용만 되면 A와 견해를 달리하는, 심한 경우
적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B를 위해서라도 가진 바 지식을 동원, 봉사를
하는 예를 볼 수 있다.
지성이 이념성을 겸하지 못하고 기능화가 지나치다 보면 효용성이 문제이지
지성의 일관성, 바꾸어 말해 지식인의 지조 같은 것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다.
기능적 지성의 소유자 중에는 일반적으로 그의 사회 생활에 일관성이 부족하고
효율성만을 찾아 해바라기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일찍
'근대화' 과정을 거쳐 휴머니즘이나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따라서 자의식, 주체
의식이 강한 서구 사회에서는 지성이 기능화되어도 뚜렷한 자아 의식으로
'해바라기'식 처세를 보기 힘드나, 자아 의식이 아직 약한 후진 사회에서는
지서의 지나친 기능화가 서구 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기 쉽다. 한때 존경의 대상이 된 바 있는 지식인이, 일부이기는 하나,
오늘날 멸시와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최근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높아지고 새삼스러우리만큼
민족의 주체성이 주로 사학계를 중심으로 의식되고 제창되어 지석의 지나친
서구적 기능화에 대해서도 반성의 경향이 일부 나타나고 있음은 경하할 일이다.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라고 무조건 바람직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문화나 지성을 한낱 기능적 의식 활동으로만 받아들이는 서구의 일부 지적
풍토에 도전, 이념 성향을 강하게 띠고 나타났음은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본래 가장 바람직한 지성이란 물론 기능주의에 치우쳐서도 또 이념주의에만
치우쳐서도 안 된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오늘의 한국 사회의 지성은
이와 같이 지나친 기능화와 이것에 도전한 새로운 이념형 지성 간의 일종의
갈등 현상의 축도라고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이 같은 한국
지성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민족적 자각을 더욱 높여 신생국의 바람직한
지성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선비 정신
기사도, 무사도
선비 예찬론이 심심찮게 저널리즘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아다시피 선비는 이조
5백년간 양반들의 이상적 지식인상으로서 중세 유럽의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처럼 지난날의 이상상이지 지금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인간상은 못 된다.
원래 이상적 인간상이란 나라나 시대마다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며
선비가 우리 사회의 이상이 된 것은 그 때 양반 신분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유럽에 기사도가 있고 일본의 무사도가 생긴 것도 제각기
중세의 봉건제가 그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필요로 한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시민 사회에서 이런 인간상이 필요 없게 된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한데 근래 '선비론'이 새삼스럽게 대두되고 심지어 예찬론마저 들리게 된
것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한말로 '선비'는 이조의 신분 사회에서 지배층, 즉 양반들의 도의적
규범이라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선비'는 원한다고 아무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인간상이 아니었다. 선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양반이라는 신분에
국한되었으며 상민은 아무리 인격과 학식을 겸비해도 선비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선비는 철저하게 비민중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훌륭한 선비는 민중
앞에 초연해야 했으며 민중이란 '따르게 하고 알려서는 안 될 중우'에 지나지 않았다.
선비는 또 철저하게 비세속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손에 돈을 쥐는 법이
없고 쌀값을 물어 보는 법이 없다'는 것이 선비 생활의 이상이라고 했다.
세속적인 문제는 일체 알려고도 않고 알지도 못하며 오로지 대의를 논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라고 했다.
선비의 생활은 한말로 관념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18세기 말엽 이 땅을
찾아온 유럽의 선교사와 여행자들이 코리아의 양반 생활의 너무나 가난하면서도
빈궁 속에 태연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례가 많았다.
이런 형이 선비의 이상이라면 오늘의 우리에게 선비형 인간이 바람직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한데 이처럼 전시대적 인간상인 선비가 오늘날 왜 새삼스럽게, 심지어
예찬까지 받게 되었는가.
4.19를 계기로 한때 구세대가 지탄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구세대는
썩었다' '나라를 못쓰게 망쳐 놓았다'해서 마치 부정 부패의 상징처럼 공격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사실 구세대는 이런 공격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8.15 후의 정치, 경제 생활이 줄곧 상궤를 벗어나 혼란을 거듭한 것을
볼 때 비난의 적이 된 것도 무리라고만 할 수 없었다.
선비 대망론
그러나 지금 시대는 어떤가. 오히려 그 전 시대만도 못하다는 소리가 들린다.
일신의 출세와 안락을 찾아 변절을 해도 전처럼 수치는 고사하고 오히려
선망하는 풍조조차 생겼고, 부정 부패의 형태도 더욱 지능화되어, 도대체 도의적
처신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됐다는 평이다.
'부조리 일소'란 구호 아래 당국의 정화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나
이른바 '윤리 도덕'의 타락은 상은 물론 사회 저변에까지 만연돼 일소
용이찮다는 말이 들린다. 국민 전체가 도의 의식이 타락됐다는 개탄의 소리가
들린다.
'선비'의 예찬, 선비형 인간의 대망론이 대두하게 된 것도 아마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선비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시대적 성격이 짙기는 했으나 한편 오늘의
시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미점이 없지도 않다. 비민중적이며 세속에
어둡고 공리 공론을 일삼는 관념적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때로 그들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기를 대의를 위해 발휘하기도 했다.
직언을 하면 왕의 노여움을 사 목이 달아나는 것이 뻔한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태연히 간언을 서슴지 않기도 했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관군이 무색하게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우는 등 충의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옳은 일을 위해선 서거정의 말대로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지 않는' 대쪽 같은 절개를 보이기도 했다.
'사색당쟁'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옛 선비에 변절이란 도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들 손자대에까지 그들은 일편단심 변할 줄을 몰랐다.
매천같이 초야의 일개 무명 선비조차 망국을 보다못해 순국을 했다. 선비로서
의병 대장 또는 순국 열사로 길이 청사에 빛날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나오게 된 것은 그들의 그 굳은 지조, 순국의 애국
사상, 안빈 도락하는 생활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긍정적 면에서 선비의 좋은
점을 오늘의 시대에 되살려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은 것이 없다. 일본의
무사도, 유럽의 기사도는 근대에까지 무엇인가 전통을 남겼고 현대 사회에
긍정적으로 일부 계승된 족적이 남아 있으나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에는 우리 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선 그들의 전근대적 성격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선비에게는 세속적인 면,
가령 경제 활동에 너무나도 무능했다. 경제 활동을 극도로 천시했으므로 더욱이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 남을 능력이 없어 의를 지킨 '선비'일수록 경제적
낙오자가 되었다. 또 하나는 그들의 비민중성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식민지
치하의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엔 민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는데 '선비'는
그들의 생리로 보아 3.1운동 이후의 민중적 차원의 항일 운동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김창숙 등 일부 유생에 대쪽같이 곧은 절개는 남아 있었으나 거의가 개인적
숭절에 불과했고 역사적 항일 조류에서는 사실상 소외되었다.
경계할 복고풍
그 자체 내에 이 같은 취약점이 있은데다 일제의 적극적인 회유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합당했을 때 그들은 특히 유림의 포섭에 주력했다.
즉 합방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한 정부 요인들에게 작위를 주어 '은사공채'를
발행, 막대한 액수인 이자로 편안한 여생을 보장해 주었고, 이 밖에 정부 관리를
지낸 자 3천 5백 59명, 양반, 유생 9천 8백 11명에게 각각 후한 이른바
'은사금'을 뿌렸다.
구한국 정부의 관리란 으레 양반 유생 출신이며 과거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도 말하자면 유생이므로 그들은 특히 유생의 회유에 주력한 것이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유생은 일제에 포섭되고 나머지 수절한 유생들은 사회적으로
영락하고 게다가 항일 운동에서조차 소외되어 이조 5백 년간에 걸친 자랑스러운
선비의 전통은 이렇게 허무하게도 붕괴되고 말았다.
초야에 묻혀 살던 무명의 선비 황현이 스스로 자결의 길을 택한 것도, 5백
년간에 걸친 선비의 전통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무너지고 나라는 망했는데 명색
선비란 사람들이 너나없이 일신의 안락을 위해 일제의 은사금을 타먹기에
급급하는 것을 보다못해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황현과
전후해 자결한 20여 명을 마지막으로 이조의 선비 정신은 사실상 전통이
끊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대두된 것은 이미 사라진 이 같은 선비 정신을
그리워하는 심리라고 보겠는데, 이는 그만큼 오늘의 세대가 혼탁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선비 예찬은 오늘의 시대에 긍정적 구실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비 예찬이 복고풍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다. 선비란 중세 신분
사회의 양반층의 이상상이므로 선비 정신은 반민중적이 되기 쉽고 현실 의식의
결여, 생활 능력의 부정 등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초연한 생활인을 그렇게
부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선비를 이렇게 보고, 이런 뜻에서 선비 대망을 한다면 현대 사회에 있어
선비는 긍정적 구실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가 요구하는 선비는 대중을 무시하는 고고형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같이
호흡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선비는 공리 공론을 일삼는
관념형 인간이 아니라 현실 의식에 투철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향하려는 이념형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
사회가 기사 정신을, 일본이 무사도를 근대 속에서 새롭게 그 정신을
계승했듯이 우리도 선비 정신을 오늘의 시민 사회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는
자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고향을 향한 마음
젊어서는 고향을 등지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생활처럼 생각되고 있다. 학교를
나온 뒤 서울이나 지방 도시에서 하다못해 몇만 원 월급쟁이라도 해야만 고향
사람들의 칭찬의 대상이 되지 집에서 농사를 짓거나 마을 일을 돕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러한 청년은 사회에서 낙오된 젊은이로 업신여김을 받기 일쑤다.
남자가 듯을 세워 고향을 나온 이상 성공을 못 하고는 죽어도 귀향하지
않는다는 결심이 훌륭한 젊은이로 칭찬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장성하면 고향을 등지고 이른바 '성공'을 위해 노력한다.
물론 젊은이들의 이러한 '성공'에의 야망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고 이러한
야심에 찬 젊은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의 앞날이 양양해진다는 것도 긴
설명을 필요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야심
많은 사람이라도 고향에 대한 '향수'만은 결코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큰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난 사람일수록 가슴 속에는 고향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
불타오르고 있다. 수만 리 떨어진 먼 외국에 사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고향에
대한 절절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까.
살인 강도와 같은 흉악범도 죄를 범하고 난 후에는 많은 경우 그가 어려서
자란 고향에서 잡히는 일이 많다. 일단 죄를 범하고 난 뒤에는 순간적인
격정에서 저지른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마음이 약해져 자기도 모르게 어릴 적에
자란 고향 마을에 찾아갔다가 잡힌다는 것이다. 범인의 이러한 심리적 약점을
알고 있는 수사관들이 미리 그의 고향에 잠복했다가 잡는 것이다. 사람은
평소에는 별로 생각도 느끼지도 못하지만 누구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어릴 적에 늘 만지작거리던 어머니의 젖꼭지와 자랄 때 아침 저녁 대하던
고향 산천은 다 같이 '마음의 고향'으로서 우리의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다. 내가
오늘 있는 것은 고향 산천의 힘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치 않는다.
고향 산천을 대해도 할 말이 없다--고향 산천은 고맙기만 하여라.
어느 시인이 부른 시 한 구절이다. 젊어서 고형을 뛰쳐나온 젊은이도 나이가
들면 으레 고향을 그리게 된다.
외국으로 왔다갔다하며 우리 풍습을 거의 잊은 사람도 50이 넘고 60이 되고
하면 점점 고향을 그리게 되고 입는 옷은 물론 취미도 한국적인 것에 심취한다.
일본에 사는 어느 우리 동포가 20대에 고향을 떠나 일본에서 자수 성가, 그
곳에서 뼈를 묻게 됐으나, 생전에 틈만 있으면 "춘향전"의 레코드를 틀어 놓고
고향 생각을 하며, 눈물지었다는 이야기를 그의 아들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아들은 서울에 온 길에 "춘향전"에 관한 레코드를 모조리 구해다가 돌아간
선친의 영전에 바쳤다고 한다.
나는 지방색을 의식적으로 배척하고 반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를 낳고
길러 준 고향 마을에 대해서는 좀더 관심을 보여야 옳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지방색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 마을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누구나 성장한 뒤에는,
특히 고향을 떠나 사회나 나라의 지도적 위치에 선 사람이면, 고향에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했으면 한다. 큰일이 아니라도 좋다.
크게 귀를 했거나 축재한 사람이라면 고향 마을을 위해 좀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게 보람 있는 일이 아니어도 좋다. 오히려 작은
일이라도 정성에 더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라고 한글과 산수를 깨우쳐
준 고향 모교인 국민 학교에 몇 권의 책을 기증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한국 위인전, 동화집, 또는 학습에 도움이 되는 이것저것 책을 사서
고향의 모교에 보낼 수도 있다. 자라나는 고향의 후배들이 얼마나 좋아하고,
도움이 될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연로하여지면 자기 반성을 하게 된다. 또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출세'를 위해 또는 '축재'를 위해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연로할수록 사람들은 자기의 지난날을 회고하게 된다. 조그마한
일이나마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하고자 생각한다. 뜻있는 일은 물론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고향에 대한 무엇인가의 기여도 마지막 인생을
장식하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박완서편"
박완서(1931__)
여류 소설가. 경기도 출생. 서울대 문리대 중퇴. 1970년에 장편 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나온 후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등으로 일약 각광을 받아,
가장 설득력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평판을 얻었다.
감각적인 묘사가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분석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40대의 비 오는 날
앉은뱅이 거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요즈음은 꼭 장마철처럼 비가 잦다. 청계천 5가 그
악마구리 끓듯하는 상지대도 사람이 뜸했다. 버젓한 가게들은 다 문을 열고
있었지만 인도 위에서 옷이나 내복을 흔들어 파는 싸구려판, 그릇 닦는 약,
쥐잡는 약, 회충약 등을 고래고래 악을 써서 선전하는 약장수, 바나나나 엿을
파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인도가 텅 빈 게 딴 고장처럼 낯설어
보였다. 이 텅 빈 인도의 보도 블록을 빗물이 철철 흐르며 씻어내리고 있어
지저분한 노점상도 다 빗물에 떠내려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딱 하나 떠내려가지 않는 게 있었다. 앉은뱅이 거지였다. 나는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그 곳을 지나칠 일이 있었고, 그 때마다 그 거지가 그 곳
노점상들 사이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 봤기 때문에 그 거지를 알고 있었다. 그
날 그는 외톨이였고 빗물이 철철 흐르는 보도 블록 위에 철썩 앉아 있는 그의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하체가 물에 홈빡 젖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손으론 비닐 우산을 펴들어 머리를 빗발로부터 가리고 한 손은 연방 행인을
향해 한 푼만 보태 달라고 휘젓고 있었다. 나는 전에 그를 봤을 때 각별하게
불쌍히 본 적도 없었고 그가 앉은뱅이라는 것조차 믿었던 것 같지가 않다.
앉아서 주춤주춤 자리를 옮기는 것도 봤고, 앉아서 다니기 편하게 손에다
슬리퍼를 꿰고 있는 것도 봤지만 그게 반드시 앉은뱅이란 증거가 될 순 없었다.
허름한 바지 속의 양다리는 실해 보였고 아마 아침엔 걸어나와 온종일 저렇게
흉물을 떨다가 밤이면 멀쩡하니 털고 일어나 걸어들어가겠거니 하는 추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약아 빠졌달까, 닳아 빠졌달까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 날도 물론 그가 앉은뱅이란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앉은뱅이가 아니란
증거 또한 없었다. 그냥 빗속의 모습의 충격적으로 무참했다. 찬 빗물에 잠긴
누더기 속의 하체가 죽어 있는 물건처럼 보였고 그래서 행인을 향해 휘젓고
있는 한쪽 손이 비현실적이리만치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순간 무참한 느낌으로 숨이 막히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곤 잠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한
겨울에 벌거벗고 울부짖는다거나 끔찍한 불구라든가 너무 늙었거나 해서 도와
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가엾은 거지를 보고 주머니를 뒤적이다가도 문득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냥 지나친다. 이렇게 마음을 모질게 먹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 날도 나는 빗속의 거지 앞에서 핸드백을 열려다 말고 이 거지 뒤에 숨어
있을 번들번들 기름진 왕초 거지를 생각했고, 앉은뱅이도 트릭이란 생각을 했고,
빗물이 콸콸 흐르는 보도 위에 저렇게 질펀히 앉았는 것도 일종의 쇼란 생각을
했고, 그까짓 몇 푼 보태 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 도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
요컨대 나는 내 눈앞의 앉은뱅이 거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를 못하면서
거지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예비 지식을 갖출 만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비 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한 그의 비참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속아만 산 사람처럼,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세무쟁이를 믿지 않던 버릇으로, 외판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장사꾼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거지조차 못 믿었던 것이다.
그 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 거지에 대한
한두 푼의 적선이 거지를 구제하기는커녕 이런 적선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구제책이 늦어져 거지가 마냥 거지일 뿐이라는 제법 똑똑한 생각을 요즈음은
어린이까지도 할 줄 안다. 사람들이 갈수록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불쌍한 이웃을 보면 이런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 대신 반사 작용 겨울철의
뜨뜻한 구들장이 그립듯이 그리워진다. 나이를 먹고 세상 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 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버스 바닥에 흩어진 동전
이것도 비 오는 날 얘기다. 버스를 타고 있었다. 타고 내린 많은 사람들의
젖은 신발과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로 버스 바닥은 질펀한 진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내릴 정거장을 하나 앞두고 갑자기 앉은 자리에서 안절부절
불안해졌다. 잔돈이 하나도 없고 오백 원짜리 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오백 원권은 그가 처음 탄생할 때 지녔던 가치를 어느틈에 오천
원권한테 빼앗기고 형편없이 타락한 건 사실이다. 오백 원권을 가지고 큰 돈
대접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나는 아직도 버스에서 내릴 때 오백 원권을 낼 때만은 그게 큰 돈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차장 아가씨한테 미안해하는 버릇이 있다. 아마 옛날 옛적
오백 원권이 위풍당당하게 최고액권 행세를 하던 시절, 그것으로 버스 요금을
내면 차장이 짜증을 내며 구박까지 하던 때의 기억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백 원권으로 요금을 내려면 한 정거장쯤 미리 앉은 자리에서
차장한테 가는 걸 내 나름의 예절로 삼아 왔다. 그 날도 나는 미리 차장
아가씨한테 가서 미안한 얼굴을 하며 오백 원권을 내밀려고 했다. 그런데 차장
아가씨는 꼿꼿이 선 채 머리만 약간 창틀에 기대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우리집
셋째딸만한 나이의 연약한 아가씨였다. 짙은 피로가 앳된 얼굴과 심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어 측은했다. 그 잘난 오백 원권 때문에 이 아가씨의 달디단 잠을
깨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그녀의 피곤하고 불안한 낮잠에서
그녀의 중노동, 불량한 생활 환경, 불결한 잠자리, 조악한 식사, 업주로부터의
인간 이하의 모욕적인 대접, 그리고 그녀가 도망친 가난한 농촌 등 버스
차장이란 직업에 대해 갖고 있던 일반적이고 알량한 상식을 한꺼번에 확인한
것처럼 느꼈고, 그래서 얼싸안고 내 품에 편히 재우고 싶으리만큼 감상주의에
흠뻑 젖어들었다.
내가 내릴 정거장이 되고 버스가 멎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반짝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게 그녀가 아니라 나였던 것처럼 나는 놀리면서 어설프게 오백
원권을 내밀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동전이 짤랑대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백원짜리와 십원짜리 동전을 건네 주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런 우리의
주고받음 사이를 뚫고 두어 명의 승객이 버스를 내렸다. 그 바람에 누구의
잘못인지도 모르게 동전이 질퍽질퍽한 버스 바닥에 흩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주우려고 엎드리면서 차장 아가씨가 상냥하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같이 줍든지,
그냥 내리라고 하고는 새로운 거스름 돈을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발까지 구르며 나에게 호통을 쳤다.
"아이 속상해. 그것 하나 제대로 못 받고 속을 썩여, 빨리 빨리 주워 가지고
내려욧. 빨리 발차시켜야 한단 말예욧."
질퍽한 버스 바닥의 동전은 용용 죽겠지 하는 듯이 차고 희게 빛나며 좀처럼
주워지지를 않았다. 마치 침으로 붙인 우표 딱지 모양 버스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나를 약올렸다. 나는 거지처럼 헐벗은 버스 바닥을 엉금엉금 기며
손톱으로 이리저리 집어 겨우 백원짜리 동전만 주워 가지고 허리를 좀 펴려는데
차장 아가씨가 나를 잽싸게 문 밖으로 떠밀었다. 아니 내던졌다.
나는 곤두박질을 치면서 겨우 진창에 엎어지는 것만은 면했다. 그것만으로
내가 받은 수모가 부족했던지 버스는 흙탕물까지 나에게 끼얹어 주고 떠나갔다.
옷도 옷이지만 네 닢의 동전을 주워 올린 내 손과 손톱 사이는 말이 아니게
더러웠다. 나는 어느 가겟집 홈통에서 흘러내리는 빗물로 손을 씻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차장 아가씨한테 몹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꼿꼿이 선 채 불안하고도 달게 자던 소녀에 대한 한 가닥 모성애
같은 게 그 때까지도 내 내부에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철거되는 대학 건물
또 비 오는 날이었다. 또 버스간 속이었다. 나는 돈암동 쪽에서 시내로
버스를 타고 나오고 있었다. 버스가 조용한 대학로로 접어들었다. 비 오는 날,
그 곳의 가로수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연두빛 어린 잎들이 신기한리만치
정갈하고 싱그러워, 덩달아서 살아 있다는 게 그저 고맙고 축복스럽게 여겨졌다.
젖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문리대 건물이 보였다. 철거 작업중임을 알 수
있었다. 벽은 그대로 서 있는데 지붕과 내부가 헐어져 뻥 뚫린 창으로 저편
하늘이 보였다. 아아, 드디어, 문리대가 철거당하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는 현실감보다는 달콤한 감상이 더 짙었다.
나는 문리대 자리에 아파트가 선다는 소식도, 이를 반대하는 쪽의 서울대
보존 운동에 대한 소식도 남이 아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편도
아니었다. 그냥 담담한 방관자의 입장이었다. 학문과 사상의 전당이요,
젊은이들의 꿈과 야망의 고장인 유서 깊은 건물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게 못마땅했지만 아무리 떠들어도 종당에는 그렇게 되고 말걸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대학로가 이루고 있는 풍경 외에 어떤 딴 풍경도 그곳에서
바꿔 놓고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 곳은 누구에게나 그리운 풍경의 고장이었다.
또 내 자식이거나 손자이거나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곳에서 입학식을 갖고
졸업식을 가졌으면 하고 벼르던 누구나의 희망이 고장이기도 했다.
아아, 마침내 헐리는구나, 나는 신음처럼 되뇌이었지만 축축이 내리는 비
때문일까, 좀처럼 현실감을 가지고 그 문제가 나에게 다가오진 않았다. 나무들은
다 제 자리에 청청하게 서 있고, 시계탑도 보였다. 버스가 정문을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낯설은 게 보였다. 아마 건설 회사의 현장 사무소 같았다.
일자형의 흰 건물에 함석 지붕이 짙고 독한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아아,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신음했다. 나는 평생 그렇게 독하고 추악한 주황색을 본
일이 없다. 더군다나 그 주황색은 비에 젖어 번들대고 있었다.
그 주황색이 내 뇌를 갈고 지나가는 듯한 충격을 나는 내 뇌수에 느끼고
진저리를 쳤다. 나는 그런 충격은 청각의 자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독한 쇳소리의 마찰음을 들었을 때 뇌 속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황색 지붕 너머로 미래의 아파트 단지의
투시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비로소 문리대가 헐리고 속악하고 호사스러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는
현실감이 나에게 왔다. 그 현실감은 고약하고 고통스럽게 왔다. 나는 지금도 그
빗속에 번들대던 주황색 지붕을 생각하면 혐오감으로 진저리가 쳐진다.
그 혐오감은 유서 깊고 자랑스럽던 대학 자리에 호화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감과도 일치하는 혐오감이다.
소도구로 쓰인 결혼 사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었다. 마침 그 날이 내 결혼 기념일날이라 나는 부부
동반한 2박 3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나선 길이었다. 실로
얼마만인지도 모르게 오래간만에 우리는 완행 3등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골에 내리는 비는 도시에 내리는 비와 그 풍취가 전연 다르다. 빗속에
바라보는 봄의 농촌은 싱그럽고 산뜻하고 흥겨워 보였다. 물을 흠뻑 먹은 땅이
검고 부드럽게 보이는 들판으로 도랑물이 흐르는 게 가을 들판 못지 않게
풍요로워 보였다. 문자 그대로 감우로구나 싶었다. 들과 풀과 나무와 내와 배꽃,
복숭아꽃이 달디 달게 목을 축이고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이는 듯했다.
얼마나 좋은 고장인가 이 땅은, 나는 제법 감동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
속이었다. 쉴새없이 장사꾼이 드나들며 연설을 해댄다. 백 원에 자그마치 빗이
다섯 개에 칫솔을 세 개나 껴 주겠다는 장수서부터 바늘장수, 책장수, 사이다,
콜라, 사과, 삶은 계란, 김밥, 호두과자 장수들이 서로 다투어 목청을 돋우고,
물건을 떠맡기고 했다.
나중에는 한푼 보태 달라는 사람까지 찻간에 들어서자마자 유창하게 일장의
연설을 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골병이 들고 회사까지 해고 당해 제 입 한 입
굶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나섰으니 신사 숙녀 여러분의 동정을 바랄 따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개별적으로 승객 한 사람 한사람에게 구걸 시작했다. 차마
거지라고 부를 수 없게 의젓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구걸하는 경우
단정한 옷차림이란 눈에 거슬리면, 거슬렸지 보탬이 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좀 이상한 걸 갖고 다니고 있었다. 꾸벅 절을 하고는 무슨
증명서를 꺼내 보이듯이 그걸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 보이는 거나를 똑똑히 보면 구걸에
응하게 될 것 같아 겁이 나는 것처럼 누구나 그 사람 쪽은 거들떠도 안 보고
차창 밖만 열심히 내다봤다.
나는 그게 뭔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내 앞에 그가 오거든 그게 뭔가
똑똑히 봐 두리라 벼르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뜻밖에도 그건 낡은
결혼사진이었다. 족두리 쓰고 연지 찍고 다소곳이 서 있는 신부 옆에 사모
관대의 사랑이 의젓하게 서 있는 촌스럽고 낡은 구식 결혼 사진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신랑은 지금 구걸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걸 보여 주며 구걸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상해하면서도
어느만큼은 감동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그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고 결혼을 했다. 천지신명께 백 년 해로를 맹세했고
친척 친구들에게 앞날을 축복받으며 착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고, 지금 이
구걸도 그 무겁고 무서운 지아비 노릇이다 하는 생각이 뭉클하니 내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했다.
웬일인지 이 결혼 사진도 구걸 행각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약고 똑똑한
생각은 안 했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베풀기에는 좀 많은 돈을 꺼내서 얼른
그 사람의 주머니에 꾸겨 넣었다. 남편이 알까 봐, 또 딴 승객들이 눈치챌까 봐,
나쁜 짓이라도 하듯이 몰래 재빠르게 그 짓을 하고, 하고 나서도 얼굴을 붉혔다.
아마 그 날이 내 결혼 기념일이어서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의문이 안 풀리는 건 그가 왜 하필 결혼 사진을 꺼내 보이며
구걸할 생각을 했을까 하는 거다. 내가 보기엔 그게 조금도 구걸에 도움을 주는
것 같지가 않았는데 말이다. 어쩌면 결혼의 의미를 남보다 더 잘,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이 아닐까.
비 오는 날 있었던, 사건이랄 것도 없는 몇 가지 얘기를 적어 놓고 보니 문득
서글프다. 빗속에서 같이 받은 우산이 인연으로 싹튼 로맨스가 한 컷쯤
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없는 걸 어찌하랴. 이래
저래 40대의 비 오는 날의 사건은 재미없을 수밖에 없나 보다.
떳떳한 가난뱅이
뭐는 몇십 %가 올랐고, 뭐는 몇십%가 장차 오를 거라는 소식을 거의 매일
들으면서 산다. 몇 %가 아니라 꼭 몇십% 씩이나 말이다 이제 정말 못
살겠다는 상투적인 비명을 지르기도 이젠 정말 싫다. 듣는 쪽에서도 엄살 좀
작작 떨라고, 밤낮 못 살겠다며 여지껏 잘만 살았지 않느냐고 시큰둥하게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백성들의 생활력이 질기다는 게 모멸에
해당하는 일인지 찬탄에 해당하는 일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기다는
것만 믿고 너무 가혹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 같아 뭉클 억울해진다. 더 억울한
건 물가가 오를 때마다 상대적으로 사람값의 하락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가난이 비참한 건 가는 그 자체의 물질적인 궁색을 견디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부의 지나친 편재로 배고파 죽겠는 처지에서 배불러
죽겠다는 이웃을 봐야 하는 괴로움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금전의 다과를 인간을 재는 척도로 삼는 풍조 때문에 가난뱅이는
어디 가나 기죽을 못 펴고 위축돼서 사람이 지닐 최소한의 긍지도 못 지키고
비굴하게 한구석으로 비켜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 봉급 수준과 물가 수준으로 볼 때 우리의 생활이 궁색하다는 건
지극히 정당하고, 잘 산다면 그게 오히려 부당한 거다. 그런데 왜 정당하게 사는
사람이 위축되고 부당하게 사는 사람이 당당한가? 이거 엄청난 비리다. 어차피
비리가 판을 치는 세상인걸 무력한 백성이 새삼 뭘 어쩔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죽은 듯이 비리에 굴종만 할 것이 아니라 한번 과감히 도전해 봄직도 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의 사람값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무능이나 게으름에서 오는 가난이 아닌, 우리가 속한 사회가 가난한 것만큼의
정당한 가난은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여 한점 부끄러움도
없어야겠다. 의연하고 기품 있는 가난뱅이가 돼야겠다.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치부한 사람, 우리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 수준에서 동떨어지게, 엄청나게
잘 사는 사람을 준엄한 질책의 시선으로 지켜 보고, 경멸까지도 사양치
않음으로써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많이 쓰이는 말로 상류층이란 말처럼 듣기에 민망한 말이 없다.
거액의 밀수 보석을 사들인 사람도 상류층, 위장 이민도 상류층--.
이 타락할 대고 타락한 정신이 어째서 우리의 상류층일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대들보건 기둥뿌리건 가리지 않고 갉아서 치부를 하고, 그 부를 보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환물 투기를 일삼아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고, 일신의
안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위기 의식만 예민해져, 보다 전쟁의 위험이 없는
나라로 도피할 궁리나 하는 게 이들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열심히 떳떳하게
사는 교포들의 정신 생활까지 해치는 게 이들이다.
쥐는 영감이 발달돼 난파할 배를 미리 알고 떠나 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쥐새끼만한 영감도 없는 채 처신은 꼭 쥐처럼 약게 하다가 조국을 떠나는 것도
쥐새끼가 난파선 버리듯한다. 그러나 가난하나마 정신이 건강한 백성들은
조국을 난파선의 운명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 고난의 현장에서 피신하지
않고 끝내는 목숨을 걸고 난의 운명을 극복하고야 말 최후의 용기가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난뱅이는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정신적인
상류층'을 자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제 부흥에 안간힘을 쓰면서 우리는 '잘 살아 보자'를 외쳤었다. 이 '잘 살아
보자'가 차츰 '어떡하든 잘 살아 보자'가 되고 종당에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잘 살아 보자'로 돼 버렸다. 물질적인 가치가 정신적인 가치 위에 군림하고
인간은 이제 완전히 물질의 노예로 타락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이 인간의 타락을 구할 새로운 싹이 틀 고장이 있다면,
아직까지는 양심을 물욕에 팔지 않고 살아 온 떳떳한 가난뱅이들의 고장밖에 더
있겠는가.
"전혜린편"
전혜린(1934__1965)
수필가. 평남 순천 출생. 독일 뮌헨대 독문과 수료. 여러 대학의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 역임. 31세로 자살함.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불꽃처럼 살다가 간
지식인이었다.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을 갖고 생을 긍정했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삶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과 일종의 필수적인 비애의 기록으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10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교외 림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뮌헨 하면 그 이후 내 머리에는 회색과 안개로 가득 차게 된 것도 그의
독특한 나쁜 날씨보다도 내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던 그 날 오후의 첫인상과
나의 걷잡을 수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 아니나 생각된다. 트렁크를 들고 비행장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돈을 다 내어 보이고 그 중에서 1마르크만 가져가게 한
일, 힘없이 혼자서 하숙을 찾아 갔던 일--나는 정말로 내가 파리에 있는 말테나
된 듯한 서글픈 마음이었다.
우선 고국에서부터 연락해 놓았던 아스타라는 학교 사무국에 가서 벽에 붙은
벽보를 찾아야 했다. '빈 방 있음'의 광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모두 값이
비쌌다(내 생각보다). 또 학교에서 멀었다. 그리고 뮌헨은 나에게 마치 라비린트
그 자체처럼 보였었고, 학교에서 5분 이상 더 가는 곳에 가서 살 자신은 나에게
없었다.
그 중에서 나는 겨우 '빈 방 있음, 전기 있음, 학교에서 도보로 5분, 월세
50마르크'라는 꼬불꼬불한 연필 글씨로 쓰인 광고 용지를 찾아 냈다. 그 집은
정말로 학교에서 5분쯤 가면 있는 영국 공원이라는 광대한 공원에 임해 있었다.
첫인상이 포의 어셔 가를 연상시켰고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수가 어디
있으랴? 다른 빈 방들은 대개가 '미국인에게 한함'이거나 또 엄청나게 비쌌던
것을...
나는 다시 들어서는 발을 억지로 닫혀진 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60세 가량 된 극단적으로 비만한 흰 단발 머리의 할머니가 나왔다. 키는 작았고
차림새는 누추했다. 나는 '방을 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거나 '방을 빌릴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표정은 의외로 상냥했고 입가에는
구수하다고 형용할 수 있는 미소를 띄어 보였다. '학교 광고를 보셨습니까?'
할머니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악의는 없는
말투였다. '방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네, 네, 어서 들어오세요.'
방, 내 방인 것이다. 나는 그 할머니를 따라서 긴 낭하를 지나갔다. 낭하는
어두웠고 방이 많았고 방마다 사람의 이름이 작게 써 붙여 있었다. 맨끝에서
할머니는 멎어서더니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여기 살던 사람이 이틀 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페르시아
사람이었지요."
열쇠가 돌려지고 문이 열렸다. 나는 주저하면서 할머니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도 마루처럼 어두웠으나 의외로 깨끗했다. 초록빛 도자기로 된 커다란
난로가 한편 구석에 서 있었고, 전기 곤로가 놓인 대와 흰 요와 이불이 덮인
침대가 하나, 그리고 경대와 찬장이 딸린 콤모데가 있었다. 창은 두개가 영국
공원과 반대 되는 포도로 나 있었고 이중창에 이중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하시겠어요?' 할머니가 물었다. '네.' '방세는 한 달분 미리 내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나간 후 나는 덧문을 열고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은 완전히 잿빛 안개로 덮여 있었고 물기가 촉촉히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어제까지나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안 지나가고
여기는 뮌헨에서도 가장 오래 된 지역이고 폭격도 안 맞은 1920년대 그대로의
문명의 이기만을 쓰고 사는 마을인 것 같았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 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 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다섯 시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 등 한 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여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유럽을
그리 원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는 근처의 생활 필수품점에 가서 빵 두개와 마가린 한
통을 샀다. 전기 곤로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빵을 먹었다.
학교의 개강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원래 돌아다니거나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외국서는 더구나 무서웠다. 그러나 낮에 나는 큰
마음을 먹고(사실 도착 이래 식사다운 식사를 못 해서 배도 고팠다.) 바로
근처에 있는 제로제라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았으나 별로 눈에 익은
게 없었다. 단 왜지 커틀릿이라는건 나도 알 것 같아 그걸 시켰다. 그러나
프로일라인(하인)이 가져온 것은 우리 개념의 커틀릿이 아니고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째로 그냥 삶은 것 같았다(실제로 그렇게 요리하는 모양이다.). 나는
힘없이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실 것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의 뜻도 파악 못 하고 그냥 웃어 보였더니 작은 컵에
맥주를 따라서 갖다 주는 것이었다. 난 그냥 잠잠히 앉아 있었다. 말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안고..., 그 때 여러 명의 틴 에이저들이
들어오더니 주크 박스 앞으로 다가가서 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힐끗 나를 보더니 무슨 판을 눌렀다. 그에 이어서 뜻밖에도 일본말
노래가 새어나오는 데는 아연하여 보고 있었더니 일본의 이별의 노래라고 그
중의 하나가 나에게 알려 주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안 모양이었다. 그 때만 해도 뮌헨에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더구나
여자는 구경하려 해도 없었을 때니까 아마 그렇게 짐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역시 웃어 보였을 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서글퍼졌고 덜
혼자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후나 저녁때 그 집을 자주 찾아갔다. 거리도 내 방에서
가까웠고 음식값도 다른 데보다 싼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일라인도
친절했다. 늘 말없이 호의를 보여 주었고 주간지도 내 테이블에 갖다 주곤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음식점이 보통 음식점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합숙소인
것도 알게 되었다. 목요일에는 '시의 밤'이 있고 화요일에는 '화가의 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한편 벽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사진이며 편지며
분필 사인이 토마니 링겔나츠니 캐스트너니 좀마니... 하는 쟁쟁한 작가나
화가나 만화가들의 소행인 것도 점점 알게 되었고 이 집이 한때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제 아이힝가라는 여류 시인의 존재를 그 여자의
특이한 용모와 매력적인 긴 흑발과 함께 알았다.
가을은 깊어만 갔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학우들(오스트리아 여학생이나 프랑스 학생)과 같이
근처의 다방에 가서 크림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는 방법도 배웠다. 주립
도서관도 자기 집 내부처럼 환히 알게 되고 뮌헨 시내의 고서점이란 고서점은
다 환히 알게 되었다. 헌 책방 주인과도 친해지고 이미륵 씨 얘기도 듣게
되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파는 군밤 장수의 군밤을 50페니히쯤 사서 교실에서
먹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몹시 허전했다. 고국에까지 뛰거나 걸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운 심연을 내 마음 속에 열어 놓을 줄은 나도 몰랐었다.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그리워했다.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이 있는
민족의 환영--그들의 비극이 내 속에 담겨져 있고 그들의 대표자로 내가
여기에서 간주되고 있는 그러한 비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해도
좋다. 강의실 내의 교수의 방언과 노령에 의한 발음의 불명료에 그리고 '생활
필수품점' 속에 진열돼 있는 셀로판지로 담긴 이탈리아 쌀에... 어디서나 그
비전은 나를 따랐다.
뮌헨 대학에서 내 하숙에 이르는 레오폴드 통은 거대한 꼿꼿하게 높기만 한
포플러 가로수로 줄지어져 있었다. 그 길은 온갖 빛의 낙엽으로 두껍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의 가을이 아름다웠다. 그 거리에는 작은 어항같이 생긴 '유리
동물원'이 있었다. 유리로 기막히게 정교하게 만든 온갖 작은 짐승들, 도자기
발레리나들...안데르센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날 때마다
5분 이상이나 진열장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갖고 싶고 애무하고 싶은 유리
동물들이었다.
그 가게 뒤에 쓰러져 가는 '노아 노아'라는 집이 있었다. 거기는 다다이스트의
집합소로서 늘 해괴하고도 기상천외인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화가들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떠들며 담론하는 살롱이기도 한 것 같았다. 때로는 에리카
만의 낭독회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제로제보다 더 싼 음식점을 발견했다.
서서 먹는 집이었다. 흰 소시지를 불에 구워서 겨자를 발라 먹는 소시지
집이었다. 거기다가 신 오이 한 개와 리모나데 한 컵을 먹어도 1마르크가 안
되니 싸기도 하려니와 냄새만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맛이 있었다.
먹는 것은 간단히 빨리...그리고 나는 걸어다녔다. 학교에서 내 집까지 사이의
골목 그리고 영국 공원 속...이러한 곳이 내 산보지였다.
어떤 날 나는 백조가 마지막으로 떠 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 지켜 본 일이
있다. 어둑어둑한 박명 속을 흰 덩어리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때때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몹시 외로워 보였다.
나 자신의 심경이 그대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 속을 뒤흔들린 편지를 매장한 곳도 이 호수였고 내 꿈과 동경--몇
년이나 길게 지속되었던--을 던져 넣어 버린 곳도 이 호수 속이었다. 이
호숫가의 가스등 밑에서 나는 안개에 감싸이는 쾌감과 머리를 적시는 눈에 안
보이는 비를 맛보았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귀로에 서곤 했었다. 도자기 난로
속에서 석탄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지켜 보고 있으면 쓸쓸하지 않았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붉은 불의 혓바닥...이러한 것과 함께 있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불길을 지켜 보면서 언제나 어떤 시의 구절을
생각했다.
휴식과 포도주에 넘친 어둠,
슬픈 기타 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방 안의 부드러운 등불로
꿈 속처럼 너는 돌아간다.
공기에서는 서리와 안개와 낙엽 냄새가 섞여서 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공원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11월 중순--아직 한국에서는 가을이지만
여기서는 눈이 큰 송이로 내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난로의 석탄이
타오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눈이 와도 무섭게
왔다. 세원 둔 자동차가 눈에 폭 파묻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한국서 가져온 얇은 천으로 된 학생용 검은 오버를 입고 오돌오돌
떨면서 학교에 다녔다.
점심은 커피 대신 그로크(펄펄 끓인 포도주)와 수프로 했다.
그래도 추웠다.
때로는 눈이 멎고 다시 영원한 뮌헨의 하늘빛인 회색 구름장이 덮이거나
안개비가 촉촉히 내렸다.
나는 두꺼운 색양말을 신고 두꺼운 머릿수건을 쓰고 다시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라고는 없고 나뭇가지가 앙상한 해골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검은 나뭇가장이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변함없는
회색일까? 하고...
아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하나만 있어도 이 하늘이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물음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고 황색 비전을
나는 좇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우울한 회색과 안개비와 백일몽의
연속이었다. 악몽처럼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따라다녔고 절망적인 '고국까지의
거리감'에 나는 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 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
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일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이 나고 그리운 것은 그러나 웬일일까? 뮌헨이 그
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유럽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사치의 바벨탑
--여성의 가장 큰 본질적 약점은 사치의 광적 추구와 같은 생에 대한
비본연성인 것 같다.
'여자는 전체로 보아서 아직도 하인의 신분에 있다. 그 결과 여성은 자기로서
살려고 하지 않고 남성으로부터 이렇다고 정해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선택하도록 된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경제적 특권, 남자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명예, 남자에 의존하는 것에서 얻는 효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애쓰고 있다.'
여성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
언급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여성과 남성
간의 사회적 차이와 대립이 완전히 제거된 곳은 없으며 앞으로도 사회 구조의
전적인 변화가 없는 한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몹시 느린 속도로 향상되어 가는 과정에 있고 아직도
우리는 평균적으로 보아서 여자가 사회에 한 발을 디디고 서기가 마치 미국에서
한 흑인이 그렇게 하려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힘드는 처지에 있다. 그러한
남성과 여성 간의 커다란 차이를 미리 고려하면서만 우리는 여성의 제문제 또는
약점을 파고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여성의 가장 본질적 약점으로 나는 생 전반에 대한 비본연적 태도를 들고
싶다.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마다 의식하고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 자기를
투기하고 초월하면서 사는 것이 본연적인 생활 태도라면 태반의 여성의 생활은
그와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보다 큰, 보다 진실한 문제--유는--에 빠져
있고 그 곳에서 아무런 타격도 전율도 반응 없이 흘러가듯이 사는 생활 태도,
말하자면 비진정하고 불성실한 생활 태도가 대부분 여자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무서운 조건하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유일의
일은 우리의 삶을 규명하는 것일 것이며 적어도 그러한 근본적인 생활 감정에
지배된 생활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의 진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회피하고 자그마한 일들, 물진,
사치스런 생활, 남자에게 의존 또는 기계와 같은 나날의 틀 속에 안면하는 의식,
이러한 것들 속에 자기를 소외해 버리는 생활은 허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과 사에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용기와 신경력을
요한다. 특히 이 사회의 구조와 한국적 풍토 속에서는 너무나 신경이 긴장되는
작업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전생의 의의가 무로 화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우리 삶에의 죄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좀더 응시할 수 있을 것, 자기를 견딜 수 있을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 비극인 우리의 생의 소상을 긴박한, 팽팽하게 차 있는 참된
순간으로 지속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가 존재에서 외면하고 사실의 세계로만 눈을 향하는 데에 여성에 대한
사회의 비난의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자기 과제를 느끼지 못하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따르고 따라서 오락의 필요가 생긴다.
최신 유행의 여성들에게 갖는 매력은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물건을 사는
것--특히 몸에 붙일--은 어느 나라 여성을 막론하고 남자들에게 있어서 바와
필적할 만한 상쾌한 오락인 까닭이다.
가장 유행이고 가장 비싼 물건을 입거나 신을 여자의 얼굴에는 반드시 어떤
빛나는 생기가 떠 있다. 그 순간은 그 여자는 살고 있는 까닭에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사회 내의 일이나 지위나 가치의 인정을 완전히 보상해 주어서 하고 있다.
사치스러운 복장에 대한 여성의 판타직은 억눌려진 야심 사회 내에서 해당하고
싶은 본질적 욕망과, 자기는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어떤 여자든지 반드시 믿고
있는 오신, 또 누구나 다소 가지고 있는 나르시즘(자기 연애) 등의 혼합물인
것이다.
정말로 수많은 여인은 이 광신의 추구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고
있다. 월급의 전액을 차지하는 값의 지갑을 태연히 들고 다니고 연봉에
해당되는 값의 외투도 서슴지 않고 해 입는다.
현실에서는 발견하거나 인정되지 않는 자아의 가치를 이러한 방법으로나마
가상적으로라도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외투도 신도 곧 닳아 버리는 물건이고 유행도 바뀐다. 즉 가상적 자아의
'바벨탑'은 너무나 빨리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면 또 새로운 투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여성의 물질에 대한 애착은 웃거나 비난하기에는
너무나 어둡고 심각한 근원이 여성의 내재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본질적 존재로 여성을 만든 것은 여성의 지능 계수도 생리도
아니고, 다만 사회의 상황인 것으로 사회와 가정은 여성을 가능한 한
비본질적으로 교육하기에 전력을 다해 왔다.
여성의 자주성을 찾으려는 가장 조그만 움직임이나 생각까지도 조소되고
비난받아 왔고 다만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서 공동하게 생활을 건설해 가고
둘이 다 자아의 생장을 지속시켜 가는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결혼을 사회는
여자의 궁극적인 숙명, 여자의 자아 발전의 무덤으로서 또 어떤 절대적인
영광스러운 예속으로서 가르쳐 주어 왔다.
말하자면 비진정하면 할수록 여자다운 여자일 수 있다. 그러한 전통에 닦인
여자도 자연히 그러한 사고 방식을 갖게 되었고 그것에서 이익을 끝내어 줄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즉 자기의 삶 전부를 실존을 스스로 순간마다 결단하고 세계로 향해서
투기하는 생활 대신에 한 남성에게 자신을 꽉 맡겨 버리고 자기는 더 이상
사고할 필요 없이 사소하고 무상하게 흘러가는 일상성과 사실성의 세계에
파묻히는 편이 얼마나 편하고 또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여자도 그것에 완전히 만족하거나 행복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생활에는 일순 일순의 팽팽한 충일감과 초월의 느낌이 없을
것이다. 어느 주부든지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자기를 부조리하게 느낄 것이다.
쌀 씻고 빨래하고 옷 꿰매고, 나날의 무서우리만큼 단조한 반복 속에서 그
여자의 인식은 엷게나마 눈을 뜰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활인가 하고, 그럴 때 우리는 그 의식의 각성을 소중히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파고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것은 나의 생활이 아닌
것이다. 누구냐의 생활에 불과한 것이지 자기를 사물이나 타자의 속에 소외 해
버린 일반적인 아무나의 삶이지 그것은 이 일회적인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생이 진정한 것이 아니었고 불성실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다 한 발자국 나와 가까워진다. 자아에 대해서 비로소
눈을 뜬 느낌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아에 자기의 감정과 이성과 신경에게
충실한 것, 그것 이외에 우리가 자아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다. 그것만이 사치,
허위, 소극성, 아첨, 비굴, 수다 등등의 여성에 붙여진 비난의 제 레테르를 벗는
길로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다.
이 모든 레테르는 남성들의 사회에서 남성에 의해서 붙여진 레테르이다.
그러나 사회 상황의 변화에 의해서 남녀가 정말로 동등한 입장이 되고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향해서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 속에 자기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여성은 개인적으로라도 무서운 고독과 절망과 싸우면서 자아를
좇는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으며 현재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숨은 곳에
많으리라고 확신한다.
지엽적인 여성의 결점은 모두 이러한 비실존적 생활 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우리는 여성의 결점을 열거하는 것보다도 우선 우리의 존재의 문제를 좀더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비의존적으로 투기가 가능해진다면, 아니 한 마디로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남성의 그것과 동등해진다면 여성의 근본 결함인 비진정, 불성실한 생활
태도는 자연 소멸하고 여성도 보다 높은, 보다 참된 과제를 자기의 생활 과제로
삼게 될 것이다.
독일로 가는 길
--그 당시 언제나 내 입에는 '출발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시 구절이 떠나질 않았다.
왜 하필 독일에 가게 되고 또 독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는가? 라고 간혹
질문받을 때마다 나는 한 마디로 대답을 못 한다.
그리고 '우연이지요'라고 대답할 때가 대부분의 경우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나의 유학의 동기는 막연했고 또 우연의 별의 지배 밑에
놓여 있었던 것 같기만 하다.
나는 국민 학교 때부터 대학까지를 관립 학교만을 나오았었고 다녔었다. 또
점수따기와 책상버러지와 독서광의 부류에 속해 왔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로를
밟은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온갖 관료적, 점수주의적 암기식 교육에 대해서
맹렬한 반발과 자유로운 학문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품고 있었다.
부산 영도의 피난 가교사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와 또
커트라인 높은 학교에 대한 우등생다운 유치한 무의식의 흥미로 법대에
입학하고 난 후부터 나는 몹시도 혼란한 정신상태 속에 살고 있었다.
배우는 학과마다 'du sollst'였고 로마 제국의 법언과 양피지 냄새가 났었다.
조금도 리얼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가장 리얼한 시스템인 정치 체계 위에
세워진 학문이 가장 공소하게 나에게는 느껴졌었다.
그것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유일의 것, 궁극적인 것이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유일의 것은 그 때의 나에게는 정신 또는 철학이라고 느껴졌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부터인지 철학을 공부하려 마음먹게 되었고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외국에 간다는 것은 언젠가의 꿈으로 돌려져 있었다.
대학 3학년, 내가 스물한 살 때였다. 나의 둘도 없는, 그 때 미국에 가 있던
주혜라는 친구가 독일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고 편지를 했었다. 주혜는
그의 아버지의 친구인 독일인을 서신을 통해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다음은
수없는 서류 작성과 독일어 공부, 유학생 시험... 그리고는 한국이 세계에서도
그 복잡성과 번거로움에 첫째 간다는 출국 수속으로 바삐 돌아다녔다.
언제나 내 입에는 '출발하기 위해서 출발하는 것이다'라는 누군가 시인의 시
구절이 떠나지 않았고 갑자기 지평선이 무한대로까지 넓어진 느낌이 났었다. 그
때의 그 신선한 흥미와 이유 없는 마음의 약동을 아마 나는 일생 다시는 가져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어디고 가게 되더라도.
맏딸로서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늘 양친에만 매달려 온, 말하자면
어리광둥이인 나에게 출발의 날은 어제까지의 분주와 약동과 흥미와는 딴판으로
암담했다.
갑자기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고 절대로 내 집을 떠날 수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보다도 무서웠다.
그 때까지 국내에서도 피난 때의 왕복 이외에는 여행이라고는 해 본 일이
없는 나였고 내 집 이외에는 친척집에서도 자 본 일이 없는 나였다. 미칠 듯이
울었던 생각이 아직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비행기가 뮌헨에 닿았을 때도 그 암담은 또 한 번 내 마음을 덮었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고, 그 때만 해도 독일에 유학가는 한국인이
거의 없을 때였다. 더구나 여자로는 아무도 마중나올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독일어도 자신이 전연 없었다. 무슨 차를 타도 그것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955년 가을이었다.
덧붙여 한 마디--내가 살았던 슈바빙 구의 분위기가 가르쳐 준 거. 언제나
아무도 안 사는 그림을 그리고 아무도 안 읽을 시를 쓰면서 굶다시피 살면서도
오만과 긍지를 안 버리는, 이 구역에 사는 모두가 가난했고 대개가 외국이나 타
지방에서 모여든 화가나 학생이었던 그들한테서 나는 자유로운 생활이
무엇인지를 배운 것 같다.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생활, 따라서 온갖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타인의 이목에 구애되지 않는
생활이 그것인 것이다.
또 나는 편견 없이 산다는 것인 무엇인가를 본 것 같다. 정신만이 결국
문제되는 유일의 것이라는 것도. 국적도 피부색도 아무것도 거기에는 문제가
되고 있지 않았다. 영혼의 교통이 가능하여 정신이 일치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벗이냐 그렇지 않느냐만이 문제였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문제되지 않았다.
슈바빙 구역은 가장 정신이 자유로운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 곳에서의 몇 가지 일들이 생각난다. 내가 가장 깊이 연구했고 전 작품과
생애를 공부해야 했던 그릴파르처의 세미나에서 "사포와 탓소의 비교 연구"라는
테마를 받고 도서관에서 그릴파르처와 사포에 관한 책은 모조리 빌려서 겨우
타이프지 열 장의 레포트를 써 낸 생가, 늘 파우스트를 강의하는 보르헤르트
교수가 너무 노령이고 너무 사투리가 심하고 목소리가 작아서 언제나 속상했던
일, 또 라이스트 교수나 데쿠 교수나, 가장 많은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모으고
있던 기독교적 실존에 관한 강의를 하는 구아르디니 교수, 강의 때 라틴어와
희랍어를 너무 많이 써서 나는 받아쓰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독일 학생들이
모두 원어로 척척 받아쓰는 것을 보고 통분했던 일.
추억은 괴로웠던 일로만 달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몽환적 시월
--10월이 되면 레스토랑이나 다방에서 '데운 맥주'를 요구한다.
뮌헨의 10월이 그립다.
거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추운 가을은 처음 보았느니 한국의 가을
하늘을 못 본 사람이 가엾느니 하면서 새파란 하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석류, 추석 보름달,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 등의 이미지와 불가분인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했었다. 끔찍한 김장 시즌조차가 못 견디는 향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요즘 웬일인지 자꾸 뮌헨의 가을이 생각난다.
뮌헨의 10월은 벌써 본격적인 털외투가 필요해지는 계절이다. 한달 중 20일은
비가 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짙은 회색 구름과 언제나 공기를 무겁게 적시고
있는 두꺼운 안개, 안개비, 보슬비 등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뮌헨의
10월이다.
벽이 두껍고 방 안에서 이중창에 세 겹 커튼을 두르고 난로를 때고 앉으면
독서의 계절이라는 슬로건이 없어도 누구나가 마치 회색 안개에 눌린 듯이
생각과 책읽기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살던 슈바빙이라는 뮌헨의 한 구는 일부러 옛날 것을 그대로 놔 두는
파리식인 예술가 촌이었다.
거기서만은 형광등 대신 여전히 가스등이 가로등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저녁때의 짙은 안개 속에 가물가물 어렴풋이 보이는 가스등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자전거를 탄 할아버지가 긴 막대기로 유유히 한 등 한 등
켜 가는 박모의 광경은 이런 계절에는 더욱 몽환적으로 동요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10월이 되면 레스토랑이나 다방에서 손님들이 '데운 맥주'를 요구하는 수가
늘게 된다.
그러나 추위를 덜기 위해서 그보다 흔히들 마시는 것은 물과 설탕을 끓이고
럼주를 섞은 그로크라는 음료와 또 붉은 포도주에 계피, 사향, 레몬, 설탕 등을
넣고 끓인 '굴류와인'이라는 음료다.
둘 다 북극다운 침침하고 검소한, 음악도 없는 뮌헨의 학생 다방에서 마실 때
무척 맛있게, 또 추위에 대해서 유효하게 생각된 음료지만 한국에서 마시면
어떨는지? 아직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했다.
아마 그 우울한 안개비의 포장과 뜨거운 사기 난로, 구운 소시지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날라다 주는 금발의 프로일라인의 친절한 미소 없이는
맛없는 음료일지도 모르겠다.
"이어령편"
이어령(1934__)
평론가. 수필가.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문리대 및 대학원 졸업. 여러 신문의
논설 위원과 이화 여대 교수, 문화부 장관 역임.
사변 이후의 비평계에 이론적 기수로 등장하여 김동리와 '실존성의 논쟁'을,
조연현과 '전통론의 논쟁'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그 후 칼럼니스트로
에세이스트로 맹렬히 활약하면서 신화, 전설, 풍속 기타 다방면의 재료를 토대로
한국인의 사고 방식을 해부하였다. 장편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30만부 매진의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지게
지게는 우리 나라 고유의 것이다. 우리 겨레의 정이 배고 피가 도는
물건이다. 그것에는 운반 수단 이상의 의미가 깃들여 있다.
우선 지게의 모양을 보라. 그것을 져 온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마음씨처럼 순박하기만 하다. 쇠못 하나 박은 흔적이 없다. 솜씨를 부린 데도
없다. 애초부터 지게 모양의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대강 다듬고, 몇 군데 구멍을
뚫었을 뿐이다. 나는 이 순박을 사랑한다.
지게에는 노래가 있다. 지게꾼들은 작대기로 지겟다리를 치며 그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외로운 숲길, 한적한 논두렁에서 그것은 다시 없는 위안이다.
악보를 보며 배운 노래가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득한 할아버지 때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노랫가락이다.
지게에는 평화로운 휴식이 있다. 나무 그늘에 지게를 뉘어 놓고 그 위에 잠든
농부의 얼굴들. 안락 의자에 잠든 어느 신사의 얼굴이 이보다 평화로우랴!
지게에는 또 고운 마음이 있다. 나무꾼의 지게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여름이면 산딸기가, 가을이면 들국화와 단풍이 꽂힌다. 무엇을 생각하며 꽃을,
열매를, 잎을 꽂을 것일까?...그것은 우리의 멋이요 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지게를 볼 때마다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먼저 한숨이 흘러나오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게는 어깨에 멜빵을 걸어 지는 1인용 운반 수단이다. 어깨에 걸어 지기
때문에 지게는 괴로운 것이다. 짐의 무게를 온통 몸으로 지탱해야 한다. 물보다
어렵다는 구절양장을, 짓누르는 짐을 지고 올라가 보라, 내려가 보라. 숨이
차다. 무릎 마디가 아프다. 뿐만 아니라 지게는 한 사람의 몸으로 지탱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짐을 운반할 수가 없다. 그래서 괴로운 걸음을 두 번, 세 번,
아니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야 한다. 수레를 이용했던들 그런 괴로움은 쉽게 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어느 때, 그 어느 세상에서도 운반 수단은 필요했으리라.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들은 하필 이 괴로운 지게를 만들었던 것일까? 하기는 수레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너무 적었다. 아니, 많았다 하더라도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수레가 다닐 만큼 넓은 길이 없었으니까.
우리 할아버지들은 힘들여서 넓은 길을 닦지 않았다. 다니다 보니 저절로
생겨난 그 비탈길, 그 오솔길, 그 논두렁길... 그러나, 날라야 할 짐은 많았다.
지게는 어디나 갈 수 있다. 사람이 갈 만한 길이면 어디나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지게이리라.
왜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히려 하지 않았을까? 외 굴이라도 뚫으려
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게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나'를
위하여 환경을 개선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에 '나'를 맞추려 했던 데서 지게가
생겨난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게의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지게를 사랑한다. 그러나, 지게를 벗어 던질 수 있는 넓고 곧은 길을
더욱 사랑한다. 시원스럽게 뚫린 길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준다.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그리고 나라에서 나라로 길이 하나 생길
때마다 우리의 삶도 그만큼 넓어진다.
길을 닦아야 한다. 그래야 천 년 동안이나 져 온 그 괴로운 지게에서 벗어나,
새롭고 넓은 세계를 향해 우리는 마음껏 달려갈 수가 있는 것이다.
네 잎의 클로버
현대인에게 있어 행복은 잃어버린 숙제장이다. 누구나 이제는 행복이란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하나의 장식 문자가 되어 버렸다.
사기 그릇 뚜껑이나 아이들 복건이나 시골 아이들의 금박 댕기, 그리고
돗자리와 베갯모와 주머니와 방석... 그런 것들 위에 어쩌다가 수놓여진 복자를
보면 이미 사지가 되어 버린 옛날 금석문을 대하는 느낌이다. 옥편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글자 같다.
실상 철이 든다는 말과 행복이란 말은 역비례한다. 행복을 장식품처럼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어른이라고 불러
준다.
이웃집 개 이름만 하더라도 해피이다. 행복은 그렇게 전락하고 만 것 같다.
책상 머리에 불이 켜지는 그런 시각에 나는 이따금, 이웃집에서 그 개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해피--"
"해피--"
"해피--"
어둠의 조수가 잔잔하게 밀려오는 골목길을 향해서 기침을 하듯 혹은 각혈을
하듯 이웃집의 미망인은 개를 부른다. 여운도 없이 번져나가는 목소리다.
나에게는 그것이 처량하면서도 모질게만 들린다.
개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아직도 체념하지 못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어둠을
향해 고함치고 있는 소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혹은 좌초된 깨진 선박 위에서
치맛자락을 찢어 흔들고 구원을 청하는 한 여인의 광경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녀는 구원을 청하고 있다. 시꺼먼 파도가 밀려오는 막막한 바다 가운데서
찢어진 치맛자락을 기폭처럼 내흔들고 있다.
더구나 그 개의 이름 '해피'는 '해피니스(행복)'의 형용사이다. 형용사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에는 반드시 수식해야 할 실체가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해피의 부름 소리는 수식해야 할 실체를 찾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축축한 저녁
공기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한--'
'행복한--'
'행복한'
그 다음 올 말은 실종된 채 영원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런 영상들은
내 상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미망인은 치맛자락 같은 것을
찢어 휘두르지는 않는다. 밀려오는 검은 파도도 없다. 다만 여인의 손에는
쭈그러진 양은 그릇이 하나 들려져 있을 뿐이다. 그 속에 생선 가시를 담아
가지고, 개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 동안, 아주 잠시 동안 그녀는 어둠을 지켜
보고 어 있는 것뿐이다. 더구나 그 미망인은 16밀리 흑백 영화나 무슨 연재
소설이나 혹은 유랑 악극단에 등장하는 파란 많은 미망인, 젊고 아름다운
극적인 그런 미망인이 아니다.
사람은 평범할수록 현실적으로 보인다. 결혼할 때 가지고 온 혼수가 이제는
걸레가 된 것처럼, 그녀에겐 지금 생활에 대한 기대나 소망도 또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무거운 짐을 져 나르는 사람의 어깨에는 굳은 못이 박여 단단한
근육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그 굳은 살결은 아픔을 견뎌 낸다. 고된 나날은
보드랍던 그녀의 마음에도 감각이 통하지 않는 굳은 못을 박아 놓았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생각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일 것이다.
그러나 일몰의 시각이면 숲 속의 맹수들도 헤슬피 우는 것이다. 낮과 밤이
옮겨 가는 그 경계선에는, 노동과 휴식이 엇갈리는 그 경계선에는 깊은 공백의
단애가 있다. 누구나 때때로 이 단에 속에 떨어지면 일상적인 평원을 회의하게
된다. 그 미망인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부엌문을 열었을
때 그리고 개를 부르며 잠시 어둠을 지켜 보고 있을 때 분명히 그녀는 무엇인가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을 들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날 그 남편이
돌아오던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을...
자기는 지금 개가 아니라 분명히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때부터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고 독백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그 때'라는 것이 있다.
다른 것은 다 시골의 간이역처럼 기억도 없이 지나쳐 버리고, 언제든 변하지
않는 '그 때'가 말뚝간이 박혀 있다. '그 때보다...''구 때처럼...''그 때와 같이...'
그렇게 마음 속으로 온갖 생애의 내용과 견주어서 말할 수 있는 '불변의
시간'이란 게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미망인이 '해피'라고 부를 때 돌아오는 것은 그 때의
행복이 아니라 한 마리의 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피'는 지쳐 있다. 온종일 쓰레기통을 뒤지다가--하수구 속에서 죽은 쥐를
뜯다가 해피는 배를 척 늘어뜨리고 그렇게 지쳐서 돌아오는 것이다. 눈은 언제
보아도 진벅거리고 잔등이는 멀겋게 헐어서 털이 빠져 있다. 병든 개--수척하고
게으르고 눈치만을 살피는 돌림병을 앓고 있는 늙어 빠진 개--이것이
'해피'이다.
미망인의 해피는 그런 꼴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로 저녁놀이 번져 가는 엘리엇 씨의 그 일몰 시각에 해피는
쩔뚝거리면서 온다. 한 토막의 생선 가시와 먹다 버린 밥 찌꺼기를 찾아 해피는
쩔뚝거리며 온다.
우리들의 행복도 그러한 꼴을 하고 쓰레기통과 질퍽한 하수구와 연탄재가
깔려 있는 음산한 골목길로 해서 문득 우리 곁으로 온다. 출타한 여인이 불의의
시각에 비단옷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문턱 앞에 와 앉듯 그렇게 돌아오는
행복이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에 꿈꾸던 행복의
이미저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푸른 언덕길, 이슬 속에서 숱하게 빛나던
클로버의 잎사귀들이다.
누나는 그 때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잎사귀가 세 개밖엔 없잖아...그런데 지금 우린 네 개짜리
클로버를 찾는 거야! 저 흔해 빠진 세 잎 클로버들 사이에서 그것은 몰래 몰래
숨어 있거든...그래서 행복하게 될 사람만이 숨어 있는 그 네 잎의 클로버를
찾아 낼 수 있다는 거지...이 길섶에도 지금 그것들은 숨어 있을 거지만 보통
사람 눈에는 뜨이지 않는 거야. 남들이 뜯어 가기 전에 우리는 빨리 그 숨어
있는 행복의 잎새를 찾아 내야만 된단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풀숲을 헤치면서 정신없이 네 이파리의 클로버를 찾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던가 보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모두가 흔히
빠진 세 잎의 클로버뿐이었다. 아주 기진해서 머리를 들었을 때, 하늘에는 온통
하얀 클로버 잎들의 환영이 둥둥 떠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거기에도 네
잎짜리는 보이지 않았다. 전나무 끝에서는 솨솨 바람 소리가 울렸다. 광산으로
뚫린 산길을 따라 파란 클로버들은 한없이 뻗쳐 있다. 흰 꽃도 피어 있었다.
누나도 나처럼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풀숲만을 뒤지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 클로버를 찾는 거야? 누나, 나는 이제 멀미가 났다.
해가 넘어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있지도 않는 네 잎짜리 클로버를
찾는 거야?"
누나는 풀어진 단추를 잠가 주면서 어른처럼 나를 달래는 것이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행복하게 되려고 애쓰고 있는 거야. 일순이는
말이다... 누나 친구말야...일순이는 책 갈피 속에 네 잎짜리의 클로버를 잔뜩
넣고 다닌단다. 벌써 열 개가 넘어... 이제 두고 보려무나, 일순네는 가난해도 그
애는 다음에 부자가 될 꺼야. 공주처럼 말이다. 우리도 져서는 안 돼. 누가 먼저
따나 나와 경주를 해야 돼. 분명히 네 잎사귀 클로버는 어디엔가 숨어
있으니까..."
나는 빨리 클로버를 따고 싶었다. 그래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나보다 그것을 일찍 따서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이러다가 해가
기울면 더 이상 풀숲을 헤치지는 못할 것이다.
누나는 먼 데까지 갔다. 비탈진 둔덕에 엎드려서 풀 냄새를 맡듯 머리를
풀숲에 박고 엎드려 있었다. 아직도 행복의 클로버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 때 문득 나는 전나무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선교사의 붉은 양옥집 유리창을
보았다. 저녁 햇살을 받고 보석처럼 그것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이
세상에 네 잎 달린 클로버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없다면--없다면
만들 수밖에 없다. 누나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보지는 못 할 것이다.
가짜라도 네 이파리의 클로버를 만들어야 한다. 클로버의 잎사귀 하나를 줄기째
찢어 내서 세 잎 달린 클로버의 줄기에 갖다 붙였다. 아주 그럴 듯하게 침을
발라서...숨을 죽이고 몰래 숨어서 행복의 모조품을 만들어 낸 셈이다.
창조와 속임수는 피가 같은 쌍생아이다. 창조나 속임수나 그것은 다 같이
숨어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약간의 수줍음과 오만이 서로
미묘한 갈등을 이룬다는 점에 있어서도 그것은 아주 유사한 것이다.
다만 창조는, 예술과 같은 그런 창조는 신에 대한 속임수이지만 우리가
단순히 '속임수'라고 하는 것은 노름판에서 도박사들이 트럼프 장을 속이는
것처럼 다만 인간의 눈을 속이는 데에 불과하다. 그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보상 없는 모조품'을 만들어 낸다는 면에서 도박사나 가짜 보석
상인과 구별될 따름이다.
어쨌든 나는 그 날 애매하게 행복을 '속여서 창조'했다. 속임수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창조이기도 했다. 네 잎사귀 클로버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낸 것이니까.
딱하게도 누나는 속아 넘어갔다. 너무 지쳐 있던 탓이었을까. 놀랍고 부러운
표정을 하고 누나는 내 손끝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클로버의 이파리는 세어
보는 것이었다.
"하나...둘...셋...넷...그...그래, 그래. 정말 이파리가 네 개가 있구나...네가
이겼다. 나보다 빨리 찾아 냈으니까. 그런데 대체 어디서 그것을 땄니?"
애초에는 장난이었지만 누나가 속고 있다는 것을 알자 내 태도는 달라지고
말았다. 무엇을 훔친 것처럼 가슴이 두근댔다. 속아 넘어 가게 한 것이
기뻐서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남을 속였다는 가책 때문이었을까. 남이 완전히
믿어만 준다면, 남을 끝내 속일 수만 있다면 이것은 진짜 네 잎의 클로버와
다를 것이 없다. 나는 다시 보다 완벽하고 멋진 모조품들을 만들어 냈다.
속임수도 창조도, 기도도 그것은 다 같이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자리를 택한다.
착한 일도 악한 일도 그 산실은 남이 보지 않는 어두운 밀실에서 생겨난다.
몰래 뒤돌아 앉아서 그렇게 나는 행복의 클로버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누나는 나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말았다. 마지막엔
잎사귀들을 확인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핼쑥했던 것을 보면 누나는
몹시 초조했던 모양이다. 그 때까지 끝내 하나도 따지 못했던 것이다.
전나무 가지 사이에서 누렇게 빛나던 선교사 집 양옥의 유리창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야 할 시간인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누나는 울먹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나보다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너는 세 개씩이나 가지고 있으니까 그 중에서
하나만 자기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누나네 반 아이들은 모두 네 잎사귀
클로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개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자기
혼자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숙제도 하지 않고 깜깜할 때까지 네
잎 클로버를 따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졸라서 집으로 가는 것이니 한
개만 달라고 했다. 내가 싫다고 하니까 누나는 꿔 달라고까지 했다. 언젠가
재수 좋은 날 자기도 틀림없이 한 개쯤은 네 잎 클로버를 딸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소중하게 책 갈피 속에 넣어 두었다가 돌려 줄 터이니 그 때까지만 꿔
달라는 것이었다.
누나는 울고 있었다. 분해서 울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짜였다고,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는 가짜 네 잎사귀의 클로버였다고...나는 그렇게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겉으로는 완강히 거절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내가 딴 그 클로버가 진짜였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를 일이다. 그랬더라면 나는 그 때 모든 것을 누나에게
주었을 것이다.
왜 나는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가? 누나가 너무도 모조 클로버를
진짜라고 믿어 주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누나는 나를 원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절대로 행복하게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슬퍼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누나는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다.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던 모조의 행복, 모조의 클로버.
누나는 전쟁 때 남편을 잃었다. 젊은 나이로 가난하게 그리고 외롭게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쩌다 지금도 내 집에 들리면 그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들여왔구나. 어딧제니? ...너는 어려서 네 잎 클로버를 잘 찾아
내더니만... 정말 그래서 잘 사는가 보구나. 그러고서도 욕심은 또 얼마나
대단했니... 글쎄 한 개만 달래는데도 끝내 그 클로버를 움켜쥐고 보여 주지도
않았지... 정말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남들은 누구나 다 찾아 내는 그 네 잎
클로버를 나만 한 개도 찾아 내질 못했으니 말이다. 언제나 뒤늦었어. 남들이
뒤지고 간 뒷자리만 쫓아다녔었어. 그래서 지금도 이렇지 않니..."
나는 말하고 싶었다.
위로를 해 주기보다도 진실을 말해 주고 싶었다.
"누님, 이게 어디 행복인가요. 가짜지요. 전부 가짜지요. 그 때 내가 땄다는
클로버도 가짜였어요. 이 피아노도, 번쩍거리는 자개 장롱도, 서재의 이 자개
화병과 그 꽃까지도 모두가 행복의 모조품입니다. 행복의 모조품...모조품은
남이 속아 줄 때만이 진짜처럼 행세할 뿐입니다. 누님,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모조품의 비극입니다. 이것들은 남에게 자신을 행복한 체
보이려고 꾸며 낸 속임수들이지요. 남들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 주면 자기가
행복한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누님, 왜 사람들은 큰 대문을
세우고 싶어하는지를 아십니까? 페르시아의 왕처럼 왜 사람들은 자기가 다
소유할 수도 없는 많은 방을 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는 억지로라도 웃는 법입니다. 남들한테 그렇게 보이고 싶은
거예요. 모조품인 줄 알면서도 남에게 들키지 않으면 진짜와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지요. 제 스스로 제 행복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때의 클로버는 누님! 가짜였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누나는 내 이야기를 곧이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자기 행복을 또 나누어 달라고 할까 봐서 공연히 변명을 늘어 놓는
것이라고 오해할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행복의 모조품으로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사실
행복을 느끼는 순간 벌써 우리는 행복 그 밖으로 나가게 된다. 설령 진짜
행복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과거형일 경우, 또는 미래형일 경우다.
지금 당장 자기가 행복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행복은 '내'가
아니라 '나의 대상'이다. 그것은 '앞에' 혹은 '뒤에'있다.
나는 단 하나 행복과 같이 있는 사람, 행복과 손잡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시골의 기독교인이었다. 새벽마다 설화산 둔덕에 있는 황새 바위에 올라
천주께 기도를 드렸다. 예수교를 믿는 사람인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산
부처'라고들 했다. 천한 농부의 자식이었지만 얼굴에는 온화한 희열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늘 아이들과 하께 놀았다. 나는 몇 번인가 그의 등에
업혔던 기억이 있다. 그의 입에서 언제나 샘물처럼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내가 고향에 들렀을 때는 이미 그는 천치의 불구자가
되어 있었다. 공산군이 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그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로 모진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장난으로 시작된 고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말하면 풀어 준다고 했는데
끝내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다가 내리치는 몽둥이에 머리와 중추
신경을 다쳤던 것 같다. 기억 상실증에 걸려 버렸고 전신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이 지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천주와 함께 살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들은 그에게서 신을 빼앗아 갔던가?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의 양지 바른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세월을 보낸다고 했다.
이제는 청년이 아니라 40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는 젖먹이 아이처럼
말을 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게 되고 가끔 또 무슨 생각이 나면 벙실거리며
웃는다는 것이다.
내가 그 집을 찾아갔을 때에도 그는 햇볕이 드는 뜰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마치 아이들이 뒤를 보는 것 같은 자세를 하고
눈은 어딘가 먼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리를 잡힌 베짱이가 방아를 찧듯
머리를 끝없이 끄덕이고 있었다.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앉아 있던 자리에 그늘이 지자
짐승처럼 두어 발자국 햇볕이 드는 곳으로 옮겨 앉았다.
그는 온종일 소리 하나 지르지 않고 이렇게 해바라기처럼 햇볕을 따라
옮겨다니는 것이다. 그는 알고 있을까? 지금 그의 아내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를. 그렇게 효성을 바쳤었던 그의 부모가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것인가. 또 그는 알고 있을까, 천주가 있다는
것을...아니, 아니, 저 성서의 말을, 마태 복음 제 5장 5절에 적힌 예수의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짐승처럼 졸고 있는 이 시골의 기독교도 앞에서 나는 행복을 정의한 성서의
구절을 외어 보았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음이 청결한 자는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렇다. 그는 의에 주리고 또한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행복한가? 과연 천국이 그의 곁에 있는 것일까? 지금 저 희끄무레한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텅 빈 하늘인가? 그는 가난하며
애통하며 목마르다 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조차도 지금 느낄 수가 없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무서운 고독과 절망과 억울한 그 핍박에 대해서도 아무 원한이 없는
것이다. 백치는 왜 웃는가. 모멸과 고통 속에서도 백치는 어째서 웃는가. 백치는
행복과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 그러한 행복을 누가 원할 것인가. 물론 그것은 정반대로
만들어진 행복의 모조품이다. 사람들은 불구가 된 그 무명의 기독교인이
불행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가 비참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기가 불행을 의식하지 않는 한 그는 불행하지 않다. 남이 행복하다고 믿어
주는 한,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과는 정반대로...
네 잎사귀 클로버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찾아 내려고 한다. 행복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가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행복은 순수한
주관 속에서도 살지 않으며 따라서 객관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속되어서도 안 된다.
마테를링크는 아무래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 같다. 행복의 궁전에서도, 미래의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파랑새를 자기 집 울타리 새장 속에서 찾아
냈다는 그 이야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비참해졌던가?
'여러분, 그 새를 찾은 사람은 우리에게 돌려 주셔요.'
하고 치루치루 소년이 소리치는 데서 "파랑새"의 막은 내린다. 하지만 관객들은
아무리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어도 막이 다시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 새를 찾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파랑새"의 연극은 다시 계속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치루치루에게 돌려 줄 새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마테를링크는
'파랑새란 먼 데 있지 않고 바로 가까운 자기 집 울타리 안에 있다'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근시안적으로 행복을 찾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치루치루와 미치루처럼 긴 환상의 여로를 더듬지 않고서도 개와
고양이와 설탕, 또 빵의 요정 같은 것을 데리고 가지 않더라도 마법의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초록빛깔의 모자를 쓰지 않고서도 손쉽게 행복은 우리
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행복'이란 말은 '모험'의 뜻을 상실하고 '동경'의 뜻을 상실했고
'영원'의 뜻을 상실했다. 사람들은 가까운 곳의 행복만 찾아다니다가 행복이란
말까지 상실해 버린 것 같다. 보잘것없는 녹슨 새장에 모조품 파랑새를 사육해
가면서 자위하고 있는 거다. 행복의 개념도 나날이 줄어들어서 이젠 연하장
한구석에 깨알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월급 봉투의 숫자나 또는 출근부에 적힌 이름의 서열, 까 나가는 월부 액수,
때묻어 가는 보험 통장... 이런 것들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의
물거품을--떴다 꺼지는 그 물거품을 바라보고 있다. 멀고 먼 나라, 칼 부세의
'산 너머 마을'보다도 한층 더 멀고 먼 마을에 살고 있을 찬란한, 거대한,
영원한, 그 미지의 행복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몰의 시각에 실종된 우리들의 행복은 돌아오는 것이다.
비에 젖은 들개처럼 온종일 쓰레기통을 쑤시다가 뱃가죽을 늘어뜨리고 어둠을
질질 끌면서, 그리고 눈곱이 낀 눈을 껌벅거리면서 털 빠진 붉은 잔등이에
희미한 별빛을 받으면서 우리 곁으로 그것은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찢어 붙인 네 잎사귀 클로버처럼 들킬까 조바심을 내는
모조의 그 클로버처럼...
아니 그렇지 않으면 백치와 같은 표정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쪼그리고 앉아
있는 무명의 그 시골 기독교인처럼--고개를 끄덕이면서 햇볕을 따라
옮겨다니면서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그 시골의 기독교인처럼...
그런 꼴을 하고 행복은 우리들 곁으로 온다. 어느 일몰의 시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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