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집 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
속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 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인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새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김소운편"
김소운(1907__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창원 장날
그 날이 아마 창원의 장날이었던지, 찻간에는 짐을 가진 이가 많았다.
경부간에 해방자호가 다니던 시절이니, 그 때만 해도 옛 말이다.
진해를 두어 역 앞두고, 기차가 상남 성주사간을 달리고 있다. 그 때는 이
찻간에도 유리창이 있고, 좌석이 있었다. 물론 전등도 켜져 있었다.
내 옆 자리에 총을 가진 순경 하나가 있는 것을 외투 겉으로만 보고 나는
처음 군인인 줄만 알았다.
--오늘 쌀값이 얼마나 갑니까?
북쪽 말씨로 그 순경이 어느 장꾼 노인더러 묻는다. 그 노인이 두어 말짜리
쌀 부대 하나를 가졌다. 얼마 얼마 하더라는 대답이다.
순경과 노인 사이에 몇 마디 문답이 오고 간다.
--쌀은 장사하려고 사 가시나요?
--그저 장사가 되면 장사를 하고 집에서 먹게 되면 먹고 그렇지요.
--어디까지 갑니까?
--경화에서 내립니다.
--나도 경화에서 내려야겠는데..., 경화동은 싸점이 있지요?
--있습니다.
--지금 가면 쌀을 살 수 있을까요?
--문을 닫았을 건데..., 깨우면 일어날지 모르지요.
그 대답으로 안심이 안 되는지 순경은 좀 걱정스런 표정이다.
--싸점이 한 집뿐인가요?
--또 있기는 있어도 좀 멀구요. 역에서 가까운 게 그 한 집뿐이지요.
--그 쌀, 몇 되만 팔아 주실 수 없나요?
--팔아도 좋지요. 좋지마는 밤중에 쌀을 사서 뭘 하려고 그럽니까?
어쩐지 그 장꾼 노인은 팔기를 별로 탐탁찮게 아는 눈치다. 순경도
거기까지로 입을 닫았다.
전등 불빛으로 보아서 25, 6세--남을 우기거나 위협은 못 할 순진한
얼굴이다. 그 순경의 몇 마디 말이 내게 몹시 궁금스러웠다.
--경화동서 근무를 하시나요?
혹시 새로 부임해 와서 경화동 지리를 잘 모른다는 경우를 상상해서 이렇게
물어 보았다.
--아닙니다. 터널 이쪽 수원지를 지키고 있어요.
--수원지가 거기 있었던가요? 그런데 왜 경화까지 가요? 성주사가 더 가깝지
않아요?
--쌀을 좀 사 가려고 그럽니다. 동료들이 여태 저녁을 못 먹고 있을 텐데...
마산서 와야 할 쌀 배급이 며칠 늦어서 오늘 찾으러 갔더니, 2, 3일 더
기다리라고 해서 빈 손으로 오는 길이라는 이야기다.
--아침에 남은 쌀을 톡톡 털어서 죽을 쑤어 먹고 나왔는데, 동료들은 점심도
못 먹고 쌀 가지고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기차가 성주사역을 지났다. 터널을 빠지면 얼마 안 가서 경화역이다.
내가 묻는 말이 좀 빨라진다.
--수원지를 지키는 이가 모두 몇인데요?
--일곱입니다.
--일곱 식구가 아침에 죽 한 그릇씩 먹고 온종일을 굶었구먼요. 반찬같은
것은 어떡합니까?
--반찬이라니요, 형편 없지요. 소금 한 가지라도 좋으니 쌀이나 꼬박꼬박
주었으면 좋겠어요.
--부근 마을에서 찬 같은 것을 좀 달랄 수는 없나요? 된장이나 김치나...?
--왜요, 여러 번 동냥들을 해다 먹었지요. 하지만 한 번 두 번이지, 염치가
없어서 이젠 더 달 란 말은 못 해요.
여기에도 대한 민국의 기름 마른 부속품이 있다. '염치가 없어서--' 얼마나
고마운 말이냐. 누구를 탓하지도 원망치도 않고 묻는 말을 중학생처럼 솔직하게
대답해 주는 그 순경에게 나는 짧은 시간에 정이 들어 버렸다.
내 주머니에 가족들에게 갖다 줄 한 달 생활비가 있다. 그 돈에 손을 댈
자격이 내게 있는지 없는지는 나중에 판정할 일이다. 미담을 제조하는
쑥스러움을 헤아릴 겨를도 없다.
기차가 경화역 앞에서 속력을 늦춘다. 백 원짜리로 쌀 한 말 값을 헤어서(천
원 지폐가 생기기 전이다.) 장꾼 노인에게 쥐어 주고는,
--그 쌀 한 말 이분에게 드리시오.
하고 나는 떠다 맡기듯 당부를 했다.
내리려고 자리를 일어선 젊은 순경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공용인데 이런 폐를 끼쳐서야 어디 되겠습니까?
하고 사양을 한다.
--공사이길래 적은 힘이라도 도웁자는 겁니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노릇이지요. 주제 넘는 짓입니다만...
--그럼 성함이라도...
--성함이 다 뭐입니까? 자, 그런 소리 말고 내리시오. 차가 닿았습니다.
순경은 내 선에다 '부산 철도 경찰대 000'라는 명함 한 장을 남겨 두고는
깍듯이 경례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반 년 남짓해서 6.25사변이 일어났다. 우리들의 생활이 그 때와는
비할 나위 없이 더 군색하고 절박해졌다.
그러나 한편에는 이 사변으로 해서 단단히 한 몫 보는 친구들도 있다고 한다.
인구 비례가 10분의 1 밀도도 못 되는 이 진해 같은 곳에서도 요리집이 몇몇
군데나 되고 엊저녁 누구 회계는 70만원이니 80만원이니 하는 기름진 화제가
앉아 있어도 들려 온다. 하물며 부산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나는 그 터널을 지금도 매월 한두 번씩은 기차로 지나 다닌다. 수원지에는
오늘 밤 같은 소한 추위에도 날을 새우며 지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네들이 행여나 밥을 굶지 않았기를 바란다. 아울러 내 이 얼굴 뜨거운
'선행보고기'가 대한 민국에 되레 욕이 미치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선의의 불씨
또 하나의 눈
--어제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시장에 들렀지요. 이것 저것 사다
보니 자질구레한 종이 뭉치가 대여섯 개나 됐나 봐요. 그걸 양쪽 손에 다 들고
오느라니까, 시장 안에서 신문을 차는 앉은뱅이 청년이 있잖아요. 스무남은
살이나 됐을까요. 팔에다 무슨 보급원인가--그런 완장을 둘렀어요. 그런데도
불구자 같은 궁기가 없고 퍽이나 명랑해요, 얼굴 표정이--. 밖에서 별로 신문
같은 것 산 일은 없었지만 그냥 지나가기가 무엇해서 10원을 꺼내서 신문을
샀지요. 두 장인지 석 장인지 주는 대로 받아서 그걸 또 짐 가진 손에다 구겨
쥐고--그리고 몇 걸음 가자, 뒤에서 '아주머니!' 하고 누가 불러요. 딴 사람을
불렀거니 하면서도 짐짓 돌아다 보았지요. 그랬더니 가게 앞에 웬 중년 남자가
서서--그 가게 주인인가 봐요, 아주 심상한 얼굴로 '그거 이리 내세요.'하고
손을 내밀잖아요. 돈을 다 치렀는데 어째서 달래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내라니까 무심결에 내주었지요, 그 가게에서 산 건 아니지만...
그걸 받더니 남자는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봉지에다 그 작은 종이 뭉치들을
하나하나 넣어 주지 않겠어요. 그런 호의를 모르고 하도 무뚝뚝하게
내놓으라기에 물건 산 걸 보자는 줄로만 알았지요...
"미안해서 어떡하나..."
제가 그러니까 남자는 딴 말은 없고,
"아주머니, 저 애한테서 신문 사셨지요?"
신문 사는 걸 아마 보고 있었던가 봐요--그게 무슨 고맙다는 인사같이
들리더구먼요...
별 대단한 일도 아닌데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렇게 가벼운지...무슨 좋은
수나 난 것 같아 괜히 가슴이 부듯하더구먼요...
아는 이를 만나 거리에서 차 한 잔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일행 중 부인네 한
분이 이런 얘기를 들려 주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곁에서 듣는
나까지 무언지 마음이 흐뭇했다.
거추장스런 종이 뭉치들을 한데다 넣어 주었다는 그런 단순한 얘기는 아니다.
그만한 친절도 요즘 우리네 생활에서는 보기 힘드는 일이지마는 이 얘기에는 또
하나 울려 오는 다른 여운이 있다.
육체의 불행을 짊어지고도 제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를 쓰는 불구의
청년--그 청년에게서 신문을 샀다는 그야말로 겨자씨 한 알만한 작은 선의를
고마운 일로 알고 치사하는 또 하나 다른 '선의'의 눈--, 가게 주인의 그
무뚝뚝한 친절은 그 치사의 소박한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동상이 세워질 커다란 공로도 아니요, 무슨 상이나 표창을 받도록 의젓한
미담도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고 보면, 이 작은 '불씨'--평범하고도 소박한
'인간의 선의',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생활에서 제일 아쉬운 주림일지도 모른다.
연잎에 괸 이슬
아쉬움이라니 바로 며칠 전에 본 영화의 장면 하나가 생각난다. 극영화는
아니고, 어느 먼 나라의 생활의 실경을 찍은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지방이라 물이 몹시 귀하다. 흘러가는 시내도 없고, 우물을
판다고 해서 물이 솟아나지도 않는다. 여인들은 첫새벽에 먼 길을 떠나서 연
잎사귀에 괸 이슬을 찾아 다닌다. 하얀 구슬처럼 연잎 위를 구르는 이슬
방울--그것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그릇이 옮긴다.
생명에 바로 직결되는 의미로는 어떤 보석, 어떤 구슬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한 이슬 방울을--그것이 하나하나 모여서, 나중에는 제법 물 소리를 내면서
쏴 하고 커다란 물독에 부어진다.
아쉬움을 두고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은, 30여 년 전 일본서 본 "아랑"이란
스웨덴 영화이다.
흙이라고는 한 줌이 없는--바윗돌뿐이 절해 고도--거기 젊은 어부 내외가
산다(십수 년 전에 두 번 가 본 독도가 꼭 이런 섬이었다.).
거기서도 씨를 뿌리고, 곡식이 자란다. 흙 없이 어떻게 씨가 뿌려지나?
사람의 팔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바위 틈--그 밑바닥에 풍화 작용으로 깎여진
바윗돌의 부스러기가 깔려 있다. 한쪽 손을 뻗을 대로 뻗어서 바위 틈에서 수백
년, 수천 년 쌓였던 그 돌 부스러기를 손으로 긁어 올린다--연 잎사귀에 괸
이슬 방울을 모으는--바로 그 정성, 그 노력이다.
해초를 평범한 바위 위에 깔고, 그 위에다 긁어 올린 돌 부스러기를 덮는다.
이것이 그들의 '밭'이다. 이 '밭'에 해가 쬐고 비가 내려서, 뿌린 씨에 싹이
트고 나중에는 곡식이 맺는다. 시간의 경과를 압축한 화면만으로는, 마치 무슨
마술의 무리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마술도 기적도 아닌, 이것은 인간 생활의
냉엄한 현실의 단면이다.
조상이 마련해 준 이 땅, 여기는 물도 흙도 풍성하다. '풍성'이란 말이 우스울
정도로 우리는 그런 구애를 모르고 살아 왔다. 풍화암 부스러기를 긁어 올릴
필요도 없고 연잎에 괸 아침 이슬을 모을 필요도 없다. 하물며 편편옥토, 하물며
옥수 같은 물맛, 문화, 예술의 메카라는 프랑스에도 이런 물은 없다.
그러나 '물'이니 '흙'이니를 예찬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주림, 메마르고 거친 생활 감정으로 따진다면, 오늘날의 우리처럼 가난한 백성도
아마 드물리라. 연 잎사귀의 이슬을 모으는--바위 틈에서 돌 부스러기를 긁어
올리는 그런 생활을 내려다보고 동정할 주제가 과연 우리에게 있다고 할
것인가?
다만 그들과 다른 것은, 우리의 아쉬움이, '흙'이 아니요, '물'이 아니라는
그것뿐이다.
마음의 주림
시골서 서울로 와서 벌써 1년 넘어 여관살이를 하는 P군의 이야기다. 무슨
사연인지 이집저집 여관으로 굴러다니는 P군의 신세도 처량하거니와 P군이
들려 준 이 얘기도 그지없이 처량하다.
찾아드는 손님의 반수 이상이 값을 깎거나 시계, 만년필 등속을 잡히고
간다(P군이 묵는 이 여관은, 도심 지대의 소위 일류 축에는 못 가도 서울서는
그래도 표준 클래스는 된다는 얘기다.).
방마다 하나씩 걸어 두는 거울--백 원도 못 가는 그 거울이 없어지는 것은
보통 일이다. 물주전자에 하나 가득 오줌을 채워 두고 사는 손님도 있다.
저 혼자가 여관 하나를 독차지나 한 것처럼 밤중 한 시 두 시까지 떠들어대는
손님, 통금 시간에도 절제를 받지 않는 특권 계급(?)들이 밤중에 와서 여자를
데려오라고 호통을 칠 때는 으레 전치사가 있다. '우린 직무상 그래도 좋게 돼
있단 말야!' 그것을 증명이나 하려는 건지 이런 '손님'들은 걸핏하면 순경을
불러오라고 호령이다(이런 것들을 손님이라 '님'자를 붙여서 부르기는 좀
곤란하지마는--하는 것이 P군의 어투다.).
사흘들이 임검이란 명목으로 단골 순경들이 찾아온다. 이럴 때 주인 마나님이
살며시 쥐어 주는 지폐도 정찰제마냥 액수가 마련되어 있다.
관 내의 어느 순경이 장가는 간다, 어느 형사의 장인 회갑이다, 그런 길사
때면 으레 '청첩장'이 온다. 서원의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골 사돈댁에
상사가 생겨도 등사판으로 찍은 부고가 돌려진다. 이런 종잇장을 쉽사리 알고
괄시했다가는 결과적으로 몇 갑절 더 부가세가 딸려 오기 마련이다.
소방서원도 소화기 비치를 빙자로 번번이 얼굴을 내민다. 물론 그런
'손님'들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P군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황홀할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화든 사실--십수 년 만에 제 나라로 돌아온 나 같은 숙맥이나
아니고는 이런 정도의 얘기에 놀라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인정이 서울보다야 순박하려니 했던 시골살이도, 듣고 보면 서울 뺨칠
정도로 대단하다는 얘기다. 버스칸에서 조사를 한다는 젊은 군인들의 그 등등한
기세--쥐꼬리 같은 권력이자 직무를 앞장세워서 설치고 덤비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그 안하 무인의 행패를 두고는, 낚시터를 찾아서 자주 원행을 하는
P씨며 H교수들이 입담 섞어서 진담, 기담들을 수두룩이 들려 주었다.
20원 염세론
일본 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책 가게들--수천만 원의 자본을 들인 대서점에서
명동 뒷골목 노점 책장수까지, 서울 거리만 새도 이런 책가게가 자그마치 4,
50집은 더 될 것 같다.
그런 노점 가게에서 일본 잡지 값을 물어 본다. 5, 6개원 지난 헌 부인
잡지다.
'2백 원입니다.' 혹은 '2백 50원입니다.' 거침없이 부르는 그 '값'은 그 책에
찍혀 있는 정가 그대로이다. 일화와 우리돈의 환산율로 따지고 보면
30__40프로, 정가보다 더 비싼 계산이다.
일본서는 5, 6개월 지난 잡지는 쓰레기다. 10원 균일로 고책상 가게 앞에
무더기로 쌓여 있어도 사 갈 사람이 없다.
그 '쓰레기'가 이 나라에서 보배 취급이요, 한두 달 전에 나온 새것이면
정가의 3, 4배--. 우리들의 주림과 가난함이 이러하다.
하필이면 이런 얘기가 아니라도 오늘날의 우리들의 빈곤을, 마음의 굶주림을
진단할 카르테는 얼마든지 있다. 10분만 거리를 거닐어도--버스나 합승을 한
번만 타도--.
어느 날, 밤늦게 돌아오던 D여사는 종점 하나 앞에서 내려야 할 것을, 연일의
과로로 버스 안에서 졸다가 종점까지 와 버렸다. 같은 버스로 한 정류장
되돌아가면 될 것이나 2,3분만이라도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침
종점에서 떠나 나오려던 다른 버스에 바꿔 탔다. D여사가 이제 막 닿은
버스에서 내린 것을 새로 떠나는 버스 차장도 보고 있었다.
D여사가 한 정류장을 되돌아와서 "미안해--"하고 내리려 하자, 차장이
"요금은요? 한다. 되돌아온 것을 아는 차장이 한 정류소 사이에 요금을 달랄
줄은 D여사도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금시 거기서 내렸던 걸 차장도 보았잖니?"
D여사가 그러자,
"봤지만, 이 차가 아니잖아요! 남의 차로 지나갔거나 말았거나 내가 알게
뭐예요!"
눈을 흘기면서 쏘아붙이는 차장 아가씨의 서슬에 D여사는 두말없이 20원을
내주고 버스를 내렸다.
며칠 후에 나를 만났을 때 D여사는 그 날 얘기를 하면서 이런 나라에 살아
있는 것이 진정 싫어졌다고 한숨 반, 웃음 반으로 하소연을 했다. 나와는 오랜
친구인 D여사 부처는, 나와 마찬가지로 외지 생활에서 여러 해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분들이다. 고국이 그리워서 굶어도 내 나라에서 굶겠다고 남편을
설득해서 돌아온 D여사이고 보니 '20원'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는 그분의
심정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패전직후의 일본에서는 메틸알코올을 탄 값싼 술로 해서 실명을 하고, 때로는
한잔 술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다. 한잔 술에 섞인 메틸의 분량이 인명을
앗아가도록 대단한 독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조금씩 쌓이고 차차로 축적된
독성이 최후의 한 잔으로 그 한계를 넘어 버릴 때 '사고'가 일어난다.
'20원 염세론'의 D여사의 경우가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이화감, 작은 감정의 축적이 마침내는 조약돌 하나의
차질에도 이겨 내지 못하게 된다.
D여사 같은 이는 이 사회의 부적격자이다. 쇠가죽처럼 질기고 툭툭한 정신이
아니고는 이 나라에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버스 차장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상냥하고 착한 차장 소녀들을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퉁명스럽고 미련한 '메틸알코올'식 차장이 절대 다수란 것도 사실이다.
어둡고 침침한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의 '마음의 주림'을
설명하기로는 이런 이야기들은 백분의 1, 천분의 1의 샘플 축에도 못 간다.
5, 6만 대의 자동차가 달리는, 20여 층의 호텔이 세워진다는 서울의, 가난하고
초라함이 이러하다. '물'이 있다고 해서, '흙'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주림'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연잎의 이슬로 목을 축이는--해초 위에 돌 부스러기를
덮어서 곡식을 가꾸는 그 아쉬운 생활자들이 어느 의미로는 우리보다 백 배는
더 부자일지도 모른다.
어질고 너그러운 겨레의 피
앉은뱅이 청년에게서 신문을 산 부인네의 '가슴이 부듯했다'는 그 행복감--,
20원으로 살맛을 잃었다는 D여사의 비애--.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먼데도,
하나 공통된 것은 둘 다 지극히 작은 불씨에서 기쁨이, 슬픔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남의 가슴에 기쁨을 심어 주는 것이 '선의의 불씨'라면, 절망과 비애에
연하는 또 하나의 '불씨'도 그 위력은 결코 그만 못지않다. 성냥개비 한 개로도
도시 하나를 불태울 수 있는, 그것이 '불씨'의 작용이다.
6.25직후 한강 가에 물밀듯 피난민들이 밀려들었을 때, 서로 먼저 건너려고
자전 뭉치를 손에 쥐고 뱃가에서 사람들이 붐벼대는 그 수라장에서, 웬 노인
사공 하나가 '선가 없는 사람은 이리로 오시오.'하고 배 한 척으로 진종일
사람을 실이 나르면서 일체 돈을 받지 않더란 이야기를, 바로 그 당시, 그 배로
한강을 건넌 이에게서 들었다. 어떤 사람이 돈 뭉치를 그 사공 앞에 내밀면서,
"이걸로 먼저 우리 식구를 실어 주시오."
하자, 노사공은 '돈?' 하고,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여전히 선가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태우더란 얘기다.
불씨 하나에 겨누기로는 너무나 황송하고 우러러보이는 이야기다. 그러나 애
겨레의 혈관 속에 흐르는 어질고 너그러운 피가 어찌 이 날의 이 노사공 하나의
것이라고 단정하랴.
'--구름장이 제아무리 두꺼워도 해를 잃어버렸다고는 행여 생각지 맙시다.
두꺼운 구름장을 헤치고 해는 또다시 나타납니다.'
오랜 친구인 D여사 내외분에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설령 그
햇빛을 눈으로는 목 본다 하더라도 그 날을 믿어야 한다고--. 그리고 또 하나,
반딧불 같은 작은 '불씨'--겨레의 혈관 속에서 다시 깨어날 '선의의 불씨'를
우리는 믿고 살자고--.
행복이란, 목마를 때 마시는 물 한 그릇--아랍과 이스라엘이 겪은 이번
전쟁에서 생채기 하나 없는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가 이스라엘 사막 지대에서
발견됐다는 얘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물이 없어서 말라 죽은 희생자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지나친 극단의 예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마음의 '굶주림''목마름'에도
아쉽고 긴한 것은 마실 수 있는 물 한 그릇--선의의 불씨 하나--그것이다.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보람 있게 살 수 있고, 그것이 없을 때 절망의 구름장이
우리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행복의 '파랑새'는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는 메테를링크의 찌루찌루 미찌루
이야기--우리가 찾는 '행복의 불씨'도 그다지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리라.
퇴색치 않는 사랑
왕후의 밥, 걸인의 찬
그 내외는 가난했다.
보통이면 사내가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을 지키기 마련이건마는 그
내외는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로 아내가 직장으로, 교사이던 남편은 학교 일을
그만두고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실직자였다. 어린것은 아직 없었다.
젊은 아내의 직장은 그들이 깃들어 사는 단칸방에서 과히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어느 개인 회사에서 회계 사무를 맡아 보는 것, 그것이 그 젊은 아내의
직업이다.
어느 날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밥을 굶은 채 직장으로 나갔다가 점심
시간을 틈타서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나갈 때 남편의 한 말이 있다.
"어떻게라도 변통해서 점심을 지어 둘께 시장해도 그 때까지만 참으라우."
방 안에는 밥상이 나와 있고, 남편은 어디로인지 외출하고 없었다.
신문지로 덮은 밥상에는 남편이 지은 밥 한 그릇--반찬이라고는 간장
하나--그 밥상 위에 써 두고 간 쪽지가 얹혀 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걸로 시장기만 속여 두시오.'
쌀은 간신히 샀는데도, 남편이 마련한 돈으로는 반찬에까지 손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밥을 간장 하나로 먹으면서 젊은 아내는 미상불 왕후가 부럽지 않도록
가슴이 뿌듯했다. 촌철이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지마는, 표어도 격언도 아닌,
남편이 적어 두고 간 그 한 마디 말에 아내는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다.
'가난'이란 결코 환영할 것이 못 된다. 안빈 낙도니 청빈이니 하는 빛좋은
문자들이 있기는 하나, 인간을 시궁창에 뒹굴게 하는 것도 가난이요, 가까운
일가 친척이며 친한 벗들 사이에 길을 막고 담을 쌓게 하는 것도 역시
가난이다.
그런데도, 때로는 이 가난이 만금으로 못 살 보석을 경품으로 갖다 주기도
한다니 신기한 조화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내가 잘 아는 어느 부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역시 남편은 실직--실직이라는 말은 가졌던 직업을 잃었다는 뜻이니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 남편에게는 본래 직업이 없었다. 남들은 그를
시인이라고 부르지만, 이 나라에서 싯줄이나 쓴다고 해서 그걸로 호구책을
삼는다거나, 가족을 먹여 살릴 의젓한 직업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사내는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아침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누라가
쟁반에는 삶은 고구마 몇 개를 얹어 들고 들어왔다.
"햇고구마가 하도 맛이 좋다고 아랫집에서 그러길래 우리도 몇 개 사
왔답니다. 하나 맛이나 보세요."
사내는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식전에 그런 것을 먹는 게 꺼림해서
잠시 주저하다가 마누라 대접으로 그 중 제일 작은 한 개를 집어서 입에다
넣었다. 그리고는 쟁반 위에 같이 놓인 홍차를 마셨다.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한 개만 더 집으세요."
별로 달갑지는 않으나 이번에도 마누라의 강권에 못 이겨 마지못해 두개 째를
손에 집었다.
밖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졌다.
"인제 나가 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
사내가 재촉하자 아내는 태연 자약,
"지금 잡숫잖았어요, 그게 오늘 우리 아침밥이랍니다."
그러면서 시치미를 떼었다.
"뭐요? 그게 아침이라?"
사내는 그제야 쌀이 없어진 것을 알고, 무안과 미안을 뒤섞어서 마누라에게
한 마디 쏘았다.
"쌀이 없어졌으면 없어졌다고 왜 좀 미리 말을 못하는 거요, 사내 봉변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그 말에 대답이,
"제가 XX장관 조카랍니다.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을라구요. 하지만
허구한 인생에 이런 때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지요."
웃음을 지으면서 하는 아내의 그 한 마디 말에 내 친구는 대꾸를 잃고
묵연했다. 때마침 그의 처삼촌이 장관이었고, 그 장관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는
청도 몇 차례 없이 들어와서 성화를 겪던 터이다.
그 날로 쌀 한 가마를 주변해서 짐꾼에게 지위 들여가기는 했으나 내 친구는
그런 마누라를 가진 것이 무척 흐뭇했던지, 팔불출이는 자인한다면서 걸핏하면
이 이야기를 남의 앞에서 되씹곤 했다.
놓지 않았던 그 손
'가난'이 갖다 주는 프리미엄--그렇다고는 하나 가난만 하면 그 프리미엄이
절로 따라온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 위하고 아끼는 애정의 불씨--그 불씨가
없고서야 어느 아내가 간장 하나로 밥을 먹으면서 '눈물이 나도록 행복'할
것이며, 어떤 사내가 아침 끼니를 삶은 고구마에 홍차 한 잔으로 때우려는
아내를 남의 앞에 치사하고 다닐 것인가--. 귀하고 소중한 것은 가난 그것이
아니요, 제아무리 염라 대왕 같은 가난의 위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시들이
않는 '진실의 애정' 그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가난한 내외간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사내는 등산을 좋아했고, 책읽기를 좋아했다. 쉬는 날은 젊은 아내를 데리고,
자그마한 륙색을 어깨에 메고는 일쑤 산을 잘 찾아다녔다.
몇 가지 일에 실패를 겪고 나서 사내는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과일 시장에서
사과를 사들여 트럭으로 춘천까지 실어 가서 거기 장사꾼에게 넘기면 수송
운임을 제하고도 얼마만큼은 이윤이 생겼다. 제날로는 못 와도 춘천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은 아내가 기다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남의 곁방 하나를 사글세로
빌려서 장모와 같이 사는 세 식구 살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뒤 사흘이 가고 나흘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못해 닷새째 되는 날 아내는 집을 나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젊은 년이 사내를 못 잊어한다고 혹시나 그런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친정 어머니에게는 가까운 시골에 사는 동무의 병문안을
빙자했다.
"춘천에만 닿으면 자연 만나지려니 했지요. 춘천을 손바닥만하게 알았던가
봐요. 정거장에 내렸더니 읍내까지가 왜 그렇게 멉니까.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릅니다마는, 그 날 밤으로 춘천에 있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찾아다녔지요.
그런데도 그이는 아무 여관에도 없어요.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이튿날 아침,
그이의 친한 분이 도청에 있다는 생각이 나서 거기를 찾아가느라고 나선 길에,
행여나 해서 정거장에를 가 보았지요."
그랬더니 차표를 사려고 줄을 지은 행렬의 맨 앞에 그 남편이 서 있었더란
것이다. 아내는 반가움, 그리움에 가슴이 뛰면서도, 입으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남편 곁으로 가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두 내외의 눈이 서로 마주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2초나 3초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 아내에게는
몹시도 길고 지루했을 것만 같다.
춘천시 서울까지 서너 시간이나 달리는 그 거리를 남편은 아내 손을 꼭 쥔 채
찻간에서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닷새째가 되도록 남편이 돌아가니 못한
사연--춘천으로 올 때 중도에서 태워 달라는 사람들을 트럭에 올렸더니, 인원이
좀 많았던지 가마니에 넣었던 사과들이 사람 무게에 눌려서 서의 모두 껍질이
상해 버려 옳은 값으로 흥정이 되지 않았다. 밑지고 돌아갈 수는 없는 사정이라
장터에 임시로 자리 하나를 빌려 낱개로 소매를 하느라고 꼬박 나흘이 걸렸다.
아내가 기다릴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당시는 전보도 옳게 제 구실을
못하던 시절이다.
남편이 유숙한 곳은 친구네 집이었다. 여관을 주름잡아서 필경 찾지 못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러나 그런 주석이나 해명은 지금 쓰는 이 이야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춘천서 서울까지 서로 말이 없이 찻간에 실려 오면서 아내의 손을 쥔 채 그
손을 놓지 않았다는 지아비. 남편에게 손 하나를 맡긴 채, 행복에 젖어 그저
황홀했던 그 날의 그 아내. 이런 행복은 어느 장관 댁이나 고루 거각의
부잣집에서는 좀처럼 못 찾아보는 행복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론보다도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따로 있다.
간직한 행복의 실태
사과 장사에서 몇 해나 지났는지--그 새 어린것이 강보에 싸인 갓난애까지
셋이나 생겼다.
서울서 백여 리 떨어진 시골 농촌에서 돼지를 기르고 닭을 치고 하면서 영영
자립하던 그들의 단란한 가정이 하루 아침에 산산이 부서졌다.
6.25사변에 한 마을 청년 네다섯과 같이 끌려나간 채 1주일이 지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소문으로 30리 밖 재 너머 언덕으로 찾아간 아내는
거기 총알에 꿰뚫려 쓰러진 송장 속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 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추기로 들면 한이 없다. 6.25의 피비린 희생이 어찌 이 한
가정뿐이랴. 여기서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 두 번 다시 그들 가족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 사실만을 적어 두기로 한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막다른 외길, 그것이 '죽음'이다.
사람들은 이별을 슬퍼하고 죽음을 슬퍼한다. 과연 죽음이란, 이별이란 그렇게
슬퍼만 해야 하는 것일까?
슬픔, 눈물, 그런 불행의 저쪽에 행복이란 것이 있다. 도대체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무엇을 가리킨 것일까? 거기에 대한 대답을 뚜렷이 내세운 사람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행복이란 객관의 눈으로는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다는 것--제각기 제 주관 속에만 간직할 수 있는 것
그것이다.
천하가 다 내 것이면 행복할까? 전 세계의 미남 미녀를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면 행복할까?
호화 찬란한 성찬보다도 주릴 때 먹는 보리밥 한 술--행복이란 어디까지나
내용의 문제요, 분량으로 판단할 것은 아닌 것 같다.
R씨의 초대로 저녁 대접을 받은 자리에서 R씨가 자기와는 친한 어느 부인네
한 분에게 물었다.
"부인은 지금까지 겪어 온 중에서 어떤 때가 제일 행복했나요? 가장
행복이라고 생각되던 일이 뭔가요?"
동석했던 그 부인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어 한 말이 '서울 닿기까지
한 번도 놓지 않았던 남편의 손--' 그 이야기였다.
세 아이가 다 자라서 그 중 둘은 벌써 대학생이라고 한다. 거기까지
길러내면서 걸어 온 고생길.
어느 때는 길거리에 ㅇ아서 떡장사도 했고, 시골을 찾아다니면서 옷가지와
양곡을 바꾸는 행상꾼 노릇이며 나중에 좀 자리가 잡힌 뒤에는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갖고 헌옷 장사를 하다가 믿었던 여자 친구에게 푼푼이 모은 돈을
떼어도 보았고--. 자식 셋에다 사는 보람을 걸고 격류를 거슬러 살아 온 그
고초 속에서도, 때로는 즐거운 일, 행복으로 느껴질 일도 전혀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도 한 여인의 가슴 속에 그 날 그 찻간에서 느꼈던 행복만이
오직 하나 간직한 행복의 실체였다는 사실--무슨 외국 영화의 한 토막 같은 그
날의 그 장면을 마음 속으로 새기면서 나는 또 하나 딴 생각에 잠겼다.
--만일에 그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그 날의 그 '행복'이 과연
지금까지 자리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을까? 젊어서는 그런 일도
있었더니라는 한낱 낡은 앨범의 한 장으로 그쳐 버리고 말지 않았을까?
만인이 슬퍼하는 죽음--그 죽음으로 해서 경화되는 사모가 있고, 퇴색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면 '죽음'을 어찌 슬프다고만 할 것인가--. 죽음이 가져오는
손실보다는 죽지 않고 삶으로 해서 결과하는 상실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많다.
"윤오영편"
윤오영(1907__1976)
수필가. 서울 출생. 양정 고보 졸업. 장기간 교편 생활.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시선에 잡히는 모든 사물을 고전의 세계에
접합시켜 독특한 아취를 자아내곤 하였다. 정묘한 문장을 추구하였고 역대
문장가들의 글을 깊이 연구하여 "연암의 문장" "노계 가사의 재평가" 등의
논저를 남겼다. "한국의 창 연구"는 특히 주목을 끈 논문이다.
부끄러움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애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아는 여름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촌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 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의 몸매며 옷매무새는 제법 색시꼴이 박히어 가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시골서 좀 범절 있다는 가정에서는 열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 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너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은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너방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 냈다.
소녀는 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 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는 훨씬 성숙해 보였다. 반쯤 닫힌 안방 문 사이로 경대 반짇고리들이
한편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막 건너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배기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날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본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흘낏 훔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뺨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마고자
나는 마고자를 입을 때마다 한국 여성의 바느질 솜씨를 칭찬한다. 남자의
의복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호사가 마고자다.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같은 다른
옷보다 더 값진 천을 사용한다. 또, 남자옷에 패물이라면 마고자의 단추다.
마고자는 방한용이 아니요 모양새다. 방한용이라면 덧저고리가 있고
잘덧저고리도 있다. 화려하고 찬란한 무늬가 있는 비단 마고자나 솜둔 것은
촌스럽고 청초한 겹마고자가 원격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노인네가 겨울에
소탈하게 방한 삼아 입으려면 그 대신에 약식인 반배를 입었던 것이다.
마고자는 섶이 알맞게 여며져야 하고, 섶귀가 날렵하고 예뻐야 한다. 섶이
조금만 벌어지거나 조금만 더 여며져도 표가 나고, 섶귀가 조금만 무디어도
청초한 맛이 사라진다. 깃은 직선에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둥글어도 안 되며,
조금 더 파도 못쓰고, 조금 덜 파도 못쓴다. 안이 속으로 짝 붙으며 앞뒤가
상그럽게 돌아가야 하니, 깃 하나만 보아도 마고자는 솜씨를 몹시 타는
까다로운 옷이다.
마고자는 원래 중국의 마괘자에서 왔다 한다. 귀한 사람은 호사스러운 비단
마괘자를 입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청마괘자를 걸치고 다녔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마고자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고자는 마괘자와 비슷도 아니 한 딴 물건이다. 한복에는
안성맞춤으로 어울리는 옷이지만, 중국 옷에는 입을 수 없는, 우리의 독특한
옷이다. 그리고 그 마름새나 모양새가 한국 여인의 독특한 안목과 솜씨를 제일
잘 나타내는 옷이다. 그 모양새는 단아하고 아취가 있으며, 그 솜씨는 섬세하고
교묘하다. 우리 여성들은 실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어받아 온 안목과 솜씨를
지니고 있던 까닭에, 어느 나라 옷을 들여오든지 그 안목과 그 솜씨로 제게
맞는 제옷을 지어 냈던 것이다. 만일, 우리 여인들에게 이런 전통이 없었던들,
나는 오늘 이 좋은 마고자를 입지 못할 것이다.
문화의 모든 면이 다 이렇다. 전통적인 안목과 전통적인 솜씨가 있으면 남의
문화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든다 할지라도 이를 고쳐서 새로운 제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송자에서 고려의 비취색이 나오고, 고전 금석문에서 추사체가
탄생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예전엔 남의 문물이 해동에
들어오면 해동 문물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탱자가 아니라 진주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남의 것이 들어오면 탱자가 될 뿐
아니라, 내 귤까지 탱자가 되고 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백사장의 하루
눈이 떠지자 창을 여니 아청빛 푸른 하늘이 문득 가을이다. 어제까지의
분망과 노고가 씻은 듯 걷히고 맑고 서늘한 기운이 흉금으로 스며든다. 소제를
마치고 나도 모르게 길에 나서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등산객들과 소풍가는
남녀들로 근교행 버스는 바쁘다. 복잡을 피하여 사잇길로 빠지니 곧 경춘선로의
교차점이 아닌가. 예정 없이 버스에 올라, 가는 대로 맡기니 버스는 군말없이
달린다. 이윽고 강안을 지난다. 강이 아름다워 차를 스톱시키고 내리니 인적이
고요한 소양강 하류의 이름 모를 백사장, 하루의 유정을 풀기에 가장 좋을
곳인상 싶다. 백사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청한을 읊조린다. 단풍은 아직 일러
산봉우리는 푸르고 거울같이 맑은 물 위에 떠가는 구름이 가끔 짙은 시름을
던진다. 그러나, 끝없이만 보이는 백사장에는 갈매기 그림자 하나 없고, 10년에
한 번인 듯 느껴지는, 가물거리는 포범이 아쉽게 반갑다. 나는 누워서 문득
생각한다. 천추 일심이요 만리 일정이라고.
고왕금래 수년 만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우리의 혈관을
끓어오르게 한다. 사책을 헤치거나, 전설을 뒤지거나 혹은 저기를 보고 혹은
소설을 읽다가도 옳은 것을 위하여 의분을 느끼고 악한 것을 위하여 증오하고
타기하며 사리에 그릇됨을 개탄하고 인생의 과오를 슬퍼함은 너나가 없건만,
매양 같이 슬퍼하고 같이 분개하던 그들이 한 번 현실에 발을 들여놓자 드디어
스스로 증오와 타기의 인간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간이 사는 곳에 비환이 있고, 비환이 있는 곳에 정회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알지 못하는 고도의 이족과도 정은 통할지니 어찌 서로의 애정이 없으며, 저
가물거리는 포범과 같은 반가움이 없으랴마는 어찌하여 서로 적대하고,
시의해야 하며, 심하면 동족도 구수같이 상잔해야 하며, 이웃도 헤치고, 가족도
등지며 배반하고, 모해와 살육이 사상에 그칠 날이 없어야 하는가. 서로가
하루살이 같은 목숨이요, 창해에 뜬 좁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진부한 옛 말을
굳이 되씹어 본다. 와우각상에 쟁하사요, 석화광중에 기차신이란 감상적 애수가
스며드는 것은 최근 나의 과로로 인한 신경의 쇠약에서 오는 것일까.
천추의 느끼는 그 마음은 하나요, 만리에 느끼는 그 정은 하나다. 불가에서
생사를 허무에 돌려, 생야에 일편부운기요, 사야에 일편부운멸이라 했다.
그러나, 한 조각 구름은 떠난 뒤에 남는 것이 없지만 사람은 간 뒤에도 정이
남지 않는가. 고래로 뜬 구름같이 사라진 사람들이야 이제 그 잔해인들 남아
있으랴마는 인류가 존속하는 날까지 면면이 지속해 오는 것은 이 정이다.
불가의 만유귀심이란 그 법심이 무엇인지 모르거니와 심심심이 곧 정이다.
정근을 버리고 미망에서 벗어나 대오귀심을 외치는 대덕에게 심심심이 정이라면
속성의 완미함을 연민해할지 모르나, 나는 원래 그런 묘망한 진리와는 연이
없는 듯하다. 나에게 철학이 있다면 정의 철학이요, 나에게 생활이 있다면 정을
떠나서 따로 없다. 혹 나의 깨닫지 못하는 완미를, 혹 나의 지성 부족한 우둔을
비웃는 이도 있을지 모르나, 이것이 아니고는 인생을 맛보며 살 길이 없다.
인간이란 신과 짐승의 사생아라고 한 이가 있다. 그렇다면 정이란 사생아의
개성이다. 신은 이미 정을 초월해 있을 것이요, 짐승을 아직 이 정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지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말은 영리한 사생아들의 엉뚱한
어휘다.
성리학자들은 성이니 정이니 하는 말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서 설명한다. 심은
일신의 주재니 성과 정을 통솔하고, 성은 천부의 이니 칠정을 낳는다. 희노애구
애오욕은 기질의 청탁에 따라 때로 선이 되고 때로 악이 되지만 그 본원은
천명의 성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이 선일진대 중화의 덕을 길러 삼재의
하나로서 천지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합리적이요 오묘한
철리엔 둔하다. 또 굳이 형이상학적으로 그 본질을 캐고 체계를 세워 논리를
정리하는 수고를 청부받을 생각도 없다. 무릇 곡소비환이 생활의 표현일진대
이것이 진정이요 인생이 아닌가.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심정의 세계를
나는 지금 체감하고 있다. 심이라 해도 좋고 성이라 해도 좋고 정이라 해도
좋다. 나는 적절한 용어를 모른다. 오직 천추일심만리일정, 심즉정이다. 심은
추상적인 존재요, 정은 구체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실로 영속적인 생의
실체요 영속적인 인간의 내용이 아닌가.
흰 구름장이 바람에 불려 강상으로 떠가더니 산봉우리에서 사라진다. 강 속의
그림자도 사라진다. 문득 채근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풍래소죽에 풍과우 죽불유성이요, 응도한담에 응법우 택불유경'
그렇다. 바람 간 뒤에 소리는 대밭에 남아 있지 않고, 기러기 날아간 뒤에
그림자는 담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나는 채근담 저자의 낯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눈 위에 기러기 발자취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떨어지는 꽃잎에서
또 그것을 느껴야 한다. 이 곧 천추일심이요, 만리일정이다.
강안 길로 되돌아 허튼 걸음으로 한식경을 걸었다. 버스가 이삼 차 지나갔을
뿐 고요한 강안의 길이다. 길가에 한 주점이 있다. 막걸리 안주로 도토리묵이
있다. 요기하기에 족했다. 숭굴숭굴하고 부드러운 주모의 씩 웃는 인사가 제법
구수하다. 친절, 불친절 없이 늘 보는 이웃에 대하듯 태연한 인사, 영접을
위해서 마음을 쓸 필요조차 없는 한적한 주점인 까닭이다. 이해의 득실이
없으면 스스로 담연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가는 말이 구수하다.
버스가 왔다.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 몸을 실었다. 녹색의 산봉우리들은
석양에 물들어 빛이 더욱 곱고, 강물은 그늘이 져서 검푸르게 흐른다.
"이무영편"
이무영(1908__1960)
소설가. 충북 음성 출생. 일본에서 중학을 나와 작가 가토다케오의 문하에서
4년간 작가 수업을 함.
이무영은 초기에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1939년부터 6.25사변
때까지 농촌에 파묻혀 주로 농촌 소설을 썼다. 그는 농촌을 먼 데서 바라다보며
쓴 작가가 아니었고 직접 농촌 생활에 젖었던 본격적인 농민 작가였다.
6.25사변 후에는 잠시 시정 문학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낙엽과 문학
귀뚜라미, 달, 낙엽, 단풍..., 우리는 이런 낱말들만 보고서도 흔히 시정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시 속에는 가을을 소재로 한
것이 제일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가을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문학 작품이
감상에 깊이 빠지고 있음도 사실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문학하는 태도를 한 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낙엽이니
단풍이니 하는 것이 다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되는 것임엔 틀림이 없지만, 이를
보고 다만 감상에 빠지는 데서 끝나고 만다면, 이것은 결국 우리 문학을
나약하게 만들 위험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을을 조락의 계절로만 파악하여 애수에 사로 잡힐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는 문학의 길을 개척해야겠다. 애수니 감상이니 하는 것도 물론 때로는
필요한 것이겠지만, 남들이 달나라를 여행하는 오늘, 우리만이 안이한 데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가을이 되어 나무가 그 잎을 떨어뜨리는 것을 그 나무의 신진 대사지
생병이 다 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 가을 봄을 위한
준비요, 새 생활을 위한 생명력의 보강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다만 피상적으로만 보고서 영탄조에 머물리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좀더 젊어져야겠다. 우리의 문학도 좀더 젊어져야겠다. 지는 잎을
바라보며 애수에 잠기는 감상 문학에서 벗어나, 새봄을 준비하는 낙엽의 내적
생명력을 파악하여 그것으로 충일한 문학을 이룩해야겠다.
문학은 넋두리가 아니다. 푸념일 수도 없다. 그것은 생명감이 약동하는
젊음이어야 하고, 신비를 극복하는 과학이라야 한다. 우리는 이 이상 은일을
미덕으로 삼을 수도 없고, 후퇴를 달관시할 수도 없다. 나아가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 태산보다 더한 장해물이 있다 할지라도 이와 대결하여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야 한다. 서재에 가만히 앉아 창 밖에 지는 잎을 바라보며 한숨이나 지을
것이 아니라, 대지 위에 버티어 서서 대자연의 추이를 관찰하고 과학하고,
그럼으로써 생명력으로 충일한 문학을 이룩해야겠다.
남들이 달나라에 기를 꽂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좀더 경이를 느껴야겠다.
우리가 달을 바라보며 애수에 젖어 있을 때, 그들은 달을 과학했고, 마침내 달을
정복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 좀더 놀라야 하고, 이 사실로써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를 삼아야겠다. 그들은 멀지 않아 대우주를 과학한 새로운
문학을 창조할 것이다.
무기력과 겸허의 미덕이 혼동되던 시대는 벌써 지났다. 애수나 감상으로써
심금을 울리던 시대도 이미 아니다. 정원에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애수에
잠기던 창가에서 떠나야겠다.
단풍도 좋고 낙엽도 좋다. 우리는 감상을 극복하고 거기서 대자연의 섭리를
발견해야 하며, 그것을 문학화해야 하겠다. 지금 말하거니와, 낙엽은 생명의
종식이 아니라 생명력의 보강을 의미한다. 우리는 낙엽에 대한 일체의 기성
관념을 버리고 생명력으로 충일한 새로운 낙엽부를 창조해야겠다.
"최재서편"
최재서(1903__1964)
영문 학자, 문학 평론가. 황해도 해주 출생. 경성 제대 영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런던 대학 수료. 문학 박사. 연세대 대학 원장 역임.
한국 비평 문학에 개척자 가운데 하나인 최재서는 비평의 아카데미화를
이룩해 내었다. 그는 일제 시대의 우리 문학의 성격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해 내었고 논리적인 면에서 주도해 나갔다. 일제 말기에 친일파로
지적되었다가 해방 후에는 영문학에 파묻혀 지냈다.
문학과 인생
인생 오십 고개에 올라서, 그 사이 한 일이 많은 것 같지만, 돌아다보면
실오라기만한 외길이 보일 둥 말 둥, 줄거리 잡아 이렇다 할 아무 일도 없다.
나는 인생의 허무와 무가치를 느낀다. 나는 좀더 충실하고, 좀더 가치 있는 생을
체험하고 싶다. 그럴 때에 나는 베토벤의 교향악을 듣고, 혹은 밀턴의 시를
읽고, 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다.
이 글을 읽어 줄 독자는 대개 20 전의 청년임을 나는 알고 있다. 여러분은
아직 인생의 회고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앞을 내다보며 기쁨과 슬픔을 다같이
희망의 품안에 포옹하면서 전진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앞으로 간혹
문학 작품을 읽어, 인생에 대해서 그 무엇을 반성하게 될 때에, 이 글이 약간의
도움이 될까 해서 붓을 든다.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비교적 현대에 발달한 소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 자주 되풀이된다. 그만큼, 모든 문학 작품이 자연과 인생을 모방하고
반영하여, 현실의 이모저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의 일면이고 전면은 아니다. 어느 작품을 보아도, 거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마치 사진기가 풍경이나
인물을 촬영하듯이, 문학이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지는 않는다. 문학의 목적은
좀더 별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생에서 소재를 선택하다가 그들의
모양을 다소 수정하고 혹은 다시 결합해서 한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문학 작품은, 현실적이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작품 세계는 현실 세계와 따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생을 떠나서 예술이 독립할 수는 없다. 예술가는
그의 소재들을 인생 체험 속에서 구해 올 뿐만 아니라, 만약 그가 진정한
천재라면 그 소재들을 결합하고 조직하는 독특한 방법과 원리까지도 자연에서
배워 온다. 그러니까, 예술 세계는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해서만 성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다. 현실 세계가 있고, 그 곁에 혹은 그 위에
예술 세계가 있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고 반영하면서도, 독자것인 원리 밑에서
자체의 세계를 창조하여 독특한 목적을 수행한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한도에서는 기록이지만, 새 세계를 창조하는
한도에서는 예술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기록면과 예술면을 가진다. 이 두면
중에서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기록과 예술의 두 면을 구비함으로써만 작품은
완전하다. 예술적인 면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록적인 면만을
말하려 한다.
문학을 현실의 기록으로서 볼 때에,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을 쓴 사람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인생을 체험했으며, 또 그 체험을 얼마나 진실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했는가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이 성실하게 인생을 실천해 보지 못한
사람의 글이, 아무리 아름다운 문구를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일평생 성실하게
진리를 실천해 나가는 사람은 퍽 드물다. 진실한 생활 체험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더욱 희귀하다. 우리는 밀턴에게서 그런
희귀한 실례를 본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턴은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어린 밀턴은 줄곧
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이것은 그가 장래에 시인이 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일이 그의 소년 시대의
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문학적 소질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의 지도로 특별히 교육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열두 살 이후로 그는 자정 전에 자 본 일이 별로 없었다. 아직
조명이 불완전하던 그 시대에 어린 사람이 그렇게까지 밤늦도록 공부했다는
것은 건강에 좋았을 리가 없다. 그것은 그가 만년에 실명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근면의 덕택으로,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문학을 비롯하여
철학, 천문학, 물리학 등의 학문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었다.
밀턴의 대학 시대는 순결한 생활로 일관되어 있었다. 그는 그가 믿는
퓨리터니즘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그의 생활 감정이 여러 편의 시 속에
남아 있다. 대학에 들어갈 때에 밀턴은 목사가 될 예정이었지만, 대학 재학 중에
문학으로 전향했다. 그 당시 교회들의 타락을 분개했다는 것도 목사 지망을
단념한 이유의 하나였다. 대학을 나온 뒤에, 그의 앞에 유망한 길이 열려
있었지만, 그는 시골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독서와 시 창작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장래를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문학에 대해서 얼마나 투철한 신념과 열렬한 정신을 품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스물 아홉 살 되던 해에, 밀턴은 더욱 견문을 넓히고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 곳에서 여러 문인, 학자 둘과 상종했고, 또 직접 이탈리아 말로
시를 발표하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갇히어 살던 과학자 갈릴레이와 만난
것도 이 때였다. 이 여행 중에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가 영국을
대표할 만한 장편 서사시를 쓰고자 결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탓소의 서사시
(예루살렘의 해방)과 경쟁해 볼 생각이었다. 전기의 서사시는 16세기 말이
발표되어 근세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국민시로서 온 유럽에 이름이 높았었다.
밀턴도 그런 영국적인 시를 써 보고 실었다. 그래서 주제를 영국 역사에 유명한
아더 왕의 전설에서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시칠리아 섬으로 떠나려 할 때, 본국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 있어, 그는 곧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왕실과
의회 사이에 계속해 오던 알력이 마침내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그 때의 심정을
밀턴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포가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이렇게 쾌락을 위해서 외국에 여행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언제나 양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밀턴의 면목이 여기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본국에 돌아온 뒤에, 밀턴은 형세를 살피면서 여전히 문학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 때에 그의 머리를 점령했던 문제는 여전히 장편시의 창작이었다. 그 때의
그의 포부는 다음 말들에서 엿볼 수 있다.
'고심 노력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일은 나의 팔자라 생각하는데, 그 위에 또
강한 천품이 결합된다면, 후세 사람들을 위해서, 만만히 죽어 없어지지 않을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는 열심히 작품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때의 계획들을
적은 원고가 99편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에 성경에 관한 것이 66편, 영국
역사에 관한 것이 33편이다. 마지막에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선택되면서
실락원이라는 제목이 결정된 것은 1642년이었다.
바로 이 때에, 교회를 장로제로 고쳐 종교와 정치를 철저히 민주화하려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어 국내가 물끊듯 했다. 밀턴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팸플릿을 써 가지고 서재에서 나왔다. 그 후 20년 동안, 그 내란에 직접
참가해서 투쟁했다. 여러 해 연구해 오던 그의 장편서는 어찌 되었던가? 물론
포기되었다. 그렇게 알뜰한 그의 시였지만,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는 서슴지 않고
붓을 꺾는 밀턴이었다. 내란 중에 그는 크롬웰 호민관 밑에서 라틴 말 비서로
있으면서, 국왕 찰스 1세를 단두대로 보내라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여 온
유럽을 진동시켰다. 그는 그의 온갖 지력과 정력을 바쳐 자유 진영을 위하여
싸웠다. 그러므로, 문학에서는 멀어졌었다.
그러나 영국의 왕실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만들려고 일으킨 내란은 밀턴과
그의 동지자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1660년에, 파리에 망명했던 찰스 2세가
다시 영국 왕으로 영접되어, 영국은 왕정으로 복고했다. 혁명 투사들은 모두
붙잡혀서 처단되었고 밀턴도 투옥되었으나 목숨만은 보존되었다. 그의 문학적
재질을 아깝게 생각하는 국왕이 특별히 그를 사해 준 것이다.
이 때에 밀턴의 나이 50, 그는 이상과 더불어 지위와 권세를 잃고, 사면의
적들 속에서 고독과 빈궁에 빠졌다. 그의 가정 생활도 특별히 불행했다. 첫번
결혼에 실패했고, 둘째 번 부인은 사망했고, 그 자신은 완전히 사력을 잃어
맹인이 되었다. 실락원에서 밀턴은 암담한 그 자신을,
'고약한 시대 험한 구설을 만나,
암흑과 위험과 고독에 둘러싸여'
라고 읊고 있다. "실락원"은 이런 환경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눈먼 늙은
시인이 한 구절 한 구절 구술하는 것을 그의 어린 딸이 받아 쓰면, 그 것을
낭독시키어 틀린 데를 고치고, 이리하여 12권 장편시를 읊어 나가는 장면은
참담하고도 엄숙하였다. 무엇이 맹목의 시인을 몰아서 시를 읊게 했던가?
그것은 그가 젊었을 제 약속했던, 만만히 죽어 없어지지 않을 만한 불후의
작품을 후세에 남기겠다는 불붙는 열정이었다.
밀턴은 이 작품 속에다 그의 지식과 학문과 사상과 신념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 특히 왕정 복고 이후에 그가 겪은 가지가지의 쓰라린 감정--실망과 분만,
권세에 대한 반항과, 아첨에 대한 멸시, 하느님의 사명을 다 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희한--요컨대, 그의 인생 전체를 털어 넣었다. 뿐만
아니라, 밀턴은 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일생을 살고 싸우고 고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실락원은 그가 예언했던 대로 불후의 작품이
되었다. 밀턴은 양서를 정의하여 '생명을 넘어 생명으로 길이 전하고자, 대가의
생명 고혈을 향약으로 처리하여 보존한 것'이라 말했는데, 이 말은 그대로 그
자신의 책의 성질을 설명한다.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다만, 그런 사상과
감정은 밀턴의 경우에서처럼 성실하고도 열렬한 인생 체험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다. 러스킨은 그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이것을 진실하고도 유익하다.' 또는 '유익하고도
아름답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말해야 할 그 무엇을 가진다. 그가 알기로는,
과거에 아무도 그것을 말한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말할 사람이 없다. 그는
그것을 분명하고도 음악적으로, 적어도 분명하게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인생을 총결산하는 마당에서,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명백한 사실이라 함을 그는
자각한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 생을 받아 태양의 혜택을 입음으로
인연해서, 천재일우로 알게 된 참다운 지식이며, 참다운 의견이었다 함을
자각한다. 그는 그것을 영원히 기록하고 싶다. 될 수만 있으면 바위에 새겨
두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서--'이것이 나의 최선이다. 그 나머지는 나도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미워했다. 나의 인생은 수증기처럼 사라지고,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나의 눈으로 보았고, 나의 마음으로
알았다. 나에게서 그 무엇이 가치 있다면, 이 책이야말로 당신들이 기억해
줄만한 가치 있는 나의 일부다.
"한흑구편"
한흑구(1909__1979000)
수필가. 소설가. 평양 출생. 미국 템플 대학 신문학과 수료 포항 수산 대학
교수 역임.
30년대에 월간지 '대평양', 문예지 '백광'을 창간. 주재하면서 단편 소설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한 바 있으며 해방 후에는 주로 수필에 전념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정 생활의 애틋함을 그렸다.
옥수수
아내가 거리에 나갔다가 옥수수 두 개를 사 왔다. 하나씩 먹자는 뜻이다.
그러나 옥수수 자루가 얼마나 큰지 반 토막도 다 못 먹겠다. 한뼘 반도
넘으니 양적으로 한 자나 되는 것 같다.
요사이 TV에서 전하던 개량종 수원19나 20 호인 거 같다. 그리고 멀리
강원도 산간 지방의 화전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옥수수를 퍽이나 좋아했다.
키가 2미터 이상이나 자라난 옥수수밭이 길 양쪽에 서 있는 좁은 길로 혼자서
지나갈 때에는 무서운 짐승이나 뛰어나올 것 같아서 머리털이 오싹 일어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옥수수의 이파리들은 야자수의 이파리처럼 길게 뻗어 나무의 양쪽이
늘어져서 춤을 추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병사들이 칼을 빼들고 열을 지어서 몰려나오는 것 같은 무서움도
주었다.
키가 큰 옥수수나무들이 강한 비바람에 줄기가 휘어서 절을 하는 모양을
하였다가도 향일성이 강한 탓으로 다시 태양을 향하여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나의 고향, 평양의 근방에는 옥수수를 전문으로 농사짓는 동리가 많았다.
대동강을 건너 동쪽에 있는 사동과 미림이 그 대표적이고, 밭이 많은
이북에서는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옥수수를 심어서 식량을 보탰다.
사동에는 내 누님이 살고 있어서 방학 때이면 으레 놀러 갔고, 그 곳의
옥수수는 좀 일찍여서 여름 방학 달인 8월이 한창이었다.
국민 학교 시절부터 나는 옥수수를 많이 먹었고, 또한 좋아했다.
옥수수의 나무는 키가 크고, 후리후리해서 멋이 있지만, 야자 이파리같이 길게
늘어진 것도 보기가 좋고, 또한 그 열매야말로 어느 열매와도 비길 수
없으리만큼 아름답고, 탐스럽고, 우아했다.
푸른 식물성 섬유의 천 조박지 같은 껍질로 싸여 있는 열매를 한 갈피 한
갈피 벗기어 가면, 마지막 속잎은 희고 깨끗한 모시 속옷과 같이 씌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것마저 벗기면 파릿하고 흰 수염들이 열매를 보호하는 듯이
감싸고, 품어 주고 있었다.
흰 명주실과 같은 수염들을 곱게 뜯어내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순스럽고,
탐스러운 옥수수알들이 곱게 줄을 지어서, 지붕 위에 있는 기왓골같이, 가지런히
박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참으로 황홀할 지경으로 아름다웠다.
처녀의 빨간 입술 속에서 진주알같이 빛나는 이빨보다도 더 빛나고
자연스러웠다.
하느님의 섭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신기한 조각이라고
생각하였다.
탐스러운 옥수수를 쪄서 먹어 보면 아무런 자극성이 없이 담백하면서도, 달고,
고소하고, 향긋하였다. 한알 한알 따먹어도 맛이 있고, 누에 모양으로 길다랗게
뜯거나, 이빨로 마구 뜯어 씹어도 그 맛은 한없이 달고, 고소하고, 향긋하였다.
열 자루를 그냥 계속해서 뜯어 치우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옥수수를 가공해서 먹는 방법이 많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여름에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옥수수묵이다.
옥수수알을 맷돌에 갈아서 된죽을 쑤고, 찬 우물물을 자배기에 채운 다음,
여러 개의 잔 구멍이 뚫린 바가지로 된죽을 찬 물 속으로 뚝뚝 흘러내려서
식히는 방법이다.
이것을 옥수수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올챙이같이 생겼다 해서
올챙이묵이라고도 한다.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는 미국에서는 이 담백한 옥수수를 여러 가지로
가공해서 식품으로 많이 사용한다.
옥수숫가루를 비롯해서, 설탕, 전분, 과자 등과, 튀김과 야채 기름 등 많은
종류의 식품을 가공한다.
그러고도 남는 옥수수는 소, 돼지의 가축 사료로 쓰이고, 그러고도 또 남는
것은 외국으로 수출하는 형편이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순한 이들의 말을 들으면, 북한에서 살고 있는 서민들은
주식으로 옥수수를 배급받아서 살아가기 마련이고, 이것도 부족하게 주어서
수수죽을 쑤어 먹는 형편이라고 한다.
아무리 옥수수가 맛이 좋다고 해도 매일같이 주식을 삼아 먹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서 죽을 쑤어서 먹어야 한다니, 그 어렵고 슬픈 사정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식생활 사정이 이러하다니, 간장, 고추장은 어떻게 담가 먹으며, 채소나
고기는 구경도 할 수 없을 것이 뻔한 노릇이다.
우리 속담에 '굶는 것같이 서러운 일이 없다.'고 했는데, 북한에서는 무슨
까닭으로 백성들을 굶겨야 하나.
아내가 사 갖고 온 강원도산 수원 19호의 큰 옥수수 자루를 들고, 한알 한알
뜯어서 씹으며, 옛 추억에 잠겨 본다.
야자나무 수풀과 같이 우거져 서 있던 옥수수나무들의 긴 이파리들이
너울너울 팔들을 벌리고 춤을 출 때면, 손가락을 벌린 듯이 높이 피어난
옥수수꽃의 꼭대기로 수많은 풍뎅이들이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옥수수의 시원한 그늘 속에 뚫린 길을 혼자서 20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다니던 어린 시절이 아름다운 풍경화와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웠던 옛 시절을 되씹는 듯이 옥수수의 반 토막을 맛이 있게 뜯어먹다가
오늘의 고향을 생각하면서 그만 내어놓고 만다.
석류
내 책상 위에는 몇 날 전부터, 석류 한 개가 놓여 있다.
큰 사과만한 크기에, 그 빛깔은 홍옥과 비슷하지만, 그 모양은 사과와는
반대로 위쪽이 빠르고 돈주머니 모양으로 머리 끝에 주름이 잡혀져 있다.
보석을 꽉 채워 넣고 붙들어매 놓은 것 같다.
아닌게아니라, 작은 꿀단지가 깨어진 것같이 금이 비끼어 터진 굵은 선
속에는 무엇인가 보석같이 빤짝빤짝 빛나는 것이 보인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석류의 모양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본다. 매끈한
사과와는 달리 무엇에 매를 맞았는지 혹과 같은 것이 울툭불툭한 겉모양 그
속에는 정녕코 금은보화가 꽉 채워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나는 아까워서 아까워서 석류 한 개를 놓고 매일같이 바라만 보고 있다. 행여,
금이 나서 터진 그 석을 쪼개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석 주머니 같은 이 석류 한 기를 구하기에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나는 그것이 꽃 피는 봄부터 비바람이 부는 여름 장마철 속에서도, 또한
새맑은 가을 하늘에 추석달이 기울 때까지도, 얼마나 오랜 나날을 그리운
정으로 보고 싶고 갖고 싶은 꿈을 꾸었었나.
"할머님, 추석도 지나고 했으니, 이젠 그 석류 하나 따 주세요."
나는 석류나무집 할머니에게 이렇게 애걸했으나, 할머니는 또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아니 약에 쓴다면서 벌써 따아? 찬서리를 맞고, 터져서 금이 나야 약이 되는
거지! 가래도 잘 삭고, 오랜 해수병엔 특효지. 몇 날만 더 참아요."
이렇게 한 해의 철이 다 기울어져서야, 끝내 구해 온 귀한 석류 한 개가 내
책상 위에, 내 눈앞에 고요히 놓여 있다.
석류나무는 소아시아가 원산으로 살구나무보다는 키가 작은 관상용의 낙엽
교목으로서, 이상한 꽃과 열매를 맺는 특색을 가진 나무다.
가지가 꾸불꾸불하고, 터실터실하고, 대추나무같이 삐죽삐죽한 가지 같은
메마른 작은 가지들이 이파리도 없이 여기저기 돋아 나온다.
석류나무는 물론 목재도 될 수 없지마는, 과실을 맺는 나무치고는 작은 편에
들고, 꽃도 열매도 많이 맺지 못한다.
그러나 그 꽃은 양귀비꽃같이 붉고, 아름답고, 그 꽃받침은 무화과와 같이
살지 누두형으로 되어 있으며, 나중엔 석류의 귀한 과피가 된다.
봄이 지나고, 장미의 계절이라는 6월이 되면 석류나무는 정열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장구같이 생긴 꽃받침 속에 선홍의 꽃잎으로 꽉꽉 채워서 그 둘레를
오붓하게 피어나온다. 꽃도 되고 또한 열매도 되는 이 육중한 꽃은 7월의
장마로 반 이상이 땅에 떨어져 어린애들의 손가락에 골무 노릇을 하기도 한다.
10월이 지나고 하늘이 코발트색으로 높아 가면, 주먹 같은 빨간 석류
열매들이 검푸른 이파리들 속에서 뻔쩍뻔쩍 빛나는 왕관을 쓴 듯이 빛나고
있다.
석류의 머리 쪽은 별과 같이 삐죽삐죽한 왕관의 모양을 하고 있고, 그것들이
가을의 된서리에 쭈그러지면 돈주머니를 잘라맨 듯한 모양을 한다.
8월의 태양과 뜨거운 더위에서 정열을 다 뿜어 내지 못했는지 석류의 조롱박
같은 얼굴 위에는 매를 맞아서 부어오른 것같이 혹이 나와서 울툭불툭
매끄럽지가 않다.
나는 미국의 이미지스트인 여류 시인 힐다 둘리틀의(더위)라는 시의 몇
구절을 연상해 본다.
더위
이 짙은 공기를 통해서
열매가 떨어질 수 있을까--
배들의 끝들을 뭉툭하게,
또한 포도알들을 동그랗게,
치받쳐 올리는 이 더위 속으로
열매가 떨어질 수 있을까.
둘리틀의 (더위)라는 시를 읽으면, 모든 열매가 8월의 치받치는 더위 속에서
뭉툭하고 매끈하게 된다고 그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석류는 열매 속에 무수한 보물의 정열과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그
겉모양까지가 울툭불툭 튀어나오다 못해서 찢어지고, 깨어져서 크게 금이 나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된다.
나는 석류를 손에 들고 깨어져 금이 난 그 속을 들여다보다가, 그 자수정
같고, 금강석 같이 빛나는 속을 쪼개 본다. 벌집같이 오몽고몽한 갈피 속마다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석류씨(알)들이 꽉 차 있다.
그 수정 같고, 금강석 같은 석류알을 하나 떼어서 입에다 물고 혀로 굴려
보면서 주요한 씨의 시집 "아름다운 새벽"에 실렸던 "앵두"의 일절을 생각나는
대로 한 번 되새겨본다.
5월에 무르익은 앵두 한 알,
입에 넣고 터질까 봐
그냥 혀로만 굴려 봅니다.
입에 넣고, 혀로 굴려 보고, 씹어 보는 그 맛, 입 속, 가슴 속, 머릿속까지
시원하고, 새틋한 그 맛.
온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가을의 된서리 속에서 과피가 터질 때까지 정열을
간직하고, 또 터져나온 그 기개의 참되고, 아름다운 결정이여.
나는 책상 위에 쪼개 놓은 석류알들을 두루두루 바라보고 있다.
"이상편"
이상(1910__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생. 경성 공고 졸업. 총독부 내무부
건축과 근무,
특이한 소재와 특이한 기법, 특이한 행적으로 이채를 띠었던 이상은 수필에도
뛰어났다. 독특한 안목과 감성으로 사물을 바라본 그의 수필은 실험적인 시나
황당한 소설보다 훨씬 짙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권태
1
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댑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도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나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녘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나는 최 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 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 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최 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나 지난 후니까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 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두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물에 가 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이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자세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
2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 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 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렁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실색한다. 그것은 남루를 갈기갈기 찢은 것과
다름없는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하고 추악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민절 하지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 된 것이리라.
일할 때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겨울 황원처럼 거칠고 구지레하고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이 범에게 물려 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전신주 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흥분할 수 있으랴.
팔봉산 등을 너머 철골 전선주가 늘어섰다. 그러나 그 동선은 이 촌락에 엽서
한 장을 내려뜨리지 않고 섰는 채다. 동선으로는 전류도 통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방이 아직도 송명으로 어둠침침한 이상 그 전신주들은 이 마을 동구에
늘어선 포플러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3
대싸리 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뎅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그런 웅뎅이가 있다. 내 앞에서 물은 조용히 썩는다.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 왔으니 그저 들었달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 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이 작소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한 겸손한 겁쟁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은 이 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 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 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 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새악씨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 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는 이
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 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 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 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 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 본다. 밤낮 다니는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 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기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알 길이 없다.
4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소위 승합 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뎅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 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수구를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이면? 배인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워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아해들에게도 젊은 촌부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 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 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 집 주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 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넝쿨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넝쿨의 뿌리 돋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자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어찌했으면 좋을까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 보았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5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들을 원숭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은 중의 웅뎅이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한다. 무수한 오점이 방향을 정돈해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 속에 이런 앙증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벌러지를 먹겠지.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벌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 있지 않는다. 저무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뎅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뎅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 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고 웅뎅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 학자를 위한 표지이다. 야우 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하는 마치 폐병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우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렀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 해 보임이리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해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6
길 복판에서 6,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의 반나체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둘른 베, 두렝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 6세 내지 7, 8세의 '아이들'임에도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 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풀을 뜯어 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 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충겅충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 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장난감 하나 없는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데기씩 누어 놓았다. 아--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7
날이 어두웠다. 해저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 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뎅이 속을 실로 송사리 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 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 떼가 준동하고
있나 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 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 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벌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갔다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 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권태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 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 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한 판 두자.
웅뎅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피천득편"
피천득(1910__)
수필가. 시인. 영문 학자. 서울 출생. 중국 호강 대학 영문과 졸업. 하버드
대학 수학.
피천득은 한국의 서정적 수필의 대표자이다. 생활 속에서 명상의 표적을 찾아
내어 섬세하면서도 다감한 문장으로 그려 낸 그의 수필은 '수필의 전형'으로
지목되고 있다.
구원의 여상
구원의 여상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헤나의 '파비올라'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좁은 길이라고 믿는
알리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블타오르던 과거를, 쌓이고 쌓인 재가 덮어
버린 지금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도 되겠지요. 언제라도 볼일이나 유람차 님므
부근에 오시거든 에그비브에도 들러 주세요.' 이런 편지를 쓴 줄리에트도 구원의
여상입니다.
지나가 날의 즐거운 회상과 아름다운 미래의 희망이 고이 모인 얼굴.
그날 그날 인생살이에
너무 찬란하거나 너무 선스럽지 않은 것
순간적인 슬픔, 단순한 계교
칭찬. 책망. 사랑. 키스. 눈물과 미소에 알맞는 것
워즈워스의 이런 여인도 구원의 여상입니다.
여기 나의 한 여상이 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늘같이 맑습니다. 때로는
흐르기도 하고 안개가 어리기도 합니다. 그는 싱싱하면서도 애련합니다.
명랑하면서도 어딘가 애수를 깃들이고 있습니다 원숙하면서도 앳된 데를
지니고, 지성과 함께 한편 어수룩한 데가 있습니다. 걸음걸이는 가벼우나 빨리
걷는 편은 아닙니다. 성급하면서도 기다릴 줄을 알고 자존심이 강하면서
수줍어할 때가 있고, 양보를 아니 하다가도 밑질 줄을 압니다.
그는 아름다우나, 그 아름다움은 사람을 매혹하게 하지 아니하는 푸른
나무와도 같습니다.
옷은 늘 단정히 입고 외투를 어깨에 걸치는 버릇이 있습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나 가난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파이어플레이스에 통장작을 못
피울 경우에는 질화로에 숯불을 피워 놉니다. 차를 끓일 줄 알며, 향취를 감별할
줄 알며, 찻잔을 윤이 나게 닦을 줄 알며 이빠진 접시를 버릴 줄 압니다.
그는 한 사람하고 인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바라다보는 일이 없습니다.
그는 지위, 재산, 명성 같은 조건에 현혹되어 사람의 가치 평가를 잘못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예외적인 인사를 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
합니다. 아첨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남이 감당하지 못할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사치하는 일은 있어도 낭비는 절대로 아니 합니다. 돈의 가치를
명심하면서도 인색하지 아니합니다. 돈에 인색하지 않고 시간에 인색합니다.
그는 회합이나 남의 초대에 가는 일이 드뭅니다. 그에게는 한가한 시간이
많습니다. 미술을 업으로 하는 그는 쉬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오래오래 산책을 합니다.
그의 그림은 색채가 밝고 맑고 화폭에 넓은 여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나, 인생의 전부라고는 생각지 아니합니다.
그는 마음의 허공을 그대로 둘지언정 아무것으로나 채우지는 아니합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사랑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서는 아니 될 남의 호의를 정중하고 부드럽게 거절할 줄 압니다.
그는 과거의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아니합니다. 자기 생애의 일부분인
까닭입니다. 그는 예전 애인을 웃는 낯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몇몇
사람을 끔찍이 아낍니다. 그러나 아무도 섬기지는 아니합니다.
그는 남의 잘못을 이해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정직합니다. 정직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큰 매력입니다.
그는 자기의 힘이 닿지 않는 광막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울로 싶을 때 울 수 있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고갈하지
않는 윤기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유머가 있고, 재치있게 말을 받아넘기기도 하고
남의 약점을 찌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는 때는 매우 드뭅니다. 그는 한
시간 내내 말 한 마디 아니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라도 그는 같이 있는
가람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는 기쁨을 갖게 합니다.
성실한 가슨, 거기에다 한 남서의 머리를 눕히고 살 힘을 얻을 수 있고,
거기에서 평화롭게 죽을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 영혼의 존엄성, 진리의 미, 사랑과 기도, 이런 것들을 믿으려고
안타깝게 애쓰는 여성입니다.
인연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았다. 스위트피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1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가톨릭 교육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3,4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 학교 1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 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M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 때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 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았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셀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10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M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치하를
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가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20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 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10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10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수필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 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 있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 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읽는 사람 얼굴에 미소를 띄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 인간성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 무엇이나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 때의 심정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룻이나 클라이맥스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차가 방향을 가지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오필리아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찰스 램은 언제나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 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다가, 그런 여유를 가지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10분의 1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유순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암만 되불러도 나오지를 않으니
전신줄이 끊어졌나 보다. 나는 어두운 강가로 나왔다. 멀리서 대포 소리가 들려
온다. 이따금 기관총의 이를 가는 소리도 들린다. 잡북 쪽을 바라다보니
볼케이노 터지는 남양의 하늘보다 더 붉다. 그리고 쉬일새없이 번개 같은 불이
퍼졌다 스러진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겨울
방학이므로 학생들은 다 집에 돌아가고, 나하고 남양에서 온 사람 몇만이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 이불을 쓰고 드러누웠다. 여전히 대포 소리,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온다. 여러 번 몸을 뒤채도 잠은 들어지지 않았다. 아까
전화로 들은 그의 음성이 나를 괴롭게 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총에 맞아서
쓰러지는 것 같기도 하고 불붙은 병원에서 어쩔 줄 몰라 애통하는 양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나는 서가회라는 곳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리 심한 병은
아니었으나 기숙사에는 간호해 줄 사람이 없어서 입원을 하였던 것이다.
요양원이 있는 곳은 한적한 시외였다. 주위에는 과수원들이 있었고 멀리
성당이 보였다.
병실이 많지 않은 아담한 이 요양원은 병원이라기보다는 별장이나 작은 호텔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흑단 화장대 거울에 정원의 고목들이 비치는
것이었다. 간호부들이 아침 찬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들 얼마나
고적하였었을까.
내가 입원한 그 이튿날 아침 노크 소리와 함께 깨끗하게 생긴 간호부가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하고 그는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그 때의 나의
놀람과 기쁨은 지금 뭐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 때 그가 가지고 들어온 오렌지
주스와 삼각형으로 자른 얇은 토스트를 맛있게 먹은 것이 가끔 생각난다.
마멀레이드도 맛이 있었다. 나는 그 후 어느 레스토랑에서도 그런 오렌지
주스와 토스트를 먹어 본 일이 없다.
그는 틈만 있으면 내 방을 찾아왔다. 황해도 자기 고향 이야기도 하고 선물로
받았다는 예쁜 성경도 빌려 주었다. 자기는 '누가 복음'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타고르의 "기탄자리"를 나에게 읽어 준 때도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동이 터 갔다. 교문을 나서니 찬바람이 뺨을 에인다. 시외요
때가 새벽이므로 한적도 하겠지마는, 길에 공장 가는 노동자 하나 보이지
아니한다. 싸움을 중지하였는지 대포 소리도 아니 들리고 사면이 모두
고요하였다. 나의 마음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연상할 만치 고요하다.
별안간 어디서인지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히 들린다. 쳐다보니 비행기들이 열을
지어서 잡북 방면을 향하고 날아간다. 용기를 내느라고 두 주먹을 쥐고 걸레
같은 보따리 진 사람, 누더기 같은 이불 멘 사람, 한 아이는 앞세우고 한 아이는
안고 또 한 아이는 끌고 가는 여인--피난민들이다. 그때 본 산 아이의 둔한
눈들이, 여인네의 해쓱한 눈들이 지금도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길에는 차차로
사람이 많아졌다. 사람이 황포강 물결 같이 흐른다. 푸른 옷 입은 사람들의
푸른 물결! 나는 그들 속에 섞여서 가는 동안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만약 불행히 그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나를 잘못 일본 사람으로 본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맞아 죽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아무거라도 얼른 잡아 타려고 하였으나 전차도 버스도 불통이었다. 가든
브리지에 다다르니 다릿목에 철망으로 만든 방색이 두 겹으로 막혀 있고, 그
뒤에는 흙을 담은 전대를 쌓아 놓았다. 그리고 공공 조계 미국 군인들이 총창을
낀 총대를 겨누고 있다. 기관총도 갖다 놓았다. 나는 어떻든 북사천로로 갈
작정이므로 빠둔조를 건너지 않고 사천로교로 갔다. 그 다리에도 역시 견고한
방색을 시설하여 놓았다. 북사천로를 내려다보니 그 곳이야말로 수라장이다.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몰려오는 사람들로만 가득 찬 그 길을 내려다보며
나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었다. 밀물같이 밀려오는 그 군중과 정면 충돌을
하면서 목적지까지 갈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하고
걷기 시작하였다. 벌써 숨이 막힐 지경이요 정신이 아뜩아뜩하여진다. 빼--ㅇ
소리가 났다. 발을 주춤하니 바로 내 앞으로 오는 노동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엎어진다. 이어서 총 소리가 났다. 나는 얼떨결에 사람들의 줄기를 옆으로 뚫고
가로터진 샛길로 빠져나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상점 속에 숨어
있던 편의대 하나가 나를 일본인으로 보고 쏜 것이 빗나가서 그 노동자를
죽였는지 모른다. 골목으로 뛰어들어온 나는 뒤도 아니 돌아보고 달아났다.
육증한 바퀴 소리가 들려 온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그리로 쏠렸다. 탱크 두
대가 시멘트 바닥 위로 궁굴어 왔다. 잡북 전선으로 가는 것이다.
'비행기다!' 사람들은 일제히 담모퉁이로 가서 달라붙었다. 궁굴어가던
철갑차도 땅에 붙어 버렸다. 소란하던 거리가 고요하여졌다. 비행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사람 모양으로 마음은 급하고 걸음은 아니
걸렸다. 간신히 소방서 앞을 지나서 인적 그친 거리를 걸어서 북사천로로 돌아
나가려 할 때, 일본 병정 하나가 총대를 내밀며 달려든다. 나는 일본말은 알아도
입술만 떨리고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적막한 아스팔트 위에는 불규칙하게 밟는 나의 발자국 소리만 울리었다.
부상당한 병정들을 실은 적십자 자동차 하나가 지나간다. 아마 그가 있는
병원으로 가나 보다 하고 바라보았다. 빨간 불길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위로
안개 같은 연기가 퍼져 오른다. 불자동차 소리도 났다. 북사천로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덩이 튀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일본 육전대 방색
가까이 왔을 때 패--ㅇ 하고 탄자 소리가 나더니 재각재각 다시 총 재는
소리가 난다. 이어서 기관총을 내두른다. 나는 그 자리에 섰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5분이 지났을까, 총소리는 그쳤다. 나는 그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시내 클리닉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위험한 곳에를 어떻게 오셨어요."
그는 나를 자기 일하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총 소리 대포 소리가 연달아 들려
온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임으로나 인정으로나 환자들을 내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바라다보았다.
상해 사변 때문에 귀국한 지 얼마 후였다. 춘원이 "흙"의 여주인공 이름을
얼른 작정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를 생각하고
'유순'이라고 지어 드렸다. 지금 살아 있는지 가끔 그를 생각할 때가 있다.
"안수길편"
안수길(1911__1977)
소설가. 호는 남석. 함남 함흥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수학.
초기에는 만주에서 주로 농촌 소설을 썼고 해방 후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더듬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특히 장편 "북간도"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바쳐서 완성한 대하 소설로 4대에 걸친 겨레의 수난사를 그린 문제작이다.
수필에서도 깔끔하면서도 격조 놀은 품격을 보여 주었다.
일하는 행복
알랭이 그의 "행복론"에서, '파리의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언제 생각을 해 보아도 재치 있고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기하지 않았던 사건들이
뒤를 이어 기다리고 있고, 직책상 그것을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할
일이 없어 하품을 하거나 적적한 느낌이 들 때는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란 일을 하는 데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사실, 일에 열중하고 있노라면, 몸과 마음에 일종의 리듬이 생겨 쾌적한
느낌을 맛볼 수 있고, 일한 자리가 생기게 되므로, 역시 일종의 정복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더구나 특정한 일을 끝마쳤을 때의 쾌감은, 일이 주는
일련의 행복감의 절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행복감을 맛볼 수 있게 하는 일을 싫어하는 본능 같은 것이
사람에게는 있다. 게으름이 그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이 게으름의 검은
흐름은, 마치 물이 낮은 데로 한없이 흐르게 마련인 것처럼, 걷잡지 않으면
끝가는 데를 알 수 없게 되고, 마침내는 일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감에 영영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불행한 사회요, 이런 사람들이 많은 나라 역시 불행한 나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으로서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게으름의 검은
흐름에 둑을 쌓고 일에 열중해야 함은 물론, 사회나 나라를 위해서도 일하는
기풍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이런 풍조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음에랴.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이라고 하면 흔히
육체적인 것만을 생각하거나, 혹은 물질적 보수만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물론, 정신적 노동의 경우에도 육체적 노동의 요소가 전연 없는 것이
아니요, 또 일에는 대체로 물질적 보수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만이 일이라거나, 일에는 반드시 물질적 보수가 따른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이 공부로 책을 읽는 것은 학생으로서는 훌륭한 일이나
육체적 노동은 아닌 것이요, 일인 공부를 했다고 해서 학생이 보수를 받는 법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일이란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보수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어쨌든 각자가 해야 할 바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각자가 해야 할 바에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달려들어 열중하는 습관을 특히
학생들은 길러야 할 것이다. 이런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매일 일정 분량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이란 처음 달라붙을 때에는 싫고 신명이 나지
않으나, 견디고 그냥 밀고 나가는 사이에 리듬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요, 리듬이
생기게 되면 비로소 행복감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로댕도 덮어놓고 일을 하지고 말했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언제 영감을 기다려
일에 달라붙겠는가 하고 말했다. 스탕달도 매일 일정량의 일을 규칙적으로
했다고 스스로 써 놓고 있다.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겨 놓은 사람들의 일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우선
달라붙는 것이요, 매일 끊임없이 일정량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정비석편"
정비석(1911__1991)
소설가. 평북 의주 출생. 일본 니혼 대학 문과 중퇴.
통속적인 신문 소설로 대중의 인기를 끈 바 있는 정비석은 흔히 예정 소설만
쓴 것으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그 문장의 점착력이나 심리, 상황의 뛰어난
묘사는 그를 수필 문학에 있어서도 많은 작품을 남기게 하였다. "산정 무한"은
금강산 기행문의 일부인데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산정 무한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 해선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들을 대면하려고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반 후 단장 짚고 험난한 전정을 웃음경삼아 탐승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 산악이 열병식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의 색소는 홍!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은 붉을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이 있고, 녹이 있고, 황이 있고, 등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색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하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이다. 장안사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만으로는 미흡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 저편의 존재인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 부앙하여 천지에 참괴함이
없는 공명한 심경을 명경지수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을 발 밑에 굽어보며 반공에 외연히 솟은 층암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유무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할 일인가?
신라조 최후의 왕자인 마의 태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를 명경에 영조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하실 몸에 마의를 감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이 말하는 전생의 연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처럼 막아 서는 웅자가 석가봉, 뒤로 봐야 협착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
몸에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을 길잡이에게
들어 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 같이 유수한 수목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요원 같은 화원이요, 벽공에 외연히 솟은 봉봉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
난만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화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같이, 우러러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 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 수렴폭을 완상하며, 몇십 굽이의 석계와 목잔과 철삭을
답파하고 나니, 문득 눈앞에 막아서는 무려 3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5천 척의 망군대--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은 바로 지호지간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 할거하는 군웅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천인단애, 무한제로 뚝 떨어진 황천계곡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 단장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의 여사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 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을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을 풀고 마하연암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로 30명은 됨직하다. 이런 심산에 웬
중이 그렇게도 많을까?
한없는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옛 글 그대로다.
노독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등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 송이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여,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바람 소리와 물 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는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폼이,
춘향이 태형 맞으며 백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 쓴 장화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가는
카추샤의 뒤를 네프 백작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 갔다.
자꾸 깊은 산 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은제, 금제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 할 수 없다. 우장 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일지 광풍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를 내며 운무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 가며 짜 놓은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는 꽃보다 단풍이 배승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우세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 속에서
홀현홀몰하는 영봉을 영송하는 것도 과히 장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로 내리붓는다. 만 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객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덧 우박으로 변해서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들고 금시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다. 용호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노하신 것일까?
경천동지도 유만부동이지, 이렇게 만상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장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변환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이라는 암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 외, 해
삼 금강을 일망지하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 척을
가하고 오연히 저립해서, 만학천봉을 발 밑에 끓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에 군립하는 쾌승 장군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휜 자작나무의 수해었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 맺혀 있는 용마석--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철책도 상석도 없고, 풍림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된 태자의 애기 용마의 고영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한 백화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
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 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재천이라. 천운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 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 년도 수유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움큼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나의 참회록
지금부터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어느 잡지사에서 나에게
'선생님이 만약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에는 어떤 직업을
택하시겠습니까?'하고 질문해 온 일이 있기에 나는 서슴지 않고, '인생을 다시
한 번 살게 되더라도 나는 역시 소설가가 되겠소.'하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경과한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나의 생각에는
별로 변함이 없다.
여기까지 읽어 주신 독자들은 문학에 대한 나으이 정열을 높이 평가해 주실지
모르겠으나 사실대로 밝히고 보면 별로 그렇지도 못했다. 나는 60평생을 소설
쓰는 일로만 살아 온 관계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너무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재생하더라도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극히 타당적인
심리에서 그런 대답을 했을 뿐이다.
사실 나는 중학생이던 열네 살 때에 문학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60을
넘어선 오늘까지 문학 이외의 길에는 별로 발을 들여놓아 본 일이 없었다. 굳이
있었다고 하면 해방 직전에 5년 가량 신문 기자 생활을 한 일이 있었고, 해방
후에는 대학 강사로 이태 가량 재직한 일이 있었으나, 그것도 타의에 의한 임시
방편이었을 뿐이지, 나 자신의 의사로서 그런 일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소년 시절에 문학에 한번 뜻을 둔 이후로 60이 넘는 오늘날까지 문학의
길만을 외곬으로 걸어왔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견스러운
일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까지 별로 신통한 작품을 남겨놓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나를 소설가로 취급해 주는 것은 그만큼 연공을
쌓아 온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인생의 업적이나 성실성 같은 것은 반드시 시간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두고 한 가지 일에만 종사해 왔다 하더라도 그
행위에 정열과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낭비해
버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문학을 창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온갖 정열을 기울여 창작을
성실하게 꾸려나간다 하더라도 작품 하나를 제대로 남겨놓기가 어려운 판인데,
하물며 특출한 재능도 없는 사람이 문학을 합네 하고 엄벙덤벙 세월만 보냈다면
그야말로 취생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날까지 40년간이나 문학을 해 온 나 자신의 작가적인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나는 문학을 합네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문학을 항상 배신하면서
살아 왔다. 8.15해방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하룻밤 사이에 예수를 배반한 일이 세 번이나 있은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거니와, 나는 한평생 문학에 집착해
오면서도 8.15에서 6.25를 거쳐 4.19에 이르는 15년 사이에 문학을 세
번씩이나 포기하려고 했었으니, 그 한 가지만 보더라도 문학에 대한 나의
성실성이 얼마나 부족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디 나는 생활의 방편으로서 문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38이북이 고향인
관계로 모든 재산을 공산도배들에게 빼앗겨 버려서 지금은 알거지가 되었지만,
8.15이전에는 먹고 살아가는 데는 별로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문학이라는
것을 취미로 시작하였다. 더구나 일제 말기에는 간악한 일제가 우리네의 글과
말을 말살시키려고 했기에, 나는 그에 대한 심리적인 반발이 느껴져서 굳이
문학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8.15해방 후에 세상이 한동안 혼란에 빠져 있다가, 얼마 후에는
38선이라는 것이 생기며 모든 재산을 일조일석에 빼앗기게 되고 보니, 그때에는
문학에 대한 애착보다는 당장 처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할 일이 큰 걱정이었다.
지금 40 미만의 젊은이들은 8.15 직후의 우리네 사회의 혼란상 같은 것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우리라. 그 당시는 신문이라는 것이 겨우 타블로이드판으로
4면이었고, 잡지 같은 것은 제대로 나오는 것조차 없었으니, 글을 써서 밥을
먹어 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생활의
방도를 다른 데로 택해야 할 판인데, 나는 웬일인지 월급쟁이 같은 것은
생리적으로 싫었다. 그야 물론 학교 선생이나 신문 기자 같은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먹고 살아가기 위해 이왕 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나설 바에는 돈을
벌기 위해 장사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장사를 하자면 밑천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나는 장사 밑천을 마련해
보려고 한동안 동분서주했었다. 그러나 나에게 장사 밑천을 대 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문학을 포기한 채 한동안 장사꾼이 되려고 미쳐 돌아가다가
때마침 모 고등 학교와 모 대학에서 전임 강사가 되어 주기를 간청하는 바람에
생리에 맞지 않는 학교 선생님 생활을 2, 3년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로부터 몇 해 후인 6.25 직전에 사회가 다소 안정되어 문필
생활이 가능하게 되자, 나는 일단 배반했던 문학의 길로 다시 돌아왔었다.
그것이 문학에 대한 나의 최초의 배반이었다.
문학을 두 번째 배반하게 된 것은 6.25사변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서울의 한복판인, 수하동에 살고 있었는데, 1.4후퇴를 하게 되자
주위의 사람들은 저마다 남부여대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가건만, 나만은
돈이 한푼도 없으니 엄동설한에 어린 자식들을 다섯이나 데리고 어디고 떠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중공군과 인민군이 물밀듯 몰려올 서울 한복판에 그냥
버티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9.28 수복 이후에 국군이 북진하는 바람에
나는 소위 종군 작가로서 50여일 간을 일선으로만 뛰어다니다가 급히 후퇴하는
바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 사정이 그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은 한강 건너 상도동 일가집에 피신을
시키기로 하고 나 혼자만 피난길에 올랐다. 말이 피난이지 가족을 그냥 남겨
두고 피난길에 오르는 나는, 살려고 떠나는 길이 아니라 죽을 곳을 찾아 나서는
심정이었다.
혼자서 피난길에 오르자니 가슴이 찢어지게 괴로울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처자식을 그 꼴로 만들게 된 것도 역시 문학에 집착했기 때문이라 싶어서, 나는
금후에 다시 평화의 날이 오더라도 문학만은 완전히 포기해 버릴 결심이었다.
그러기에 평소에 애용했던 '파카'와 '워타만' 두 자루의 만년필조차 의식적으로
내버리고 떠났다. 그런 마물을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는 언제 또 문학의 길에
되돌아오게 될지 모르리라 싶어서 문학과는 영영 인연을 끊으려고 만년필조차
내버린 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기괴한 운명인지, 대구까지 피난을 내려가 직장을 구하려고
하니 나를 채용해 주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반면에, 신문, 잡지사에서는
소설을 써 달라고 성화같이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얼마 후에는 가족까지 대구에서 합류하게 되고 보니 나는 당장 쌀 한
봉지를 사기 위해서도 그처럼 굳게 배신했던 문학의 길을 다시 걸어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문학을 세 번째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은 4.19 직후의 일이었다.
4.19 직후에 나는 한국 일보에 (혁명 전후)라는 연재 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나흘 만에 1천 6백여 명의 연세 대학 학생들에 의하여 소위'데모'라는 것을
당하였다. 나는 4.19학생 혁명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고 내가 목격한 그 당시의
생생한 사실들을 소설 속에 그대로 기록하여 후일에 역사적인 재료로 제공하려
했건만, 워낙 극도로 흥분한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의 오해로서 나는 본의 아닌
핍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때만은 문학을 단연코 포기해 버릴 생각에서 "이조 실록" 전질을
비롯하여 책을 모조리 팔아 가지고 외국 여행을 한 번 다녀온 뒤에, 모 신문에
"문학과 이별한다"는 선언문까지 발표해 버리고 다른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외우 송지영 형이 세계적인 광고 대리점인 일본의 '덴스' 한국
대리점을 맡기로 되어 있었기에 나도 송 형과 함께 그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던
것이다.
국제 광고를 국내에 유치해 오자면 국내 신문들과 미리 배면 계약이 있어야
하므로, 나는 국내의 10여 신문사와 계약까지 맺었다. 사업이 순조롭게
진척되어 전망은 매우 밝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나의 운명의 탓이었는지, 사업 기반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뜻하지 못했던 5.16군사 혁명이 터졌다. 그래서 모처럼의 공들인
탑이 일조일석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혁명 정부는 외국의 광고 대리점을
인정하지 않는데다가 그 사업의 총책임자였던 송지영 형이 다른 사건으로
형무소에 잡혀 들어가는 바람에 사업도 송두리째 거덜이 난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사회적인 변혁이 있을 때마다 문학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였고,
더구나 세 번째는 '문학과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고 만천하에 선언까지
해놓았건만 5.16후에는 다시 문학으로 돌아오고 말았으니, 문학과 나와는
영원히 끊지 못할 악인연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라도 생계를 수월하게 꾸려나갈 다른 방도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문학을 포기해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잘 쓰거나 못 쓰거나 간에 나를 용납해
줄 세계가 문학 이외에 또 어디 있을 것인가.
돌이켜보면 서글프기 짝이 없는 방황하는 일생이었다.
문학이 나에게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인 줄 진작 깨달았던들, 나는 모든 정열을
문학 하나에만 기울여서 지금쯤은 제법 대작가가 될 수 있었으련만, 60평생을
문학의 아마추어로만 살아 왔으니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 간절한 것이다.
"류달영편"
류달영(1911__)
농학자. 사회 운동가, 수필가. 경기도 이천 출생. 수원 고농 졸업. 미네소타
대학 수학. 서울 농대 교수. 재건 국민 운동 본부장 역임.
그는 수필 "신문 망국론" "흙과 사랑"에서는 경세가로서의 풍모와 자연
찬미를 보여 주었다. 담백하고 진지한 인간상을 모색하는 철학적인 필치로
정평이 높다.
슬픔에 관하여
사람의 일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위로 하여 짜 가는 한 조각의 비단일 것
같다. 기쁨만으로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듯이 보이는 사람의 흉중에도 슬픔이 깃들이며, 슬프게만
보이는 사람의 눈에도 기쁜 웃음이 빛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쁘다
해서 그것에만 도취될 것도 아니며, 슬프다 해서 절망만 일삼을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고호가 그린 "들에서
돌아오는 농가족"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이 얇게 무늬지고, 넓은 들에는
추수할 곡식이 그득한데, 젊은 아내는 바구니를 든 채 나귀를 타고, 남편인
농부는 포크를 메고 그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생활하는 사람의
세계를 그린 그림 가운데 이보다 더 평화로운 정경을 그린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넓은 들 한가운데 마주 서서, 은은한 저녁 종 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농부 내외의 경건한 모습을 우리는 밀레의 "만종"에서
보거니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그 다음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밀레와 고호의 가슴 속에 흐르고 있는 평화 지향의 사상은 마치 한
샘에서 솟아나는 물처럼 구별할 수 없다.
그 무서운 가난과 고뇌 속에서 어쩌면 이렇게도 모든 사람의 가슴을 가라앉힐
수 있는 평화경이 창조될 수 있었을까? 신비로운 일이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나(봄의 소나타)를 들을 때도 나는 이러한 신비를 느낀다. 둘 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된 이후의 작품인 것이다. 슬픔은, 아니 슬픔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영혼을 정화하고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
아닐까? 예수 자신이 한없는 비애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인류의 가슴을 덮은
검은 하늘을 어떻게 개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공자도 석가도 다 그런 분들이다.
나의 막내 아들은 지난봄에 국민 학교 1학년이 되었어야 할 나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 때 이 아이는 '신장종양'이라고 하는 매우 드문 아동병에
걸렸다. 그러나, 곧 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 왔다. 그런데 오늘. 그
병이 재발한 것을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의학으로는 치료의 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선고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손목을 하나씩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우리 내외는, 천 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은, 시골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 사람의 물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티끌만한 근심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자기의 마지막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맹목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빠, 구두."
그는 구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두가 신고 싶었었나 보다. 우리
내외는 그가 가리킨 가게로 들어가,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어린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는
그의 기쁜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오늘이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할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이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아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아이가 밖으로 놀러 나갈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넌 커서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사가 너의 병을 고쳐 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나쁜 병을 고쳐 줄 수 있게 말이다."
하고 말했었다. 그른 고개를 끄덕이었고,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든지 의사가
되겠다고 말해 왔었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없이 총명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픈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겨울 정원에서
정원에 흰 눈이 가득하게 덮였다. 연인을 안으려고 벌린 두 팔처럼
광교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겨울철에는 우리 평화 농장 좌우편에서 유난스레
푸르르다. 우리 농장도 광교산의 한 줄기로 완만하게 뻗어내린 경사지이다.
왼편으로 맑은 시내가 흘러내리고 바른편으로 제법 노송의 티가 도는 수령 백
년 안팎의 송림이 길게 둘러 있어 우리 농장의 울타리 구실을 하고 있다.
농막 주위에는 십여 년 전, 내가 이 땅을 개간하던 무렵에 심어서 가꾸어온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이제는 모두 크게 자라서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 보게
되었다. 나와 내 아내가 해마다 땅을 파고 거름을 묻고, 가지를 간추려 주고,
벌레를 잡고 병을 막기 위해 소독을 하면서 지성스럽게 가꾸어 온 나무들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그루 정들지 않은 것이 없다. 남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
심어 가꾼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작고 큰 여러 종류의 나무들은 그대로 우리집
가족들이다.
이제는 서리 맞아 낙엽이 져서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들이 못가에도 언덕
위에도 잔디밭가에도 정자 주위에도 을씨년스럽게 찬 바람에 떨고 서 있다.
각종의 산새들이 몰려와 앙상한 가지 위에 앉아서 재재거릴 때에는 잎사귀 하나
꽃 한 송이 없는 나무들은 더욱 살벌해 보인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바라보면 어느 나무 어느 가지 하나도 오달진 눈을 지니지 않은 것은
없다. 목련. 라일락. 산수유 가지에는 탐스러운 꽃을 잉태한 야무진 꽃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리고 벌거벗은 앙상한 나무의 수피 속에는 강인한
생병이 충만해 있다. 손으로 나무 줄기를 어루만져 보노라면 나무와 나의
생명이 서로 하나가 되어 흐르는 듯한 삶의 신비를 느끼게 된다.
버드나무, 벚나무, 백양나무, 자작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오동나무,
박태기나무, 아기씨나무, 복숭아나무, 모과나무, 은행나무... 그 어느 것을
보더라도 백인의 용기를 가진 도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싹틔울 때와 꽃 피울
때와 잎을 떨어 버릴 때를 올바로 아는 선지자처럼 느껴진다.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함축이라고 할 것이다.
차원이 높을수록 소박하고 떫은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함축
때문이다. 그런데 겨울 나무들은 네 계절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함축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을씨년스럽고, 그렇게 메마르고, 또 그렇게 외로워
보이건만 겨울 나무들의 가지가지에는 이미 봄날의 찬란한 꽃 세계도 신록의
청신한 향연도 충분히 마련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씨 심어 가꾸어 기른 나무들 사이를 무한의 애정을 느끼면서
거닌다. 세월이 내 머리칼을 은실로 표백하면서 쉬지 않고 흐르고 있건만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나무들을 어루만지면서 흰 눈 위를 거닌다.
봄이 돌아오면 시냇가의 능수버들은 어느 나무보다도 일찍 꿈처럼 아련한
초록으로 실가지들을 물들이고 흐느적거리겠지. 언덕 위의 산수유나무는 잎이
돋기도 전에 잔설 속에서 황금의 꽃을 마술처럼 가지마다 푸짐하게 피우겠지.
그리고 진달래, 개나리, 미선, 백목련들이 일찍 피기 경쟁을 벌일 것이고 철쭉,
아기씨꽃, 살구, 매화, 앵도, 홍도, 백도, 박태기 들이 각각 제 시간을 찾아 피어
나겠지. 모란, 옥싸리, 모코렌지, 레드멘들이 차례차례로 뒤를 이어 피겠지. 언덕
위의 과수원의 사과나무, 배나무도 푸짐하게 꽃을 피울 것이고, 숲 속의
자작나무, 백양나무, 은사시나무, 상수리나무, 참나무, 밤나무꽃들도 멋을 아는
눈에는 버릴 수 없는 풍취를 심어 줄 것이 틀림없다. 그 무렵에는 연못에
수련의 둥근 잎이 물 위에 몇 개씩 동동 뜨기 시작하겠고, 금잉어 떼들이 물을
굽어 보는 나에게 먹이를 달라고 수면에 호화롭게 떠올라 조를 것이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깊은 겨울날에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거칠 것 없이
비쳐 오는 겨울볕을 받으면서 나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뚜비와 함께 눈 위를
거닌다.
잎 하나 지니지 않은 겨울의 낙엽수들은 제각기 특유의 골격과 수형을 지니고
있어 제나름의 본 모습을 보여 준다. 수석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줄 아는
사람들은 겨울의 벌거벗은 나무들을 감상해 볼 것이다. 그 소박하고 깊이 있고
떫은 멋에 취하여 반드시 삼매경에 잠기게 될 것이다.
난만한 봄을 마른 가지에 빈틈없이 준비하고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봄날을
의심 없이 믿고 기다리는 겨울 나무, 눈서리와 매운 바람을 희망 속에 꾸준히
견디고 참는 침묵의 겨울 나무, 볼수록 믿음직하고 멋지고 아름답다. 탁월한
예술인 같기도 하고, 천년을 내다보는 철인 같기도 하다.
겨울 정원의 낙엽수 사이를 거니는 멋을 나는 점점 즐기게 된다.
초설에 붙여서
--전진을 위한 회고와 전망--
어느 날 나는 텅 빈 운동장에서 두 팔을 앞뒤로 높이 휘저으면서 혼자
걸어가는 한 어린이를 지나쳐 볼 수가 있었다.
밤 사이에 내린 첫눈으로 뒤덮인 운동장은 동녘 하늘에 솟아오르는 햇살에
더욱 눈이 부시었다. 그 흰 눈 위를 생기가 넘치는 그 어린이는 마치 사열대
앞을 행진하는 군인처럼 기운차게 신이 나서 꺼덕꺼덕 걸어가는 꼴이 하도
익살맞아서 나는 혼자 웃음을 참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린이는 가끔 그
활발한 행진을 멈추고 차려의 자세로 서서 고개를 돌려 뒤를 한 동안씩
바라보다가 전과 똑같은 보조로 두 팔, 두 다리를 높직높직 쳐들면서 다시
걸어가는 것이었다. 옥판선지 같이 깨끗한 흰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이 자국자국
무늬져서 길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 어린이는 눈 덮인 운동장을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걸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서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어느 정도로 똑바른가를 검토해 보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어린이가
걸어간 발자국은 부분적으로는 곧았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바른편으로 또는 왼편으로 굽어 있었다.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그 어린이의 행동을 통하여 적지 않은 것을
느꼈고, 또 배울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부귀 빈천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누구나 자기들의 일생을 곧고 바르게 걸어가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걸어간 그 생애의 발자취들은 작고 큰 허다한 파란
속에 가지가지의 복잡한 곡선을 그리고 가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영원히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눈 덮인 들판에 가지가지의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가는 나그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눈 덮인 운동장 위를
걸어가는 저 어린이가 짬짬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돌려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을 이윽히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슬기로운 일인가?
공자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증자는 '내가 날마다 세 차례씩 스스로
반성해 본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날마다 일기를 쓰면서 지나간 하루의 생활을
살펴본다. 주말에는 1주일의 생활을, 월말에는 한 달 동안의 생활을, 그리고
연말에는 1년 동안의 생활을 더듬어 살펴보는 것이다. 또 누구나 자기의
생일에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되씹으면서 자기의
걸어온 삶의 발자국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뚫어보고
스스로 지나온 자국을 살펴보는 일은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자기
자신과 스스로 걸어온 발자취를 때때로 돌아다 보지 않고서는 걸어가는 옳은
방향을 찾아 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가'손에 쟁기를 쥔 사람은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고 제자에게 경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경고는 결코 걸어온 과거를 살피고 되씹어
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뚜렷한 큰 목표를 세운 다음에는 그 목표를
잠깐 동안이라도 놓치지 말고 한결같이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뜻이다. 눈 덮인
운동장을 일직선으로 걸어가고자 애쓰는 저 천진한 어린이의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 대하여 우리는 그 원인을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저 어린이의 세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저 어린이가 만일 운동장 저편에 서 있는 큰
포플러나무나 또는 전신주를 일정한 목포로 삼고 그것만을 향하여 한결같이
걸어갔더라면 저 어린이의 발자국의 줄은 매우 곧게 되었을 것이다. 그
어린이는 앞을 향하여 곧게 나가려고 치밀하게 주의를 했었지마는 먼 앞에
움직이지 않는 일정한 큰 목표를 세우는 슬기가 아직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으로서 각각 자기 자신의 한결같은 목표가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가면서, 때때로 지나온 과거를 보살피고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경주장에서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린다고 하더라도 골을 향해서
달리지 않는다면 그 달음질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귀중한 일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는 한스럽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나'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물론이지마는, 또 우리라는 사회인으로서의 '나'의
존재를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작은 나'와 '큰 나'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알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인생의 걸음걸이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작은 나'와
'큰 나'의 이중의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민족이 장구한 역사의 험한 길을
걸어오다가 이제 비로소 세계 무대 위에서 살길을 열어 보고자 거족적으로
분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작은 나'로서의 행로의 목표와 회고도 중요하지마는
'우리'로서의 행로의 확고한 목표와 겸허하고 정성스런 회고가 절실히 요청된다.
첫눈이 내린 오늘, 나는 눈 벌판을 걸어가던 저 어린이를 더욱 잊을 수가 없다.
"노천명편"
노천명(1912__1957})
여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 이화 여전 영문과 졸업.
현대시다운 시를 쓴 최초의 여류 시인으로 지목된다. 초기에는 고독과 애수의
주정적인 시 세계를 보여 주었고, 후기에는 도시적 취향의 고독 속에 침잠하여
현실과 유리된 생활을 하다가 독신으로 병사하였다.
향토 유정기
밤기차가 가는 소리는 흔히 기인 여행과 고향을 생각하게 해 준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정거장 대합실에 가서 자기 고향 이름을 외치는 스피커 소리를
듣고 온다는 다쿠보쿠도 나만큼이나 고향을 못 잊어 했던가 보다. 아버지가
손수 심으신 아라사 버들이 개울가에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서 있고 뒤 울
안에는 사과꽃이 피는 우리집, 눈 내리는 밤처럼 꿈을 지니고 터키 보석 모양
찬란했다. 눈이 오면 아버지는 노루 사냥을 가신다고 곧 잘 산으로 가셨다.
우리들은 곳간에서 강낭콩을 꺼내다가 먹으며 늦도록 사랑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수염 텁석부리 영감에게 나가 으레 옛날 얘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영감은,
"어제 장마당에 가서 다 팔구 와서 없어."
"아이 그렁 말구 어서 하나만."
"이거 또 성황났군. 그렇게 얘길 좋아하면 이 댐에 시집갈 때 가마 뒤에 범이
따라간단다."
"그래두 괜찮아, 그럼 박 첨지더러 쫓으라지, 미섭나 뭐."
램프 불 밑에서 듣는 얘기는 재미있었다.
이런 밤이면 어머니는 엿을 녹이고 광에서 연시를 꺼내다 사랑으로 내보내
주셨다. 고향과 하께 그리운 여인이다. 내 어머니처럼 그렇게 고운 이를 나는
오늘까지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늘 "옥루몽"을 즐겨 읽으셨다. 읽으시곤 또
읽으시고 읽을수록 맛이 난다고 하셨다. 백지로 책 뚜껑을 한 이 다섯 길의
책을 나는 어머니의 기념으로 두어뒀다.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장마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었을 이 책을 꺼내서 본다. 어머니의 책 보시는 음성이 어찌
좋던지 어려서 나는 어머니의 이 책 보시는 소리를 들으며 늘상 잠이 들었다.
이 고장 아낙네들은 머리를 얹는 것이 풍습이다. 공단결 같은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땋아서는 끝에다 새빨간 댕기를 물려 머리를 얹고서 하얀 수건을
쓰고 그 밖으로 댕기를 살풋 내놓는다. 이런 모양을 한 고향의 여인들이 나는
가끔 그립다. 서울 번화한 거리에서도 이따금 이런 여인이 보고 싶다.
뒤는 산이 둘려 있고 앞엔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여기서 윤선을 타면
진남포로, 평양으로 간다고 했다. 해변에는 갈밭이 있어 사람의 키보다 더 큰
갈대들이 우거지고 그 위엔 낭떠러지 험한 절벽이 깎은 듯이 서 있었다. 아래는
퍼어런 물이 있는데 여름이면 이 곳 큰애기들은 갈밭을 헤치고 이 물을 찾아와
멱을 감았다.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놀다가는 산으로 기어올라간다. 절벽을
더듬어 올라가노라면 바위 속에서 부엉이 집을 보게 되고 산개나리꽃을 꺾게
된다. 산개나리를 한아름 꺾어 안고는 배를 타고 대처로 공부를 간다고 작은
소녀는 꿈이 많았다.
내가 사는 데서 한 20리를 걸어가면 읍이 있다. 고모님 댁이 거기 있고, 또
성당이 거기 있어서 가톨릭 신자인 우리집에선 큰 미사가 있을 때면 읍엘
들어가야 했다. 달구지를 타거나 걷거나 하는데, 고모집엘 갔다 올 때면 고모가
언제나 당아니(거위) 알을 꽃바구니에 하나 가득 담아 달구지 위에다 올려 놔
주는 것이었다. 흔들거리는 달구지 위에서 이 당아니 알이 깨어질까 봐 몹시
조심이 됐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달구지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
덮이는 좌우의 산과 촌락들을 보며 어린 나는 말이 없었다.
고향을 버린 지도 20여 년, 낯선 타관이 이제 고향처럼 되어 버리고 그리운
고향은 멀리 두고 그리게 되었다. 나는 고향에 돌아간 기약이 없다.
앞마당엔 아라사 버들이 높게 서 있는 집, 거기엔 어머니가 계셨고 아버지가
계셨다.
겨울밤의 얘기
"좋아하는 눈 왔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할멈이 내 창 앞에 와서 이렇게 지껄이는 소리에 얼른 덧문을 열고 내다보니
눈보라가 날리고 있어 내가 또 싱겁게 좋아했더니 저녁부터 날씨는 갑자기
쌀쌀해지고 말았다.
방이 외풍이 세서 어제 오늘로 부쩍 병풍이 생각나고 방장 만들 궁리를 한다.
시골집의 어머니가 쓰시던 낡은 병풍을 가져올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그 병풍을 치고 내가 홍역을 할 때 밤을 꼬빡 새시며 얼굴에 손이
목 올라가게 지키셨다고 들었다.
지금 그것을 내 방에다 가져다 치고 보면 내 생각은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타산 뾰죽한 멧부리들이 둥글게 묻히도록 눈이 와 쌓일라치면 아버지는
친구들과 곧잘 노루 사냥을 떠나셨다.
그래가지고는 그제나 시방이나 몸이 약한 내게 노루피를 먹이려고 하시는
통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랑에 나가 돈을 달라던 내가 온종일 아버지한텔
나가지 못하고 숨어서 상노애더러 아버지한테 가서 돈을 달래 오라고 울고
매달린 적도 있었고 어려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따랐다. 술을 못 하시는
아버지가 늘 사랑에 가 조용히 앉아서 골패를 떼시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골패를 섞는 소리는 왜 그렇게 듣기 좋았는지.
이렇게 객지 생활을 하고 나이를 차츰 먹고 보니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늦도록 부모를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행복된 일이다.
헌데 세상 사람이 흔히 부모를 여의고 나서야 어버이가 귀한 줄을 통절히
느낀다는 것은 이 무슨 안타까운 일이랴.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동화 같은 옛일들이 머릿속에 피어오른다. 겨울밤은
길고 내 마음은 구성진데, 비를 머금은 날이 밤새도록 기차 바퀴 소리를 들려
주면 실로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츠아라리엔더가 "남녘의
유혹"에서 느낀 것 같은 향수에 내가 한없이 빠져들어간다. 이런 시간이란 어찌
보면 청승스럽게도 보이나, 실은 그 위에 가는 사치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진실로 잔인하게 나는 이것을 즐긴다. 어떠한 다른 환경을 가져 본다
치더라도, 내 가슴에 지니는 향낭은 없이도 견딜 수 있으나, 일종의 이
'페이소스'가 없이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실상 인생 생활에 이 비애가 없다면
도대체 심심해서 어떻게 배겨 내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다 고독을 지니고
다니는 하이칼라는 없는가?
이런 친구를 만난다면 내가 아끼는 신비로운 이 긴 밤들을 그 친구와 함께
화롯가에서 얘기를 뿌리며 밝혀도 좋겠다. 늙은 시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밤이 한없이 아깝다.
시골뜨기
내가 맨 처음 서울에 올라온 것이 이맘때였던 상싶다.
음력 이월 초순께나 되었던지 춥기는 해도 겨울은 아니고, 그렇다고 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옥색 두루마기를 입고 여기 애들 모양 당홍 제비부리 댕기도 못 드리고, 검정
토막 댕기를 드린 나를 보고 동네 아이들은,
"시골띠기 서울띠기 말라빠진 꼴띠기."
하며 우르르 달아나곤 하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는 나는 그 애들의
외우는 말이 재미가 있어 웃으며, 그 애들이 몰려가는 데로 따라가면
줄달음질들을 쳐서 골목 안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시골 우리 동리가 그립구, 박우물께 이쁜이며, 새장거리
섭섭이, 필녀, 창호 이런 내 동무들이 한없이 보구 싶어졌다.
학교에두 아직 못 들구 어머니는 날마다 집주름을 데리구 집만 톺으러
다니시면, 나는 그 동안 이모 아주머니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
이 이모 아주머니란 분은 재미있었다. 달래 그런 것이 아니라 환갑이 다 된
분이 머리는 하나도 세지를 않고, 그 대신 정수리가 무르팍처럼 멘 분이
함박꽃빛 자주 마고자를 입고 계신 것이 우습고, 또 한 가지는 방 안에 가만히
앉아서 온종일 잔소리로 일을 보시는 것이다. 할아범과 할멈을 번갈아 부르셔선
무슨 분부인지 그처럼 많다. 그런데 한번은 밖에 손님이 오셔서,
"이리 오너라."
했다. 아주머니는 미닫이도 좀 안 열어 보고 창경으로 겨우 내다 보시며,
"거기 아무두 없느냐."
하시더니 아무 대답도 없는데,
"누구신가 엿줘봐라."
하고 분부를 하신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밖의 손님이 이 말을 듣더니,
"양사골 김 주사가 왔다구 엿줘라."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아주머니는,
"영감 마님 출입하고 아니 계시다구 엿줘라."
하신다.
할멈도 할아범도 사이에는 없는데 서로 해라를 하고, 또 문도 안 열어 보며
영 등바같이 또랑또랑하게 말루만 해내는 것이 나는 말할 수 없이 우스웠다.
서울은 정말 별난 곳이라 생각되었다. 별난 것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우리 게와 달라 무슨 장사들이,
"비웃드렁 사려! 움파드렁 사려!"
'드렁' 하며 외치고 다니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달음박질
뛰어나가 문 밖에 가 서서 구경을 했다.
한번은 머리를 따내린 호인이 팔에다 나무 궤짝을 걸고, 한 손에 울긋불긋한
종이로 오린 꽃에다 섞어 천연 멍개(해당화 열매) 같은 빨간 것을 꼬챙이에
끼워 들고 가며,
"아아가위 콩... 사탕..."
하고 외우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 시골에 있는 멍개 같은 데
반가움을 느끼고, 한 꼬치 5전이라는 것을 샀다. 그래서 가지고 들어가 먹어
봤더니 맛이 여간 좋지 않았다. 시골 우리 아랫집 '대각'이네 '모나까'보다도
훨씬 맛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이 되면 으레 어머니한테 아가위 값을
타고 '아가위 콩사탕'만 외우고 지나가면 뛰어나가 사곤 했다. 아주머니는 여덟
살이나 된 걸 저렇게 군것질을 시켜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셨으나, 우리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하시고 언제나 은장도가 달린 주머니끈을 끌러 돈을
꺼내 주셨다. 서울은 정말 좋은 곳인 것 같았다. 언제까지나 신기한 것에 대한
내 주의는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아주머니가 나가시더니 할아범에게 이상한 것을 들려 가지고
들어오셨다. 이 찬란한 것에 나는 정말 황홀했다. 놋쟁반 같은 데가 오색이
영롱한 꽃이 하나 그득 담겨 들어왔다. 가까이 보니 꽃만도 아니다. 꽃에, 새에,
연밥에, 새파란 오이에, 가지에, 옥가락지, 귀주머니, 갖은 패물, 족도리, 안경집
이런 것들이 노랭이, 파랭이, 분홍, 흰 것, 당홍, 취얼, 보라, 이루 말할 수 없게
곱게 차려졌다.
이것을 보시고 어머니가 아주머니에게 요샌 색떡 한 밥소래에 얼마냐고
물으니까 5원이라고 하신다. 대화에서 이것이 색떡이라는 물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흰 바탕에다 검정 선을 두르고 분홍 매화와 새를 새긴 안경집과
칠보가 달린 족도리가 제일 고왔다. 그래서 어머니를 지긋이 잡아당기며 나는
저기 족도리하구 안경집을 날 떼달라고 졸랐더니 그것은 혼인집에 가져 갈 것이
돼서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얼마 동안 그것 때문에 울었다.
한참 있으니까 이웃집 서울 아이들이,
"얘애야, 나아와 노올아!"
하고 저이 동무들을 찾는 노래 곡조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번연이 나를 찾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첫째는 노래같이 부르는 이 소리가 재미있는 까닭이요, 다음으로는 얼굴에
분세수를 하고 기름을 발라서 머리들을 곱게 빗은 서울 아이들을 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 팔짱을 끼고 말없이 우리집 문 앞에 가 서서 있는 것이다.
바로 건너다뵈는 앞집은 꽤 큰 집인데 대문에는 흰 글씨로,
'성적분 파오'
하고 씌어진 간판이 걸려 있다. 나는 심심해서 속으로 몇 번이구 자꾸 '성적분
파오' '성적분 파오' 하고 읽어 보는 것이다. 하루 아침엔 이 큰 대문집에서
나만한 처녀 아이가 나오더니 내게다 말을 였다. 말씨가 예뻐서 나는 그애가
말하는 것을 무슨 고운 것이나 보듯이 신기해서 자꾸 쳐다봤다.
그애는 자기 집에선 성적분을 만든다는 것이며, 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있다는
것이며, 망녕난 할머니가 계시다는 것 등을 말해 주며, 내 손을 붙들고 저의
집엘 데리고 들어갔다. 나더러 널을 같이 뛰자고 하는데 나는 뛸 줄도 모르고
또 무섭다고 질색을 했더니 줄을 잡혀 주며 나더러 줄을 잡고 뛰라고 했다.
내가 줄을 잡고 널을 뛰어 봤더니 그애는 나더러 사내 널을 뛴다고 하며 널
뛰는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 후부터 인순이는 아침만 치르면
우리집에 와서,
"얘애야, 나아와 노올아!"
하고 나를 불러 주었다.
인순이와 내가 차츰 정이 들려고 하는데 우리는 집을 구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서울 길을 모르는 나는 인순이를 다시는 만날 수가 없이 되어 버렸다.
그 뒤 전학이 돼서 내가 하교엘 들어갔을 제 나는 인순이를 찾으려고 은근히
살폈으나 찾지 못했다. 내 생각에 인순이는 집이 완고해서 학교엘 넣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인순이는 내가 서울 와서 제일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지금도 내가 서울엘
자주 왔을 때 제 일을 생각할라치면 으레 인순이가 생각나고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인순이는 언제나 처음 만날 때 그가 입었던 꽃분홍 삼팔 치마에 연두
저고리를 입고 파란 징신을 신었다. 나는 그 때 인순이 이름을 알았지만,
인순이는 내 이름도 채 모르고 헤어졌다. 다만 시골 애라고 알았을 따름이다.
"김동리편"
김동리(1913__)
소설가. 본명은 시종, 경북 경주 출생. 경신 고보 중퇴, 서라벌 예술대학장.
한양대 예술대학장 역임.
일찍이 민족 진영의 문학을 대표하여 좌익을 분쇄한 바 있고 순수 문학의
옹호자로서 전후 문단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왔다. "황토기" "등신불" "까치
소리" 등 문제 소설의 작가이다.
만월
나는 지금 보름달 아래 서 있다.
한 깊은 사람들은 그믐달을 좋아하고, 꿈 많은 사람들은 초승달을 사랑하지만,
보름달은 뭐 싱겁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맞는다던가?
한이 깊은 사람, 꿈이 많은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아무래도 싱겁고
평범한 사람이 더 흔할 게고, 그래서 그런지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나도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직까지, 내 자신이 싱겁고 평범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잘 모른다.
그러나,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예외없이 싱겁고 평범하게 마련이라면,
나는 내가 그렇게 싱겁고 평범한 사람이 되어도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새벽달의 기억은 언제나 한기와 더불어 온다. 나는 어려서
과식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 하얗게 깔린 서릿발을 밟고 새벽달을
쳐다보는 것은, 으레 옷매무시도 허술한 채, 변소 걸음을 할 때였다. 그리고,
그럴 때 바라보는 새벽달은, 내가 맨발로 밟고 있는 서릿발보다도 더 차고
날카롭게 내 가슴에 와 닿곤 했었다.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있어 달의
일종이라기보다는 서슬 푸른 비수나, 심장에 닿은 얼음 조각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게다가, 나는 잠이 많아서, 내가 새벽달을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선잠이
깨었을 때다. 이것도 내가 새벽달을 사귀기 어려워하는 조건의 하나일 것이다.
새벽달보다는 초승달이 나에게는 한결 더 친할 수 있다. 개나리꽃, 복숭아꽃,
살구꽃, 벚꽃들이 어우러질 무렵의 초승달이나 으스름달이란, 그 연연하고 맑은
봄 밤의 혼령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소식의,
봄 저녁 한 시각은 천 냥에 값하나니,
꽃에는 맑은 향기, 달에는 그늘.
이라고 한 시구 그대로다. 어느 것이 달빛인지 어느 것이 꽃빛인지 분간할 수도
없이 서로 어리고 서려 있는 봄 밤의 정취란, 참으로 흘러가는 생명이
한스러움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단들 초승달로 보름달을 겨룰 수 있으랴? 그것은 안 되리라.
마침 어우러져 피어 있는 개나리꽃, 복숭아꽃, 벚꽃들이 아니라면, 그 연한
빛깔과 맑은 향기가 아니라면, 그 보드라운 숨결 같은 미풍이 아니라면, 초승달
혼자서야 무슨 그리 위력을 나타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이미 여건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초승달이 아닌가?
보름달은 이와 달라 벚꽃, 살구꽃이 어우러진 봄밤이나, 녹음과 물로 덮인
여름밤이나, 만산에 수를 놓은 가을밤이나, 천지가 눈에 싸인 겨울밤이나, 그
어느 때고 그 어디서고 거의 여건을 타지 않는다. 아무것도 따로 마련된 것이
없어도 된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물이면 물, 수풀이면 수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로서 족하다. 산도 물도 수풀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라도 좋다.
머리 위에 보름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황홀하고
슬프고 유감한 것이다.
보름달은 온밤 있어 또한 좋다. 초승달은 저녁에만, 그믐달은 새벽에만 잠깐씩
비치다 말지만, 보름달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우리로 하여금 온밤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보름달은 온밤을 꽉 차게 지켜 줄 뿐 아니라, 제 자신 한 쪽도 귀도
떨어지지 않고, 한쪽 모서리도 이울지 않은 꽉 찬 얼굴인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좋은 시간은 짧을수록 값지며, 덜 찬 것은 더 차기를
앞에 두었으니 더욱 귀하지 않으냐고 하지만, 필경 이것은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행운이 비운을 낳고 비운이 행운을 낳는다고 해서, 행운보다 비운을
원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초승달이나 그믐달같이 불완전한 것, 단편적인 것, 나아가서는
첨단적이며 야박한 것 따위들에 만족할 수는 없다.
나는 보름달의 꽉 차고 온전한 둥근 얼굴에서 고전적인 완전미와 조화적인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예술에 있어서도 불완전하며 단편적이며 말초적인 것을 높이 사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기발하고 예리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완전성과,
거기서 빚어지는 무게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에 견줄 수는 없으리라.
사람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을까? 보름달같이 꽉 차고 온전히 둥근 눈의
소유자를 나는 좋아한다. 흰자위가 많고 동자가 뱅뱅 도는 사람을 대할 때 나는
절로 내 마음을 무장하게 된다. 보름달같이 맑고 둥근 눈동자가 눈 한가운데
그득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람, 누구를 바라볼 때나 무슨 물건을 살필 때,
눈동자를 자꾸 굴리거나 시선이 자꾸 옆으로 비껴지지 않고, 아무런 사심도
편견도 없이 정면을 지그시 바라보는 사람, 기발하기보다는 정대한 사람, 나는
이러한 사람을 깊이 믿으며 존경하는 것이다.
보름달은 지금 바야흐로 하늘 가운데 와 있다.
천심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간은 더욱 길며 여유 있게 느껴지는 것이
또한 보름달의 미덕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다릿목 정자까지 더 거닐며 많은 시간을 보름달과 사귀고자
한다.
수목송
돌과 흙과 쇠 같은 따위들은 그 깸 없는 깊은 잠에 주검처럼 굳어진
자들이라, 일깨워 우리와 사귈 수 없고, 조수와 충류들은 생로병사에 사람의
아픈 바를 지니되, 그 신령한 바를 갖추지 못하니, 또한 더불어 살기에 나를
기를 것이 없다. 수목은 이와 달라, 돌, 흙, 쇠같이 깸 없는 잠으로 굳어진 자도
아니요, 꽃으로 잎으로 또는 열매로 그 생명의 다양한 변화가 사람의
얼굴에서처럼 발랄하되, 그 생로병사에 신음없이 의젓함은 조수, 충류에서 멀다.
깨어 있으되 소란하지 않고, 삶을 누리되 구차하지 않음이 사람에서는
지인달사의 풍모라고나 할까?
우리가 수목에서 가장 경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은 그 장수라 할지니, 느티나무,
은행나무, 밤나무, 녹나무, 회화나무, 편백나무 따위들은 그 수명이 천 년에
이르는 자 많고, 떡갈나무, 이깔나무, 벚나무, 감탕나무 따위들은 그 연연하게
물들어 화사하기 꽃과 같은 잎을 달고도 견디기를 오히려 5백 년에서 지난다.
동양의 역사 소설인 "삼국지"에 보면, 주인공 유비의 고향은 탁현인데, 그의 집
앞에 천 년 묵은 뽕나무가 누각처럼 펼쳐 서 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누상촌이라 불렀다 하며, 또 다른 주인공의 하나인 조조의 죽음을 재촉한
이야기에도 천 년 넘은 배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 뽕나무, 배나무도 다
각각 천 년의 장수를 누릴 수 있다고 하겠다. 그뿐 아니라, 경주 불국사의
대웅전과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의 어느 기둥들은 각각 천 년 된 싸리나무와
박달나무라고 전해지고, 이 밖에도 고사 거찰에 대개 천 년 넘은 잡목 기둥이
한 두 개씩 들어 있다고, 그 절의 승려들로부터 자랑하는 말을 듣는다. 이로써
볼진대, 천 년을 사는 나무의 이름들은 따로 들먹일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수목이 이와 같이 사람이나 조수, 충류에 비겨 그 유장한 세월을 누림은, 그
뿌리를 깊이 땅속에 묻고 그 잎으로 직접 태양을 흡수하게 때문이리라. 따라서,
수목은 대지와 태양을 직접 먹이로 삼고 살아가는 유기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할 때 맨 먼저 수목을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또한 수목에서 그 장수와 더불어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청춘이라 하겠다. 수목은 어린 나무나 늙은 나무나 잎을 달고 꽃을 피우는 이상
언제나 청춘이다. 그 잎은 푸르고 그 꽃은 붉은 것이 보통이다. 붉지 않으면
희거나 누르거나 푸르거나 하더라도, 꽃이란 꽃은 다 잎보다도 더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이렇게 청청한 잎과, 잎보다도 더 젊고 아름다운 꽃을 가진
모든 수목은 우리에게 언제나 희망과 용기와 위안을 준다.
우리가 고향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라든지 가까운 육친의 모습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때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연로해서 세상을 떠나셨거나 했을 땐 어버이 대신
형제나 또는 다른 친척, 친지의 얼굴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를 대신할 형제나 친척마저 타처로 떠나 버렸을 때, 아아, 그 때 고향을
지키는 얼굴은 마을 앞에 서 있는 늙은 팽나무나, 마을 뒤에 서 있는 묵은
느티나무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예로부터 고향산천이란 말이 있고, 또 사실
산과 내야 나무보다도 더 오래고 더 믿을 만한 고향이기도 하지만, 마을 앞뒤의
늙은 팽나무나 묵은 느티나무처럼 고향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도, 어느 낯선 마을 앞에 늙은 회나무와
느티나무가 몇 그루 멋지게 가지를 벌리고 서 있으면 덮어놓고 그 동네가
평화스럽고 행복스러워 보이며, 무언지 깊은 유서나 전설이라도 깃들인 것같이
느껴진다. 만약, 그 나무 곁에 주막이라도 있다면 곧 뛰어내려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싶은 야릇한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수목은 산야나 벽지에만 흔한 것이 아니라, 도회와 읍, 시의 거리 거리,
공청과 여사와 민가의 뜰마다 번성하지 않는 데가 없다. 이렇게 현대 같은
문명의 폭위에도 배척받지 않고, 도시의 시가와 청사, 여염집 마당에 번영,
무생하여 사람과 더불어 공존, 교환함은, 수목이 우리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그윽한 즐거움과 기쁨과 희망과 이익을 줄지언정, 우리의 짐이 되고 걱정이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수목이 없는 세상에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수목이 없는 세상에
기쁨과 위안과 희망이 있겠는가? 수목이 없는 세상에서 행복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수목에서 받는 이 형언 할 수 없는 그윽한 기쁨과 즐거움과 위안과,
그리고 마음의 안정은 어디서 연유하여 오는 것일까? 그것은 흡사 기독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신에게서 받는 그것과도 같다. 수목은, 아니 자연은,
동양인에게 있어, 성격이 다른 신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흰나비
어느 날 대낮에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뜰로 날아 들어왔다. 그리하여 하얀
박꽃이 번져 나가듯 뜰 안을 펄펄펄 날아다녔다. 그 때 집 안은 절간 같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금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뜰에는 이미
녹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본래 수풀을 좋아하여 내가 집을 가진다면, 한 백 평 가량은 울창한
수풀이 우거지게 하려고 생각하여 왔다. 위는 나뭇잎이 어우러져 하늘을 가리고,
아래는 찔레와 칡덩굴이 엉켜서, 그 속이 천고의 비밀을 감춘 듯한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다 가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부터 그렇게 유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뜰을 장만하고
집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풀을 가진 집이라고는 여지껏
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있대도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 가지기란 수십 년의 적공을 요할
터인데, 50이 가깝도록 이 모양인 나에게 그러한 꿈이 실현되기란, 참으로
너무나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건만, 나는 아직도 그러한 나의 꿈을 포기한 적은 없다(나에게는
이밖에도 이러한 꿈이 몇 가지 있다.). 이것은 엉뚱하고 데퉁스럽게 낙천적인
나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 크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남이 상상할 수도 없는
희망과 자신과 자부가 넘치고 있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한
막연한 희망과 자신들이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금년 들어 나는 우연히 그러한 나의 꿈의 한 조각이 이루어진 듯한
집을 하나 얻어들게 되었다. 앞뜰이 넓은데다 나무가 꽤 많다. 가위
거목이라고도 일컬을 만한 은행나무가 네 그루요, 거의 그만한 크기의 잣나무와
그보다는 좀 작으나 정원목으로서는 보기 드물 만큼 큰 편인 단풍나무가 네댓,
그리고 역시 그러한 라일락이 몇 그루, 이 밖에 소나무. 향나무. 밤나무.
매화나무, 등나무, 포도, 찔레, 개나리들도 의외로 어우러져 있었다.
이 나무들이 모두 그렇게 화려한 꽃을 달지는 못하지만, 잎들은 심히
무성하여 그 푸르름이 바야흐로 성하 염천을 물리치리만큼 뜰에 가득하다.
그리하여, 진실로 오랫동안 수풀에 주려 온 나의 두 눈에 싱그러운 기쁨과
위안을 던져 주었다.
나는 온종일 대청에 나와 앉아 뜰을 내다보고 있다.
대낮은 고요하다. 복중이 돼서 그런지 숨이 막힐 듯한 고요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나무 그늘은 더욱 짙다.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이 햇빛을 전부 강물로
만든다. 나는 끄덕끄덕 졸면서도 그냥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을 안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어느 순간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날아든
것은...
뜰에 가득 찬 녹음이요, 숨막힐 듯한 고요 속이었기 때문에 흰나비의 흰
빛깔은 더욱 눈에 띄었고, 그것은 마치 어떤 '의미'에 도전하는 상징과도 같은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
이것은 내가 20여 년 전에 쓴 "표박 행로음"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가장 순수한(혹은 내적인) 경험으로써, 내가 가장 희다고 느낀
것은, 이 시구의 그 '독수리 날개를 꺾은' 햇빛이 아니었을까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때부터 '도의 광휘'는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흰빛이거니 생각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태고로부터 흰 빛깔을 숭상하여 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옷
빛깔을 보아도 곧 알 수 있는 일이다. 요즘의 양복은 외래복이니까 별도지만,
우리의 재래복은 신통하리만큼 일색으로 희다. 무색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린애들이나 그 밖에 특수한 경우에만 착용되는 것이고, 정상 상태는
언제나 흰 빛깔이다.
여기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
최초에 흰 빛깔을 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째서 흰 빛깔이 택해졌는가? 흰
빛깔엔 어떠한 뜻이 있는가?
흰 빛깔이 우연히 택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설령, 우연히 택해진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 의하여 오랫동안 지지되고 계승된
데는 우연 이상의 필연성을 인정해야 한다.
최남선 씨의 "고사통"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백'민. 아득한 옛날에 대륙의 극오부를 출발하여 동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일 집단이 있으니, 그의 향하는 바는 일출처의 진이라는 곳이었다. 그네는
스스로 '붉은'이라 하니 신명의 자손이란 의미요, 후에 한자로 '붉'을 '백'이라
쓰고 백을 다시 '맥', 또 '맥'으로 고쳤다. 백민은 천을 신계로 하고, 태양을
천주로 숭배하고, 대산을 인간과 천상과의 교통로로 생각하고, 천주는 하계를
감시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그 아드님을 강림시키는 것을 믿는 백성이었다.
동으로 전진하는 동안에 여러 곳에 천산 또 신산을 정하고 한참씩 머무르다가
마지막 새벽에 태양을 맞이하는 곳에 있는 거룩한 대산에 이르러 천주의 신도가
여기 있다 하고서 그 주변에 안주할 땅을 이룩하고, 여기저기'불'이란 것을
만들고 있었다. '불'은 한편 '부유' 또 '부여'라고도 하여 인민이 많이 모여서
질서 있게 사는 바닥을 일컫는 말이었다. '불'의 큰 것에는 '나라'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최초의 흰 빛깔을 택한 것은 어느 개인이기보다 '집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단은 '태양을 천주로 숭배했다'고 하니 광명을
신명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흰 빛깔은 신명의 빛깔이요, 도의
빛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지하기 어려운 흰 빛깔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며 계승되어 온 소이인 것이다.
흰 빛깔이 밝음을 뜻한다면 검정 빛깔은 어둠을 뜻한다. 어둠과 밝음이
상극적인 것처럼 흰빛과 검은빛도 빛깔의 양극이다. 흰 빛깔이 모든 빛깔의
바탕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말살을 뜻한다. 흰빛이 모든 빛깔의 모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죽음을 가리킨다. 흰 빛깔이 삶이라면 검정빛은 죽음이요,
흰 빛깔이 희망이라면 검정빛은 절망이요, 흰 빛깔이 순결이라면 검정빛은
오탁의 극이다.
우리 조상은 왜 '붉은'에서 신을 발견하고'도'를 느꼈을까? 이것은 그
성격이요 생리요 운명이었으리라.
'붉은'은 '도'의 이름이요, '백'은 그 빛깔이다. 따라서 흰 빛깔을 숭상하는
한민족은, 그 성격과 그 생리와 그 운명에 있어, 광명의 민족이요, 순결의
민족이요, 희망의 민족이요, 명랑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위에서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나는 막연한 희망과 자신에
차 있다고 말했지만, 그러고 보면 이것은 내 핏줄 속에 조상의 '붉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저 뜰에 박꽃이 번져 나가듯 펄펄펄
날고 있는 흰나비야말로 내 젊은 날의 시구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의
'흰 햇빛'의 한 조각 또는 그 '독수리 날개'의 한 부스러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바도 아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이 처음으로 외치던 '붉은'의 한
조각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 뜰에는 강물을 퍼붓듯한 눈부신 햇빛과 푸른 나무 그늘이 대낮의
고요를 겨루고 있다.
흰나비, 나의 손님이여! 너를 맞이하는 나의 미소 속에 너는 마음껏 나의
뜰에서 날아다오.
"임옥인편"
임옥인(1913__)
여류 소설가. 함북 길주 출생. 일본 나라 여고 사범 졸업. 건국대 가정대학장
역임.
해방 직후에 농촌 여성의 계몽 운동에 몰두했으며 그 이후 계속 교편을 잡아
왔다. 일상적인 체험과 시대적인 충격을 여성 특유의 서정적 세계를 형상화하여
주목을 받았다. "월남 전후"는 민족의 수난을 르포 형식으로 그려 많은 감동을
준 장편 소실이었다. 유리한 문장을 추구하였으며 여류 문단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감사
오늘은 우리가 새 집을 짓기 시작하는 날이다. 평생 '임시'와'방랑'을 면하지
못했다. 이제는 안주하고 싶은 것이다. 기쁘다.
"얼마나 더 살려고 그래?"
"누구에게 물려주려고?"
내가 집을 짓겠다고 할 때, 이렇게 말하는 벗들도 있었다. 내가 늙은 탓이고
나에게 아들딸이 없는 까닭일 것이다. 이 말들 속에는 물론 내가 고생할 것을
염려하는 따뜻한 우정도 들어 있다. 그러나 나는, '비록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집이 누구에게 돌아간들 어떠랴. 누구라도 들어와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로써 족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했다.
말할 수 없이 신선한 오전이었다. 아름답게 흐르는 오월의 맑은 햇빛, 뜰 안에
가득한 새 소리, 풀 향기, 나무 냄새..., 모든 것이 거룩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벗들이 올 것 같아 약간의 음식을 마련하기로 했다. 손이 없어서 나 혼자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산 색시가 왔다. 갑산 색시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내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에는 젊었지만, 지금은
손자와 손녀들이 국민 학교에 다니는 할머니다. 그는 젊었을 때 나와 함께
살면서, 때로는 쑥을 뜯어다 쑥떡도 만들어 주고 때로는 우리 고향식으로
된장을 담가 나의 향수를 달래 주기도 했었다. 갑산 색시, 아니 갑산 할머닌 곧
시장으로 달려가 도라지, 오이, 호박, 생선 등을 사 오고, 단골집에서 빈대떡도
부쳐 왔다. 그리고 열심히 도마질도 했다. 내가 어려울 때면 언제나 달려오는
갑산 할머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도마질에
여념이 없는 갑산 할머니의 주름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조금 뒤에 서 목사님이 오셨다. 그리고 벗들도 몰려 왔다. 목사님은 곧
기도를 드리셨다. 완공까지도 무사를 비시고 우리 내외에게 감사로 충만한
영혼의 안거를 허락해 주십사고 간구 하셨다. 신앙의 길에 들지 않은 벗들도,
신앙의 길이 다른 벗들도 모두 머리를 숙였다. 나를 위하여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분들, 얼마나 고마운가.
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세상은 거칠다지만 나는 거친 줄을
모른다. 나의 이웃이 고맙다. 내가 사는 사회와 나라, 그리고 하나님이 고맙다.
아무것도 이룩한 게 없는 나에게 너무나 과분한 은총인 것 같아 죄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한 사람의 가냘픈 여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성에겐 그 특유의
모성애가 있는 법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히 개인적인 보호 본능으로 끝나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웃을 향해, 사회를 향해, 겨레를 향해, 할 수 있으면 전
인류를 향해 확산, 심화시키고 싶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느끼는 경건한
태도를 가지고, 나의 사랑을 확산, 심화하는 데 나의 남은 삶을 바쳐야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에게 과분하게 내려진 은총을, 그 억만분지 일도 보답할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원응서편"
원응서(1914__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낚시의 즐거움
1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즐거웠던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
본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즐거움에도 크거나 작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세분과 아이는 차치하고 개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내 경우엔 그
즐거웠던 나날은 낚시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만큼 내
생활의 즐거움은 낚시질하는 행위가 실어다 준 것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낚싯줄을 물에 드리우고 있지 않더라도 낚싯대나 낚시 연장을 매만질 때가 하루
중에서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가난한 묵객은 시름이 있거나 무료할 땐 벼루에다 연적의 물을 부어
먹을 벅벅 갈아 거기에서 안겨 오는 향기로움으로 인생을 달랬다고 한다.
참으로 운치를 담은 경지라 하겠다. 낚싯대를 닦고 매만지는 심정도 이와
상통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낚싯대를 매만지는 것은 반드시 앞으로 고기 수확에 더 큰 기대를 거는
데서가 아니라 세상의 번거로움을 잠시나마 잊고 묵연히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낚시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하루에 한동안이나마
생활의 실무에서 휴식을 주는 시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낚싯대를 매만지면서 무료를 끄며 일요일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이야말로 하루하루가 흐뭇해진다.
즐거움은 반드시 큰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즐거움은 크면 클수록 오히려
지속이 안 되거나 반비례되는 일이 따를 가능성이 짙다.
조그만 은은한 즐거움이야말로 영속될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까닭인지
모른다.
낚시에는 은근한 정미와 조그만 즐거움이 있는 대신 큰 즐거움이 따르지 않는
것은 곧 영속적인 의미가 내재하고 있어서이리라.
언젠가 어느 낚시인의 글에서 읽은 한 대목이다.
낚시 시즌이 지나고 한참 지루한 겨울 한밤중의 일이다. 가족들이 모두 고이
잠든 방 안에서 주인공은 낚싯대를 꺼내 홀연히 휘둘러 고기를 낚아 본다. 그의
얼굴에서는 회심의 미소가 흐른다. 이 때 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낚시의 즐거움이고 낚시꾼의 즐거움의 표현일 것이다.
2
낚시꾼에겐 물은 향수와도 같다. 물만 보아도 낚시꾼에겐 저절로 미소가 안겨
온다. 이것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그리는 마음에서이리라.
논바닥에 고인 하잘것없는 물이건, 벌판 한구석에 웅크린 웅덩이건 물이면
그저 좋다. 하물며 호연한 물바다를 보았을 땐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나오고 속이 후련해진다.
이건 낚시꾼이면 누구나 느껴지는 감회이고 또 낚시꾼만이 누릴 수 있는
흥취일 것이다.
그러나 기실 따지고 보면 물이 그립다는 그 자체는 물과 불가분의 사이인
물고기를 그리는 심정일 것이다.
고기가 살지 않는 물은 나무 없는 산처럼 낚시꾼에겐 무의미하니까.
해발 1천 미터 이상 높이의 고원에 가로놓인 장진호는 묘묘한 바다나
다름없다. 추운 지대이고 워낙 물이 깊어서인지 물고기가 놀지 않는다. 물빛이
짙다못해 검다. 고기가 놀지 않는 물은 사수나 다름없이 매력이 없고 그 검은
물은 두렵기만 하다.
바라보이는 물은 다 아름답고 시원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좋아하는
낚시꾼이라도 붉은 불이나 더러운 물보다는 물의 본연의 자세인 맑은 운치를
아쉬워하게 된다. 고름을 담그면 파란 물이 들 듯한 물이야말로 눈을 감으면
낚시꾼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마음의 소우주인 것이다.
3
어느 낚시터고 고기가 잘 나오는 자리란 몇몇 군데로 정해져 있고 정해진
자리엔 으레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자리 주인이 나오지 않았을 땐 좋지만 낚는
도중에 그 주인이 나타나면 멋적다. 그러니 아예 그런 자리는 넘겨다보지 않고
숫제 새 자리를 찾는 수밖에 없다.
말이 쉽지 새 자리를 찾는 일이란 도시 수월한 노릇이 아니라는 걸
낚시꾼이라면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모처럼 공휴일을 즐기려던 것이
대개는 새 자리 찾기로 황금의 하루를 낭비하기가 일쑤다.
이런 사실을 마음에 다짐하고 난 후라야 이 어려운 작업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맡겨 두다시피 한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찾아서 낚는데서 낚시의
참다운 즐거움과 참맛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마음의 자세는 어느 정도 돼 있지만 모처럼 그것이 돼 주지를 않는다.
하나 뜻대로 돼 주지가 않는 데에 실은 낚시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어느 자리에선 매일 정해 놓고 서너 치짜리가 3, 40수씩 무슨 정리처럼
꼬박꼬박 나오기로 돼 있다면 실로 매력이 없는 낚시일 것이다. 낚싯대를 들어
보나마나 서너 치짜리밖에 나오지 않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력이
없다기보다도 싱거울 것이다.
사실 그 누구도 앉아 보지 않았던 새 자리에서 상상했던 대로 척척 낚아 질
때처럼 자기만의 황홀을 느끼는 일은 또 없을 것이다. 낚시가 다른 오락이나
스포츠보다도 영속적인 매력을 안겨 주는 것도 그것이 무궁무진한 근원을
지니고 있어서이다.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좋은 자리란 우연히 얻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좋은 판단과 시간을 투자한 개척적인 노력에서만 이루어지는 총화일 것이다.
4
낚시에 들린 상태를 가리켜 무슨 일이든 낚시를 하듯 하면 안 될 일이 없을
거라고 한다. 무엇에 들린다거나 심취한다는 그 자체는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낚시꾼치고 다소 차이가 있을망정 흘리거나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홀리고 들리거나 또 홀리게 하고 들리게 하는 데가 또 하나의 낚시의 무진한
묘미이고 매력인 것이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의 대낚시나 한겨울의 삼봉낚시라도 낚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꾼'을 나는 너무나도 많이 보아 왔다.
새벽에 낚싯대를 둘러메고 떠나가는 마당이야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가슴이 부풀 대로 부푼 순간이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먹었단 장소에라도 뜻대로
가 앉게 되어 여건들이 착착 들어맞는 날이면 기분은 더할 나위 없다. 게다가
기대한 대고 낚아질 때는 옆에 벼락이 둘러 떨어져도 모를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여느 때 끼니가 좀 늦어질라치면 아우성이고 으르렁대던 사람도
이쯤되면 적어도 한두 끼니는 무난히 걸러 넘긴다.
이런 걸 두고 몰입 혹은 무아삼매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 사람일수록 서민적인 오락의 빈곤이 따르고 심지어는
낚시는 한가한 층이 즐기는 것이고 노인네나 소일풀이로 하는 소외된 놀음으로
여기는 편견이 아직도 더러는 잔존하고 있다.
이것은 실은 꽤 실질적인 면을 추궁하면서도 되려 실질적이 못 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로만 여겨진다. 많은 투자가 필요한 승마나 골프는
하나의 떳떳한 스포츠로 보면서도 헐값으로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낚시를
꼬집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현대 생활이 긴장을 낳고 복잡해지는 사회일수록 거기서 오는 피로와 병폐를
푸는 작업, 레크리에이션이란 행위가 절실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영국 사람
같은, 우리들보다도 더 실질적인 국민도 낚시를 더 많이 즐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필드 앤드 스트림"을 보면 영국에서는 해마다 전국 낚시 대회가
국가적인 규모로 열리는데 이 날의 대낚시 대회에는 전국에서 등록된 직업 선수
1천 3백 명 내외가 출전을 하고 더비 데이 못지 않게 벌판에 갑작스런 텐트
도시가 생기고 각종 낚시 연장의 바겐세일, 전국 낚시 상점들의 특제품 전시회,
정부 지정 복권 매매소, 음식점, 술집 등 수십만의 인파와 차량으로 성시를
이룬다.
그리고 영국에는 낚시를 직업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 정도는 영국의 보통
공무원 정도이고 그 수효는 1천 명 이상이라고 했다. 이 선수들은 주로 거의
매주일마다 있는 지방 대회에 출전함으로써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들 낚시는 강낚시이고 미끼는 구더기, 그것도 노랑, 빨강, 하양, 그리고
돼지(꼬리난 구더기)등 다섯 가지를 보통 쓰고 있다. 낚싯대는 플라스틱 제품이
많으나 소위 일류 선수들은 일본에서 수입해 온 참대 대낚을 쓰고 있다.
여하튼 1년에 한 번씩 가을에 열리는 이 전국 낚시 대회는 대회일을 며칠
앞두고서부터 즐거운 축제일처럼 낚시 동호인들은 들뜬다. 막상 대회일이
닥치면 각 지방에서 선출되어 출전한 선수들은 선수대로 몇만 달러의 상금으로
가슴이 부풀고 또 낚시 상인들은 1년 중의 최고의 매상을 올리나 그렇고 또
낚시 애호가나 관광객들은 복권으로 해서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이란 나라는 이래서 우리들보다 즐거운 고장이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5
중국의 문필가 김성탄의 글을 읽으면 여름날의 무더위를 두고 묘사한
재미스런 장면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그래서 여름 낚시를 하면서 가끔
생각나는 것이 그의 글이다.
'여름날 삼복 거리에 돗자리는 축축하고 파리 떼가 얼굴 근처를 날아다니나
아무리 쫓아도 달아나질 않는다. 이 때 별안간 천둥이 우르르 진동을 치더니
이윽고 처마 끝에서 폭포처럼 빗물을 쏟아져 내린다. 이래서 성화스럽던 파리
떼는 자취를 감추어 이 때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닐소냐.'
김성탄은 꽤는 가난해서 줄곧 방 안에서 여름 무더위와 싸우는 그런
생활이었으리라.
낚시는 봄, 여름, 가을, 그 어느 계절이고 그것대로 독자적인 맛이 있다.
봄은 봄대로 곡우를 전후해서 산란기를 맞아 신록과 더불어 겨우 내 집 안에
갇혔던 울적을 향기로 씻을 수 있으니 즐겁고, 하지를 지난 무더운 여름은
여름대로 깊은 수심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강바람과 들바람을 쐬니 또 즐겁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은 푸른 하늘과 황금 물결 치는 오곡의 벌판과 울긋불긋 곱게 물든
산야에서 샛바람을 맞는 마음도 또한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낚시 계절 중에서도 여름은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땀이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뙤약볕 밑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느냐고 대뜸 반문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낚시를 드리우고 우선 웃도리와 바지를 훨훨 벗어 던진다. 이렇게 해서 팬티
바람이 되어 맨발을 물에 담그어 보라. 그리고서는 양산을 딱 버텨 놓으면
그만이다. 모자도 삿갓도 소용없다. 몸에는 다만 팬티가 한 장 걸쳐 있을 뿐
어느덧 양산 밑으로는 신선이 오락가락한다. 수면을 타고 불어 오는 미풍은
오히려 간지럽기까지 하다. 이쯤 되면 세상엔 부러운 것이 없을 지경이다.
탑탑한 방 안에서 인공적으로 내는 선풍기의 바람을 나는 병적으로 싫어한다.
에어컨디셔너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피서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서민들에게는
양산 밑으로 신선이 노니는 여름 낚시는 안성맞춤이다.
하루쯤 이렇게 낚시를 즐기고 나면 며칠은 더위를 모르고 지나게 된다. 별로
땀도 나지 않는다. 왠지 모르지만 몸까지 가벼워진다. 이것은 또한 겨우내
감기를 막아 주는 약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내 경험으로도 여름 낚시만 잘하면
감기는 모르고 지냈으니까.
그러나 여름 낚시는 감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런 이점은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지나지 않고 낚시의 본뜻은 생활에 즐거움을 실어다 주는데 있을
것이다.
김성탄도 일찍이 이 신선 놀이의 맛을 알았더라면 이러 시시한 글이 아니라
멋진 통쾌한 글이, 혹은 "낚시의 즐거움"이란 제명으로 더욱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놈을 잡으려
나처럼 글재주가 무딘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번역을 한 줄 하는 데도 민망할
정도로 연방 우리말 사전을 뒤적인다. 그럴 것이 목적한 단어를 찾다가 낯선
낱말이라도 눈에 띄면 그것에 정신이 팔리다가는 또 다른 어휘를 발견하면
그것에로 달아난다. 이처럼 '도리기'란 말을 찾다가 '되리'란 말에 눈을 팔듯이
연줄연줄 따라가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버리곤 한다. 이렇게
흘러 버린 시간이 수없으리라.
이 수없는 시간을 나는 아깝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노라면 우리말 사전과 싸우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가 당장에는
용처가 없지만 앞날을 위해서 눈에 띄는 낯선 말이면 무작정 적어 두는 버릇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적고 적어 둔 것이 어느새 두툼한 노트로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무료한 때면 이 노트를 꺼내 가지고, 어허 이런 어휘도 있었던가, 저런 말도
있었던가고 사뭇 감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겉장이 낡고 닳아 새것으로 씌우고
모자라진 데는 손질을 하느라고 화초를 가꾸듯이 매만지기도 했다. 이렇듯
노트는 거의 내 머리맡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고 손땟국이 흐르게 되었다. 몇
번이나 겉장을 갈았는지 모른다.
이런 노트를 나는 잃어버렸다. 사변 때 모든 책과 함께. 잃은 책은 그때그때
사정이 닿는 대로 제일 필요한 것부터 다시 사들일 수 있지만 노트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뿐 아니라 다시는 노트를 만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를 일이다. 무던히나 열을 쏟았고 정을 부었던 때문인지 모르겠고
이제는 그럴 겨를과 일이 없어서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변으로부터 거의 2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에도 문득문득 생각에
떠오르는 것이 노트다. 번역을 하다 우리말이 막힐 때가 더욱 그렇다. 그것이
지금 곁에 있어도 별도움은 안 될 것이지만, 정확히 따지고 보면 거기 적힌
어휘들이라야 대개는 지금에는 눈에 익은 것이 많고 나머지는 별로 쓰이지 않는
말들이다.
거기에는 놀란흙, 자드락, 어리, 버덩, 도리기, 좀 쑥스런 말이지만 '되리'등이
있을 것이고 번역에 필요한 거의 같은 성질의 낱말들을 정리해 놓은--대번,
문득, 별안간, 갑자기, 대뜸, 금세, 고대, 퍼뜩. 또 다른 종류의 계열로는--결국,
필경, 종당, 필시, 나중에, 결말에, 종국에. 그리고--종종, 가끔, 때때로, 어쩌다
등 이런 것들이었으리라.
후자에 속하는 이러한 일상적 용어들의 집합은 같은 뜻의 '결국'이라는
낱말이라도 다양성 있게 쓰이는 영어에 대처하는 데 편의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취해진, 동의어를 모은 소사전의 구실을 해 주는 것이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노트이건만 그것은 날이 갈수록 눈앞에 자꾸 확대되어
오곤 한다. 무료할 때가 더욱 그렇다. 그리고 2,3월 이맘때면 더더구나 거기
적혀 있었던 낱말 하나가 머리를 뱅뱅 돌면서도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아서다.
겨울철 삼림 속에, 내린 눈이 쌓이고 쌓였다가 봄이 되어 낮에 볕을 받아
오후엔 건등이 녹아 내리며 물이 돈다. 하지만 밤에 접어들어 다시 기온이
내려가 물이 돌던 눈의 건등은 얼음으로 변한다. 발로 짚으면 물 위의
살얼음처럼 바삭 하고 꺼져 내린다. 영어로는 crust라고 한다.
이 눈 건등의 얼음진 것을 한 마디의 낱말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분명히
노트에는 적혀 있었다.
한 5, 6년 전 어떤 수기를 번역하다가 이 crust가 나왔다. 아무리 생각을
해내려고 애를 쓰고 사전을 뒤적여 보았으나 허사였다. 할 수 없이
눈얼음이라고 번역했다. 말이면 다 말은 아니다. 이것은 얼토당토 않은
궁여지책에서 나온 넋두리에 불과하다.
나는 얼마 전부터 하루에 단 1분씩이라도 "우리말 큰사전"을 샅샅이 잡아
나가기로 했다. 저 노트에 적었던 그놈을 잡기 위해서다. 그놈을 잡으려면 몇
해가 걸릴지 모르지만.
이삭주이
책을, 이것저것 주워 읽어 온 데서나 또 번역을 해 온 가운데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상스레 뇌리에 남아 있는 말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술인이나
그 밖의 사람이 종신하는 자리에서 남긴 말에 관한 것들이 그것이다.
오랜 동안 병석에서 심신이 쇠약해진 환자이고 보면 방 안의 채광이 너무
밝아도 정신적 피로를 가져오기 쉽다. 이럴 때는 창문의 차광막을 내리어
채광을 조절하게 된다.
괴테가 종신하는 마당에도 이렇듯 커튼이 내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꾸만 의식이 흐려져 가고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그는 문득 자기의 주변이
점점 어두워져 오는 것만 같아졌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커튼을 좀 올려요.
빛이 좀더 들어오게!' 이렇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일렀던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대시인의 임종을 대시인다운 임종의 말로 미화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커튼을 좀 올려요. 빛이 좀 들어오게!'를 '좀더 빛을! 좀더
빛을!'으로, 평범한 아무렇지도 않은 산문조의 말을 운문 격조로 다듬어 고친
것이 아닐까, 이것은 어느 외국의 평론가도 꼬집어댄 바 있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 비슷한 종신의 장면으로는 O. 헨리의 경우를 또 들 수 있다. 그는
한평생을 두고 뉴욕시를 그렇게도 좋아한 사람이 또 없었을 만큼 사랑했다.
그러한 그가 임종이 가까워 오자 조용히, '차광막을 올려요. 뉴욕 시를
내다보게. 어두운 데서는 죽고 싶지가 않아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괴테의 경우처럼 O. 헨리의 임종 장면에도 차광막이 쳐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것을 끌어올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O. 헨리의 경우는
대시인이 아닌 산문가다운 격조로 임종의 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점은 두 작가가 다 같이 죽음에 임하는 자세가 초연하고
드디어 오고야 말 것이 왔다는 달관의 경지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탐험가 스코트의 마지막 일기를 보면 감히 범인들이 침범하지 못할 인간의
숭고한 존엄성을 엿볼 수 있다.
1911년 아문센은 스코트를 앞지르기 위해 북극으로 탐험길을 떠나는 것으로
위장하고 실은 남극으로 향했던 것이다. 스코트가 사력을 다해 간신히 남극의
극지에 도달했을 땐 그의 눈앞에는 노르웨이의 깃발이 휘날리며 서 있었다.
순간 모든 걸 알게 된 스코트에게는 좌절감이 밀어닥쳤다. 그러나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영하 37도의 눈보라 속으로 죽음의 귀로에 접어들었다. 일행
4명 중에서 오트스란 대원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일행의 행진을
지체시킬까 염려하고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노라, 한 마디 남기고는 텐트
밖으로 세 사람도 북극의 미이라가 됐지만 그들 누구도 당황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한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 보려 했지만 걷잡을 수
없이 몸이 점점 약해져만 가고 있다. 최후가 머지않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상 더 일기를 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스코트는 조용히 붓을 놓았다.
이것은 달관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위대한 정신력을 보여 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의 하나이다.
초년에는 귀족처럼 화려한 생활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렘브란트는
부인을 잃은 뒤를 이어 재물까지 잃어버리고는 구걸하다시피 하는 생활의
구렁창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림에 대한 정열만이 사랑과 재산을 앗아간 그의
여생을 지탱해 주었을 뿐이었다. 드디어 극에서 극으로의 희비고락에 찬 일생을
마치는 마당에 그는 '공허하고도 또 공허하다. 모두가 공허하다!'라고 했다.
이것은 그가 살아 온 인생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내재성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우선 외적인 생활과 싸웠고 자기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새로이 구축하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그리고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발견했을 땐 세상은 모두가 '공허'한 것으로 느껴졌으리라고
본다.
이와는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임종에 인생을 말한 작가가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헵벨이다.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느 작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빈과 갖은 고난
속에서 작품 제작에 목숨을 걸었건만 늘 거지와 같은 구차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만년에야 "니벨룽겐"(1862)이란 대작으로 실러 상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미 종신이 가까웠던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깨달은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술이 있을 때는 술잔이 없고 술잔이 있을 때는 술이
없더라!'고.
그처럼 인생의 무상과 부조리를 실감하고 개탄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희극은 끝났다!' 이것은 일생이 불운으로 가득 찬, 단 한 번만 있었던 결혼의
기회마저 잃어버린, 그런 생애를 마치는 마당에 친지 하나 없이 외로이 가는
베토벤의 마지막 말이었다. 느끼는 자는 울고 깨달은 자는 웃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베토벤의 '희극'은 그가 가장 잘 웃는 최후의 웃음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임종의 짧은 말들은 무엇인가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는 바 크다고
여겨진다.
그것들은 여유 있게 도사리고 앉아 금언이나 좌우명을 쓰는 마음과는 달리
인생이 종착하는 자리에서 우연이 아니라 그들에게 한평생 축적되었던 체험적
진실의 토로이기에 더욱 의의가 크다.
이러한 말들이 지니는 무게는 금언이나 좌우명보다도 우리들을 한층 일깨워
주는 힘이 크고, 또 이러한 말들을 수집 연구해서 집대성하는 일도 결코
무의미한 노력은 아닐 것이다.
"이항녕편"
이항녕(1915__)
법학자. 소설가. 충남 아산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문교부 차관,
홍익대 총장 역임
30년대에 '금성'에 단편 소설을 발표한 바 있는 이향녕은 춘원 이광수에
사사하기도 했다. 1959년 장편 소설"교육 가족"을 발표했고, 뒤이어 장편
"창산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소설가로서보다는 법학 교수로, 변호사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었다.
깨어진 그릇
광복 전에, 나는 경남에서 군수 노릇을 한 일이 있다. 광복이 되자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소나마 속죄가 될까 하여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이 전비에 대한 속죄가 되는지에 관해선 지금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 교육은 가장 신성한 사업이다. 그런 사업에 죄 있는
사람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내가 속죄를 한답시고 교육계에
들어온 것이 교육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나 하고 반성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속죄의 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 학교 평교사 되기를 바랐다. 기왕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상, 가장 기초가 되는 일부터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국민 학교의 평교사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곧 깨어지고 말았다. 국민
학교 교사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었다. 도청에서는, 차라리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중학교의 교사가 되라고 권했다. 나는 한사코 국민 학교에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자격 없는 사람을 발령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교장은 관리직이므로 나의 경력을 참작하여 발령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동래군의 어느 국민 학교 교장이 되었다.
내가 그 학교에 부임한 것은 1945년 12월 초순, 날씨가 퍽 쌀쌀했다. 광복을
맞은 지 4개월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교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교장이
온다는 바람에 무척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택이 학교 안에 있어서, 이삿짐을 운동장가에다 풀어 놓았다. 그리고,
사람을 사서 짐을 나를 작정이었다. 그랬더니, 상급반 아이들이 달려들어
이삿짐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모두 사택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중에
궤짝을 열어 보니 사기 그릇은 거의 다 깨져 있었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남의 소중한 그릇을 다 깨어 놓았는가? 나는 아이들을
몹시 미웠다. 그리고, 이 철부지들을 어떻게 상대하며 살아갈까, 차라리
중학교로 갈걸 하고 후회도 했다. 그 날, 나는 깨어진 그릇들을 바라보며 우울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무거운 걸음으로 사택을 나왔다. 사택을 막 나오는데
꼬마들이 달려와,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하며 매달렸다. 남루한 옷,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과 손, 그들은 나의 모처럼의 새 단장을 마구 더럽혔다. 나는 또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버릇 없는 놈들이 어디 있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국민 학교에 온 것을 또 한 번 후회했다.
조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연단 위에 올라서서 정중한 어조로 일장 훈시를
했다. 그리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나의 위엄을 떨쳐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줄이 엉망인데다가 제멋대로 떠들고 주저앉고 옆 사람을 쿡쿡 찌르고,
무질서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런 무질서 속에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질까, 교육의 길은 이렇게 험난한 것인가, 나의 뜻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서글픈 생각이 가슴 속에 꽉 차 왔다.
나는 조회가 끝나자 산길을 혼자 걸었다. 잠시도 학교에 있기가 싫었다. 아무
희망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산길을 걸어 어느새 범어사 경내에 들어섰다. 갑자기 청정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문득 나의 과거가 회상되었다. 동족을 괴롭힌 죄 많은
인생, 나는 큰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래도 용서되어 새로이 인생을
출발할 수 있게 된 나에게 무슨 불평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교육의 길이
험난하면 할수록 나의 속죄의 길은 넓혀진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삿짐을 굴리던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릇을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되어 부임하는 마당에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고독한 사람이겠는가? 천진 무구한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어린이들의 호의가 뼈아프도록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또 내 새 단장을 더럽힌 꼬마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달려들어 나의
새옷을 더럽혔다는 것은 내가 결코 제외된 인간이 아니란 뜻이다. 때낀 얼굴과
손, 나는 갑자기 달려가 그들을 덥석 껴안아 주고 싶었다.
나의 훈시를 듣는 어린이들이 만일 일사 불란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처음 보는 나를 무섭게 알고 경계하는 뜻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무질서를 탓한 건, 나에게 대한 그들의 친근감의 표현을 내가 오독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들의 무질서한 모습들이 정답게 다가왔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또, 코를 흘리는 꼬마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그 중 한 놈을 덥석 껴안아 주었다.
그 후 나는, 나의 그릇을 깬 그 어린 손, 나의 옷을 더럽힌 그 코흘리개들의
때 낀 손, 그리고 무질서로써 나를 따르던 그들의 눈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만족과 사랑을 느끼었고, 날마다 희열에 찬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매, 이제 내가 교육의 길에 들어선 지 20년, 나는 때때로 그 깨어진
그릇, 그 때 낀 어린 손들을 생각한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이영도편"
이영도(1916__1976)
여류 시인. 경북 청도 출생. 경남에서 오랫동안 여학교 교사 생활을 했음.
시조를 주로 썼으며 수필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음.
이영도의 시조들에는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져 가는 고유의 가락을
재구현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간절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 주었다.
매화
화목을 손꼽을 때 나는 먼저 매화를 생각한다.
겹겹이 둘러싼 겨울의 껍질을 비집고 맨 먼저 봄을 밝혀든 매화 봉오리의
연연하면서도 안으로 매운 동양의 여성 같은 정조!
바야흐로 동터 오르는 여명을 받으며 눈바람을 이겨 선 매화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고향의 산하를 마주한 듯 반갑고 낯익은 모습에 눈물겨워 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날로 그 모습을 변모해 가는 이 세월! 접목접지로 하여 화목마저
그의 본질을 잃을 만큼 색향이 요란해져 가고 있는 이 판국에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한 향기를 새벽 하늘에 풍기며 아직도 얼어 붙은 황량한 뜨락을 불 밝힌
매화! 무리를 멀리한 그 고독은 어쩌면 빈 들판의 눈얼음을 뚫고 움돋는 민들레
같은 눈짓으로 내 가슴에 밀착해 온다.
먼저 사랑을, 먼저 다사함을 소곤대듯 가냘픈 애원으로 얼굴 내어미는
조심성은 세월이 요란할수록 보다 높고 빛나는 예지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살던 동래 애일당엔 동쪽 창 앞에 매화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이른봄 꽃망울이 벌기 시작하면 나는 새벽마다 그 꽃을 마주하여 생각을
나누는 즐거움을 오붓이 지녀 왔었다.
새벽 하늘의 별빛 같은 총명을 반짝이면서 매화는 내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 매화나무가 나의 집 뜰로 옮겨 오던 날, 나는 기관지염을 앓아 신열이
39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의사가 왕진을 나오고 수행 간호원이 방금 주사를 놓고 있는데, 문간이
부산하면서 이웃 농부가 부탁해 두었던 매화를 지고 와서 어디다 심을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나는 스웨터에 머플러를 두르고 입엔 마스크까지 끼고는 비실비실 몸을
가누며 마루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닫힌 유리창 안에서 기침과 오한을 참으면서 아무리 손짓으로 형용을 해도 그
미련스럽도록 마음씨 착한 농부는 알아차려 주지를 못해 나는 결국 직접 뜰로
내려가게 되었고, 적당한 자리에 매화를 심기 위하여 동쪽 창 앞에 섰던
라일락을 다른 장소로 옮기게 되고, 그 라일락에게 자리를 빼앗긴 나무는 또
다른 자리로 옮겨지고...
이렇게 지시를 하면서 뜰에 서성대는 내 행위를 보고 절대 안정을 당부하던
의사는 아연한 표정으로 돌아가 버리고, 함부로 가지를 뻗어 운치를 잃은 매화
나무의 전지를 하느라 손수 가위를 들고 손등에 힘줄을 세우는 형편에까지
이르르고 말았던 것이다.
힘을 써서 흙을 파고 나무를 묻는 일은 농부들이 할 수 있겠지만 가지를
자르고 나무의 모양을 내는 전지 작업에 있어선 아무래도 미학을 모르는 그들의
손에다 화목을 맡겨 둘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꽃나무 앞에 서기만 하면
병도 고생도 잊어버리고 흡사 신이 들린 듯 열성을 기울이는 내 성정 때문에
실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러 그 길로 다시 병석에 누운 나는 꼬박 두 달을
일어날 수 없는 고열과 기침으로 신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신이 들린 듯 매화나무를 옮기며 전지를 하던 환자의 모습을
어처구니없는 듯 물끄러미 지켜 보고 있던 문병객인 M씨가 내 작업을 만류하는
말씀이,
--정운은 아무래도 정신보다 육신을 더 소중해하는 편인가 보다고... 육신을
담을 거처를 장식하기 위하여 정신의 집인 육신을 그렇듯 혹사할 수가
있느냐고...
입으로는 항상 육신보다 정신을 우위에 내세우는 당신이 어찌해서 육신의
거처를 꾸미기에 앓는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냐고... 만약 당신의 육신이 죽어
없어지는 날엔 그토록 소중하던 정신을 어느 자리 어느 세상에다 모셔 앉힐
작정이냐고--.
조금은 비꼬임이 섞이긴 해도 진실로 간곡한 애정의 타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부터는 늘 '정신의 집인 육신'을 내세워 M씨는 나에게 건강 관리를
충고해 마지않았으며 나 역시 너무도 절실한 그의 설득에 한편 수긍할 수
있었지만 내가 뜰을 가꾸고 화초를 만짐은 결코 육신의 거처만을 위한 사치로운
겉치레 행위가 아닌 내 육신 속에 고갈해 가려는 정신의 목을 축이기 위한
엄숙한 작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거처가 비록 정원수 한 그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벌판
같을지라도 지난날 그토록 마음 쏟아 가꾸고 사랑해 온 그 꽃들의 피고 지는
모습과 눈부신 빛과 향훈들, 그것들은 언제나 계절을 따라 나의 심안을 열고
정신의 허기를 채워 주고 있다.
젊은 시절에 무수히 밟고 오르내리던 그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들은 내 조국이
슬프고 짜증스러울 때 회상하여 자위받을 수 있는 정신의 보고가 되어 오고
있듯이...
다시 봄기운이 돌고 그 애일당의 뜰을 밝히던 매화 향기가 추억을 적시는 이
새벽, 잔잔한 메아리로 다가드는 M씨의 타이름이 하나의 철학으로 가슴을 메워
오고 있다.
육신이 떠나고 난 뒤의 정신의 소재!
그 목숨의 그지없는 허무를 씹으며 심령이 메말라 벌린 육신의 허울이 얼마나
초라할 것인가를 느끼며 아직도 사색의 줄이 끊어지지 않은 내 호흡의 물줄기에
스스로 가슴을 적시고 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시달리어 표정은 비록 굳었을지라도 안으로 깊숙이 무수한
초원을 간직한 나목으로 자세하고 싶은 나!
이제 내게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신의 의지에 영혼을 축이는 심령의
작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 송이 매화의 슬기로운 개안도 오로지 큰 뜻을 섭리 없이는 이루어짐이
없음과 같은 이 새벽, 내 마음의 꽃밭에 뿌리는 씨의 작은 알맹이가 내 생명의
핵으로 개화해 주기를 소망하면서 동 트는 여명 앞에 나를 세우고 섰다.
가슴을 환히 밝히고 비쳐 드는 먼 애일당의 매화 향기에 회억을 적시며 섰다.
오월이라 단오날에
어제 오후 저자에 갔던 아이가 창포 한 묶음을 사들고 왔다.
우리의 모든 세시 풍속이 날로 잊혀져 가는 요즘 세월에 그나마 단오절을
기억해서 창포를 베어다 팔아 주는 아낙네가 있어 주었던가 싶으니, 우리
겨레의 멋을 말없이 이어 주는 숨은 정성이 아직도 우리 둘레를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마음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이를 시켜 창포를 삶아 그 물을 뜰 모퉁이 작은 상추밭에 두어
밤이슬을 맞히게 하고, 목욕탕에 물을 넣도록 일렀다.
이슬 맞힌 창포물을 섞어 머리를 감고, 또 상추잎에 내린 이슬 방울을 받아
분을 찍어 아이에게도 발리고 나도 화장을 했다.
가르마엔 분실을 넣고, 창포 뿌리엔 주사를 발라 곤지를 찍었다.
올해 여든이신 어머님께서도 화장을 시켜 드렸더니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띄셨다.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머리에서 은은히 풍겨나는 창포 향기를
맡으며, 나는 옛날로 돌아간 듯 가슴이 느긋해졌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님께선 해마다 단오절이 오면 이렇게 창포 목욕을 시켜
주셨고, 상추 이슬을 접시에 받아 거기 박가분을 개어 얼굴에 발라 주셨기
때문에 나도 어머님과 아이에게 그대로 해 주어서 옛날 여성들의 멋있었던
정조를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화장품이 발달되지 못했던 옛날엔 마른 버짐이 허옇게 피어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단오날 상추 이슬에 분을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살결도 고와진다면서,
이른 새벽 상추밭에 이슬을 받던 그 시절, 어머니들이 자기네 아이들 미용에
얼마나 관심 있었는지 그 심정이 다사롭게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온다.
크림을 찍어 발라 준다든가 튜브에 약을 짜 바르는 것에 비해 얼마나
멋있고도 지성스러운 모정이 어려 있는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앵두를 사다가 화채를 만들고 쑥계피떡을 사다 가족들이 단오맛을
내어 보자고 했다.
내가 어리던 시절엔 명절 중에서도 단오절이 얼마나 기쁘고 신이 났는지
모른다.
여성들은 창포 목욕, 분가르마에 붉은 주사 곤지를 찍고, 낭자머리나 다홍빛
댕기 끝에는 천궁잎과 창포 뿌리를 꽂고 달아서 솜씨껏 모양을 내고는, 그네가
매어져 있는 마을 앞 버들 숲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푸른 버들 숲 속에 삼단 같은 머리채를 휘날리며
그네를 뛰는 아가씨들의 풍성한 여성미의 제전에 맞서, 남자들은 씨름판으로
싱싱한 남성의 멋을 과시하던 단오절!
정초 설날의 줄다리기.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며, 추석절의 강강수월래가
멋있지 않는 바 아니었지만, 신록이 구름같이 피어나는 5월의 푸르름 속에
청춘을 휘날리는 그네뛰기와 씨름판은 바로 인생의 환희가 아닐 수 없으며, 그
날은 규중 깊은 곳에 숨어 살던 아가씨들도 쓰개치마를 벗어 던지고 모두
나와서 참례하는 놀이였고 보니 모든 구경꾼 속에는 신랑감을 물색하기에 눈이
바쁜 이들도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
항라 깨끼 저고리 속을 괴비쳐 풍기는 아가씨들의 은은한 자태들은 전나체에
수영복만 걸친 시속 미인 대회보다 얼마나 격조 높은 잔치였는지 모른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서구식 영향을 받게 되어, 요즘 권투니 레슬링이니 하는
주먹다짐에 목숨을 걸고 날뛰는 악착 같은 경기나, 우승컵 따기에 악을 빡빡
쓰는 쟁탈전과는 달리 마을마다 골짝마다 끼리끼리 명절을 즐겨 우쭐거리던
5월이라 단오절!
갈수록 숨차기만 한 과학 문명의 틈바구니 속에 신경질적인 이 세월에 진정
유유한 민족 특유의 멋을 하루쯤이라도 살려 이 푸른 계절을 숨쉴 수 있다면,
우리 자녀들의 정서 순화는 물론, 주부들의 마음도 얼마나 넉넉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5월이라 단오날!
가정에도 학교에도, 전차, 버스, 사무실 안에도 창포 향기 그윽한 오늘이
되어질 수 있기를 혼자 바라 마지않는다. 그러한 정서가 오늘날의 각박한
숨결에 한 방울 기름의 역할이 될 수 있지나 않을까 싶은 목마름에서다.
모색
지극히 그리운 이를 생각할 때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돌듯, 나는 모색 앞에
설 때마다 그러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질 때는 아마도 모색과 같은 심색일는지 모른다.
은은히 울려 오는 종 소리 같은 빛, 모색은 참회의 표정이요, 기도의 자세다.
하루 동안을 겪어 낸 번잡한 과정 다음에 밀려드는 영육의 피로와 허황한
감회는 마치 한낮의 강렬했던 연소의 여운이 먼 멧등에 서리듯 외로움이 감겨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유명한 화가 밀레도 한 가족의 경건한 기도의 모습을 모색 앞에
세우고 그림의 제목을 만종이라 붙였는지도 모른다.
황혼이 기울 무렵, 산그림자 내리는 들녘에 서면 슬프디 슬픈 보랏빛 향수에
싸여 신의 음성은 사랑하라고만 들려 오고, 원수 같은 것 미움 같은 것에 멍든
자국마저 밀물에 모래알 가셔지듯 곱기 씻겨 가는 빛깔... 어쩌면 내 인생의
고달픈 종언도 이같이 고울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가끔 나는 해질 무렵에 경복궁 뒷담을 끼고 효자동 종점까지 혼자 거닐 때가
있다.
이 거리에 석양이 내릴 때 가로수에 서리는 빛깔을 보기 위해서다.
봄 여름은 너울거리는 푸르름이 마음을 축여 주어 조용한 생기를 얻을 수
있지만 만추에서 초봄까지의 낙목일 경우엔 말할 수 없는 눈물겨운 빛이 된다.
가물가물 일직선으로 열지은 나목들이 암회색 높은 궁창을 배경하고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에 비춰 선 정취는 바로 그윽히 여울져 내리는
거문고의 음률이다.
이 음색에 취하여 혼자 걷노라면 내 마음은 고운 고독에 법열이 느껴지고
어쩌면 이 길이 서역 만리, 그보다 더 먼 영겁과 통한 것 같은 아득함에
젖어진다.
그 무수히 소용돌던 역사의 핏자국도 젊은 포효도 창연히 연륜 위에 감기는
애상일 뿐, 그 날에 절박하던 목숨의 상채기마저 사위어져 가는 낙조처럼
아물어 드는 손길! 모색은 진정 나의 영혼에 슬픔과 정화를 주고 그리움과
사랑을 배게 하고 겸허를 가르치고, 철학과 종교와 체념과 또 내일에의
새로움과 아름다움과...일체의 뜻과 말씀을 있게 하는 가멸음의 빛이 아닐 수
없다.
모색 앞에 서면 나는 언제나 그윽한 거문고의 음률 같은 애상에 마음은
우울을 씻는 것이다.
"전광용편"
전광용(1919__1988)
소설가. 국문학자. 함남 북청 출생. 서울대 문리대 및 대학원 졸업. 문학 박사.
서울 대학 교수 역임.
동화로 출발했다가 소설로 옮긴 전광용은 냉철한 사실적 필치로 한국적인
여러 상황을 추구하는 것이 된 작품 경향이다. 감각적 요소를 곁들인 간결
정확한 문장과 현장 확인을 내세우는 소재의 소화는 그의 작가적 성실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가을의 여정
여행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그리고 여름은
여름, 겨울은 겨울대로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그대로 다 새로운 즐거움을 가슴
속에 안겨다 주는 청신제라고나 할까. 그뿐인가. 농촌은 농촌대로 전원의
유장한 목가적인 맛을,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그것만이 지니는 독특한
자연의 시정을 선물하는가 하면, 새롭고 낯선 도시의 가로는 그것대로 흙 속에
파묻혔던 사람들에게 산뜻한 미지의 감각에 경이에 찬 눈동자를 뒹굴리게 한다.
그러기에 천하 명산 금강산도 계절에 따라 봉래, 풍악, 개골, 금강 등 그
때마다의 승경의 아치를 상징하는 이명들을 가지고 있다. 새 움 트는 봄의
정경이 산책이나 소풍을 연상시키는 경쾌한 리듬이라면, 여름의 무르익은
녹음과 작열하는 태양은 그대로 바다의 유혹을 자극하는 정열 발산의 표정임에
틀림없는 성싶다.
앙상한 가지에 설경어린 겨울 시계가 남성적인 장엄미를 과시하는 것이라면,
사색이 곁들인 여정의 풍일은 아무래도 가을만이 간직한 자연의 격이 아닐 수
없는 것 같다.
가을!
그 음향의 여운 속에는, 그 너머의 첩첩한 시각과 굽이굽이 상념의 계속을
함께 함축하여 주는 낭만이 깃들여 있는 것만 같게 여겨짐을 어찌하랴.
티없이 맑게 트인 드높은 하늘을 끝없이 훨훨 날고만 싶은 충동은 가을만이
지니는 독점물인 것만 같다. 먼지 속에 복닥거리는 도시의 소음을 잠시
외면하고, 놀진 저물녘 차창에 기대어 시골 초가집 지붕에 널어 말리는 빨간
고추와 싸리 울타리에 늘어진 노오란 호박에 눈을 주며 엑조틱한 정감에 잠기는
것은 비단 소녀의 값싼 감상쯤으로만 돌릴 것인가...
가을이라면 으레 곁붙는 푸른 하늘, 귀뚜라미, 기러기, 그리고 단풍과 낙엽,
이것들은 시인 묵객의 입에뿐만 아니라 어린이들 작문 구절에까지도 예사로
오르내려 이젠 좀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과 장소와 사람에
따라 씌어질 나름으로, 그 맛은 또 그 맛대로 전연 가셔진 것은 아닌 것만 같다.
가을 나그네!
그것은 현대 문명의 첨단의 하나인 제트기의 여로에서도 맛보지 말라는 법은
없으리라. 그러나,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다음날 점심을 파리에서 먹어야 하는
기계 문명을 현기증 나는 메커니즘 속에서는, 계절의 신비로운 순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지 자못 의심이 가시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죽장 망혜 단표자의 옛 풍류는 아직도 산정의 진미 속에
천고여하게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 하면 '나그네'와 더불어 떠오르는 추억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부전 고원의 아침 해돋이, 자작나무 수풀을 건너 보이는 호반의
정회와 금강산 상팔담의 사파이어같이 맑고도 푸른 물에 비낀 석양 무렵의
다감한 회포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휴전선 너머 먼 이방 마냥,
흘러가는 구름에 착잡한 회상만 얽힐 뿐이다.
운악산도 금강산과 같은 산맥 줄기여서 그에 비견할 수 있는 승경이라고들
하지만, 백보를 양보해도 금강의 절승에 견주면 해갈의 경지에도 닿지 못하는
끝없는 아쉬움이 감돌 뿐이다.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자꾸만 가고만 싶어지니, 이도 또한 병이런가...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없다. 설악도, 지리도, 속리도, 한라도 다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또 가고 싶은 그 이상의 구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그저
그만 정도의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가을을, 이 상량한 계절을 도심에서 새기며 그대로야 보낼쏜가?
유혹이 거듭되는 여정, 단풍이 좀더 짙어지면 가야산 유곡의 해인사라도
찾아야만이 가을의 병은 치유될 것만 같다. 가을은 소녀처럼 가슴 부푸는 계절,
더욱이 온 누리에서 가장 맑고 아름답다는 이 땅의 가을 하늘! 인공이 미비하니
천부에라도 기대볼까?
그 가을은 여수를 지겹게 안겨다 주기에 더울 매력을 느끼는 것이나 아닐지...
나의 고향
1
나의 고향을 함경도 북청이다. 북청이란 지명이 사람들의 귀에 익게 된 것은
아마도 '북청 물장수' 때문인 것 같다. 수도 시설이 아직 변변하지 않았던 8.15
전의 서울에는 물장수가 많았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북청 사람이었던
까닭으로 '물장수' 하면 북청, '북청 사람' 하면 물장수를 연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청 사람이 물장수를 시작한 것은 개화 이후, 신학문 공부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북청 물장수치고 치부를 하기 위해서
장사를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머리 좋은 조카나 사촌을 위해서까지도
그들은 서슴지 않고, 희망과 기대 속에 물장수의 고역을 감내했던 것이다.
여기에 한 토막의 일화가 있다. 삼청동 일대에다 물을 공급하는 사람 중에,
중늙은이 북청 물장수가 하나 있었다.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연중 무휴로,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물지게를 지고는 물 쓰는 집에서 돌아가며 해 주는
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은 그들의 합숙소인 '물방'에서 잤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물지게를 지고 어느 부잣집엘 들어갔더니, 그 집
마나님이 방금 배달된 등기 우편물을 받아들고는 그것이 어디서 온 건지를 몰라
어찌할 바랄 모르고 있었다. 마나님의 하도 안타까워하는 양을 보다못해, 그는
그 편지를 비스듬히 넘겨보고는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일러 주었다.
판무식쟁이로만 알았던 물장수의 식견에 감탄한 마나님은, 그 후부터 그
물장수를 대하는 품이 달라졌다.
다음해 3월 상순, 어느 해질 무렵이었다. 그제야 겨우 물지게를 지고 그
부잣집 대문 안에 들어선 그 물장수는 이미 얼근히 취해서, 물통에는 물이 반도
안 남았고 바지는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신문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의 아들의 경성 제대 예과 수석 합격의 보도가 실린...
문득 파인의 시, "북청 물장수"가 입 속에 맴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2
우리집에는 어른의 생일을 차리는 법이 없다. 부모의 생사도 모르고 사는
불효 자식이 저 먹자고 제 손으로 생일을 차릴 수는 없는 일이기에.
고향 생각이 가장 절실한 것은 추석을 맞을 때다. 이 날 우리는, 차례를 지낼
대상이 없으므로 일찌감치 등산복 차림을 하고 우이동이나 도봉산으로 간다.
거기서 달이 떠오를 때까지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들국화의 향기를 맡는다.
개울의 돌을 들추고 가재를 잡는다 하며 신명나게 놀지만,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북녘 하늘 한끝에 시선을 막은 채 끝없는 추억과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마음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엔
여전히 뭉쳐진 덩어리가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날
밤 집에 돌아오면, 우리는 고향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아이들은 흥겹게 합창을 하지만, 나와 아내는 어느새 착잡한
심정에 잠기고야 마는 것이다.
이럴 땐 사진첩이라도 펼쳐 보면 좀 나으련만, 고향의 사진은 한 장도 없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결혼 사진만이라도..."
하고 아쉬운 푸념을 되뇐다. 그러니, 차라리 눈이라도 감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명멸하는 것이다.
8.15 직후 서울에 온 나는, 고향이 그립고 궁금하여 그 해 겨울 방학과
이듬해 여름 방학, 두 번을 고향에 다녀왔다.
두 번째 갔을 때는 집에 닿아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보안대에
끌려갔다. 그리고, 당일로 60리가 넘는 군청소재지의 보안서에 연행되어 1개월
간의 교화소 신세를 졌다. 그 때의 죄명은 우습게도 '하경자'라는 것이었다.
서울서 내려왔다고 해서 그런 해괴한 이름이 붙은 것이다.
출감해서 집으로 돌아오니, 나의 절친했던 친구의 한 사람이며 그 쪽에서
열성적으로 깃발을 날리던 Y가,
"너를 감옥에 집어 넣은 것도 나고, 나오게 한 것도 나다." 하고 말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등골을 스쳐 내리는 전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할 뿐이었다. 그 때 서울로 돌아온 후 얼마 동안은, 고향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었다. 그런데, 그 후부터 고향 꿈을 꾸면 꼭 붙잡혀 가서
욕을 보는 장면만 나타나고, 빨리 서울에 가야겠는데 하고 신음하다가 깨는
것이다. 그 그리운 고향이 왜 무서운 꿈으로만 나타나는 것일까?
어머니가 그립다. 나는 어릴 때, 수양버들이 서 있는 우리집 앞 높직한
돌각담에 올라가 아득히 먼 수평선가를 스쳐 가는 기선을 바라보면서, 외국으로
유학간 아씨들을 그려 보곤 했었다. 이젠 80이 넘으셨을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면, 지금쯤 그 돌각담 위에 홀로 서시어, 터널 속으로 사라지는 남행
열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시며, 흩어져 가는 기차 연기 저 너머로 안타깝게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전숙희편"
전숙희(1919__)
여류 수필가. 함남 협곡 출생. 이화 여전 문과 졸업. 미국 컬럼비아 대학
수학.
문화 사절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보여 준 전숙희는 동서 문화의 교류에 남다른
공적을 남겼으며 월간지 "동서 문화"를 창간해 내기도 하였다. 한국 펜클럽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탕자의 변" "이국의 정서" "밀실의 문을 열고" 등
수필집을 통하여 넓은 안목과 교양을 보였다.
삶의 슬기
밤새 훈훈히 김 오른 방문을 열고 청마루로 나서면 코끝이 짜릿하도록 부딪쳐
오는 싸늘한 아침의 감촉.
불기 없는 목욕탕에 받아 놓은 물 위엔 살얼음이 지고 뜰 앞에 서 있는
나무에 매달렸던 마지막 잎마저 떨어져 버리고 가지만이 생명 없는 표본인양
처량해 보이는 초겨울의 아침, 마치 새초롬하게 청초한 여인의 모습 같은,
그러한 초겨울 아침을 나는 좋아한다.
그래서 부엌에서 보글보글 밥 끓는 소리와 뽀오얗게 서린 김의 훈훈함이 더욱
정다움 아침, 또 어쩌면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나, 그 마음 속에 너그러움과
따뜻함이 이끼처럼 깔려 있는 초로의 모습, 그러나 어딘지 범치 못할 단정함과
의연한 여인의 얼굴과도 같은 그 모습을 나는 사랑하고 싶다. 쌀 뒤주에는
햇곡이 가득하고 곳간에는 차곡차곡 담은 김장독과 겨우내 방들을 덥혀 줄
연탄이 쌓이고 담가 놓은 포도주는 향기롭게 익어, 어쨌든 한 시름을 놓고 이제
휴식의 아침을 맞을 만하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가까워 오는 설날의 꿈을 익히고, 젊은이들은 성탄절에
주고받을 선물과 카드로 마음이 설레이는 아침, 나는 폭신한 털옷으로 몸을
싸고 싸늘한 고요 속에 그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일만이 즐겁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나뭇가지에 흰 눈송이가 쏟아진다. 마치 어려서 내가
좋아하던 어떤 크리스마스 카드의 그림 풍경처럼.
얼마 후, 흰눈은 걷히고 나뭇가지에는 새파란 움이 트이더니 푸른 나뭇잎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오래잖아 나무에는 눈부신 붉은 꽃송이들이
탐스럽게 만발한다. 태양은 밝고 우주는 온통 밝은 풍경이다.
그러나, 바라다보고 있는 동안 어느샌가 그 꽃들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잎이 피고 또 떨어진다고 하자.
그리고 열 번 다시 그 붉은 꽃이 만발하고 또 흰 눈송이가 덮일 때, 내 머리는
이미 희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리라. 초조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으리라.
나는 어려서 곧잘 책상 앞 벽에다 그 시절의 어린 여학생들의 버릇대로
'시간은 황금이다'라고 문구를 써 붙이고 날마다 쳐다보기를 좋아했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던 나는 내 시간이 너무나 모자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이렇게 나 자신을 채찍질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도 결국은 나에게 별다른 성과를 주지는 못했다. 즉
지나간 그 많은 시간들도 나에게 기적을 낳아 주진 않았다. 나 자신의 의욕과
협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나에게 넉넉히 주어졌던 노다지
황금과도 같은 그 시간에 노다지 덩어리를 마구 함부로 낭비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내 비록 오늘날 그 시간을 통해 별것이 되지는
못했을망정 나는 쓰고 단 생활을 맛보고 또 배웠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사랑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었고 망각의 슬기로움과 평화로움을 가르쳐
주었다. 시간은 나를 황금처럼 빛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지는 못했으나, 그
시간은 나에게 사람을 사랑하고 남을 이해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르쳐
주었다.
푸른 꿈을 가득 지녔던 20대에 나는 지망했던 문학에서 철학으로 옮기려고
했다. 문학조차 시시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회의에 가득 찼던 20대의 나는
모든 것을 동경하면서 또 동시에 경멸하려 드는 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30대 40대의 나는 변해 있었다. 정열을 다해 생활을 사랑하는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열심으로 이성을 사랑하고 친구를 따르고, 아이들에게 정을 쏟고 사회
생활에 참여하고...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금 때때로 철인이 되려는 나 자신을 보며 혼자 미소
짓는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부귀 영화도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도다.' 나는 성경의 이 굴절을 즐겨 되씹어 본다. 그러노라면 뭔가
가슴 속이 허전해 온다. 인생 전체가 연기처럼 모호한 느낌이다.
그러면 왜 나는, 또 많은 사람들은 그처럼 헛되고 헛된 생을 영위하기 위해
그처럼 악착스럽도록 열심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
생각하는 나는 외롭지 않다. 철학 서적을 뒤질 필요는 없다. 인생의 해답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뜰 앞에 서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김 서린 부엌에도,
골목 밖에서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음성에도, 내 인생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나는 때때로 실망이란 아픔을 맛보았고 움직이지 않는 차바퀴를
억지로 밀고 나가려는 어리석은 욕심조차 부려 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그마한 내 생활의 창을 통해 생명의 존엄과 삶의 보람을 배워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인생과 더불어 밝아 오는 이 초겨울 아침에도 나는 가슴 속에
훈훈한 애정을 품어 보는 것이다.
설
설이 가까워 오면, 어머니는 가족들의 새 옷을 준비하고 정초 음식 차리기를
서두르셨다. 가으내 다듬이질을 해서 곱게 매만진 명주로 안을 받쳐 아버님의
옷을 지으시고, 색깔 고운 인조견을 떠다가는 우리들의 설빔을 지으셨다. 우리는
그 옆에서, 마름질하다 남은 헝겊 조각을 얻어 가지는 것이 또한 큰 기쁨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살림에 지친 어머니는 그래도 밤 늦게까지 가는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 한땀 한땀 새 옷을 지으셨다. 우리는 눈을 비벼가며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었다.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배갯머리에
어머님이 홀로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잠든 아기는 어머니가 꿰매 주신 바지를 입고 산줄기를 타며 고함도 지를
것이다. 우리는 설빔을 입고 널 뛰는 꿈도 꾸었다.
설빔이 끝나면 음식으로 접어든다. 역시 즐거운 광경들이다.
어머니는 미리 장만해 둔 엿기름가루로 엿을 고고 식혜를 만드셨다.
아궁이에서는 통장작불이 활활 타고, 쇠솥에선 커피 색 엿물이 설설 끓었다.
그러면, 이제 정말 설이 오는구나 하는 실감으로 내 마음은 온통 그 아궁이의
불처럼 행복하게 타올랐다. 오래 오래 달인 엿을 식혀서는 강정을 만들었다.
검은콩은 볶고 호콩은 까고 깨도 볶아 놓았다가 둥글둥글하게 콩강정도 만들고
깨강정도 만들었다. 소쿠리에 강정이 수북이 쌓이면서 굳으면, 어머니는 독
안에다 차곡차곡 담으셨다.
수정과를 담그는 일도 쉽진 않다. 우선 감을 깎아 가으내 말려서 곶감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알맞게 건조한 곶감은 바알갛게 투명하기까지 하고, 혀끝에
녹는 듯한 감칠맛이 있다. 이것을 향기로운 새앙 물에 띄우고, 한약방에서 구해
온 계피를 빻아 뿌리는 것이다.
빈대떡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우선 녹두를 맷돌로 타서 물에 불려
거피를 내고 다시 맷돌에 곱게 갈아, 돼지고기와 배추 김치도 알맞게 썰어 넣은
다음, 넉넉하게 기름을 두르고 부쳐 내는 것이다. 며칠씩 소쿠리에 담아 놓고
손님 상에 내놓기도 좋거니와 솥뚜껑에 푸짐이 부쳐 가며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것도 별미였다.
그러나, 정초 음식의 주제는 역시 흰떡이다. 흰쌀을 물에 담갔다가 잘 씻고
일어선 차례로 쪄내고, 앞 뜰에 떡판을 놓고는 장정 두어 사람이 철컥철컥 쳤다.
떡판에선 김이 무럭무럭 올랐고, 우리들은 군침이 돌았다. 장정들이 떡을 쳐
내면 어머니는 밤을 새워 떡가래를 뽑고, 알맞게 굳으면 이것을 써셨다. 그리고,
세배꾼이 오는 대로 맛있는 떡국을 끓이고, 부침개며 나물이며 강정이며
수정과며 한 상씩 차려 내셨다.
나는 지금도 설날이 되면, 어머니 옆에서 설빔이 되기를 기다리던 그 초조한
기쁨, 엿을 고고 강정을 만들고 수정과를 담그고 흰떡을 치던 모습, 빈대떡
부치던 냄새, 이런 흐뭇한 기억이 되살아나 향수에 잠긴다.
우리 어머니들은 설빔 하나 만드는 데도, 설상 하나 차리는 데도 이처럼
수많은 절차를 거치고, 알뜰한 정성과 사랑을 쏟고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대접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가?
기성복상에는 항상, 맞춘 것 이상으로 척척 들어맞는 옷들이 가득 차 있으니
언제든지 돈만 들고 나가면 당장에 몇 벌이라도 골라 입을 수 있다. 설이
돌아와도 여자가 그의 남편이나 아이들을 위해서 밤 새워 옷을 지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식료품상에는 다 만든 강정이 쌓여 있고, 다 갈아 놓은 녹두도
있다. 아니, 빈대떡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흰떡도 뽑을 필요가 없이, 쌀만
일어 가지고 가면 금방 떡가래를 찾아올 수도 있다.
세상이 모두 기계화되었으니, 필요한 것은 돈과 시간 뿐이요, 솜씨나 노력의
정성이나 사랑이 아니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편리' 속에
짙은 향수가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는 정작 귀한 것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 여성들의 그 정성과 사랑을 우리는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옷 한 가지 짓는 데도, 남편의 밥 한 그릇 마련하는 데도, 조상의
제삿상 하나 차리는 데도, 이웃에 부침개 한 접시 보내는 데도, 우리 여성들은
말할 수 없는 정성과 사랑을 다 바쳤다. 옛날의 우리 의생활과 식생활은
여성들의 무한한 노고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지만, 우리 여성들은 오로지
정성과 사랑으로, 노고를 노고로, 인내를 인내로 알지 않았다. 밤새도록
시어머니의 버선볼을 박던 며느리, 손 시란 한겨울에도 찬물을 길어다 흰
빨래를 하고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하고,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던 아내와 어머니, 한국 여인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씨를 누가 감히 따를 수
있을까?
오늘의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잃어 가고 있다. 마음을 잃어 가고 있으므로
생활도 잃어 간다. 아침이면 뿔뿔이 헤어지고, 저녁에 모여선 빵과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고, 텔레비전 앞에서 대화 없는 몇 시간을 지내다가 또 뿔뿔이
헤어져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도 많다. 편리하지만 참생활이 없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한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려서 우리 어머니들에게서 느끼던 그 '어머니'를 오늘의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느끼게 하지를 못한다. 사서 입히고 사서 먹이는 동안에
우리는 정성과 사랑이 식어 간 것이다. 뼈저린 고생이 없는 대신, 그 뒤에 오는
샘물 같은 기쁨도 없어졌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고독하게 자라는지도
모른다. '편리'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뜨겁게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새삼스럽게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여성들이 보여준 그
정성과 사랑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의 마음만은 이어받자는 것이다. 아무리
기계화된 생활이라 할지라도 정성과 사랑은 쏟을 데가 있을 것이다. 이야말로
삭막해져 가는 우리의 생활을 인간다운 것으로 되돌리며, 현대인의 고독을
치유하는 길이리라.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필요까지도 없다. 나의 남편과
아이들로 하여금, 고독을 모르는 기쁜 생활을, 행복하게 누리게 하는 길이라고
믿자.
명절이 돌아오면 나의 고독한 눈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자꾸만 떠오른다.
"조지훈편"
조지훈(1920__1968)
시인, 본명은 동탁. 경북 영양 출생. 혜화 전문 졸업. 고려대 교수, 민족 문화
연구소장 역임.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림.
지사풍의 시인으로 알려졌던 조지훈의 시는 회고적 취미, 자연적 친화성,
불교적 선의 감각 등을 그 주요한 바탕으로 삼았다. 엄한 유교적 가정에서
자라난 장자의 기풍이 있었으며 후기에는 시보다 민족 문화의 개발에
주력하였다.
지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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