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월
어느 누가 일상의 굴레를 쉽게 떠날 수 있으랴. 나이를 들수록 점점 더 빠져 드는 일상의 늪을 허우적 거리다가 꼬르륵..... 그대로 끝나고 마는게 우리들의 인생이 아니던가. 바쁜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일주일 한달, 일년이 후닥후닥 지나가고 "내 몫의 시간"은 별로 주어지질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직장과 교회, 가정등을 떠나 뭔가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 나만의 시간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 현실인지 모른다.
요즘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로 떠오르는 조안리의 작품 "사람과 성공은 기다리지 않는다"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로선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저자는여 늬 날과 다름없이 바쁜 사무실 일을 마치고 혼자서 차를 몰고 퇴근한다. 마침 창밖으로 바라뵈는 가을 하늘이 너무나 파랗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집으로 향하던 차를 돌려 김포공항으로 향해 버린다. 그리고 무조건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2박 3일 동안 자기 충전의 시간을 보낸뒤 서울로 되돌아온다. 저자의 행동이 약간 이상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이 얼마나 멋진 일상의 탈출인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저자의 정신적 자유로움과 그럴수 있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는 금년 여름휴가에 훌쩍 5박 6일 동안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주위사람들은 어쩌면 휴가 기간동안 부인과 함께 가지 않고 혼자서 그렇게 다녀올 수 있느냐고 반문 한다. 물론 중국 여행에 대해 아내와 상의는 했지만 서로의 의견이 맞질 않았다. 아내는 무엇보다도 고교생 자녀를 두고 어떻게 집을 여러 날 동안 비울수 있느냐, 해외여행은 애들이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테니 뒤로 미루자는 것이었다. 아내의 말에 동의하기엔 나의 역마살이 그대로 있질 못했다. 무조건 떠나고 싶어 여행사에 수속을 밟고 그냥 정해진 날짜에 김포공항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민족의 한이 서린 백두산 정상을 밟아 보고, 연변 땅(도문)에서 두만강 너머 북녘땅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맨발로 걷고 걸어 중국의 만리장성 계단을 끝까지 올라보고,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가 걸린 천안문 광장을 거닐어보고.... 비록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갈 곳을 가 보고 볼 것을 보고나니 어찌 속이 다 후련한지 여행을 통한 삶의 재충전을 다시금 실감했다.
호반의 도시, 춘천에 가면 시내쪽으로 의암댐 주변 공지천 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의 약 2.5킬로 미터에 이르는 둑길이 너무도 맘에 들었다. 멀리 중도 섬이 보이고 병풍처럼 둘러선 산에 흐름을 멈추고 묵묵히 갇혀있는 거대한 호수도 좋거니와 비교적 도로가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둑길 양옆으로 오른쪽엔 숲이 우거지고 왼쪽엔 호수를 끼고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봄이면 아카시아꽃 향기가 그윽하고, 여름이면 녹음의 왕성한 생명력이 풍기고, 가을이면 하얀 개망초꽃과 억새꽃이 흐드러지고, 겨울이면 한없이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공지천 산책로가 나의 비밀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마음이 울적하거나 답답하게 느껴질 때 가끔 나는 이곳을 찾아 나선다.
이번 추석 연휴에도 나는 혼자서 숨겨둔 애인을 만나듯 차를 몰고 경춘가도를 달려 공지천 둑길에 이르렀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발바닥에 흙의 감촉을 느끼며 둑방길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가을 햇살이 아직은 따갑게 느껴지지만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스쳐오는 강바람을 쏘이는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둑밑에 앉아 한가로이 낚시줄을 드리우고 있는 꾼들의 모습도 보이고, 씩씩한 젊은이들이 조정경기 연습을 하며 강심을 멋지게 가로지르는 모습도 근사했다. 공중에 한가로이 떠돌던 물새 한마리가 고기를 잡기 위해 날카로운 부리를 곧추 세우고 갑자기 수면으로 투하하는 모습도 짜릿한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길옆에 하얗고 잔잔한 개망초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나의 직장동료중 한 명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머리가 아프고 피곤해지면 회전의자를 돌려 앉아 가만히 눈을 감는단다. 그리고 자신이 여태껏 다녀왔던 잊지못할 추억의 장소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즐거워한다. 그 아름다웠던 해외여행의 명소며,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에 실컷 빠지다 보면 어느새 모든 스트레스가 저만치 달아나게 된단다. 이 얼마나 괜찮은 스트레스해소법인 줄 모르겠다.
여행을 하다보면 또는 산에 오르다 보면 너무나 앎다운 풍광에 넋을 잃고 언제까지나 머무르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바삐 떠나오거나 하산해야 할 때의 아쉬움은 무어라 안타깝기 짝이 없다. 몇 년 전에 겨울 속리산에 올랐을 때 눈꽃이 활짝 피고 고드름이 가지에 매달린 겨울숲에 햇빛이 반사돼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동화나라에 들어선 듯 황홀한 풍경속에 매료되어 그대로 머물러 "죽고 싶다"는 느낌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은 마치 우리가 비로소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될 때, 늙어버리고 이젠 죽어야 하는 진리처럼 느껴졌다. 앞에 소개한 책에서 조안리는 돈을 왜 버는가의 문제에 대해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는 아주 명쾌한 답변을 해 주었다. 최근에 은행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동료직원 한 명이 명예퇴직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이제 그만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아, "자유함"이라는그 말이 불혹의 나이를 넘기며 코 끝이 찡하도록 그립게 다가선다.
또 한 해가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그리도 중요하고 "바쁘다 바뻐"를 외치며 나 자신을 옭아메고 있는가. 가끔씩 도도히 흐르는 일상의 강물을 빠져 나와 날개를 달고 싶다. 가을 하늘 같은 자유함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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