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古木)
유재용
아버지는 여든 다섯 살이 되도록 꿋꿋했다. 지팡이가 소용없었고 고두밥이라야 좋아했다. 꼬장꼬장한 허리와 휭하니 내닫는 걸음걸이, 똘똘 뭉쳐 나오는 힘찬 말소리를 대하며 사람들은 저 노인네 백 살은 몰라도 아흔 아홉 살까지는 끄떡없이 버틸 거야 하고 말했었다. 그러면서도 며칠 사이에 아버지의 안부를 묻곤 하는 것은 노인네 일이란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꿋꿋해 보이는 노인네일수록 하룻밤 사이에 털썩 쓰러져 버리기 일쑤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사태나듯 무너지지는 않았다.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다리가 저리구 땡긴다."
이렇게 붕괴가 시작되었다. 혈관이 굳어지는 조짐이라고 했다. 그렇게 이삼 년 끌어간 뒤 기억력의 뚜렷한 쇠퇴 현상이 나타났다. 오늘이 며칠이냐, 무슨 요일이냐, 날짜를 잠시 사이를 두고 묻고 또 물었다. 금방 식사를 하고 나서도 식사를 했느냐고 물었다. 친척이나 고향 사람의 얼굴을 얼른 알아보지 못하기 일쑤였다. 경화에 의한 뇌동맥 협소로 뇌혈관을 통하는 피의 흐름이 장애를 받고 있는 현상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길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삼백 미터만 떨어져도 되짚어 돌아오지를 못했다. 집 부근에 바람을 쏘이러 간다고 나간 아버지가 동네 사람 손에 이끌려 이마를 깬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넘어져 돌멩이에라도 부딪친 듯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아버지가 길가 쓰레기통 옆에 머리를 구겨 박고 허위적거리더라고 아버지를 데리고 온 사람이 말했다. 아버지 얘기로는 길을 걷는데 자꾸만 거꾸로 서서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몸을 바로잡으려고 애썼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균형 감각의 상실 또는 다리와 척추의 기력 약화로 머리의 무게를 지탱하기가 벅차진 때문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팡이 사드릴까요?"
하고 물으면
"늙은이 짚을 지팡이는 자식들이 사다 주는 게 아니라더라. 자기가 사거나 마누라가 사 주는 게 좋대."
하고 대꾸했다.
"그러면 지팡이 파는 가게에 아버지를 모셔다 드릴까요?"
"고만둬라. 여태 안 짚던 지팡이를 인제 뭘 새잽이루 짚어? 지팡이 짚어 버릇하면 지팡이 읎이는 영영 못 걷게 돼."
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지팡이를 짚어야 하도록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몇 차례 더 산책을 시도했다,
"아이들이라두 데리고 나가시지요, 아버지."
그때마다 말했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혼자 갈란다. 길 잊어먹는 것두 어쩌다지, 십여 년 산 동네 길을 장창 잊어먹겠니?"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라가 보았다. 아버지는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기억해 두려는 듯 차근차근 주위를 살폈다. 곧은 길을 걸어 나가면서 가지친 골목 수도 세어 보는 것 같았다. 모퉁이를 다시 한번 돌아서서 얼마쯤 나가던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허둥거려지기 시작했다. 턱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골목 안을 기웃거리는가 하면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무엇 때문에 자기가 거기 와 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는 투였다.
그러자 아버지의 표정이나 몸짓에서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히 나타났다. 아버지는 발길을 돌렸다. 귀가를 서두르는 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엉뚱한 골목으로 접어들어 가서 집집의 문패와 대문 안 쪽을 기웃기웃 살피곤 했다. 걸음걸이가 갈팡질팡해지고 머리통이 흔들거리며 기울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달려가 아버지 팔을 부축했다.
"길이 많이 달라졌구나."
아버지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전 집들을 헐어내구 새집을 지어서 그래요."
"그래 ? 그래서 그렇게 낯이 설구나."
아버지는 자기가 길을 잃어버린 까닭을 찾아내기라도 했다는 듯 기분 좋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튿날 그 지점에서 다시 길을 잃어버렸다.
"거 참 이상하다. 알 수 없는 노릇이야."
다가가서 팔을 부축하는 나를 잠시 기억을 더듬어 알아보고 나서 아버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당신이 십여 년을 살아온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납득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면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다는 것을 실증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고집부리며 혼자 산책을 나가곤 했다. 그렇게 네 번인가 다섯 번 더 산책을 나간 후 나에게 부축되어 돌아오며
"이젠 나두 다 살았나부다."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한 보름 동안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언제 너 바쁘지 않을 때 지팡이나 사러 나가자. 남하는 대루 따라 해야지 중뿔나게 굴 것 있나?"
어느 날 저녁 식사시간에 아버지가 말했다.
"내일 나가시지요."
나는 선뜻 대답했다.
"아무개는 아흔 살에 지팡이를 짚기 시작해서 십 년을 더 살았다더라."
아버지는 체념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기분이 퍽 좋은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헌데 이튿날 아침 몸을 일으키려다가 아버지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어이쿠 다리야!"
왼편 다리에 통증이 온다고 호소하며 그 다리를 쓰지 못했다
"연세가 어떻게 되셨지요?"
"아흔 둘 되셨습니다."
"신체의 여러 기관이 굳어 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삼 개월이나 육개 월, 좀 더 길게 잡으면 구 개월이나 십이 개월 동안 누워 계실 수 있지만, 삼 개월이나 육 개월 안에 돌아가신다구 보는 게 좋겠습니다. 다시 일어나실 수 없습니다. 준비를 시작하십시오."
의사가 말했다.
집 근처에 산이 있었다. 산길 초입까지는 불과 삼백 미터 거리였다. 새벽이면 산 위에서 사람들이 질러대는 소리가 닫힌 창문을 뚫고 이불 속까지 들려오곤 했다. 별로 높지도 않은 그 산을 나는 쳐다보기만 했을 뿐 올라가 본 일은 없었다. 쳐다보는 것도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곁에 있어 눈에 띄니까 본 것이었다. 소 잔등처럼 밋밋하게 뻗어나간 산줄기 끝 부분은 이름난 공동 묘지였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풀이 시들어 주저앉은 겨울철이면 공동 묘지뿐 아니라 온 산을 무덤들이 덮고 있는 모습이 드러나 보였다. 십여 년 전 이 동네에 처음 이사해 왔을 때는 빤히 바라보이는 산기슭에서 산역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산역꾼들이 흙을 다지며 읊는 노랫가락과 상제들의 곡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기도 했다. 그 모습은 체념처럼 받아들여야 했지만 어쨌든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그 우울한 느낌이 의식 속에 모르게 쌓여 온 때문일까. 요즈음에는 산의 턱 아래까지 집들이 가득 들어차 새벽이면 사람들이 운동 삼아 산을 오르게 되었지만 나는 한 번도 올라가 볼 마음을 먹지 않았다.
내가 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다리를 못 쓰고 누운 뒤부터였다. 아버지가 자리에 누운 날 나는 누님을 찾아갔었다.
"묘지를 마련해야 할 텐데."
내 말에
"고향 선산에 묻히실 것두 아닌데 묘지는 해서 뭘 하니?"
누님은 흥미 없다는 듯 대꾸했다.
"고향 선산에 모실 수 있는 처지면 묘지를 마련할 생각을 하겠우?"
"화장해 버려."
누님은 잘라내듯 말했다.
"누님은 너무 쉽사리 얘기하는 거 같수?"
"어렵사리 얘기한대두 그렇지. 생각해 보렴. 땅 한 조각 사서 어중이떠중이 모여든 무덤들 틈에 비비대구 묘를 써 봤자 뭐하니? 그나마 너나 내가 살아 있을 때 얘기지, 너나 내가 늙어 죽은 담에 네 자식들이자 내 자식들이 할아버지 무덤 찾아갈 것 같니 ? 그때 가선 임자 없는 무덤 돼 버려. 너 언제 묘지에 좀 가 보렴. 임자 없는 무덤들 볼상 사납더라,"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어느 것 할 것 없이 종내에는 다 임자 없는 무덤 돼 버릴 것 아니우?"
"그리구 말이야. 이 담에 나 죽으믄 어느 낯선 골짜기 이름 모를 무덤들 틈 비집구 무덤 하나 만들어 놓구. 또 머 죽으은 어느 산등성이 무덤들 틈 비집구 무덤 하나 만들어 놓구, 어머니 뼈는 어디 묻혔는지두 모르구. 오빠 혼은 어디를 떠돌아 다니는지두 모르구,,,,,, 이렇게 뿔뿔이 제가끔 흩어져 묻힐 바에야 차라리 화장을 해 버리는 게 깨끗하지 않냐 말이야."
"우리 살아서 고향에 가게 될지 누가 알우 ? 화장을 해 버린다면 고향 선산에 뼈두 옮겨잘 수 없잖우?"
"넌 정말로 우리 살아서 고향에 갈 수 있게 되리라구 생각하니? 그렇지만 그것 가지구두 안 돼. 아버지나 쌍문동 사시는 당숙 살아 계실 동안에 고향에 가게 되지 않음 아무 짝에두 소용 읎어. 고향 선산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하구 당숙 두 분밖에 읎어. 그나마 아버지는 틀렸구 당숙두 칠십 노인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 기회에 일가 집안들이 돈을 와서 시굴에 산 한 정보쯤 사두면 좋을 것 같은데."
"뜻이야 좋다만 번쩍하는 생각이나 그럴 듯한 말일수록 반죽이 잘 안 되는 법이야. 남의 돈 가지구 장사 지낼려구 일 꾸민다는 뒷공론이나 듣기 십상이야, "
어느덧 내 하루는 산에 오르는 일로 시작되었다. 산길은 무덤들 사이를 헤치며 뻗어 있었다. 무덤들이 유심히 바라보였다. 손등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사마귀처럼 징그럽게 뒤엉겨 보이던 무덤들이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 정다운 모습으로 눈에 안겨 왔다. 구별할 수 없도록 똑같아 보이던 무덤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큰 무덤 작은 무덤. 높은 무덤 낮은 무덤. 터를 넓게 잡은 무덤 좁게 잡은 무덤, 이런 겉모양도 겉모양이거니와 무덤들은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연고자들의 손질이나 마음 씀씀이 때문일까, 무덤들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생각 때문일까. 산비탈을 깎아 터를 닦고, 둥우리를 틀 듯 아늑하게 들어앉아 무덤들은 제각기 달무리 같은 추억에 잠겨 있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삼팔선을 넘어오다 빼앗긴 짐 속에 들어 있던 어린 시절 사진들을 생각하곤 했었다. 그 속에서는 내 돌 사진도 들어 있었다, 그 생각을 할 적마다 잃어버린 사진들과 함께 내 어린 시절의 모습들이 영영 사라져 버린 듯한 아쉬움에 휩싸여야 했다. 내 어린 시절의 모습들은 낯모르는 북쪽 경비병의 손에 찢기고 구둣발에 밟혀 삼팔선 어느 골짜기를 굴러다니다가 비바람과 세월에 삭아 흙으로 변했을 것이었다. 허지만 요즘 와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잃어버린 사진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고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리에 눕자 나는 어머니의 머릿속에 마음속에 필름처럼 담겨 있었을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고, 더불어 멀지 않아 아버지와 함께 사라져 버릴 고향의 모습, 내 기억만으로는 찾아낼 수 없을 고향의 모습들을 상상해 보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고향 산천의 모습을 구석구석까지 집어내어 말할 수가 있었고 고향 마을의 골목골목. 골목 가에 늘어선 집들의 생김새, 그 집안에 살던 사람들의 용모와 이름과 생업까치 기억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마치 고향 마을 뒷동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것 같았다, 노쇠해 기억력이 희미해진 들 고향의 모습이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없어져 버릴 수가 있을 것인가. 아버지는 고향의 일부였다. 잠시 떨어져 나온 고향의 한 조각이었다,
나는 산을 오르며 무덤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곤 했다. 무덤들은 떼옷을 곱게 차려입고 향나무와 갖가지 꽃나무들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잘 가꾼 조그마한 정원 같았다, 무덤 위나 무덤 앞에 종이에 싸인 꽃다발이 놓여 있기도 했다. 사람들은 무덤 속에 기억을 묻어 놓고 찾아올 적마다 들춰내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임자 없는 무덤이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묘미에는 무덤이 만들어진 연대가 새겨져 있었다. 1963년 졸(卒). 1965년 졸.1968년 졸. 오랜 것이라야 이십 년이 채 안 되었고, 대부분은 십오 년 안쪽의 것들이었다. 이십 년도 안 되어 임자 없는 무덤이 돼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차츰 길을 벗어나 묘지 안 깊숙이로 들어가 보았다.
정원처럼 잘 가꿔진 무덤들 가운데 30년이 넘은 것을, 아니 40년, 50년이 넘은 컷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어느 무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1968년 졸 무덤에는 잡초가 어지럽게 우거져 있었다. 지지난 해에 무성한 잡초가 시들어 눕고 그 위로 다시 지난 해의 잡초가 자라 번성했던 것 같았다. 봉분 위의 잡초를 비집고 이름 모를 나무마저 꾸부정하게 돋아나 있었다. 찾아오던 사람들이 발길을 끊은 무덤임에 틀림없었다. 찾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 버린 것일까. 찾아오기가 귀찮아진 것일까. 아니면 찾아오던 사람도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일까. 나는 피하듯 발걸음을 옮겼다.
허지만 여기저기서 임자 없는 무덤이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떼가 벗겨지고 흙이 떨어져 봉분이 일그러진 것도 있었고 언덕 위에 올라앉은 어떤 무덤은 앞이 뭉청 끊긴 듯 무너져서는 봉분 밑까지 흙구덩이가 패어 들어가 당장이라도 관이 드러나 보일 듯한 느낌을 주었다. 모두가 십 년 남짓된 무덤들이었다. 내 마음속을 공포 같은 것이 쓸며 지나갔다. 십 년이란 한 무덤이 임자 없는 것으로 버려지기까지의 세월로는 너무 짧지 않은가. 산을 내려오는 내 머릿속에 임자 없는 무덤들과 담께 누님이 하던 말이 떠올라 왔다
일가 집안 사람들은 아버지가 자리보전하고 누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알리지 않으면 장사를 치르고 나도록 모르고 있을 것이다, 육촌이나 팔촌 형제들은 손가락 꼽을 만큼은 넘어와 있었지만 평소에는 왕래가 없는 형편이었다. 나부터도 육촌이나 팔촌의 집을 태반이나 모르고 있었다. 뉘 집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면 쌍문동 당숙모가 지팡이 짚고 허위적거리며 돌아다녀 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모아놓곤 했다. 모여들 때면 전화 번호니 주소니 쪽지에 갈겨 써 가지고 서로 주고받고 하지만 주머니에 집어넣은 쪽지들은 며칠 못 가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곤 했다, 집안에 무슨 큰일이 생기면 당숙모가 다시 전화도 하고 지팡이 짚고 찾아다니며 소식을 전해 일가 집안 사람들을 모아놓는다. 일가 집안 사람들은 마지못한 듯 다시 모여들어 주소나 연락처가 적힌 명함이나 쪽지를 부지런히 주고받곤. 했다. 하지만 이 번에도 쪽지나 명함은 모르는 사이에 빠져나가 버리고 빠져나가 버린 사실도 모르고 있기 일쑤였다.
당숙모 연세가 칠십, 저러다가 당숙모가 덜컥 세상 뜨는 날이면 그나마 일가붙이들 모여 얼굴 대하는 일도 못 하게 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다부지게 붙잡고 대책을 마련하자고 들고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한참 커가는 아이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마주 앉아 있어도 모를 판이었고. 이렇게 일가 집안 사람들은 그렇다고 느끼지도 못하면서 흩어지고 부서져 남남이 되어 가는 거였다.
"즈이 아버지 인제 못 일어나실 것 같아요."
나는 쌍문동 당숙을 찾아가 말했다.
"그 형님이 올해 몇이시드라? 아흔."
"둘 되셨어요."
"아흔 둘이면 백세 사신 거나 다름없지. 그 형님 돌아가신대두 인제 서러워할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을 게다."
당숙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이 내 불효를 책하는 것처럼 들려 나는 입 다물고 앉아 있었다. 노인들은 누구나 자식들을 불효라고 생각한다,
"그 형님이 앉아 기신 동안은 뭔지 맴이 든든했었는데. 누가 내 나이를 물어두 그 형님 나이를 내세우고, 늙은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 들리기만 하믄 난 안팎으로 그 형님을 바람막이루 내세웠으니깐. 그 헝님 돌아가시믄 내가 바람막이에 올라앉을 차례여. 그래서 맴 속으루 그 형님 백세구 이백 세구 언제까지나 앉아 기시기를 바랬더니만. 그 꿋꿋하던 허리두 그예 허물어지는구만. 허기야 그 형님이 늙두룩 너무 허리가 꿋꿋했어. 팔십이 지나시두룩 걸을 때는 땅이 쿵쿵 울릴 지경이었으니깐. 늙을수룩 병 옳어야 한다푸는 하지만 그래두 늙은이답게 허리두 바스러지구 등두 굽구 다리두 허청거리구 해야 젊은 사램덜이 좋아하는 벱이여. 다 산 노인네가 너무 꿋룻하니간 몸뚱이 시언찮은 젊은 사람은 시샘을 다 하잖았남."
"이봐요, 영감님. 아부님이 자리보전하구 누으세서 근심걱정 태산 같을 사람 앞에 앉혀 놓구 무슨 그런 말씸을 하시는 거유?"
당숙모가 끼어들며 혀를 끌끌 찼다.
"작은어머니. 괜찮아요. 수없이 들어온 얘긴 걸요, 뭐."
아버지 연세 팔십이 가까워지면서 그런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일가 집안 중에서 육십 안쪽의 남자가 병들거나 사고로 죽게 되면 앞을 막아선 탓이라고 뒷공론을 한다는 것이었다. 십여 년 전 그때 마흔 몇 살이었던 육촌 형 한 사람이 병으로 죽었는데 육촌 형수가 점을 쳐 봤더니 일가 집안에 바위 같은 노인 하나가 앞을 꽉 가로막고는 비켜 주지를 않는 탓에 나갈 길이 트이지를 않아 시들어 죽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한창 활동하며 뻗어 나가야 할 사람의 앞길을 바위처럼 막으며 버티고 앉아 있는 일가 노인네란 누구인가? 그 물음에 이어 떠오르는 모습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남으로 넘어오기까지 고향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전주 최씨 가문의 중심 인물이었다. 아직도 그 권위의 여운이 고목의 마른 가지처럼 일가 사람들의 마음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고향에서는 그 어른의 땅을 밟지 않구는 나댕길 수가 읎다는 말까지 있었어. "
언젠가 고향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한 쌀이었다. 아버지의 땅을 밟고 다닌 때문일까. 아버지는 일가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고향 사람들에게마저 빚진 것도 없이 마음에 거리적거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던 참이었다. 고인이 되어 조상의 반열에 올라 있다면 아낌없이 공경할 수 있으되 살아 있는 모습을 대하기에는 귀찮고 거북살스러운 느낌을 어쩔 수 없이 품게 되는 존재. 일가 집안 사람들의 마음에 아버지는 그런 모습으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허황된 점쟁이 얘기가 일가 집안 여인네들의 마음을 그럴싸하게 물들여 놓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어른)은 많은 자식을 앞세워 보내지 않았는가. 겨우 하나씩 남아 있는 아들자식 딸자식이라는 것도 심이 펴지지를 않아 빌빌거리고 있지 않은가. 지나치게 억센 가장의 운세가 자식들이 나가는 길을 막아서고 있다는 좋은 증거였다. 자식들의 기운을 건어 놓고 나아가 일가 집안의 뻗어나는 기운마저 노인네가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일가 집안 사람들은 벌써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 길을 터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객지의 바람에 날려 뿔뿔이 흩어져 사라져가던 일가 의식이 점쟁이 지껄임을 기화로 그나마 다시 모여 울타리를 만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실소를 자아내게도 했고, 착잡한 느낌을 안겨 주기도 했다. 어쨌든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나마 일가를 한 울타리 속에 끌어 들였다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수명이 다한 고목이었지만 어둡고 음산한 모습으로 버티고 선 채 일가의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은연중 지녀 왔던 셈이었다.
"누이는 아버지 돌아가시면 화장을 하라구 하더군요.
나는 당숙의 의향을 떠보았다.
"화장을?"
당숙은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형님은 여늬 때 무슨 말씀 읎으셨니?"
마음을 가다듬듯 물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달라는 말씀 같은 건 없으셨어요."
"돌아가신 탐에야 어떻게 되건 모르겠지만 화장하리란 생각은 안 하실 게다. 우리 집안은 대대루 화장을 한 일이 읎어."
"누이 얘기는 선산이나 문중 묘가 있는 것두 아니구, 죽는 사람마다 따루따루 되는 대루 묻혔다가 임자 없는 무덤 될 바에는 화장해서 산이나 강물에 뿌려 버리는 것이 낫다는 거예요."
"임자 읎는 묘가 될 까닭은 읎잖아?"
"임자 있는 무덤 노릇은 자식 당대루 끝난다는 거예요. 손자 대에 내려가면 즈 애비에미 무덤이나 찾아가지 할아버지 무덤은 잊어버릴 거라는 얘기지요. 아버지 무덤 옆에 할아버지 무덤두 같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만요."
"아무 때건 고향에 돌아가게 되겠지. 그때 가서 고향 선산에 이장해 갈 생각하구 묘를 써야 해."
"어느 천년에 고향에 돌다가게 될는지 알 수도 없지만 돌아가게 된대두 이장이 쉬운 일인가요 ? 그나마 저 살아 있을 때라야 이장할 마음이라두 먹어 보지 계 자식 대에 가서는 소용 없는 일일 겁니다. 저만 해두 열 살 넘어 까지 고향에서 자랐으니 고향 생각을 하지만 제 자식들은 고향을 도무지 모르고 있는 걸요. 개들 대에 가서는 통일이 된다구 하더라도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안 할 거예요."
"그래서 너두 네 누이 말 따라서 화장할 생각을 하구 있다는 게냐?"
당숙은 묻고 나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저는 누이보구 일가 집안 사람들이 돈을 모아 가지구 고향 가는 길가 어디쯤에 산을 사서 일가 묘를 마련하는 것이 어떨까 하구 물었었지요.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일가 집안 사람들은 큰일 당할 배 따루 묘지 장만할 걱정 안 해두 되고. 임자 없는 묘 생길까 근심 안 해두 되구, 일가 집안 사람들 자주 모일 기회두 생길 테구요. 신문에 광고 나오는 묘지라는 거 알아봤더니 열 평 안팎에 사오십 만원이나 하는데 산을 사면 한 정보 삼천 평에 백만 원 남짓이면 될 것 같거든요. 헌데 누이는 일가 집안 사람들한테 욕 먹는다구 그런 말 꺼내지두 말라는 거예요."
"아니야, 좋은 생각이다. 썩 좋은 생각이여. 내 내일부터라두 일가 집들 찾아댕기믄서 얘기해 보마."
당숙은 기대 이상으로 선뜻 응하고 나섰다.
당숙은 사흘 뒤 문병하러 왔다
"형님, 그 동안 격조했습니다."
당숙이 인사를 해도 아버지는 얼른 못 알아보았다.
"뉘기신가요?"
이렇게 두서너 번 물은 뒤에야 기억해 내고는
"오, 자네 병석이지? 나 죽을라나부야."
했다,
"돌아가시긴요. 툉일되는 거 보시구 돌아가세야지요."
"나두 그럴 생각이었네만 몸이 말을 들어야지."
"이 근래는 약이 좋으니깐요."
"글렀어. 몸뚱이가 낡을 대루 낡아서 생긴 고장인데 약이 무슨 소용인가? 허기야 또 살 만큼 살았지. 세상사 볼 만큼은 봤구, 들을 만큼 들었구. 겪을 만큼 겪었구."
"허긴 형님만큼 변하는 세상 일 많이 겪어 본 사람두 흔치 않을 거예요. 형님은 이겨 조선 망해 들어가는 세상두 겪으셨을 테니깐요."
"뭐가 망하는 세상이라구?"
"왜놈들 밀려 들어왔다가 쬧겨 나가는 것도 겪으셨구, 쏘련 병정들 몰려 내려와서 빨갱이 세상 되는 것두 보구 겪으셨구, 빨갱이 놈들 난리 피우고 쳐내려왔다가 꽁지가 빠져 가지구 도망쳐 올라가는 것두 보구 겪으셨구, 그러니 툉일되는 것마저 보시구 돌아가세야지요."
"세상만사 꿈속의 꿈이라더니만 아물아물해서 당최,,,,,"
아버지는 말을 끝내지 않고 잠 속으로 라걱 들어갔다. 자리에 누운 뒤로는 깨어 있는가 하면 금세 잠 속에 빠져들곤 하는 것이었다.
"문병 오는 사람들 좀 읎재?"
당숙은 잠든 아버지의 수척한 얼굴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다가 내게로 말머리를 돌렸다.
"누이가 몇 번 왔었지요."
"어저께 그저께 이틀 동안 돌아댕기믄서 얘기를 했으니깐 굉일날에는 찾아덜 올 테지. 헌데 산 얘기를 끄내 놨더니만 신통한 대답덜을 안해. 내 생각엔 얼씨구나 하구 달려들지는 않더래두 좋은 말씀입니다 하구 고개를 끄덱거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구만. 아직 죽는 일하구는 상관 읎는 나이덜이 돼서 그런지 이 핑계 저 핑게루 도리질치는 사람뿐이여. 늙은이 말이 통하는 세월이래야 말이지,"
당숙은 말을 마치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안 하겠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나는 누님의 말을 생각했다. 일가 집안 사람들이 오해는 하지 않았을까.
"그래 산 자리 마련할 돈은 있니?"
당숙이 아버지 얼굴에 힐끗 눈길을 주며 음성을 낮추어 물었다, 그 말이 내 신경을 자극했다.
"돈 없이 큰일 치를 생각을 할 수가 있나요?"
"묘 자리만 마련했다구 되는 것두 아니야. 이런 큰일이라는 게 생각보다 엄청나게 돈이 들게 마련이야. 화장한대서 나쁠 게 뭐냐구덜 그러더구나. 나두 첨엔 듣기 싫더니 자꾸 들으니깐 그럴싸하게두 들려. 죽으면 어차피 읍어질 몸뚱이, 살아 있는 사람 형편 대루 일을 치뤄야지, 죽은 사람 치다꺼리 하느라구 산 사람이 못 살게 돼서는 안 된다는 말은 운은 말이여."
새벽 등산길에서 무덤들이 자꾸만 내 마음에 부러움을 안겨 주었다. 마치 소유하고 싶으면서도 소유하지 못한 것의 곁을 지나는 듯한 안타까움이 마음 밑바닥에서 짙게 우러났다. 무덤 주위로는 개나리 진달래가 어우러져 피어 있었다. 무덤마다 피어 있는 개나리 진달래가 온 산을 노랗게 붉게 물들여 놓았다. 꽃들로 둘러싸인 무덤은 단지 송장을 묻어 놓은 장소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열 평 짜리 묘지라는 게 애기 무덤만한 조그만 봉분을 만들어 놨을 뿐인데두 서너 사람 앉을 자리두 남이 않을 만큼 좁던데."
나는 몇 군데 공원 묘지를 돌아보고 와서 누님한테 말했다.
"공원 묘지가 별다른 건 줄 아니? 공동묘지에 싸구려 분단장 하듯 꽃나무나 몇 그루 심어논 것 뿐이야."
"아무래두 공동 묘지하구는 다르던데."
"다르긴 뭐가 달라? 그래 열 평 짜리가 얼마라든?"
누님은 금방 코방귀를 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석두 세우구 하면 그럭저럭 오십만 원은 들겠던데."
"흥. 도둑놈들. 그놈들이 다름 아닌 땅 장수 놈들이야. 송장 묻어 주구 땅 팔아먹는 땅 장수놈들이야. 그놈들한테 오십만 원이나 갖다 바칠 것 읎어. 화장은 몇만 원이면 된대더라. 내 말대루 화장을 해 가지구 산이나 강에 뿌려. 혼이 있으은 맘대루 돌아다니다가 어머니 혼하구 만나시게 말이야. 허기야 나는 출가 외인이니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은 없다만, 너 보기 딱해서 그래."
그래, 나는 아버지의 무덤에 어머니의 기억도 함께 묻고 싶다. 작은형을 찾아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 실성해서 헤매다니다가 쓰러져 이름 모를 사람의 삽으로 어느 산 기슭에 묻히거나 연고자 없는 행려 병사자로 화장되어 어느 강물에 뿌려졌는지 모를 어머니.
새벽 등산 길가의 무덤들은 큼직한 봉분을 쌓아 올리고도 열 사람 이상 편히 앉을 만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 그만한 넓이면 이십 평 이상이라야 할 것이다. 공원 묘지를 둘러보고 오기 전까지는 새벽 등산길 가의 무덤들이 그토록 당당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도 곧 저런 정도 묘지의 연고자가 되어 묘지를 찾아다니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정다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좁아빠진 열 평의 묘지, 어린아이의 무덤 만한 봉분 속에 아버지의 생애를 고이 묻을 수가 있을 것인가.
요즘 와서 나는 아버지를 화장해서 그 재를 산과 강에 뿌리는 꿈을 꾸곤 했다. 아버지의 생애가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뿔뿔이 흩어져 가고 있었다. 허지만 바람 소리도 물결 소리도 아버지의 생애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꿈을 꾼 새벽이면 나는 좀더 서둘러 산을 오르곤 했다. 무덤들이 새벽 안개 속에서 품을 열어 나를 맞아 주었다. 폭신한 잔디를 밟고 서서 무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지금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는 것이라는 환상 속에 슬며시 빠져들곤 했다. 나는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쓰다듬어 읽어 내려간다. 전주 최공 병렬지묘, 1888년 9월 1일 생(生). 1979년 X월 X일 졸(卒) 최공은 이씨 조선말 국운이 돌이킬 수 없이 기울어 가던 때 강원도 금성 땅에서 토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에 동학란을 겪었다. 열 살에 서당을 버리고 소학교에 들어가 열 다섯 살 때 졸업했다. 졸업 후 금성에서 사십 리 떨어진 외가로 가서 마을에 강습소를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스물세 살 때 나라의 주권이 왜국에게로 넘어갔다. 그 해 간도로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는 길로 원산 농림학교에 입학했다.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서기가 되었다. 군청 산림과 서기로 십여 년 동안 재직한 후 물러 나와 산판업을 손을 댔다....
당숙의 말대로 돌아온 일요일 육촌 아우 하가와 팔촌 아우 하나가 문병을 왔다.
"지난번에 작은 아버지 통해서 형님이 하신 얘기 잘 들었어요."
아버지한테 인사를 끝내고 잠시 앉아 있다가 육촌 동생 균행이 말했다.
"작은 아버지한테 그냥 의견을 말씀드려 봤을 뿐이야."
나는 아버지가 깨어 있다는 데 마음을 쓰며 대꾸했다.
"좋은 의견이세요. 그래서 그 일두 의논드릴 겸해서 왔어요."
"모두들 생각이 없다는 걸루 전해 들었는데."
"당장 잇속이 돌아오는 일이 아니라구 생각하면 흥미가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괜한 말을 꺼냈다구 생각했어."
"그렇게 발리 단념하실 거야 없지요. 권유를 받는 사람이 매력을 느껴 호응하도룩 방법을 강구해야지요."
"방법?"
"투자에 대한 이익이 보장된다구 믿으면 기꺼이 호응해 올 거예요. 철행이 네가 형님께 말씀드려라."
균행이가 팔촌 아우 철행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나는 눈으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자리에 누운 뒤로 혼자 있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할 때도 방에 혼자 남은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고 그 순간부터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팔을 쳐들고 허위적거렸다. 외로운 짐승처럼 낑낑대기도 했다. 찾아온 손님을 끌어내 간다는 것은 아버지가 섭섭해할 일임에 틀림없었다. 대신 아내를 아버지 방에 들여보냈다.
"형님, 공원 묘지라는 데 가 보셨습니까?"
자리를 옮겨 앉자 균행이가 물었다.
"가 봤지, 열 평 짜리라는 게 형편없이 좁더구만."
"열 평이라는 게 경사면을 잰 평순데 그 경사면을 정지해 수평으루 터를 닦은 다음에 묘를 쓰는 것이니까 좁을 수 밖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두 알아보셨겠지만 공원 묘지 한 평에 사오만 원씩 하잖아요? 헌데 그게 몇 백 원씩에 사들인 땅이에요. 금리니 인건비니 관리비니 세금이니 최고가루 쳐서 빼내더라두 어마어마한 폭리예요. 물론 관리비는 사용자들에게 따루 받지요. 그래서 말씀인데요. 형님이 생각하신 문중 묘하구 영리 사업으루서 공원 묘지를 절충하는 방향에서 우리 최씨 집안이 힘을 합해 산을 사면 어떨까하는 구상을 해 봤지요."
균행은 말을 끝내고 반응 살피듯 내 얼굴을 응시했다.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고향을 버리고 온 우리 최씨 집안 사람들이 자본을 공동으로 투자해 가지구 산을 사들여 공원 묘지를 개설하자는 겁니다. 공원 묘지를 경영하면서 우리 집안 상사에는 무료로 묘 자리를 제공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첫째 우리 집안 공동의 사업체가 생기니 좋구, 둘째 문중 묘를 마련한 것과 다름없으니 좋구, 세째 집안 사람들이 늘 모일 수 있으니 좋구요. 우리 집안이 안구 있던 여러 문제가 그 일을 성사시킴으로써 일시에 해결될 수 있다는 겁니다,"
철행의 말이었다. 낯선 땅에 옮겨 심은 모종이 아직도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듯 실한 가지 펼쳐 보지 못하고 웅크리고 살아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나 나나 같은 처지였다. 모처럼 떠오른 그럴 듯한 생각에 들뜨고 열이 올라 있는 것 같았다.
"기발한 생각이로구만,"
나는 이렇게 대꾸했지만 여전히 긴가민가한 느낌이었다.
"생각뿐이 아니예요. 형님. 시작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사람들이 쉴새없이 죽어간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루두 성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업입니다. 게다가 전부터 있던 공원 묘지들은 거의 다 찼구요. 시작만 해 놓으면 번영이 뒤따를 사업이에요."
"얼마씩이나 돈을 내놓아야 하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님은 얼마나 가지구 계시지요?"
균행이 되물었다
"오십만 원쯤."
"공원 묘지 한 뙈기 값이로군요."
"너무 적은 돈이지?"
"요즘공원 묘지에 묘 쓰구 장사 지내자면 최소한 백만 원 한 장 가져야 해요. 네 평 짜리 시립 공동 묘지에 묘를 쓴다면 오십만 원 가져두 되겠지만요."
"형편 닿는 대루 해야지."
"큰아버지 돌아가시면 우리 공원 묘지에 모시두룩 빨리 산을 사야겠어요. 관행이 형님이 투자하실 금액이 오십만 원이라구 적어."
균행이가 철행이한테 지시했다. 철행이가 수첩을 꺼내 적었다.
"그러면 곧 다시 연락드리겠어요."
두 아우가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비교적 식사를 잘하는 편이었다.
"이 상태에서 식사를 못 하시면 안 되지요."
의사가 말했다. 아버지는 계속 정신이 맑았다 흐렸다 했다. 정신이 맑을 때면
"자식들 고생하지 않게 빨리 죽어야지."
이렇게 말하며 운명의 쓴잔을 순순히 받아 마시겠다는 듯 얌전히 누워 있었지만, 정신이 혼미해질 때는 자신이 다리를 쓰지 못해 누워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투였다. 아버지는 다리를 뻗친 채 상체를 일으켜 앉히고 엉덩이를 밀어 방안을 돌아다녔다. 그런 행동은 낮보다는 밤이 심해서 밤중에 기척을 듣고 잠이 개면 아버지는 엉덩이걸음으로 방안을 헤매고 있거나 장지문의 종이를 찢어내고 있거나 했다. 아버지는 그런 일을 하면서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쉴새없이 중얼거리곤 했는데, 한밤중 캄캄한 방안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헤매거나 문을 찢어대는 모습은 섬찟하니 귀기스러운 느낌마저 안겨 주었다. 그럴 때면 도무지 내 아버지 같지가 않고 낯선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가족들과 정을 뗀다지. 정말이지 아버지가 밤중에 하는 행동은 정떨어지는 것이었지만. 한편 처연한 느낌도 들었다.
"노인네 망령든다는 게 저런 건가 부지요?"
아내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자기를 구속하고 있는 어떤 힘과 싸우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밤중의 암흑과 적막이 자신을 삼켜 버릴 것 같아서 몸부림치듯 방안을 헤매고, 자신을 죄어오는 어떤 손아귀로부터 탈출한다고 생각하며 문을 겪는 것이라고,
돈을 모아 산을 사서 공원 묘지를 개설하겠다던 사람들은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따져보면 그들이 다녀간 지 일 주일밖에 안 되었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벽 등산길 묘지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시들며 철쭉과 벚꽃이 피어나고 꿩이 짝을 찾아 울기 시작했다.
며칠 전 찾아가 본 시립 공동 묘지에는 꿩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무도 없고 수풀도 없었다. 어깨를 맞댄 듯 다닥다닥 붙어선 봉분들 사이에 나무 심을 자리도 없었다. 틈을 비집고 나무를 심는다면 나무 뿌리가 무덤 속을 파고들 것이다. 떼가 덮여 있어도 가난하고 헐벗은 듯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비바람이 헐벗은 묘지 위로 휘몰아쳐 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마지못해 세운 듯한 키 작은 싸구려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이 비바람에 닳고 깎여져 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기억들이 바르게 닳아져 가고 있었다.
(전주 최공 병렬지묘. 1888년 9월 1일생, 1979년 X월 X일 졸.)
남으로 내려오고 얼마 동안 마버지는 삼팔선을 넘어오다가 빼앗긴 짐 속에 들어 있었다는 토지 권리증 얘기를 기회 있을 적마다 입에 담곤 했다.
"문서는 읎어졌지만 고향에 가기만 하믄 모조리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애."
나는 아버지의 땅에 대해서는 별다른 애착을 느끼지 못했다. 그 땅은 이미 삼십여 년 전에 아버지의 땅도 내 땅도 아니게 되었다는 이유에서도 아니고, 내가 물려받아 보기도 전에, 재산의 가치를 인식하기도 전에 그것을 떠나왔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내게 있어서 그 땅은 아버지의 평생의 업적이었을 뿐 고향 그 자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쌓아올려 소유했었던 아버지로서는 그 땅이 고향 자체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미일 안에 고향에 돌아가게 되리라는 기대가 무너지자 (고향에 가기만 하면)이라는 말은 (내 생전에 고향에 갈 수 있게만 된다면)으로 바뀌었고, 이윽고 기대와 희망은 회상과 추억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내 당대에 도조 천 석하는 땅덩어리를 내 힘으루 그러뫄 가지구 손아귀에 움켜쥐어 봤지."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표정이 아련한 웃음을 타고 번지곤 했다. 가을이면 도조 쌀 바리가 줄을 잇던 모습이 내 기억에도 생생했다. 허지만 쌀 섬은 곳간에 쌓이기가 바쁘게 땅값으로 되실려 나갔다. 아버지의 땅은 그런 식으로 자꾸 팽창해갔다.
"재산이란 건 어느 만큼만 모이면 그때 가선 저절루 늘어가기 매련이야."
어느 땐가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모이기도 어렵고 견뎌내기도 힘든 것이 거기까지라는 것이었다. 자기 힘으로 재산을 쌓아 부자가 된 사람들은 그 고비를 넘긴 자들이라고 했다,
허지만 아버지는 그 고비를 넘어 재산을 모은 뒤에도 고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들은 바닥이 떨어져 개혓바닥처럼 털렁거리는 신발을 신고 다녔고. 무릎과 엉덩이를 기운 옷을 입고 다녔다. 다 죽어 가기 전에는 병원 문턱에도 갈 수가 없었고, 고기는 명절 때나 먹어 볼 수 있었다.
"여보 부자 소리 듣기 남부끄럽수. 그만큼 재산이 모였으니 사람 사는가 싶게 살아 좀 봅시다."
어머니가 어쩌다 이렇게 불평하면,
"깡조밥두 읎어 못 먹는 사람이 쌨는데 이밥 먹구 살은 됐지, 그 당치두 않은 소리 두 번 다시 하지 말어."
아버지는 이렇게 윽박지르곤 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간식으로 콩 볶아 먹는 것까지 아까워했다. 하루세 끼 밥 먹는 것 이외에는 콩 한 톨 좁쌀 한 알이라도 아껴서 땅 사는 데 디밀어야 했다. 아버지는 땅을 늘구는 데 미쳐 있었다. 그토록 돈 아까운 사람이 어떻게 아들을 둘씩이나 일본에 유학 보냈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유일한 예외였는데
"즈덜이 재간 읎어 못하는 게야 헐 수 을지만 재간 있어 공부를 하겠대믄 하구 싶어하는 데까장 뒤는 대 줄테여."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물론 그것도 아들의 경우에 한해서였고 최소한의 학비에 국한된 얘기였다. 큰형이 대학교 졸업반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왔을 때 아버지의 노여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동경에 있는 큰형이 들릴 만큼 큰소리로 욕을 욕을 해댔다.
"귀한 돈 들여 게까지 보냈더니 해야 할 공부는 안 하구 쓸데 읎는 짓거리해서 숱하게 디밀어 넣은 돈 헛것으루 맨들어? 그눔 새끼 뒈지던지 살던지 망대루 하라 그래. 난 상관 안 할 테니깐."
그 말대로 아버지는 큰형의 일에서 손을 떼 버렸다. 면회도 가지 않았고, 뒷구멍으로 석방 운동을 하지도 않았다.
"죄질이 과히 무거운 것이 아니니 천황 폐하께 충성만 표시하면 정상이 참작될 수두 있을 겝니다."
순사 부장이 슬며시 사람을 보내서 말했다.
"군에서 일등 세금을 물구 있으면 충성하는 게 아닌가요?"
아버지가 대꾸했다,
"세금이야 황국 신민이면 주구나 무는 것, 특별히 충성이라구 할 수 있습니까? "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충성이지요?"
"황국은 지금 신성한 전쟁을 하구 있는 중입니다. 전비를 바치십시오. 그러면 천황 폐하께서 선생의 충성을 받아주실 겝니다."
"그따위 미련한 자식놈을 위해서는 동전 한 푼 쓸 생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딱 잘라 말했다. 어머니가 애걸복걸 매달렸지만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큰형이 재판에서 징역 일 년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 왔다.
“징역살이 하구 싶어 그 따위 짓거리 한 걸 테니 소원 성취했구만."
아버지는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열 달만에 큰형은 가석방되어 작은형의 부축을 받고 돌아왔는데 목숨이 붙었달 뿐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감옥 속에서 아주 죽어 없어질 것이지 그런 꼬락서니를 해 가지구 뭣하러 기어 들어와? 뵈기 싫어, 내 집에서 썩 나가!"
아버지는 죽어가는 자식에게 욕을 퍼부었다. 아버지가 막무가내로 펄펄 뛰는 바람에 어머니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뒷채 행랑방에 큰형을 데려다 눕혔다. 의사가 아버지 모르게 뒷문으로 드나들었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큰형은 집에 돌아온 지 한 달만에 죽었다. 하지만 죽음으로써도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지는 못했다. 큰형은 상여도 타지 못하고, 한밤중, 어머니와 누이들이 울음을 씹어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초라한 관 하나로 지게 위에 누워 뒷문을 빠져나가 발소리 죽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쌍문동 당숙과 작은형이 뒤를 따라갔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거역이나 반항은 물론 항의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야 아버지의 처사를 힐난할 수가 있었다.
“큰애는 당신이 죽였수. 큰 딸 아이두 당신이 죽였구. 그깐 놈의 다 뺏겨버릴 땅 조각 아까워서 자식을 대신 죽이다니. 자식들한테 어쩌믄 그렇게 매정할 수가 있단 말이우?"
“다 저 타구난 팔자여."
아버지는 변명하는 것 같지도 않게 대꾸했다
"목석두 그보다는 인정이 많겠수. 쯧뜻."
아버지의 성격이 냉정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이 그처럼 차진 것은 어렸을 때 송장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가 여섯 살 때였다. 할아버지(아버지의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짓고 벌을 받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는데 집의 계집종 하나를 관가에 바치고 벌을 면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일로 해서 집안에 생각지 않게 조그마한 소동이 벌어졌다, 쇠돌이라는 이름의 사내종이 술을 퍼먹고 안채 마당에 술 주정을 한 것이다. 쇠돌이는 할아버지의 죄 값으로 관가에 바쳐진 계집종과 눈이 맞은 사이였고, 집에서도 언젠가는 두 종을 내외간으로 짝 지워 주겠다는 뜻을 은연중 비쳐 온 터였다.
“나라 형세, 집안 형편이 기울어 진다구 탄식을 했더니 종놈의 술 주정까지 받게 되는구나."
할아버지는 펄펄 뛰었다. 쇠돌이는 밧줄에 묶여 된 매를 맞고는 초주검이 되어 풀려났다.
헌데 이듬해 동학란이 일어나 강원도 금성 땅도 한때 동학당의 천하가 되었었다. 간다온다 말없이 집을 나갔던 쇠돌이가 며칠 뒤 무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용케도 때맞춰 피신해 버린 할아버지를 내놓으라고 으르던 무리들은 세간을 짓부수고는 아버지의 큰 누님을 사냥한 짐승처럼 어깨에 들쳐 메고 휘몰려 나갔다. 매달리다가 발길에 채여 나동그러진 할머니, 나동그러진 할머니를 흘겨보던 쇠돌이의 핏발선 눈망울. 업혀간 내 고모는 어느 아전의 집 헛간에서 뭇 사내들한테 겁간 당한 뒤 죽어서 돌아왔다, 고모는 선산에도 못 가고 홑이불에 둘둘 말려 밭머리에 애총처럼 초라하게 묻혔다.
쇠돌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상전 집을 뛰쳐나온 종들과 무리 지어 미쳐 날뛰고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죽이고 욕보이고 부수고 노략질했다. 부서진 세간과 죽어 넘어진 송장들이 길가에 널려 있었다.
허지만 동학당의 천하는 길지 못했다, 그 해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은 다시 뒤집어졌다, 이번에는 피신처에서 돌아온 할아버지가 양반패들과 어울려 미칠 날뛰기 시작했다. 붙잡힌 쇠돌이와 그 패거리들이 생선 두름 엮이듯 길게 묶여 고을 길을 끌려 다니며 장작개비, 홍두깨, 빨래 방망이. 다듬이 방망이, 지게 작대기 닥치는 대로 들고 나온 사람들한테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죽었고, 피투성이 송장은 죽은 개 끌리듯 숲이나 강가로 질질 끌려가 찢기고 토막이 났다. 양반패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앞잡이들을 몰고 다니며 그럴싸한 상민이나 천민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죽이고 욕보이고 짓밟았다. 피에 굶주린 원귀 같았다. 찢기고 토막 난 송장들은 묻을 사이도 없이 숲이나 강가에 버려져. 밤이면 송장을 뜯어먹으러 모여드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무리져 차가운 밤하늘에 울려 퍼지곤 했다.
송장은 너무도 흔해서 송장 같지가 않았다. 낮이면 아이들은 숲이나 강가로 가서 널려 있는 송장을 나무토막 구경하듯 하며 돌아다녔다. 일곱 살이었던 아버지도 아이들과 어울려 널려 있는 송장사이를 허구한날 구경 삼아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쌍문동 당숙은 이십 일 만에 아들 장행이를 데리고 두 번째 문병을 왔다. 균행이와 철행이가 다녀간 지 보름 만이었다.
"균행이랑 철행이가 보름 전에 다녀갔지요."
아버지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내가 말했다.
"산을 사서 공원 묘지 영업을 하자며 돌아당긴대지?"
당숙이 대꾸했다.
"곧 연락을 해 주겠다더니 소식이 없어요."
"형님두 찬성하셨나요?"
장행이가 내게 물었다.
"퍽 기발한 착상이더구나."
"그런데 생각으루만 그칠 것 같애요.
"금방 될 것같이 얘기하던데."
좋게 해석하면 사전 조사나 계획 없이 즉흥적으루 꺼낸 얘기였나봐요."
한 평에 몇 백 원씩에 살 수 있다구 하던데 알아보지 않구 그런 소릴 할 수 있을까?"
"몇 백 원 짜리 산은 거리두 멀구 교통이 불편한 데라야 있어요. 서울에서 백 리 안쪽에 위치한 곳이라야 고객을 유치하기가 쉬운데, 게다가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춘 데라면 평당 몇 백 원이 아니라 몇 천 원이에요. 몇 안 되는 우리 일가 집안에서 몇 십만 원씩 모아 봤자 어림없어요."
"돈이 문제여서 그렇지 허황한 생각은 아니었구만."
"돈 없이 일을 벌여 놓겠다는 것두 결국은 허황한 짓 아닌가요 ? 요즘 묘지 개설 극정을 보면 묘지는 간선 도로에서 2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곳이라야 만들 수 있다고 괘 있어요. 영업을 시작하기 전에 간선 도로에서 묘지까지의 진입로부터 닦아야 뒬 경우가 거의 다거든요. 그럴 경우 우리 집안에서 몇 십만 원씩 모은 돈 가지구는 도로 닦는 비용을 충당하기에두 부족한 형편일 거예요."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니?"
"공원 묘지 운운하는 얘기가 실현성 있는 것인가 해서 알아봤지요."
"그래서 영 실현성이 없는 얘기였나?"
"자본만 넉넉하다면야 해 볼 만두 하지요. 허지만 몇 백만 원 가지고 바라볼 수두 없는 일이에요. 게다가 그 두 사람은 돈 한푼 없이 일가 집안 돈으루 사업을 해 본답시구 돌아댕겼다나봐요."
나는 실망을 금할 수 없으면서도 기대를 던져 버리기가 아쉬운 느낌이었다. 나는 흑시나 혹시나 하며 균행이와 철행이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문득문득 느끼곤 했다. 허지만 다시 일 주일이 지나도록 소식은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음식 섭취량이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몸은 더욱 수척해 가고, 정신도 갈수록 혼미해지고 있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오줌똥을 깔고 누워 있기 일쑤였고, 엉덩이와 허벅다리가 헐어 진물이 흘렀다. 불쾌한 냄새들이 방안에 괴어 있다시피 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일찍 돌아가시는 게 낫겠다."
누님이 말했다.
"그러잖아두 다시 일어나진 못하실 텐데 명 재촉할 거야 있수?"
내가 대꾸했다.
"시중드는 니 댁데 고생하는 게 딱해서 그래."
딸은 시중 좀 들면 안될 것 있수? 하고 대꾸하려다가 참고,
"시중드는 사람보다 아버지가 더 고생하셔,"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위해서두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낫다는 얘기야."
누님이 지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나한테 오십만 원은 있는데 그것 가지구는 부족할 것 같아."
나는 말머리를 슬쩍 돌렸다.
"화장을 해. 그 돈이믄 쓰구두 남아. 화장을 한다믄 화장비의 반은 내가 부담하마. 허지만 공원 모지 어쩌구 한다믄 난 한 푼두 부담 안 하겠어."
누님은 말하고 얼굴을 저편으로 돌려 버렸다.
"누님은 아버지 자식 아니우?"
"난 출가 외인이야. 아버지한테 덕 본 것두 읎구."
"자식이 꼭 부모한테서 덕을 봐야 하우?"
"자식한테 별로 해 주신 게 읎으니 돌아가실 새 비용이나 덜 들게 해 달라구 말씀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도 아버지 성격은 누님이 많이 물려받은 것 같은데?"
"어쨌든 화장할 생각해. "
"누님이 이래라 저래라 할 거야 없잖우?"
"묘지 쓰구 비석 세워 놓구 하믄 아버지 살아기실 때나 다름없이 자식들이 기를 못 펴."
"내가 그렇다는 거유? 누님이 그렇다는 거유?"
"다 그렇지."
"점쟁이가 그럽디까? "
"난 아버지는 송두리째 잊어버리구 싶다. 아버지 사슬에서 활딱 벗어나구 싶어, 니나 내가 심을 펴지 못하구 벌벌거리며 사는 것두 아버지 밑에서 기를 펴지 못하구 자라서 그래."
"그건 무슨 소리유-일가집 사람들이 그런 소리 한다더니 누님두 흉내내는 거유? 화풀이를 아버지한테 할 것 없잖우?"
"아니야, 난 지금두 아버지가 무서운걸."
누님의 눈에 눈물이 괴어 올랐다.
아버지는 정말 무서웠다. 누님처럼 한때는 나도 아버지에게서 놓여나고 싶은 충동을 끓임없이 느꼈었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는 쓰러진 고목이었고, 아버지가 지녔던 권위는 흘러간 시대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려 하고 있는 옛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는 두려움보다는 따사로운 눈으로 스스로 권위를 쌓아 지녔던 아버지의 생애를 바라보고 싶고, 나만이라도 온갖 비난과 증오로부터 아버지를 감싸고 변호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기 방식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만주 땅 간도로 들어간 것은 나라의 주권이 왜놈들의 손아귀 속으로 넘어간 직후였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울분이 치밀어올라 어디 먼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과 함께, 이판사판 몸 내던지고 장사라도 해서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 체념처럼 마음을 사로잡더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학란 이후 기울어 가던 가세를 어떻게 하면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하고 골몰하던 차였다. 동학란을 겪는 동안 아버지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 것은 발에 채이던 무수한 송장도 송장이려니와 그 송장들이 남겨놓은 가족들이었다. 어느 일가 집은 동학당 천하에서 덮어놓고 날뛰던 무뢰배 폭도들에게 집안 어른들이 모조리 참살 당해 남은 아이들이 일가집을 이 집 저 집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뒤집어진 세상에 관군 포졸 양반 유림패들에게 잡혀 무참하게 죽은 상민 천민의 어린 자식들은 떼거지가 되어 거리를 헤매 다녔다. 병들고 굶어 죽은 거지 아이들이 다시 송장이 되어 뒹굴어 다녔다.
어릴 때 보았던 그 모습들이 장성하도록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급속하게 기울어드는 집안 형세를 피부로 느끼고 있던 아버지는 자기가 할 일은 돈을 버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연한 노릇이었다.
무엇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장사였다. 장사라도 해서 돈을 벌자. 나라 뺏긴 백성이 귀천은 가려서 무엇할 것인가.
그러자 고향을 떠나 간도로 가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양반 자식이라는 체면에 고향이나 계 나라 안에서 장사를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아 가지고 간도로 건너갔다.
그 당시 간도는 우리 백성들의 종합 피난처 같은 곳이었다. 왜놈들에게 대항하다가 쫓기거나 나라 잃은 울분을 참을 길 없어 자발적으로 건너간 망명자, 농토나 일터를 잃고 살길을 찾아 건너간 농민 노동자, 죄를 짓고 벌을 피해 도망친 죄인들, 서로 눈이 맞은 끝에 제 고장에서는 이룰 길 없는 부부의 인연을 타국에 가서나 맺어 보려고 건너간 남녀, 그 밖에 일하기 싫어 혹시 놀고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해서 건너간 건달도 있었고, 일확 천금을 꿈꾸고 건너간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
"그때 간도에 들어간 우리 백성덜은 꼭 집터 닦을 때 미리 갖다 쏟아 붓는 쓰레기 대접받았지. 나라 읎는 백성의 꼴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안 가질 수가 없더군."
아버지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간도에 일 년쯤 머물러 있었지만 있는 돈만 다 까먹었다. 장사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실의에 잠겨 발길을 돌렸다. 간도에서 되돌아 나온 아버지는 원산 농림학교에 들어갔다. 그 당시는 공납금도 없었고 기숙사에서 재워 주고 입혀 주며 공짜 공부를 시켜 주던 때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 취직을 하고부터 아버지는 재산을 모아 보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월급 액수가 왜 많았던 것이다.
"돈 모는 재간은 재간 읎는 사람의 재간이여. 돈 모는 재간이란 것이 꽉 움켜쥐는 재간밖에 읎거던. 꽉 움켜쥐고 있다가 모이은 땅 사 놓구, 또 모이는 땅 사 놓구."
군청 서기를 그만두고 산판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재산이 부쩍부쩍 불어났다는 아버지는 그러면서도 돈 모으는 재간은 잔뜩 움켜쥐는 재간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 어느 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들로 나갔다. 아버지는 막동이인 나에게는 그나마 자상한 데가 있었다.
"이게 이번에 새루 산 논이여. 너하구 네 작은형하구 두 사람 이름으루 문서를 맨들었다." 아버지가 눈앞의 널찍한 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작은형 하구 나하구 반씩 노나 갖는 건가유? "
하고 나는 물었다.
"아니지, 그냥 두구 도조 쌀이나 쪼개 갖는 거여."
아버지가 대답했다.
"에이, 같이 해놓지 말구 내 이름으루만 해놓지 그랬어유?"
"한 사람 이름으루 해노믄 팔아먹기 쉽거든. 이담에라두 팔아먹지 못하라구 두 사람 이름으로 해논 거여. 느덜이 먼 앞날 늙어 죽게되믄 니 아들 하나하구 느 작은형 아들 하나하구 이렇게 두 사람 앞으루 이 논을 물려주거라. 걔들두 못 팔아먹게 말이여. 아버지는 어린 아이인 나에게 내가 늙어 죽을 때 할 일까지 일러주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재산을 늘궈 가며 그 위에 단단히 말뚝을 박아놓곤 했다.
새벽 등산길 묘지에는 벚꽃이 지고 아카시아 꽃이 피어났다. 뻐꾸기가 고향 그리운 듯 울었다, 산등성이에 올라서면 한편으로는 눈 아래로 거대한 도시가 번잡스럽게 펼쳐져 있었고, 다른 편으로는 유구한 산야가 아득하게 굽이치고 있었다. 저 멀리 구름 얹힌 산협을 빠져 나와 들판을 유유히 흐르는 강이 내려다보였다. 도시와 산야를 함께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은 무덤들도 있었다. 나는 이런 곳에 아버지를 묻고 싶었다. 어머니의 기억도 나란히 묻힐 것이다. 나는 아버지 무덤 앞에 앉아 도시와 산야를 바라보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고향을 생각하고 싶었다.
-전주 최공 병렬지묘. 1888년 9뭘 1일 생. 1979년 X월 X일 졸.-
-유인 양주 조씨 숙현지묘 -
아버지는 밤이면 여전히 엉덩이 걸음으로 캄캄한 방안을 헤매고 문을 찢었다. 낮이면 누운 채 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려 무엇을 붙잡으려는 듯 안타깝게 휘저었다. 헛것이 보이는지 아지랭이가 덮씌운 듯 뿌연 눈이 초점을 잃고 방황했다. 살이 빠진 팔다리의 피부가 수축을 못 해 축 늘어져 있었다. 엉덩이와 넙적다리가 헐어 아물지를 않고 넓게 번져 가기만 했다. 피가 잘 통위지를 않아서 치유가 되지 않고 부패해 갈 것이라고 했다.
"어떤 노인은 죽었을 때 누워 있던 방바닥 장판이 꺼멓게 썩어 있었지요"
누님 말대로 이런 바에야 차라리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났다.
"화장해 버려. 누님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아버지 돌아가셔두 눈꼽만큼두 서럽지 않아. 다 뺏겨 버릴 땅 장만해서 움켜쥐는 재미 보시느라구 처자식들 다 회생시킨 생각하면 설움은커녕 지금이라두 분풀이가 하구 싶어진다. 그게 뭐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
"시절을 잘못 만난 탓이지. 아버지가 모아놓은 그 많은 산과 논밭이 결국 자식들한테 울려질 게 아니었우?"
"그 땅이 아까워 살리지 못한 큰오빠는 어떻게 하구? 언니는 또 어떻게 하구? 또 어머니는? 작은 오빠는?"
아버지는 산이나 논밭을 고향 근처에만 똘똘 뭉쳐 사 놓았었다. 남쪽에도 더러더러 사 놓았더라면 누님한테 덜 욕을 먹었을 것이고 고향 사람들에게도 변함없는 존경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해방이 되고 소련 군대가 밀려 내려오자 오직 하나뿐이었던 성이 무너진 꼴이 되었다.
"난 악한 짓 해서 남의 땅 뺏은 일 음어. 내가 일해서 번 돈, 내 배 졸라매구, 내 식구들 기운 옷 입히면서 모아 산 땅이여. 내가 차지하지 않았으면 왜놈덜 손에 넘어갔을지두 모를 땅이었단 말여. 땅 사 모을 계획 망가져 버릴까봐 기미년 만세 운동 때 만세두 부르지 않았어. 허지만 남 다 부르는 만세 안 부르구 남의 눈총 받으멘서두 부끄러운 줄을 몰랐어. 난 만세 부르는 대신 나라 땅을 내 힘껏 지키구 있다구 생각한 게여. 헌데 이렇게 해서 맨들어논 땅을 누가 뺏는단 말이여? 당치두 않은 소리 말라구 그래."
토지 몰수 통지서를 받자 아버지는 벌컥 화를 내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정말이지 아버지의 말은 당치도 않았다.
"아버지 그런 말씀은 공산주의자들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
작은 형이 말했다. 작은형은 학도병으로 끌려가려던 차에 해방을 맞아 집에 와 있었다.
"왜놈덜한테두 통하던 말이 조선 놈한테 안 통한다는 게여?"
아버지는 마치 대어들 상대가 생겨서 잘 됐다는 듯 작은형한테로 무릎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남쪽으로 내려가는 계 좋겠어요."
작은형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여긴 못 떠난다."
아버지는 딱 짤라 말했다.
"여기서 어떻게 사실라구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모리배, 악질지주, 벼라별 흉칙한 이름이 다 붙어 있는데요."
"그렇더라두 내 나이 육십이야. 타관에 나가 살더라두 고향에 돌아올 나인데 인계 고향을 떠나가다니. 내가 태어나서 자난 고장이여. 조상덜 무덤이 있구, 일가 친척들이 있구 그리구 내 땅덩어리가 있는 곳이여. 못 떠난다. 못 터나. 죽이거나 쫓아내지야 않겠지? 땅은 뺏었어두 집은 뺏지 않은 것이 예서 살라는 말 아니냐?"
"뭘 해 먹구 삽니까? 먹구 살 것이 있다구 하더라도 겁이 나서 밖에두 나다닐 수 없는 고장에서 어떻게 삽니까?"
"어쨌든 못 떠나. 떠나라구 등을 밀어내기까지는 못 떠나. 제놈덜이 등을 밀어내지야 못할 테지?"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작은형은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아버지에게 월남할 것을 권하다가 어느 날 어디론지 떠나가 버렸다. 아무래도 우리 식구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될 테니까 작은형이 먼저 남으로 내려가 자리잡고 있겠노라며 어머니한테 귀띔을 하고 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고향을 떠나게 돼? 흥, 저나 갈테면 가라지."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들이 길거리를 누비며 소리쳐 부르던 노래 가사를 흉내내며 말했다.
(비겁한 놈은 갈 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어떤 궁리가 있었던 것 같았다. 큰 누님과 군 인민 위원회의 무슨 간부로 있다는 청년과의 아이에 혼담이 오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혼담이 무르익는 듯하면서 큰 누님은 가끔 그 청년을 만나는 것 같았고 그 엄하던 아버지도 모른 척 큰 누님을 밖으로 내보내 주곤 했다. 허지만 곧 성사될 줄 알았던 혼담은 질질 끌기만 하는 채로 큰 누님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지 한 장이 배달되었다. 그 자에게서 온 편지였다.
(동무와 나는 출신 성분이 다르오. 나를 단념하고 동무와 출신 성분이 같은 친일파 지주 자본가 계급의 청년과 결혼하두록 하시오.)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어머니가 편지를 구겨들고 그자를 만나러 뛰어갔지만 망신과 수모
만 당하고 돌아왔다, 그 동안 당신 딸한테 재미 보여 준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라면서 눈을 부라리더라는 것이었다. 계획적으로 짓밟으려는 그자들의 술책에 말려든 셈이었다. 큰 누님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절벽에서 강물로 떨어진 것과 열흘 안에 집을 비우고 백 리 밖으로 떠나라는 통지가 온 것은 하루 차이였다.
"집안 식구들 말을 지긋지긋하게두 안 듣더니만 꼴 보기 좋게 됐구려. 왜 그렇게 집안 식구들 말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세우고 어깃장을 놓는 거
-07"
삼팔선을 넘어온 다음부터 어머니는 아버지를 닦아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집안 식구들 말만 안 들었나? 남의 말두 안 들었지."
아버지는 권위를 잃고 허탈 속에 빠져 있었다.
"그래 집안 식구 말, 남의 말 다 안 듣구 고집 세워서 자식들 앞세워 보내니까 속이 후련하우?"
"누가 그렇게 될 줄 알았나?"
"땅덩어리만 뺏기지 않았더라믄 자식들 죽는 것쯤 아무렇지두 않았을 것이란 얘기유7자고로 자식들 앞세워 보내구 잘 되는 집안 읎는 법이우. 자식들 죽이구 나서 땅덩어리만 움켜쥐구 있으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유? 다 늙은이가 새싹 같은 자식들 앞날을 콱콱 막어서서 숨통을 눌러 놓구서 어떡하겠다는 거냐 말유? 대답 좀 들어봅시다."
"허어, 세상에 자식 숨통 눌르는 애비두 있나? 그게 다 자손 대대루 잘 살게 해 주느라구 한 노릇이 시국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된 게여. 그 통에 자식 먼저 보낸 사람이 나 하나뿐인가? 자식 하나두 안 남은 사람두 있는 데 나는 삼 남매나 남았으니 뤘지, 뭘 그래 ?"
"천하태평 맘 편하구려. 자기 욕심 채우느라 땅덩어리 움켜 쥐구 있구서는 자손 위해서라구? 건질 수 읍는 자식 못 건진 건 시국탓하믄 되겠지만 건질 수 있는 자식을 고집 세우고 모른 척 안 건져 주었으니깐 원통하지. 내 한평생 고생이야 팔자 소관이라 치구, 자식들 고생시키다가 죽인 생각하믄 하루에두 열두 번씩 혀 깨물구 죽구 싶은 생각 간절하다우."
"운수 비색해서 생긴 지난 일 자꾸 들춰서 뭘 하겠다는 게여. 그럼 목이라두 매달아 죽어 보일까? 쯧쯧."
"앞으로 자식들 앞길 막아서는 일일랑 제발 하지 맙시다, 자식들 앞길 막아서게 되거들랑 우리 두 늙은이 먼저 죽읍시다. 알겠수?"
"인젠 삼팔선 넘어와서 자식 덕에 살아가는 형편인데 자식 앞길 막아서구 말구가 어디 있오 ? 그런 우중충한 소릴랑 고만둬요. 난 고향에 돌아가서 내 땅 다시 찾아놓구서야 죽을테니까. 내 땅 다시 밟아 보구서야 눈을 감드라두 감을 테야."
"그 눔으 땅덩어리, 난 소리만 들어두 이에서 신물이 나게 지긋지긋해."
우리 식구는 작은형이 교사로 있는 중학교의 교사 사택에서 살았다. 육이오 사변이 일어나자 우리는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우리가 이태 전 탈출해 나왔던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의용군에 지원하라구 야단이에요."
어느 날 작은형이 말했다. 월남한 교사는 죄를 뉘우치기 위해서 의용군에 자진 입대해야 한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으용군이 뭔데?"
어머니가 물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대나 다름없는 거지요 뭐."
작은형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안 된다."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아버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얘 대신 당신이 으용인가 뭔가 하는 데 들어가시우."
"환갑 진갑 다 지난 늙은이더러 전쟁터에 나가라는 게여?"
아버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이젠 잡혀가야 할 일 생기면 당신이 잡혀가구, 죽어야할 일 생기면 당신이 죽어야 하우. 자식 앞세워 보내는 일하믄 안 되우. 그러니깐 어서 가서 자식 대신 으용군에 들어가겠다구 말하시우."
어머니는 거칠게 숨을 쉬며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어머니, 다른 일두 아니구 전쟁터에 나가는 일인데 젊은 사람 대신 노인을 받아 주겠어요? 그렇게는 안 되는 일이에요."
작은형이 끼어 들어 말했다.
"모르믄 입 다물구 있어."
아버지는 작은형의 참견에 힘을 얻은 듯 어머니를 마주 노려보았다.
"그럼 당신은 얘가 전쟁터에 나가게 돼두 좋다는 얘기우?"
"좋은 게 아니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지 않느냐는 얘기우."
"전쟁터에 끌려가지 말구 숨어라, 이렇게는 말 못하시우? 니가 숨은 뒤에 그 놈덜이 잡으러 오믄 내가 대신 잡혀 가마, 이렇게는 말 못 하느냐 말이우?"
"내가 의용군엘 들어가랬나. 숨지를 말랬나? 그건 다 지가 알아서 할 일 아닌가?"
"얘야. 으용군 들어가지 말구 오늘 밤이라두 어디 가서 숨어라. 뒷감당은 우리 두 늙은이가 할 테니깐."
어머니가 작은형한테 말했다.
"갑자기 어디 가서 숨어요? 늦었어요."
작은형이 한숨 쉬듯 대꾸했다.
"그래두 숨을 데가 있겠지. 이 넓은 세상천지에 너 하나 더 숨을 데 없겠니? 당신두 입 봉하구 앉았지만 말구 얘더러 어서 숨으라구 말하시우."
"그저 다 저 할 탓이여."
아버지가 말했다.
"생각해 보겠어요."
작은형이 말막음하듯 말했다.
결국 작은형은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신이 그때 숨으라구만 말했던들 그 애가 숨었을 텐데. 숨었던들 지금 우리하구 같이 있을 텐데."
어머니는 넋두리하듯 말했다.
"지가 숨지 못한 거지, 내가 숨으란 말을 안 해서 못 숨은 건가? 난 숨지 말란 말 한 적 없어. 다 지 팔자여,"
아버지가 대꾸했다,
"애비 에미 놔두구 혼자만 숨을 수가 없어 꾸물대다가 끌려간 거여. 멈칫 멈칫할 때 당신이 숨으란 소리 멘 마디만 했던들 숨었을 텐데. 숨었던들 지금 우리하구 같이 있을 텐데. 당신이 또 자식 앞길을 막았우."
"당치두 않은 소리. 죽지 않았으믄 만나게 될 테지, 아 저 타구난 팔자 소관이여."
어머니는 혹시나 혹시나 하며 작은형을 기다렸다. 휴전이 되고도 한참을 더 기다려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차츰 어머니 정신이 이상해져 갔다. 작은형과 비슷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보러 간다며 어느 날 집을 나간 어머니는 그 길로 소식이 끊긴 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감쪽같이 없어진 어머니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음식을 받지 않았다. 몸져누운 노인이 곡기를 끊는다는 것은 임종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한 달 안에 돌아가실 겁니다."
의사가 말했다. 아버지는 무슨 기력이 남았는지 밤이면 아직도 엉덩이 걸음으로 어두운 방안을 헤매 다니고, 문을 찢었다. 아버지의 저런 모습도 한 달 안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일가 집 안 사람들은 각기 자기 집에서 아버지의 임종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을 해 버려, "
누님이 앵무새처럼 말했다. 나는 포천에 있는 공원 묘지를 찾아갔다. 포천은 철원 김화 금성으로 통하는 국도 변이었다. 공원 묘지 맨 꼭대기 산봉우리 부근에 북향받이 묘자리 열 평을 샀다. 삼십 오만 원. 꼭대기이고 북향받이여서 값이 조금 헐했다. 허지만 아버지나 내게는 얼마나 안성마춤의 자리인가, 아버지의 묘 자리에 앉으면 멀리 북쪽 하늘 아래 첩첩이 쌓인 산줄기들이 바라보였다. 그 중에 고향의 산이 끼여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 아버지를 묻고 때때로 찾아와 아버지 무덤 앞에 앉아 북쪽 하늘 아래 첩첩이 쌓인 산줄기를 바라보며 아버지의 생애와 고향을 생각할 것이다. 내가 늙어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의 무덤은 임자 없는 무덤이 되어 뭉개지고, 그 위에 잡초와 억센 뿌리를 가진 나무가 돋아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한평생만이라도 찾아와 돌볼 것이다. 아버지가 남다른 애국자였고, 독립투사였고, 핍박받는 약한 사람들 편에 서서 싸웠고, 고향을 잃어버리지도 않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면 물론 나는 자랑스러울 것이고. 아버지의 기억을 간직하려고 홀로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충신의 뱃속에서 역적두 태어나구, 역적의 뱃속에서 충신도 태어나구 하는 게여."
언젠가 아버지가 말했었다. 아버지는 충신도 역적도 못 되는 평범한 백성이었다. 고집 때문에 처자식들에게 미움도 받았던 한 평범한 백성이었다.
허지만 아버지는 강한 인간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올린 큰 땅덩어리를 작은 손아귀에 억세게 움켜쥐어 봤던 아버지, 나는 강한 인간이었던 아버지에의 기억을 무덤 속에 고이 간직할 것이다. 내게 있어 아버지는 고향의 일부였다. 잠시 떨어져 나온 고향의 한 조각이었다.
나는 가라앉은 마음으로 새벽이면 산을 올라갔다. 산에는 아카시아 꽃이 지고 이름 모를 노란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코스모스 같기도 하고 들국화 비슷하기도 한 노란 꽃이 수많은 무덤들을 두르며 온산 가득히 피어 있었다. 노란 꽃이 지면 또 무슨 꽃이 피어날 것인가. 둥글고 그윽하고 그리움과 외로움이 서린 뻐꾹새 울음 속에 소월의 시 몇 구절이 떠올라왔다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노란 꽃이 지고 나면 또 무슨 꽃이 피어나 무덤들을 두르며 온 산을 가득히 수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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