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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91. 귤

by 자한형 2022.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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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후명

 

그의 전화를 받고 나자 나는 오직 그냥이라는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냥이라고 말했다. 만나고 싶었어요, 그냥. 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그냥이라고 하는 말투를 들으니 저항감이라기보다 연민이 앞섰다. 그는 수화기 속에서 가물거리는 소리

로 덧붙여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얼마나 찾았던지요.

그 목소리는, 드디어 나를 찾아냈다는 반가움에 떨면서 무언가 긴장된 목소리였다, 나는 감정을 될 수 있는 대로 숨기기 위해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건성으로 응답했다.

정말 그렇군.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지 ?

그는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준비라도 한 듯이 당장은 곤란하다고 대답했다.

내일 마침 일요일이니가 내일 만나. 토요일인데도 급히 해야 할 일이 있구먼.

그러면서 나는 곧 퇴근하면 무슨 일을 할까 곰곰 생각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늘 할 일이 없었다. 거리를 헤매다가 어디서든지 술 한 잔을 들이켜는 것도 진력이 나 버렸다. 영화 구경을 한다는 건 애초에 글러먹은 일이었다. 젖통 큰 여자가 벌거벗고 나온다고 했다.

주인 여자를 건달이 막무가내로 덮친다고 했다. 여름날, 모두들 떠난 빈 집에는 두 남녀만이 남았다. ---빌어먹을. 나는 물끄러미 극장 간판을 보면서도 표를 살 흥미가 없었다. 할 일이 없으면 없을수록 더욱 무엇인가에 매달려야 하리라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었다,

나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바쁜 일을 핑계로 그를 따돌렸다. 삼 년만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표현보다도 훨씬 간절하게 나를 만나고 싶어해 왔는지도 몰랐다. 물론 따져 보면 그가 굳이 나를 찾아서 만나야 할 까닭은 없었다. 그가 군대에 가기 전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 만났었다. 그 만남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것은 비정상적인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만남을 다시 갖는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가 몇 년 만에 수소문 끝에 전화를 해서 만났으면 했을 때, 나는 그가 나를 꼭 만나야 하리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만남을 회피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라도 얻고자 쌨으리라. 하지만 겨우 하루를 미루었을 뿐이었다. 나는 버스 종점에서 내려 언덕으로 오르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수화기 속에서 알 듯 모를 듯 울고 있었다.

. 그럼 내일 만나요

전화를 끊고 나자 이미 한 시가 지났는지 옆자리 사람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어디로 간다? 이렇게 할 짓거리도 없으면서 만나자는 사람에게 바쁘다는 핑계를 댔으니 한심스럽기도 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소파에 가 앉아 건성으로 신문을 들척거리며, 매우 지겨운 토요일 오후가 계속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자 한 여자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 년, 아니, 삼 년 반 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뇌리에 그려보면서 연신 신문만 들척거렸다. 아프간 사태. 정부군(政府軍)과 저항군, 소련군, 살롱 터널에 갇혀 고전(苦戰), 큼직큼직한 활자들 아래, 살롱 터널이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하기 위해 무슨 산맥의 허리를 자르고 뚫은 험로(險路)라는 등, 그 터널에 오히려 그들이 갇혔으니 '아이러니'라는 둥, 아프간 사람들은 굴복을 모르는 저항 민족이라는 등, 소련이 월남전에서의 미국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등 하는 기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조금도 관심이 없는 기사였다. 그 비슷비슷한 기사가 꽤 오래 전부터 신문 지면을 장식해 왔었다. 나는 신문을 덮었다. 더 이상 사무실에 앉아 있을 구실도 없었다. 수위가 한 바퀴 돌러 올 것이었다.

내가 그와 만났던 몇 년 전에도 나는 할 일이라곤 도무지 없었다. 아버지가 빚만 남기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나는 그것을 시작으로 갈팡질팡했다. 갈팡질팡함으로써 점점 더 엉망진창으로 악화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나는 왜 남들처럼 비극이나 불운 따위를 의젓하게 이겨내지 못하고 쉽게 좌절하는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쏘다니기만 했다.

아버지의 죽음의 결과 그 자체가 그토록 암울한 것은 아니었다. 오래 사귀었었으며 아이까지 가졌던 여자와의 헤어짐이 겹쳐 있었다.

물론 그것도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암울해지지 않으면 안 될 막중한 사명이라도 띠고 있는 듯이 암울한 몰골이었다.

개새끼. 나는 내가 개띠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는 정말 개처럼 쏘다녔다. 어디라고 할 만한 특정한 곳은 없었다. 그 무렵에 만난 게 그였다.

그 날 내가 어떻게 코 집까지 갔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그날따라 꽤 여러 술집을 전전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바로 전 술집으로 들어간 것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방안까지 성큼성큼 들어가 점잖게 가부좌를 하고 앉은 나는 순간적으로 그놈의 덜 떨어진 장난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장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술병을 들고 들어온 여자가 자리도 채 잡기 전에 다짜고짜 여기서 만나는구먼 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던진 게 발단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여자가 흘낏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이제야 너를 만났구나 하는 미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내 웃음을 보고 여자는 얼마쯤 안도감을 느끼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의혹은 풀 길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자가 누구일까. 웃음을 머금고 있는 걸 보면 해꼬지를 하러 온 녀석은 아닌 듯해. 고개를 갸우뚱할 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도무지 생각을 진전시킬 수 없어 난감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랜 동안 만나고 싶었지.

나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한 수 더 떴다. 여자가 다시 힐끗 눈길을 던졌다. 하지만 그 눈길은 내게 머물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자기를 오랜 동안 만나고 싶어서 찾아온 사내. 그 사내를 알아볼 재간이 없는 것이었다.

스무 살이 갓 넘었을 어린 여자였다. 그 여자는 내가 술집 앞을 지나가려는데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두워 오는 해거름 녘에 무슨 노래인가를 낮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언제 어디선가 만났던 적이 있는 여자였으면 하고 느꼈다. 그래서 걸음을 되돌려 무작정 방에까지 들어가 앉았던 벗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토록 악착스럽게 의뭉을 떨 속셈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장난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고 그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수작이었다. 그 여자의 얼굴에는 심한 당혹감과 회한의 빛이 역력했다. 그 얼굴을 지그시 눌러보며, 나는, 네가 한때 거짓 사랑으로 돈과 순정을 울궈먹고 내뺐으나 원망하지 않고 진실로 사랑해서 이날 이때가지 찾아 헤맸다, 하는 투의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가 그렇게 심각해진 사실에 나대로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 여자가, 웃기지 말아요, 하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낄낄거리며 그만두었을 것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건 수작이기는 했다. 그런데 여자의 흐린 낯빛이 그만 내게 장난을 그만둘 명분을 주지 않았다.

여자는 이리저리 기억을 더듬는 모양이었다. 이미 난처해진 것은 나였다. 술 한 잔 걸치고 가면 되는 것을 괜한 장난을 벌였구나. 여자의 지나치게 심각한 반응 때문에 이젠 장난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술집에서 빚을 지고 도망친 작부를 다시 붙잡아 오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여자는 나를 그런 사람으로 여길지도 몰랐다. 한심했다. 나는 내가 적어도 그런 사람만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더욱 애써 은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술이나 한 잔 먹으면서 얘기하자구.

여자는 아직껏 병마개조차 따지 않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술병을 들어올린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가 어금니로 마개를 따냈다.

어디,,,,,, 대전에서 만났던가요 ?

여자가 넌지시 물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이 여자는 과거에 대전에 있었다. 그리고 나 같은 남자와 어떤 사건이 있었다. 무슨 사건일까. 그러나 나는 대전이라면 단 하루 동안 스쳐 지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아니.

나는 우리가 그곳에서 만난 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내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여자의 눈길이 아래로 떨어졌다. 대전에서 만난 나 같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그리 대수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풋사랑의 잠자리에 함께 든 정도일 것이다. 그보다 더한 관계라면 기억하기에 그렇게 자신 없어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여자가 대전에서 차 같은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는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무슨 큰 비밀을 안 느낌이었다.

나는 야릇한 갈증으로 술잔을 거푸 들었다. 나로서는 여자의 지난 일을 캘 필요도 없었고 권리도 없었다. 여자는 결코 나를 만난 적이 없었으므로 사실 그대로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기만 했어도 그만이었다. 나는 그런 경우를 예상하고 있었소, 세상에는 참 닮은 여자도 다 있다고 얼버무리려고 했었다. 그러나 여자는 언제 어디선가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느끼고, 또 믿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면,,,,,, 마산?

이제 여자는 집요하게 자신의 과거와 싸우고 있었다. 내가 여자의 과거를 캐는 게 아니라 여자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캐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마산에서도 나 같은 남자를 만났다. 여자가 대전에 먼저 있었는지 마산에 먼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도시는 한때 여자의 생활 터전이었다. 두 도시에서 모두 나 같은 남자를 만났다. 그러나 나는 마산 땅을 밟은 일조차 없었다. 내가 말없이 술잔만 들어올리자 여자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마산에서 만난 그 사내가 바로 이 사내였던가 하고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마산에서 만난 나 같은 남자와 이 여자의 관계가 궁금했다. 역시 하룻밤 함께 잠자리에 든 정도라고 해 두자.

그러자 이번에는 왠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어떤 애틋하면서도 소녀적인 순간이 있었을 듯싶었다. 그렇지 않고 닳아빠진 하룻밤의 상거래만으로 나 같은 남자와의 일을 집요하게 기억해내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었다. 거기에는 적어도 얼마쯤의 진실이 개재되어 있다. 그러나 아니다. 여자는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나를 만난 적이 없다고 단언하지 못하고 있다.

마산도 아닌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얼굴이 언뜻 다시 흐려졌다. 어느새 나도 엉터리 웃음을 띠고 있을 마음이 싹 가셔 있었다. 괜한 장난을 시작했다는 후회가 일었다. 장난치고는 못돼먹은, 비열한 장난이었다.

거짓말은 아니죠 ?

비로소 여자가 의문을 나타냈다. 나는 그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싶었다. 그래, 순 거짓말이었어. 그러나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자의 물음은 내 말이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고 받아들인 사실을 다시 다짐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보구 싶었지. 정말 보고 싶었지.

나는 침중하게 말했다. 앞으로 무슨 말을 계속해야 할지 답답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내가 사랑하던 여자도 어디론가 떠났어. 나는 아마도 그렇게 말했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런 말이라도 누구에겐가 해야 살 것만 같아서 쏘다니고 있었던 것이리라. 여자가 술 한 병 더 가져오라느냐고 묻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쏜살같이 나갔다 들어왔다.

그럼,,,,,, 혹시 속초?

여자는 속초에서 나 같은 남자를 만났다. 스무 살을 갓 넘은 여자가 벌써 세 도시를 두루 돌면서 나 같은 남자를 만났다. 속초. 여자와 내가 속초에서 만났을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속초, 그곳이라면 내게도 추억은 있었다. 바닷가.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오십 년대 초에 나는 그곳에 있었다.

일곱 살 때였다.

나는 하루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귤은 항구 저쪽에서 파도를 타고 모래톱으로 밀려 왔다. 물론 지독하게 운이 좋아야 하루에 몇 개였다. 귤은 당시 지금같이 가장 흔한 과일이 아니라 가장 귀한 과일이었다. 그래서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시간만 나면 바닷가에 나가 귤을 기다렸다. 그 글은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외국군 함정으로부터 떠내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양미리를 구워 먹거나, 매달아 놓은 문어의 빨판에 깡통을 붙이거나 하는 놀이에도 싫증이 나면, 언덕 뒤쪽 마을로 가서 아무 쓰레기통에서나 콘돔을 뒤져서 풍선을 불었다. 그곳에는 아예 늘 붙어 살면서, 빠꼼히 뚫린 판자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는 일로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도 많았다. 판자 틈으로 들여다보면 어떤 광경이 보이는지는 나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언덕 위 방공호 속에서는 아이들이 판자 틈으로 본 그대로를 이리저리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기도 했다. 나는 거의 하루종일 글을 기다렸다. 나는 도무지 귤

을 손에 쥘 수가 없었다. 한번은 잠시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꺼풀이 덮이는 것조차 악착같이 밀어 올리며 마침내 한 알을 먼저 발견했었다.

그러나 헛일이었다. 어느새 다른 녀석이 허벅지까지 첨벙거리며 들어가 가로챘었다. 나는 내 글이라고 징징 울면서 대들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바다에서 떠오는 황금빛의 훌릉칸 과일은 아예 내 차지가 아니었다.

귤이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나무가 내 나무라는 꿈을 꾼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꿈에서 나는 좀더 큰 아이들이 하던 짓거리대로 대담하게 한 계집애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는 계집애인 듯도 하고 모르는 계집애인 듯도 했다. 계집애가 생끗 내게 웃음을 지었다. 그 때 내가 말했다. 너 내 꺼 한 번 빨을래? 큰애들이 노상하던 말이었다. 그러자 계집애가 말했다. 귤 있어? 그렇다. ? 귤이라면 나는 주렁주렁 열매를 매단 나무째로 가지고 있었다. ? 나는 귤나무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 순간 그만 꿈에서 깨고 말았다. 캄캄한 방안이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술집 여자는 절대로 그때의 그 계집애일 수는 없었다. 꿈속에 나타난 계집애가 실제로 속초에 살았던 계집애로서, 또한 실제로 서로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손치더라도 그 계집애가 이 여자일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서른 살이 넘었고, 여자가 내 짐작대

로 갓스물을 넘긴 나이라면 그때 여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니, 나이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때의 그 계집애였다고 한들 도대체가 무슨 심령술이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역시 고개를 저으며 속초 그곳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럼 어디죠?

여자는 세 도시를 내게 댔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 한 구석에서 내 앞에 있다. 나는 비로소 여자의 행적을 다 캐고 만 것이다. 그 도시들에서 모두 여자가 나 같은 남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나를 혼동시켰다. 모든 남자를 나 같은 남자로 보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오랜 동안 만나고 싶었다는 느닷없는 말 때문에 분명히 만난 적이 있는 남자임에 틀림없다는 최면에 빠진 것일까. 나는 잠자코 술잔을 기울였다. 여자는 왜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쳐놓은 엉뚱한 그물에 들어와 퍼덕거린 셈이었다.

난 아가씰 만난 적이 없소.

그때 나는 말했다. 어리석은 고백이었다. 굳이 술 탓으로 돌리려면 그럴 수도 있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고백이었다, 그 따위 고백을 하려면 대전이니 마산이니 속초니 하고 나오기 전에 했어야 했다.

뭐라구요?

여자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아차 싶었으나 나는 어느덧 서글퍼지고 또 나약해져서 그 얼굴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비록 내가 이 여아를 만난 적은 없다고 하더라도 오랜 동안 만나고 싶었다느니 보고 싶었다느니 하는 말은 결코 거짓된 감정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니었다.

이것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문간에 서 있던 여자를 보았을 때, 그 여자를 통해 언젠가 잃어버린 여자를 보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을 받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 설명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여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 쌔끼가 누굴 놀려. 쌔꺄, 할 지랄이 그렇게 언니? 재수가 없으려니까 나 별 좆 같은 꼴 다 보겠네. , 기가 맥혀서. 꺼져. 빨랑 꺼지란 말야, 이 병신 쌔꺄.

여자가 바락바락 악을 깼다. 나는 어떻게 해 볼 엄두도 못 내고 엉거주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술값도 내는 등 마는 등, 여자의 악쓰는 소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꽤 되었었다. 막연한 그리움이 딱딱한 응어리

를 지어 가슴 속을 콱 짓눌렀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날 여러 술집을 전전했다. 나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셨다. 그런 다음에 생판 안 하던 짓으로 귤 한 봉지를 산 모양이었다. 모양이었다는 것은 아침에 깨어나자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웬 여자가 한 말이었다. 길에서 나를 만났다는 그 여자는 내가 취해서 비틀거리며 하나를 먹으라고 한사코 권하더라고 했다. 나는 낯모르는 여자와 낮선 방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러나 간밤의 일이 어렴풋이 그리고 토막토막 되살아났다. 여자는 파출부로 일하며 혼자 살아간다고 했었다. 방안에는 글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나는 작부와의 어처구니없는 희롱, 글을 기다리던 어린 날들이 섬광처럼 떠떠라 씁쓰레하게 입맛을 다셨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자의 말을 유추해 보면 나는 귤 한 봉지를 들고 비틀거리며 밤거리를 헤맸다는 이야기였다. 믿을 수 없었다. 어린 날의 글은 기억의 먼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귤이 흔해졌다고 해서 내가 귤을 사는 법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귤을 즐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 귤 봉지를 들고 헤매다가 낯선 여자의 방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자 여자는 그런 내가 우습다는 얼굴이었다. 귤을 들고 한사코 따라오니까 결국 방가지 따라오게 된 것이 아니냐고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간밤의 일을 돌이켜 보고 있을 때, 나는 바깥에서 문을 흔드는 소리를 들었다. 옆에 누워 있던 여자가 부시시 일어나며 누구냐고 물음을 던졌으나 여자는 미리 알고 있는 듯했다. 여자는 혼자 산다고 했었다. 나는 허둥대며 일어나려고 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일어나두. 현일 거야.

마흔 몇 살이라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비로소 여자의 얼굴을 뜯어 살폈다. 눈가에 잡힌 잔주름이 나이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귀엽게 생긴 얼굴에 아직도 앳된 티를 못 벗고 있었다.

현이지?

문을 따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났다.

밥이나 먹고 다니니?

그래도 남자는 아무 대우도 없었다. 이른 새벽에 누가 나타날 줄은미처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나는 낭패감에 사로잡혀서 한쪽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르춤하게 앉아 있었다.

그와 나는 만났다. 여자의 아들인 그는 그때 스무 살 먹은 청년이었다, 그는 방안에 들어와서도 나라는 사람이 거기 있다는 사실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관심조차도 없는 듯했다. 그가 간밤의 일을 상상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그의 어머니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젊은이였다. 그런데도 그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요즘은 어디 있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친구 집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내게, , 그 러세요, 하고 관심을 나타냈다. 무관심을 가장한 만큼 철저히 적의를 감추고 있는가 해서 나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색한 공간을 처리하려고 내가 담배를 피워 물었을 때, 그는 내게 재떨이를 밀어 놓기도 했다.

엄마, 나 돈이 좀 필요해요.

그가 갑자기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오로지 돈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간밤에 거의 돈 한 푼도 없이 그 집으로 기어들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어쩌면 어머니가 내게서 약간의 돈을 벌었으리라 짐작했을지도 몰랐다.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그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리움이나 외로움 따위의 케케묵고 신물나는 낱말들을 혀꼬부라진 소리로 주워섬겼었다.

요전에 가져간 건 벌써 다 썼니?

그러면서도 여자는 눈가에 잔주름으로 정겨운 눈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바지 하나 사구 쓰다 보니 그래

에구, 우리 새끼.

모자 사이의 대화에 나는 끼여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 어머니와 하룻밤을 잤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나를 붙잡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있거나 말거나, 그 어머니가 간밤에 나와 관계를 가졌거나 말거나, 그리고 그 아들이 어디로 어떻게 싸돌아 다니거나 말거나, 도대체 모든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다만 돈만이 문제였다. 내가 만약 돈으로 여자를 샀더라면 나는 그가 들어오는 순간 뺑소니를 쳤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차츰 평온을 되찾은 나는 마침내는 여자가 차려온 아침밥까지 한 상에서 먹게끔 되었다.

그 집에서 나올 때 그와 나는 함께였다. 걷는 동안 그는 비로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군에 입대할 날짜를 받아 놓고 있다는 것, 친구와 어울려 드럼이나 색소폰 같은 악기를 만지고 있다는 것 등, 마치 오래 사귄 사람에게 하듯이 스스럼없이 말했다, 나는 그가 내게

적의를 보이기는커녕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의 신변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에 야룻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연민이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친숙함을 느꼈다.

그와 나는 어떤 관계이길래 나란히 어깨를 겯고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불가사의했다. 그는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한쪽 주머니 속의 손가락은 어머니에게 받은 몇 천 원의 지폐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이었다. 연습할 곳이 마땅치 않아 서 차고나 빈 집을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밤업소 지망생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쿵작쿵작, 쉿쉿 소리를 내다가 아무 데나 쓰러져 자는 그의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드럼 쪽인가 색소폰 쪽인가를 물었다. 색소폰이었다. 그리고 군에 입대를 하면 군악대에 들어가고 싶으나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군악대 입대가 까다롭다기보다 그의 색소폰 실력이 모자란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갈림길에 거의 이르러서였다.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저씨는 이해해 주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요.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그에게 어떤 친숙함을 느꼈다고는 해도 그 친숙함에 지나치게 의지하여 마음을 놓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가 마침내는 무엇인가 요구해 오리라는 부담감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뭘 말이지?

나는 긴장을 감추며 물었다.

그냥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지금 불고 있는 색소폰은 홈친 거예요.

그는 그냥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박또박 말했으나 목소리는 서투른 주자(走者)가 색소폰을 불 때 새어 나오는 바람소리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색소폰은 훔친 거예요. 나는 그가 하고 있는 말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색소폰을 훔쳤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그가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색소폰을 ?

본랜 클라리넷을 불었었지만 오래 전부터 그걸 불고 싶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니까 악기도 없고 해서 견디다 못해 훔쳤어요. 전 음악을 하고 싶어요.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밴드부 같은 데서 특별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클라리넷을 불었다. 그리고 군악대에 들어갈 가망이 없는 줄 알면서도 색소폰을 불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

나는 여전히 그가 하고 있는 말의 저의를 모르겠어서 어정쩡한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 나는 필요하다면 도둑질까지도 불사하는 놈이니까 알아서 하라는 위하는 결코 아니었다.

그냥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나쁜 일인 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헤어져야 할 곳이었다. 그는 내게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무엇에 흘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리고 회사 전화 번호를 일러주었다.

그냥, 만나서 얘길 나누고 싶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총총 사라져갔다. 나에게는 그 말이 주술과 같았는지 그 뒤 나는 왜 여러 번 그를 만났다. 그냥,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한 그의 말은 액면 그대로였다. 그는 내게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바라는 것이라곤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끈질기게 나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 아침에 그를 만났던 이래 나는 그 어머니와는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어머니가 모르는, 그의 동료가 된 셈이었다. 그가 내게 구체적으로 바라는 것이 없는 데다가 나이 차이도 십 년 남짓이나 되어서 우리들의 만남의 세계는 퍽 단조로울 수밖

에 없었다. 그는 항상 그냥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냥. 만나고 싶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말에는 그냥이라는 앞말이 붙었다.

그냥그냥그냥. 그는 웬 계집애와 우연히 만나 그냥 잤다고도 했다. 처음 얼마 동안 그가 그냥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는 그 말은 내게도 그냥 그 말이 가진 그대로의 뜻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그 말은 모종의 의미를 가지고 다가왔다. 내가 그의 그냥 만나는 상대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필요 없는 짓이었다. 아무 구체적인 요구 조건 없이 그냥 만난다는 것이 우리 사이에서 가능하단 말인가. 설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별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게 아무 부담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의 태도는 오히려 더 큰 부담을 주었다. 그 굳어진 태도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여전히 생활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아니, 문득 한번쯤 그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으면서도 그쪽으로 발길조차 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서 오는 그 부담 탓이었다. 그러니까 발길조차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겠다.

나는 하룻밤 외로움의 광란에 못 이겨 헤매다 여자를 만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과 두고두고 만나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형벌이었다. 어느 편이냐 하면 나는 그 하룻밤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불쑥불쑥 그냥 만나고 싶어요 하면서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피하지 못하고 그를 만났다. 그것은 나를 꼼짝못하게 하는 올가미였다. 하지만 나로서도 약간의 계산은 있었다. 그의 입대 일이 가까이 다가왔으므로 나는 그날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입대하고 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리라. 괴롭고 곤혹스러운 올가미에서 벗어나리라.

그가 나를 만나서 이것저것 살아가는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위안을 받고 있다는 사실마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감쪽같이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가 나를 만나는 근거는 나와 그 어머니와의 관계에 있음을 어찌 부인하랴.

그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로서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한 여자와 잔 것이지 그의 어머니와 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현은 그것을 나와 그 어머니의 관계로 또렷이 새겨 놓고 있었다.

그가 입대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에 이르렀을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그는 예정대로 떠나갔소 나는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가 떠나기 전날, 나는 술자리까지 마련해서 그의 장도를 빌어 주었다. 그는 휴가 때면 꼭 들르겠다고 맹세했다.

그 말에 나는, 어김없이 들러야 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따는 교활하게 웃으면서 속으로는 영원한 결별을 자축했다. 그렇게 그는 떠나갔다, 드디어 올가미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와 함께 그의 어머니도 뇌리에서 떠나갔다. 나는 한번도 여자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가 제대를 하고 왔다니 그로부터 삼 년이 흘러 있었다. 그가 입대를 하고 난 얼마 뒤 나도 별 볼일 없는 그 놈의 회사를 떠나 버렸다.

그로써 그가 휴가를 나오더라도 나를 찾는 일에 온통 매달리지 않는다면 나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 삼 년 동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천성이라고까지 믿겨졌다. 아무 것도 나를 옭아매는 것은 없었다. 나는 남들이 자기 발전이니 승진이니 하며 바쁘게 뛰는 모습을 다른 세상의 일처럼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아버지의 죽음이 다시 닥친다거나 애까지 가졌던 여자가 떠나 버린다거나 하는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예전처럼 그것을 빙자하여 희떠운 짓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다. 삼십대의 나이에 내 삶은 벌써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그는 나를 수소문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나를 찾아내서 전화를 했다.

우리 사이에 그렇게 긴요하고 애틋한 사연은 없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그와 다시 만날까봐 은근히 진절머리를 냈었다.

 

그는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삼 년만이라도 예전 모습과 별로 변한 구석은 없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살아 있으니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나는 짐짓 웃음을 던졌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우리가 왜 만나야 하 는지 불쾌감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는 또다시 그냥이라고 말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냥이라는 등속의 어린애 수작을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나는 단호하게 마음먹고 있었다.

너에게 진 빛은 없어, 하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솟는 걸 나는 간신히 참았다.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나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말을 건성으로 했다. 그가 입술을 깨물면서 조금 웃었다.

실은 전화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 같아서 전활 했어요.

나는 그와 삼 년 단에 만났는데도 벌써부터 진력이 난 표정을 짓지않을 수 없었다. 그와의 만남은 애초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그날 저녁에 들어갔던 술집의 어린 여자를 상기했다. 거기서부터 일이 꼬이느라고 수작을 벌인 것이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그 말은,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끄떡하지 않으리라는 내 속셈을 미리 알아차리고 마치 나를 비웃는 듯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굳이 나를 찾아와야 할 까닭은 없었다. 그러나 따지기도 전에 그의 어머니의 죽음은 뜻밖의 일로 와 닿았다. 아직도 젊다면 젊은 나이였다. 나는 언뜻 불길한 여러 가지 사인(死因)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사인은 연탄 가스 중독에 지나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자 갑자기 불을 넣은 게 잘못됐다는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고는 생각되었으나 뚜렷한 애도의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술이나 한 잔 사고 보낼 심사로 일어서자고 제안했다. 그가 온 것이 단순히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어머니와의 만남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선뜻 일어나지를 않았다.

아저씰 찾아온 건 말이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얘길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글 때문이에요. 언젠가 어머니가 귤 얘기를 했거든요. 아저씨가 젤 좋아하는 게 귤이라고요. 올해 들어 처음 귤이 나온 걸 봤거든요. 그래서 그냥, ,,,,,

나는 일어나려다 말고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날의 일이 예민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먼 옛날의 일도. 그는 예전처럼 그냥이라고 얼버무리고 있지만 그의 행동은 결코 그냥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귤을 보고 내 생각이 나서 찾아왔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귤은 나의 비밀 가운데서도 가장 은밀한 부분이었다. 내가 바닷가에서 귤을 기다린 이야기를 그의 어머니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 비밀을 알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그 옛날 바닷가에서 기다리던 귤은 거의 삼십 년이 지나서 내 손에 쥐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해 준 사람이 그의 어머니였다. 나는 눈을 감고 먼 바닷가를 회상했다. 귤 하나가 보일 듯 말듯 떠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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