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세상을 살면서 느껴온 것 중에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게 중요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성에 관해서는 크게 의심해보지 않았다. 사람의 사는 곳 또한 그곳이 어디든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니 어떻게 사는가 하는 만큼 어디에 사는가 하는 것도 매우 비중 있는 부분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내용에 얽힌 친척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이분은 나의 연배로서 거의 10여 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최초의 입성은 서울이었다. 본래의 근거지는 부산이었는데 70년도 말 무렵에 직장에서의 인사발령으로 인해 서울행을 감행하게 된 것이었다.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어려운 선택이었음에도 과감하게 결정했고 도전했다. 부산에 사는 동안에는 부인이 조그만 슈퍼 같은 것을 몇 년 동안 했었다. 그래서 그것에 의해 벌어진 자금으로 울산에 토지를 사두기도 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가친척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 4명만이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처음 살게 된 곳은 화곡동의 빌라 쪽이었다.. 보일러 시설도 없고 연탄보일러로 난방을 하던 시절이었다. 부산에 사는 것도 만만치 않았던 터였는데 서울로 올라오고 보니 그 고생은 말이 아닐 정도였다. 얼마 후에 막내아들까지 태어나게 되어 다섯 식구가 되었다. 10여 년의 결혼생활을 통해 도시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으나 서울에서의 생활은 아무래도 낯설고 어려움이 뒤따랐다. 몰론 부인의 강단 있는 성격과 남다른 생활력은 굳건하게 서울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제조업체로서는 그런대로 대기업에 해당하는 곳으로 봉급생활자로서의 생활에는 별다른 지장은 없었다. 10여년의 생활 후에 이사를 하게 된 곳은 서초동이었다. 이층양옥집의 이층에 전세를 얻어 생활을 했다. 아이들도 자라 큰 녀석은 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작은 녀석은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서울의 한복판 중심권으로의 진입이 이루어진 셈이 되었다. 한참 게임이 유행처럼 번져나갈 때였고 아이들은 그것에 매료되어 있기도 했다. 개인 주택이 되다 보니 겨울에는 찬바람이 들었고 외풍이 심했다. 그러던 중에 청약저축을 통해 분양을 신청하게 되었고 다행스럽게도 안양의 평촌신도시 아파트가 당첨이 되었다. 20여 년 만에 제대로 된 내 집 마련을 하게 된 것이었다. 억척스럽게 저축을 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해온 덕택이었다. 기반을 서울로 잡아 생활을 얼마만큼 하게 된 덕에 이제는 가까운 친척들도 생기게 되었고 조카들도 서울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30여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대기업을 나오게 되자 조그만 중소기업의 임원으로 몇 년 동안 근무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평촌에서의 생활은 이제 어느 정도 기반을 갖게 된 상황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게까지 되었다. 부인은 통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새롭게 창업을 하게 되고 대기업에 납품을 하는 중소업체를 만들어서 경영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기업으로 시작을 하였으나 요즘에 와서는 상당한 규모를 가진 우량 중소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그런 와중에 고향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금을 출자해서 그 이자로 쌀을 몇 백 포대씩 나누어줄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러게 되었다. 지금은 평촌에서 산본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아들 둘은 다 장가를 가서 잘살고 있다. 손자1명, 손녀2손녀 2명을 둔 다복한 가정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내년 삼월이면 또 자손이 태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다. 이분들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고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남다른 뭔가가 있었으리라. 억척스럽게 달려왔고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상에 대하여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졌고 이웃에게 베풀며 근검절약했던 것이 그 원동력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이제는 편안하게 노후를 즐길 생각을 하고 계신 듯하다. 내년쯤이면 장성한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후선에서 안락한 생활을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야기는 마치 순풍에 돛을 단 듯 그렇게 흘러온 것 같이 보이지만 내면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히 성공한 것은 아님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제는 공장도 사고 충분히 운영의 기반이 튼튼한 상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여겨진다. 10여 년 이상의 경영을 통하여 제대로 된 기초 위에 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가족과 상경해 30여 년 동안 진력을 다한 결과가 좋은 결실로 마무리된 듯하다. 제대로의 학력을 갖춘 것도 아니요 부모의 조력을 받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뜻한 바의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이다. 가문의 영광을 만들었고 자식들도 다 제 역할을 충실히 할 만큼 교육시켰고 성장하도록 뒷바라지도 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회사의 기밀이 유출되어 곤욕을 치루기도 했고 한때는 발병으로 인해 오랫동안의 병원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고 견실한 중견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했다. 한 번씩 호사를 부리도 될 만큼 여유가 있음에도 부인은 네덜란드로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정작 사장님은 극구 사양하며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다. 명절날에는 지인들을 불러 행사를 하곤 한다. 갖가지 음식을 마련해놓고 식사를 같이 하면서 화기애애한 가운데 자신의 성공담과 철학을 담담히 얘기하곤 한다. 억세게 가난했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한평생 일에 파묻혀 살아오면서 나름대로의 성공을 이루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었는지 자문해본다고도 했다. 한 번씩 시골을 가면 꼭 금일봉을 희사하여 마을에서 잔치를 열 수 있도록 하고 귀경을 한다고 했다. 한 푼의 금전도 허투루 쓰지 않는 철두철미함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굳건히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나가는 부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제는 굳이 서울로 가서 그 복잡하고 어려운 곳에서 생활할 필요가 있냐고 한다. 항상 웃어른을 공경하고 자신의 역할에 한 치의 빈틈없이 잘해내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한다.” 평생을 일에 묻혀 성공을 위해 일관성 있게 살아온 친척을 볼 때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단면을 배울 수 있었다. 항상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오래도록 복락을 누리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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