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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글(수필, 여행기, 편지글, 일기 등)

이오지마 전투

by 자한형 2022.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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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

얼마 전 국방 TV의 '역전다방'(역사와 전쟁을 다루는 방)이라는 프로 중 이오지마 전투 편을 시청했다. 이 전투는 1945219일에서 326일까지 진행이 되었고 미군이 일본군 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미군은 일본 열도를 공격할 교두보를 확립한 셈이다.

이와 관련된 영화와 드라마를 찾아서 보았다. 영화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이었다. 모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작이었다. 드라마는 더 퍼시픽(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다. 전투의 시작, 경과, 내용 등은 모두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 있기에 차치하고 나의 느낀 점과 감상만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이오지마(유황도)섬은 일본 열도로 가는 교두보에 위치해 있고 군사전략상의 요충지였다. 괌이나 사이판에서 일본 열도로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이오지마가 필요했다. 전쟁의. 초창기에는 미국이 중국의 광둥성 서쪽의 공군기지를 이용해서 일본 열도 폭격을 감행했다고 하니 그 어려움을 충분히 느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194112월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후 6개월간은 일본의 전방위적 공격이 파죽지세로 진행되어 동남아 대부분 지역과 서쪽으로는 인도 인접지역까지 공략을 했고 호주까지 넘볼 지경이 되었으니 만만치 않은 전황이었다. 미국의 태평양 연합사령부에서의 상륙작전을 통해 전쟁 말기에는 필리핀 등지도 회복하고 사이판까지 회복한 상태에서 최후의 결전을 앞둔 상황에서의 전투가 이오지마 전투였다.. 미군 측은 해군과 해병대, 공군에 의한 총력전이었던 반면에 일본 측에서는 거의 해군, 공군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육군에만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일본군 지휘관은 쿠리바야시 타다미치(1891~1945) 중장이었다. 그와 함께 해군 제독 미치무라 리노스케가 있었다. 또한 부하 장교로 니시 다케이치(1902~1945)중령도 있었다. 1932LA올림픽 승마 마장마술 부분의 금메달 수상자였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그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과 양주 조니워크를 마시며 환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미군 포로 부상병을 부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치료케 하는 아량 있는 지휘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미군 측에서도 니시를 살리기 위해 항복을 수차례 권유하기도 했으나 끝내 이를 거부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일본 측에 니시가 있었다면 미군에는 존 바실론 중사가 있었다. 그는 과달카날 전투의 영웅으로 미국 최고훈장 명예훈장을 받은 이였다. 훈장은 받은 후 본국으로 건너가 전쟁 채권 판매를 독려하기도 하였고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어 각광을 받기도 했으나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지난날의 전우애를 잊지 못하고 부대로 복귀하여 이오지마 전투에 참전했다가 죽음을 맞았다. 참고로 우리가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 군인의 사망자가 5천 남짓이었다. 그럼에도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사상자는 35일간의 전투에서 일본군만 2만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니 그 처절했던 전투의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본은 쿠리바야시의 지휘 아래 초창기 상륙작전을 용인하고 내륙으로 미 해병대를 끌어들인 후 공격하려는 전략으로 방어망을 구축한다. 최초 공격을 하기 전 미 해병대에서는 10일간의 함포공격을 요구했으나 협의과정에서 포사격 기간은 3일로 제한된다. 일본 측에서는 해군과의 원활한 합동작전이 이루어지지 못해 남쪽 수리바치산과 북쪽 본대 간의 터널이 연결되지 못하고 중도에 공사가 중단된다. 전투기의 포탄 투하와 포사격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 측에서는 지하터널 망을 구축해 철벽의 방어망을 구축하고 지상에서도 지뢰를 매설하고 전차를 무력화하기 위한 방어책을 마련한다. 본래 이오지마섬에는 1,600명의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모두 인근 섬 등지로 피신한다. 인근에 치치지마섬도 있었으나 산악지형이어서 전략적 가치가 낮았다. 미군에서는 B-29 전투기의 일본열도 폭격 후 귀항지가 필요했기에 이오지마가 전략적으로 꼭 필요한 요충지였다. 이오지마에는 이미 세 곳에 비행장이 운용되고 있었다. 초기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남쪽 거점인 수리 바치(170m) 산의(170m) 점령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곳에 성조기를 세운다. 6명의 병사가 성조기를 세우고 그 성조기가 작다는 것을 명분으로 다시 성조기를 세운다. 처음 성조기를 세운 6명은 이후 전투에서 모두 전사한다. 두 번째 성조기를 세운 6명이 있었는데 그중 3명이 전사하고 3명이 생존한다. 이들이 세운 성조기의 모습은 실의에 빠져있고 전쟁에 지쳐있던 미국 국민들에게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리라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오랜 전쟁의 역경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되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미국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대변하는 것으로 비쳤다.. 역사적인 장면을 찍은 AP통신 기자는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미국 언론인에게 수여되는 최고상인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IMF 때 박세리 선수가 미국 US LPGA 메이저대회 우승을 향한 호수에서의 샷 장면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우리 국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던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한 그 장면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실제 전투를 수행하지도 않은 의무병, 통신병, 인디언 출신 병사 이들은 이후 본국으로 소환되어 전쟁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며 전쟁 채권 판매 T/F팀의 일원이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지원유세를 하기도 한다.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도 하고 성조기를 세우는 퍼포먼스도 하면서 영웅의 면모를 선보인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의 삶도 평탄하지만은 않다가 작고하고 만다. 고통받은 인디언 병사는 알코올 중독에 걸렸고 농장에서 일하던 중 일사병이 걸린 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시달리기도 했다. 그나마 천수를 누린 병사의 아들이 이오지마 전투에서 수리바치산에 성조기를 꽂았던 아버지의 깃발에 대해 회상하는 내용이 아버지의 깃발이란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회상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수리바치산을 정복한 후 다시 해안가로 내려와 수영을 하는 장면에서 평화를 갈구하고 일상에서의 평범한 안정을 희구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다.(영화 아버지의 깃발 중에서)

이렇게 만들어진 아버지의 깃발은 승전국인 미국인의 시각에서 조명된 것이라면 일본인의 시각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조명한 것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인 것이다. 쿠로바야시 사령관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말단 병사인 사이고, 시미즈 등이 아내 등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처절했던 전장의 실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인 것이다. 병사 사이고는 카스텔라를 만들던 빵 가게를 운영했었는데 어느 날 전쟁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국가에서 빵 만드는 기계를 몰수해가고 더 이상 업을 이어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또한 아내가 임신을 한 상황에서 징집이 되었고 이오지마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모든 장병이 전투에서의 패배에 책임을 지고 자폭하는 상황에서도 사령관의 명령을 전하고 북쪽 기지까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간다. 그곳에서 만난 이토 중령에게 비겁한 도망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죽임을 당할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나타난 사령관 덕에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최종전투에서 죽음을 당한 사령관의 주검까지 처리하고 포로로 생존하여 미군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쿠리야바시 사령관은 자살특공대에 의한 돌격이나 패배의 순간에 포로로 잡히기보다 자폭하는 극단적 선택을 엄금했다. 이오지마전투의 최종 전투가 326일에 있었다. 35일간의 혈전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72명의 잔존병이 있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미군에 항복할 것인지를 투표로 결정했다. 투표의 결과는 찬성 69표 반대 3표였다. 세 표의 반대를 표한 한 병사는 항복으로 최종 결정이 내려지자 분함과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군의관이었던 이는 이후 포로 교환을 통해 본국으로 송환이 되었는데 처참했던 이오지마 전투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주위의 눈총과 질시를 견디지 못하고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이치마루 리노스케 제독은 최후의 전투 전에 미카이 히로부미란 하와이 출신 병사에게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하는 편지를 전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그 병사까지도 최후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다행히 전사자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 편지가 발견되어 신문지상에 그 내용이 공개되기도 했다. 대략 내용은 대동아 공영권의 전쟁에 아무 관련도 없는 미국이 왜 개입해서 이렇게 많은 전사자와 희생자를 만들어내느냐는 식의 아전인수식 논리를 전개하여 일본의 정당성을 항변하고 호소한 듯하다.

아무튼 처절했던 이오지마전투는 이렇게 끝났고 이제는 87년이 지난 일이 되었다. 그 곳 수리바치산에는 이오지마 전투의 전몰자를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1906년에 있었던 러일전쟁의 203 고지전투를 방불케 하는 전투가 이오지마 전투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일본군 측의 피해로 5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지금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결코 우리 땅에서는 이런 처참한 전쟁과 같은 비극적인 역사가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하리라. 이를 위해 우리는 더욱 굳건한 안보관을 확립하고 철통같은 대비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강한 국방력과 국력으로 한 치의 땅도 용납하지 않는 침략에 맞서는 우리 국민의 굳건한 주국 수호의 자세와 결연한 의지 그리고 유비무환의 역사인식과 애국심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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