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스리는 우리 마을 -박 권 상
주민 자치의 현장
지금은 한낱 허구일 뿐이나 앞으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을 구성해본다.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대추벌`이라는 마을 (그러니까 경기도의 어느 시골 동네라고 치자)에 사는 김 아무개 씨의 집. 그의 네 식구는 마친 저녁밥을 막 마쳤다. 숟가락을 놓으면서 김씨가 아내를 향해 말한다.
"여보. 오늘 따라 퍽 고단하게 보이는구려, 웬일이지? 일이 너머 고된 거 아닌가?"
"예 정말 그래요,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앞길에서 날아오는 먼지 때문에 하루에도 마루와 방을 두 번, 세 번 걸레질해야 되는 데다가 오늘은 비가 내려서 먼지가 좀 덜하나 싶더니 오히려 애들 옷이 진 흙투성이가 돼 과외로 빨래를 다시 해야 했어요."
김씨 부인이 그렇게 투덜거린다. 아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엄마, 미안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었어요. 아침결에 비가 한때 억수같이 쏟아지지 않았어요? 내 친구들은 모두 큰길 건너에 살고 있으니 함께 놀려면 흙탕길을 건너 갈 수밖에 없었거든요. 우리 집 앞길에도 이제 자동차 왕래가 빈번해졌는데 하루빨리 포장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옷이나 신발을 자주 빨지 않아도 되겠고, 집안 청소를 덜 해도 될 텐데.........."
아버지가 말을 꺼내기 전에 딸아이도 한마디 잊지 않고 덧붙인다.
"내 바지 좀 보세요. 학교에서 오늘 길에 큰 트럭이 지나가면서 흙탕물을튕기고 갔단 말이에요."
묵묵히 듣고 있던 아버지가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젠 참을 수 없군, 비가 오면 진흙탕 길이요, 해가 나면 먼지 길, 어디 살수가 있어야지! 하루 빨리 길포장이 되어야겠는걸."
"그렇게 될 전망이 보여요, 아빠?"
아들이 묻는다.
"글세....... 아까 길 건너 복덕방 박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이야, 박 노인 말이 다음 마을총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될 것이라는 거야. 바짝 밀어 붙어야겠어."
김씨가 전하는 희망적인 소식이다.
"거론된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어, 다들 포장되는 걸 좋아해야 하겠지. 그러나 세금 올라가는 건 좋아할 턱이 없지. 그렇다고 중앙이나 도에서 보조금 나오기만 기다릴 수도 없고, 그리고 투표만 하면 말이 많고 무턱대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 않아? 열심히 뛰어야겠어, 이겨야지."
"아빠, 나도 마을 총회에 따라갈 수 없었는지,
"나 두 갈래!"
하며 졸라댄다.
"물론, 갈 수 있지, 있고 말고. 너희들도 크면 참석해야 할 총회가 아닌가. 미리 익혀두어야지."
아버지는 기꺼이 승낙을 하였다, 아이들은 매우 기뻐했다. 아들은 열두 살, 그러니까 국민학교 졸업반에 다니며 매우 활동적이어서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지 얼마 안 되었고, 따라서 어른들의 그런 모임을 구경하고 싶었다. 딸은 그보다 두 살 아래이지만, 학생회 '안전반' 반장이다. 며칠 전에 열린 안전반 모임에서 놀이터 안전 수칙이 보강되어야 한다는 말이 많았지만, 어떻게 고쳐야 좋을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마을 총회가 되어 가는 것 보면,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라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두 주일 동안 김씨 집에서는 마을 총회와 집 앞길 포장 문제가 날마다 화제거리가 되었다. 김씨는 한 주일에 한 번 나오는 읍내 신문의 주필을 찾아가서 대추벌 마을의 당면 문제를 호소하였고, 그 결과로 짤막한 그의 글이 실렸다, 복덕방 박 노인과 더불어 정미소나 협동 조합, 벽돌 공장, 그리고 잡화상들을 찾아다니며 이 동네에서 둘째로 큰 간선 도로가 반드시 포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찬성한 사람들이 말을 총회에 꼭 참석해 줄 것도 아울러 부탁하였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공회당에 대추벌 사람이 삼 백 명 가까이 모여들었다, 사회자가 개화를 선언하고 마을 서기가 그 모임에서 토론할 안건을 늘어놓았다. 좀도둑 대책, 가로등 설치, 적십자 회비 분담, 그리고 지방세 징수를 비롯한 여러 안건이 제시되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김씨 집 앞길 '포장의 건'도 있었다. 드디어 길포장 문제가 제기되자 복덕방 박 노인이 먼저 일어나 제안 설명을 했다.
요점은 이 마을에서 가장 넓은 간선 도로는 이미 포장되었는데, 그곳과 교차되는 또 하나의 간선 비포장 도로여서, 그로 말미암아 마을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 많으니 이길 을 포장하되. 경비 염출의 방법으로 주민세를 올리고, 그래도 모자라는 것은 마을금고에서 돈은 꾸어 십 년 동안에 걸쳐 나누어 갚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박 노인의 제안 설명이 끝나자 김씨가 동의하고 또 다른 사람이 재청하였다 의장이 "이제 동의가 성립되고 재청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한 또 다른 의견이 있는 분이 계십니다?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 마을 국민학교의 이 교장이 일어섰다.
"의장님. 나는 이 길이 포장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마을도 이제는 순전히 농촌이 아니고 벽돌 고장도 양송이 가공 공장도 섰고 해서 조그마한 상업도시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동차 왕래가 급격히 늘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늘어갈 터이니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삼 백 미터 남짓한 그 길을 꼭 포장하여 깨끗하고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야 합니다."
교장 선생의 진지한 설득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옳은 얘기라는 뜻이겠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청년회 간부 최씨가 나섰는데 그 또한 원칙으로는 길포장에 찬성하지만, 마을의 재정 형편이 어렵고 이미 마을 사람들의 부담이 과중한 상태임을 지적하여 다음 마을 총회까지 우선 보루하자는 수정 제안이었다. 열띤 찬반시비가 삼십 분 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의장이 원안의 표결 선포했다.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두시오,.........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표결 결과는 찬성이 180표, 반대가 115표입니다. 도로포장제안은 가결되었습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방청석에서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김씨의 아들과 딸도 엉겁결에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석 달 뒤에 김씨 앞길은 말끔히 포장되었다. 이제 먼지와 흙탕물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신의 일이 이루어지는 데에 스스로 나서서 토론에 참여하여 결정이 되니 모두가 큰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는 없다. 주민들은 그만큼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부담이 생긴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것들은 민주주의가 대추벌 마을에 적용된 결과이다. 그것은 곧 주민 자치의 한 보기이다, 그리고 '마을 총회'야말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살아 움직이는 증거였다.
이것은 순전히 가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멀지 않은 장래에 잘만하면 그와 비슷한 것이 구현될 수고 있는 맨 말단의 주민 자치 현장이다.
정치는 먼 데 있지 않다.
한마디로 주민 자치는 한사람. 한 가람과 그들의 가정이 직접 마을 전체의 일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생활을 스스로 의논해서 어떤 결론에 이르고 그 결론에 따라 실천하는 공동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정치요.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기본이자 핵심이다. 그것들은 우리는 모두 하루빨리 익혀야 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그와 비슷한 경우에 부딪치는 수가 있다.
"정치? 그런 것 난 몰라. 열심히 일해서 처자식 먹여 살리면 됐지, 정치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
"정치한다는 사람들, 다 미친 사람들이야, 영락없이 폐가 망신한 꼴 못 봤어?" 이렇듯이 정치 공포증에 걸린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서슴지 않고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 한 사람의 안전을 꾀하고 물질적인 영달만을 좇는다. 행여 라는 정치에 말려들어 이러쿵저러쿵 시빗거리가 되는 것은 신상에 해로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인 짐짓 이름 피하려고 한다.
조선시대 오 백 년 동안에 권력 쟁탈은 비열하고 잔인하고 비열하고 때로는 생사를 건 절대 절명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결코 부인할 구는 없고 그런 인습이 지난 사십 년 동안에 우리 정치 역상[서 말끔히 사라졌다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의 다른 모든 분야가 이른바 근대화의 길을 치닫고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수준이 크게 발전하여 이제 선진국의 문턱을 바라보고 있는 길목인데, 오직 정치 세계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을까?
정치는 올바로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위에 말한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인식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일을 우리 스스로가 합리적으로 의논하여 해결한 대추벌 마을의 길포장 경우가 바로 올바른 '정치'라고 말하고 싶다. 정치는 결코 남이 하는 것도 아니고 먼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곧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핵심적인 것임을 아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지방 정치야말로 민주주의의 훈련장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서 정치는 관가에서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백성은 오직 이에 순종한다는 거나, 우리다 더러 보았듯이 '잘난 양반' 들끼리 찧고 까불고 치고 박고 싸우는데 그저 멀리서 구경이나 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 일은 우리가 나서서 책임지고 다스리는 것이라는 인식을 터득하고 나아가 정치가는 특출난 사람이 아니라 내 고장의 조금마한 일을 몸소 실천하는 한편으로 이해 관계를 조절해 주고 남을 위해 봉사하며 민심을 파악하고 여론을 계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서 지방 주민들이 스스로 일을 다스리는 지방 정부야말로 개인과 우리 가정 생활에 가장 가까운 정부하고 할구 있겠다. 이, 읍, 면, 군, 도 그리고 중앙으로 멀어져 감에 따라 정부는 누구나 접근할 수 없는 멀고 먼 존재가 되 수밖에 없다, 나와 나의 가정, 가까운 내 고장의 일에는 누구나 좀더 자신 있는 의견을 내놓을 수 있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므로 단연코 슬기롭게 참여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정치를 남의 일이 아닌, 나 스스로의 책임으로 만들 수 있으니, 그때에는 막연히 정치나 정치인을 탓할 수도 없어지고 기피할 까닭도 없어진다. 그런 습관을 쌓아 올리고 되풀이해서 실천하는 동안에 좀더 밝은 정치가 중앙 무대에서도 전개될 수 있고, 국민이 더 현명하게 나라 살림에 참여할 구 있는 길이 열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의 여러 형태
나라에 따라, 지방에 따라 지방자치도 여러 가지이다. 지방분권이 이상적으로 잘되어있는 미국의 경우를 보면 지방자치는 획일적이 아니고 지방에 따라가지 각색이다. 또 다양성과 특수성을 존중하는, 그리고 워낙 땅덩어리가 큰 나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방정부가 중앙정부가 생기기 전에 생겼기 때문에,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 글의 들머리에 가상적으로 그려본 민주자치의 현장은 미국의 동북부인 뉴잉글랜드지방에서 실시되고있는 '타운미팅'을 흉내낸 것이다. 그 타운미팅은 청교도들이 미국에 정착한 십 칠 세기중엽에서 착한 직접민주주의에서 비롯한 것인데 지금도민주주의의 산 교본으로 건재한다. 곧, 말단자치단위인 '타운'―인구밀집지대로 서 타운이 아니라 농촌지방의 말단단위로 우리 나라의 면과 비슷하다―
에서 성인남녀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행정관, 지방판사, 보안관들을 직접으로 뽑고 아울러 타운사람들이 해야 할 당면 정책을 의논하고 결정하고 그 구체적인 집행은 선출된 행정부에 위임한다.
미국의 지방자치가 모두 뉴잉글랜드지방의 주민자치제도와 같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지방마다 주민들이 손수 의원과 시장, 군수, 주지사를 직접으로 뽑는 대의 민주주의가 실시되고 있지만 지방에 따라 자치형태가 특수하다. 이를테면, 중간행정단위 임시정부만 하더라도 적어도 다음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가 삼권분립 형태이다. 연방정부나 주 정부와 같이 행정 입법 사법부가 분리되어있어 적어도 시장과 시의회의원들은 직접
선출되고 지방판사나 보안관은 직접선거하는 수도 있고, 의회의 승인을 얻어서 장이 임명하되, 삼권이 서로 견제하여 권력의 독점화를 막는다. 그 밖에 교육의 원과 재무관까지 직접선거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권력이 분산되고, 시민의 의사가 바로 반영되는 장점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 썩 능률적이지는 않다.
둘째로, 최고의 원제도가 있다. 이 제도에서는 시민은 다섯 명의 최고의원을 뽑아, 5인 위원회가 행정 및 입법권을 장악한다. 다섯 명 가운데에서 한사람이 시장의 일을 맡고, 나머지가 집행부의 부서를 맡으면서 그 다섯 위원이 시의회를 구성한다. 이 제도는 중소도시에서 능률적으로 운용되고 있으나, 견제기관이 없는 것이 흠이다.
셋째로, 시의회 중심제도가 있다. 시민은 시의회의원만을 선거하며, 시의회는 입법권을 가질 뿐 아니라 직업적인 시의 서기장을 임명하되, 일상시정임무는 시서 기장의 책임으로 의회가 감독한다. 이 제도의 장점은 훈련된 직업적인 행정관에게 시 업무를 맡길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이 방법을 택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정치의 주인
앞에서 간단히 살펴 본 것처럼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지방자치제는 정치권력의 편의에 따라 이리저리 요리되느라 한번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지방자치제와 관련하여 강조하고 싶은 기본원칙이 몇 가지 있다.
지방자치는 단순한 지방행정 기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지방의 행정에 그 지방의 행정에 그 지방주민의 뜻이 최대로 반영되는 제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회의원선거법, 지방자치단체장선거법이 통과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지방 자치
그러면 왜 우리 나라에서는 민주주의 정치에 반드시 필요한 자치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걸음을 내디디는 것일까?
남의 나라를 보기로 들어서 안되었지만, 영국이나 미국에 견주어 지방 자치의 뿌리가 얕은 프랑스의 경우에 1789년의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부르봉 왕조의 절대 군주들은 지방 정부를 말살하고나 극소화함으로써 하찮은 지방의 일도 중앙에서 파견한 관원들이 결정짓게 하여 민중의 불만을 부채질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중앙 집권 제도였는데 거의 모든 일을 중앙 정부의 허가 없이는 진행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군주와 그 측근들에게 잘 보여야 긴요한 지방 사업이 성취될 수 있었다. 민주주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고 지방 분권이 전혀 안 되어 있었으니, 비 능률이고 비합리적 이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겠다. 그것이 마침내 부르봉 왕조가 스스로 프랑스 대혁명을 불러들인 한가지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불행 이도 우리 나라도 또한 지방 자치의 전통이 없고 따라서 그런 훈련이 전혀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민주 정치 대신에 전제 정치를 했으며, 제도가 지방 분권 대신 중앙 집권이었다. 곤, 봉건 질서라는 이름 아래에는 영국이나 일본에서 성행한 지방 영주 중심의 권력분산이 이 땅에는 전혀 없었다. 다만,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교육까지 철저하게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몇몇 사람에게 집중되고 독점되었다. 부르봉 왕조 때의 프랑스와 엇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되다, 모든 부귀영화의 원천이 한군데로 집결되므로 그 원천과 선을 대어서 벼슬을 한몫 해 보려는 사람들의 경쟁은 날이 갈수록 지열해진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그것이 조선시대에 남달리 치열했던 사색당쟁과부정부패의근원을이루었고결국은나라를송두리째외세에빼앗기는비극을자초하고말았다고도본다. 뼈아픈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독립과 더불어 해방이 되었을 때에 우리 나라도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하였다. 자유당시절에는 읍, 면, 시, 도의의회를 그 지방주민의 선거에서 뽑힌 사람들로 구성하였고, 민주당시절에는 읍, 면, 시, 도 및 특별시의장을 주민이 직접으로 선거하여 뽑게 되었으니 차차 지방자치의 기틀이 잡혀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5.16으로 말미암아 지방자치는 뿌리째 날아가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북이 맞서고있는 상태에서 국민이 각급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혼란스럽고 비능률적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재정적으로 지방자치단체가 자립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뒷받침되어 중앙관료조직의 명령으로 통치하는 체제가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신헌법에는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방자치의 시행을 연기한다고 못박았다. 유신 체제 그 자체가 민주주의하고 워낙 거리가 먼 것이기도 했지만, 지방자치를 아예 깔아뭉갠 것은 마침내 남북통일까지는 우리가 알고있던 식의 민주주의 정치를 안 하겠다는 생각에서 나왔던 듯하다.
유신체제가 무너지자 지방자치의 당위성이 부활하였다. 1980년에 생긴 5공화국헌법에서는 "지방자치단체에 의회를 둔다." 고 밝혀놓긴 했지만 '지방의 재정자립이 가능한 시기까지' 실시를 미루어 실제로는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정치적인 권리의식이 점차 높아져 감에 따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어 90년 12월에 들어서야 비로소 지방자치 법개정안과 지방지방의회 의원들이 선거 민들에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체제하여야하고 그래야만 그 지방의 필요와 요구가 큰 비중을 차지차지 할 수 있다. 만일에 지방의 요구와 필요가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지시로 좌절될 수 있는 취약한 제도라면 자치주의의 미덕을 살릴 길이 없고 오히려 혼란과 비 능률만을 불러 올 것이다. 지방자치에 정당정치가 개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정당정치만이 책임정치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방의 발전과 복리 증진 및 다른 지방과의 경쟁의식이 중앙정치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의 이익보다는 보편적인 지방의 이익이 강조되기 마련이고, 정당의 '빛깔' 이 연할수록 더 능률적 일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지방자치라는 것이 민주주의 토착화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높은 가치를 강조하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정치의 주인이라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시민의식이야 말로 이제 막 시작된 지방자치제의 성패를 결정짓는 관건이라는 걸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박 권 상/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미국노스웨스턴 대학 대학원 신문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내다 1980년 언론계에 복귀, 현재는 KBS사장이고 한 때 시사저널 편집인 겸 주필이었다. 저서로는『권력과 진실』,『민주주의란 무엇인가』등이 있다.
'비문학(인문과학, 사회과학, 철학, 역사,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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