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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시간이 신이었을까

by 자한형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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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신이었을까? / 박완서

감기에 걸려 외출을 삼가고 있던 중 교외로 바람이나 쐬러 가자는 K교수의 유혹에 솔깃해진 건 아마도 감기가 어느 정도 물러갔다는 징조일 것이다. 나는 K교수가 손수 운전하는 차가 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열두 시를 바라보는 시간에 집을 떠났으니 바람을 쐬러 가자는 말속에는 점심도 같이하자는 뜻도 포함돼 있음직했다. 집에서 한강을 끼고 양수리 쪽으로 가는 길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괜찮은 음식점 찾기도 어렵지 않았다.

K교수는 처음부터 목적한 데가 있는 듯 나한테 어디로 갈까 의논하지 않고 곧장 달렸다.

차가 능내에서 마재 마을로 꺾일 때 비로소 나는 가슴이 좀 울렁거렸다. 그 마을에는 정약용 생가랑 기념관 등 의미 있는 볼거리도 많고 경치도 좋아, 괜찮은 음식점도 몇 군데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추억이 있는 장소였다. 그 동네는 남편하고 나하고 툭하면 바람을 쐬러 다니던 곳이었다. 여름만 되면 남편은 그 동네 단골 음식점에서 장어구이와 쏘가리 매운탕을 먹는 걸 즐겼다. 남편의 유일한 취미가 식도락이었다.

남편이 나를 앞서 저 세상으로 간 지 금년이 이십 년째가 된다. 일 년 남짓한 투병생활이 허사로 끝나고 임종의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도 남편은 마지막으로 그 동네 그 집에 가고 싶어 했다. 그는 혼자 걷기도 어려울 때였지만. 우리는 그게 마지막 소풍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식구들이 총동원해서 짐짓 명랑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목이 메이는 심정으로 그매운탕 집엘 갔다.

그 집은 뜰이 넓은 조선 기와집이고 주인아주머니는 쪽을 찐 구식 부인이었다. 남편은 그 부인이 손수 만들었다는 밑반찬을 고루 맛보면서 다 맛있다고 칭찬을 하고 남은 건 싸달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흐르는 강가에서 바람을 쬐면서 어린 손자가 뛰노는 모습과 젊은 아들과 사위가 강물에 물수제비를 뜨는 걸 구경했다.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웠는지. 젊은 내 새끼들의 옷깃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조차도 어디 멀고 신비한 곳으로부터 그 애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라고 불어온 특별한 바람처럼 느껴졌으니까. 아마도 나는 그때 곧 세상을 하직할 남편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후 며칠 안 있다 남편은 이 세상을 떴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서 일 년도 채 안 됐을 때, 내가 혼자 된 슬픔을 잘 극복하지 못하고 힘들게 사는 걸 보다 못한 어떤 친구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그 집에 데려간 적이 있다.

여전히 쪽찐 아주머니가 손수 반찬을 만들고 숯불에 장어를 굽고 있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가 남편의 안부를 물을까 봐 속으로 전전긍긍했지만 그런 일 없이 그냥 넘어갔다. 그래도 장어를 먹을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 굽는 냄새도 싫었다. 친구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조금 먹는 시늉만 했는데도 토할 것 같은 걸 참느라 진땀을 흘렸고 결국은 체한 게 오래갔다..

그리고 이십 년 동안 가지 않던 동네로 K교수가 접어들었고 정확하게 그 기와집으로 가는 게 아닌가. K교수에게 그 집에 얽힌 옛날 얘기를 한 적도 없으니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쪽찐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았고, 마당의 후박나무와 은행나무는 몰라보게 큰 거목이 되어 있었다.

음식점과 찻집도 많아져서 예전 같지 않았지만 강바람만은 예전 그대로 상쾌했다. K교수는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그 집은 장어구이와 쏘가리탕이 일품이라고 그걸 시켰다. 나는 혹시 그걸 먹을 수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 두 가지가 차례로 나오자 나는 건강한 식욕을 느꼈고, 그 옛날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그걸 달게 먹었다. 그리고 남편을 떠나보낸 고통이 순하게 치유된 자신을 느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 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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