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빈자(貧者) - 민명자
녀석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파트 화단, 후박나무가 그늘진 작은 둔덕 위에 엎드려 있던 녀석과 눈길이 딱 마주쳤다. 목 줄기를 따라 가슴에 하얀 털이 섞여 있고 몸통이 온통 새까만 길고양이다.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 눈빛엔 기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고양이를 무척 무서워했다. 동네 어른들은 ‘고양이가 관을 넘어가면 송장이 일어난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래서 동네에 초상이라도 나면 밤중에 고양이가 얼씬거릴까 봐 무서워 밖엘 나가지 못했다. 어른들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라든가, ‘고양이한테 생선 맡긴 격’이라는 말도 자주 했다. 이런 속담을 들으면서 고양이는 겉과 속이 다르거나 믿지 못할 동물이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고양이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더해진 것엔 한 편의 소설이 준 학습효과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내가 아직 세상의 이해에 어두울 때 애드가 알란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어서다. 불안하고 불합리한 주인공의 이상심리나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소설의 심층적 의미를 다각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나이에 줄거리 중심으로 읽은 게 탈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각인된 건, 주인의 손등에 상처를 내고 한쪽 눈이 도려내져 흉측한 모습을 한 고양이, 살인사건과 연루되어 어둠침침한 지하 회벽에 갇혔다가 주인의 죄를 응징이라도 하듯 정체를 드러내는 섬뜩한 고양이의 이미지였다. 주인에게 희생당한 고양이에 대한 측은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강하게 남았던 거다.
그래서 골목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피하거나 쫓아버리곤 했다. 그 이빨이나 발톱은 마치 나를 할퀴려 대들 것처럼 날카로워 보였고, 눈은 내가 모르는 죄까지도 꿰뚫어보는 예지능력이라도 있을 것처럼 매섭게 느껴졌다. 한밤중에 암내가 나서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고양이의 카랑카랑한 울음을 들을 때면 서늘한 기분에 휩싸여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보니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시인이 말하는 것 같은 고양이 이미지가 쉽게 다가올 리 없었다. 봄이 고양이라고? 어떻게? ‘꽃가루처럼 부드러운 털과 봄의 향기, 금방울 같이 호동그란 눈과 봄의 불길, 고요히 다문 입술과 봄의 졸음, 날카롭게 쭉 뻗은 수염과 봄의 생기’를 지닌 고양이? 지금이야 그 감각적인 시어와 이미지 조합이 봄의 정경과 어우러져 선연하게 다가오지만, 그때는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뮤지컬 「캐츠」에서야 고양이 이미지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여기선 부자, 반항아, 악당, 선지자, 마법사, 춤 잘 추고 매력적인 고양이들이 매우 다양하게 인간 군상을 풍자한다. 하긴, 샤를 페로가 쓴 동화 「장화를 신은 고양이」에서는 고양이가 가난한 물방앗간 집 아들인 자기 주인을 일약 후작의 지위로 올려놓고 대저택에서 공주와 결혼까지 시킬 만큼 영특하고 지혜롭지 않은가. 보들레르는 또 고양이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에게로 가면 고양이는 관능적인 여인이 된다. 이렇듯 고양이는 여러 예술작품에 등장하면서 인간의 시선에 따라 위상을 달리해왔다.
나를 바라보는 저 고양이. 내가 저를 보는 것인지 제가 나를 보는 것인지, 나를 경계하는 것인지 위협을 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싸움이라도 하듯 끝까지 시선을 놓지 않는다. 자기장에 끌린 듯 떨칠 수 없는 그 형형한 눈빛이 내 온몸을 투시하는 듯하다.
예전에 사람과 처음 살기 시작했을 무렵, 이집트에서는 고양이가 무척 신성한 동물로 대접을 받았다 한다. 설령 실수라 할지라도 고양이를 죽이는 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고, 고양이가 죽으면 그 사체를 미라로 만들고 그 가족은 상복을 입었으며, 집주인은 눈썹을 밀고 애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젠 운이 좋아야 반려동물로 밥을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집도 없이 떠돌면서 도둑고양이나 길고양이로 전락하고 만다. 농촌에서 도시로 올수록, 문명의 불빛이 밝아질수록, 먹이는 줄고 쓰레기통은 더욱 견고해져 저들의 삶은 막막해진다.
저 고양이, 아파트 건물을 돌아서며 뒤돌아보니, 애소하는 듯, 두려운 듯, 노려보는 듯, 여전히 내 동선 따라 뒷모습을 쏘아보고 있다.
후박 꽃 다 떨어진 둔덕에서 꽃이 되고 싶은가, 탁발승의 화신인가. ‘너 누구에게 공양 한 번 제대로 한 적 있는가.’ 묻는 것도 같았다. 집에 들어와 고양이가 먹을 만한 음식을 챙겨 들고 다시 나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고양이는 간데없이 사라졌다.
며칠 후, 공교롭게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길고양이 몇 십 마리가 한꺼번에 독살을 당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그 고양이도 혹시 그 축에 낀 건 아닌지…. 누군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살겠다고 태어난 목숨이니 돕지 않으려거든 죽이지나 마세요. 그냥 그들대로 한 세상 살다 갈 수 있게.”라고.
다른 한편에선 강아지 유치원 얘기가 시선을 끈다. 강아지를 모셔가고 모셔오는 통학버스도 있단다. 그 견공님들은 유치원에서 사회성도 기르고 간식 먹는 법도 배운다고 한다. 먹이를 얻는 대신 자유를 반납하고 길들여지는 견공님들. 저러다가 혹시 변덕스러운 주인 만나 눈밖에라도 나면 길거리에 버려져 하루아침에 유기견 신세가 되지나 않을지, 사람 사는 세상이나 저들 세상이나 고르지 못하긴 매일반인가.
앙증맞은 모자를 쓰고 예쁜 옷을 입고 ‘개 엄마’ 품에 안겨있는 강아지의 동그란 눈을 보면서, 왜, 쓸데없이, 추운 지하도 계단에서 만났던 걸인의 눈빛이 겹칠까. 그는 검은색 누더기를 입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고개를 목덜미에 파묻고 있었는데 어쩌다 고개를 들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음울했던 그 눈빛이 잊히질 않는다.
문명의 도시 한구석에서 동냥으로 연명하는 걸인이나 길거리를 떠돌며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고양이나 도시의 빈자(貧者)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는 신세다.
오 늘따라 먹장구름이 끼고 날씨는 음산하기 짝이 없다. 허기진 도시의 빈자(貧者)들. 그들의 눈빛이 유혼처럼 허공을 떠돌며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그대들이여!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다음 생에선 천덕꾸러기 신세 면하고 존엄하게 사랑받는 존재로 환생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