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중인 지구인들을 위한 낭만적 유서 작성 교본
어제는 「저녁의 아름다운 노래」라는 시를 한 편 썼고, 오늘은 아직은 제목을 정하지 못한 노랫말 하나를 썼다. 저녁 숲을 거닐며 바다의 거대한 고래를 상상하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그 시가 되었고, “슬픈 꿈을 꾸었으니”라는 말로 그 노랫말은 시작된다. 그리고 생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일들이 내 천직이라는 현실이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 이런 엉터리 주술사(呪術師)도 다 있나 싶은 것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가져 본다. 만약 내가 ‘남몰래’ 좋은 종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뛰어난 군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람이 하는 짓들 가운데 뭐가 방황이고 뭐가 모색인지 나는 여전히 헛갈린다. 천사인 척하는 인간들이 악마보다 더 끔찍한 세상이다. 내게는 난쟁이 친구가 있다. 그는 솔직하다. 악마를 싫어하고 천사는 피곤하게 여긴다. 그가, 나와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도 꿈을 꾼다.”
“잠 잘 때 꾸는 꿈?”
“그것도 그렇고.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도 있겠지.”
“네 문학적 판타지라고 본다.”
“쥐는 인간이랑 유전적으로 얼마나 비슷할까?”
“……글쎄. 사람이 쥐랑 뭐가 비슷하겠어.”
“88퍼센트.”
“헉. 쥐가?”
“개 84퍼센트. 소 85퍼센트. 닭 65퍼센트. 오리너구리 69퍼센트. 침팬지90퍼센트.”
“그런 식으로 늘어놓으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별 차이가 없네.”
“초파리 45퍼센트. 꿀벌 44퍼센트. 회충 38퍼센트”
“미치겠다.”
“포도 24퍼센트.”
“…….”
“빵의 효모 18퍼센트.”
“…….”
“개 한 마리만 키워 보면, 녀석들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지. 잠꼬대를 하거든. 가위에도 눌리고. 우리와 유전적으로 비슷한데 왜 무의식이 없겠어? 어떤 향유고래는 백년을 산다. 어떤 거북이는 오백 년을 살고. 사람보다 오래 살면서, 혹은 몇 배를 오래 살면서, 그 긴 시간 동안 왜 꿈을 꾸지 않겠어? 왜 희망 같은 게 없겠어?”
내 친구 난쟁이는 심지어 바이러스에게까지 어떤 정령(精靈)이 있다고 믿는 듯하다. 이를테면 코로나 바이러스에게도 말이다. 바이러스가 생명체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쟁은 그것이 최초로 발견된 1892년부터 끊이질 않았다. 바이러스는 유전형질과 재생산능력, 자연선택의 대상 등 유기체의 여러 특징들을 갖추고는 있지만, 세포벽이 없고 영양분을 에너지로 전환 못 하며, 생존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숙주가 필요하다. 또한 바이러스들은 숙주의 면역체계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 숙주세포를 모방해 위장하고 숙주의 세포막 안으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신을 위해서 다른 존재에 스며드는 것들, 나는 이런 것들이 옳건 그르건 다 무섭다. 난쟁이는 강자(强者)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들도 믿고자 하면 믿는다. 나는 난쟁이가 무섭다. 그는 혁명가 타입인 것이다.
난쟁이는 소설가다. 지난주 월요일부터 그는 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마무리까지는 보름 정도가 더 걸릴 거라고 하였다. 글자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했다. 기껏해야 A4용지 두 장 안에 10포인트 크기 함초롱바탕체로 그의 죽음 뒤 그의 일생에 관한 정리를 스스로 정리하는 일이 보통의 시력(詩力)으로는 버겁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잘 정리되면, 그는 마음 편히 남은 인생을 마저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과거 일본소설 속에는 편지가 자주 등장했다. 아예 서간문학도 많았다. 내가 한 시절 오래된 일본문학을 좋아했던 이유다. 나는 한국인들이 ‘진짜 편지’를 좀 많이 썼으면 한다. 종이 위에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서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람을 안정시킨다. 한국인들은 정이 많다고는 하나 너무 사납다. 한국사회가 이 지경인 것은, 한국인들 각자가 불구덩이어서다. 나를 포함해 한국인들은 가엽다. 사나운 것은 가엽고, 사나운 것들끼리 바득바득 모여 살아야만 하는 일은 더욱 가엽다. 각설하고, 나는 난쟁이의 유서가,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서 쓰는 그런 글이었음 한다. 꼭 편지가 아니어도 좋으나 편지 같은 글. 죽음이라는 먼 행성에서 이 지구를 향해 천천히 적어 내려가는 마음. 누구에게 도착하는 것인지 모르고, 설령 아무도 읽어주지 않은들 아무 상관이 없는 편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일이 이번 한 번뿐이라면, 나쁠 게 대체 뭐란 말인가. 무의미는 편안함이다. 좋은 유서란 그런 것이리라. 전부 놓아 버리기 위해 쓰는 것이지 이것저것 챙기기 위해 쓰는 게 아니리라. 난쟁이는 자신이 이미 파괴된 인간임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결코 복구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도리어 자신을 자유롭게 해 준다고도 했다. 방황이란 무엇이냐고? 난쟁이의 대답은 이렇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 곁에 있는 것.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일.
모색이란 무엇이냐고? 난쟁이의 대답은 또한 이렇다.
─무엇을 사랑할 것이고 무엇을 사랑하지 않을 것인지를 고뇌하는 것. 그러나 그러한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게 돼 버리는 일.
시궁창의 어둠에 웅크린 채 잠든 쥐도 사람과 같은 꿈을 꾼다고 믿는 난쟁이는 지난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꿈속에서 만났다고 하였다. 흰색 홈드레스를 입고 난쟁이의 어린 시절 그 집 그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계셨다 한다. 엄마가 오른손 검지로 당신의 오른쪽 볼을 가리키면서 요기에 뽀뽀를 해 달라기에 난쟁이는 엄마가 원하는 그대로 뽀뽀를 쪽, 하고 해 드렸다. 그러고 나서, 그가 아까 자신이 그린 흰 고래 그림을 나무 벽에 고정하려다가 떨어뜨린 뒤로 못 찾고 있는 압정 얘기를 좀 나누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난쟁이는 한동안 아무 생각이 없다가, 약간 슬펐다. 하지만, 몸이 아프지 않은 어머니를 보아서 좋았다고 하였다.
천사인 척하는 인간들이 악마보다 더 끔찍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악마를 싫어하고 천사는 피곤하게 여기는 솔직한 난쟁이 친구에게 어제 오후 어느 한적한 카페에서 내가 본 것을 말해 주었다. 아주 잘 생긴 바리스타 청년이었다. 한참 떨어진 구석 자리에서 책을 읽다가 우연히 지켜보게 되었는데, 찻잔들을 가만가만 씻으면서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사연일까? 청춘들에게는 울 일들이 많다. 그걸 다 울고 나서야 비로소 노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는 청년과 노인의 사이, 청년 쪽보다는 노인에게 더 가까운 어디쯤에서 노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더 이상 사랑의 기쁨을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랑의 아픔을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 인간은 늙은이가 된다. 나는 오리너구리와 닭도 꿈을 꾼다고 믿는 난쟁이에게 말했다. 나는 그 잘생긴 바리스타 청년의 고요한 눈물이 좋았노라고.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가 일반화된 세상에서,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엇에게 슬퍼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무엇보다, ‘조용히 홀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남 보는 데서 큰 소리로 기도하지 말라고. 너희는 아무도 없는 방 안으로 혼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하라고. 슬퍼하는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마음이 약하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세상. 슬픔도 흉기 삼아 휘두르는 세상이다. 이제는 내가 어떤 글을 써도 감히 어느 정도의 수준은 유지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까닭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나의 불신’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광장에서 외치는 사람을 나는 경멸한다. 그의 유전자는 거짓말쟁이의 유전자와 100% 일치한다. 반면, 좀 기이한 베이스에서 인간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막 환갑을 넘은 어느 언론인은 1980년대에 전설적인 마르크시스트 운동권이었는데, 어찌어찌 시대의 격류에 떠밀려 옛 소련에도 갔다가 이후 난데없이 유고와 아프리카의 내전 등에서 종군기자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사회 이 나라에서 아무리 더럽고 심각한 일들이 벌어져도 실실 웃는다는 소리를 주변으로부터 자주 듣는다고 한다. 그는 아이들과 여인들이 집단으로 강간당하고 도륙당하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이다. 인간이 인간을 멸종시키겠다며 죽여서 정말 산처럼 쌓아놓고 기념사진 찍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인 것이다. 지옥보다 더한 세상과 악마보다 더한 인간들을 이미 본 마당에 뭐 이 사회 이 나라 이 멍청이들 정도면 좋은 사회 좋은 나라 착한 사람들 아니겠냐고 내게 되묻는다. 과연 득도(得道)와 해탈(解脫)에는 죽음처럼 순서가 없다지만, 방법과 그 결과도 저마다 다른가 보다. 그러나 정작 내게 훨씬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집단에 매몰되는 원인에 대한 그의 아래와 같은 견해였다.
“인간은 어디에 소속되고 싶어 한다. 혼자 못 있어. 들어가서 용해돼 버리면, 나중에는 나가고 싶어도 겁이 나서 나갈 수가 없다. 나가고 싶어 할 줄이나 알면 다행이지. 그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한 채 죽는 그 순간까지 쭉 그대로 간다. 거의 모든 인간들은.”
애에? 고작 그거라고? 뭐 이런 충격적인 허무개그가 다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저 고백을 하고 있는 그 인간의 무게를 감히 무시할 수 없었다. 순간, 나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렸다.
벗이여,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네.
레닌이 당대의 이론가들을 논파하여 혁명을 밀어붙이기 위해 자주 인용하던 대목이라고 한다.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힌다. 똑같은 말도 시대와 상황과 사용자에 따라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오용될 수 있는지를 본다. 내가 굳이 여기서 ‘악용’이 아니라 ‘오용’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레닌이 저 말을 인용했을 적에는 과학적 판단에 의한 진심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보니, ‘엄청난 거짓’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역사의 사악함’이 있다. 인간이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할 이유에 다름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 적에 그의 곁에는 그의 제자들이 하나도 없었고, 구원받은 강도와 이름 없는 여인들만이 있었음을 우리는 자꾸 잊는다. 한 인간이 다른 모든 인간들에게 겸손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겸손만 챙기고 살아도 우리는 모든 어둠을 피해 가지는 못할지언정 타인의 어둠이 되지 않을 수는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내 친구 난쟁이는 악당은 아니다. 다만 그는 몇 가지의 악의들을 쓸쓸한 기도처럼 사용하곤 한다. 나아가 절대 풀리지 않을 문제를 두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고통에 대한 중독일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왜 그랬어?”
“…….”
“그렇게 오랫동안.”
“……모르겠어요.”
“…….”
“그냥…….”
“…….”
“……사는 게 내 뜻대로 되지가 않았어요.”
초파리와 꿀벌도 꿈을 꾼다고 믿는 난쟁이가 자신이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의 대사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라고 한다. 뭐, 나쁘지는 않은 거 같다. 그리고 맞는 얘기 같다. 후회와 아쉬움이 아주 없기야 하겠냐마는 돌이켜보면 정말로 지난 일들이란, 가까운 것이건 먼 것이건 간에, 적어도 당시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던 것 같다. 그 어리석음마저도 사실은, 죽을 만큼 힘들어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랬던 거겠지. 타인에게만 너그럽고 자신에게는 엄격한 게 정답인 거 같지만, 타인과 자신 양쪽에 공평하게 너그러운 것이 이른바 ‘낙천(樂天)의 지혜’다. 아마도 서구 문명에서는 이것을 유머(humor)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낙천은 나사가 풀린 상태가 아니라, 자기과신과 오만의 대적(對敵)일 뿐이다. 이렇게 낙천하는 이는 페르소나(누구의 배우/가면)가 아닌 캐릭터(자기 자신)로 살아간다. 단 하루 단 한 순간을 살더라도 남이 아닌 ‘나’로 살다가 죽어야 옳다. 그래야 사랑도 할 수 있고 이별도 할 수 있다. 가면에게는 실패하는 연극밖에는 없다. 캐릭터만이 자신의 언어와 행동으로 ‘질문’한다. 질문하지 못하는 인간은 인형(人形)이다. 질문하는 이가 인간이다.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인생과 죽음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이며, 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조용히 홀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남 보는 데서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방 안으로 홀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한다. 어디 소속되지 않은들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 속한 곳이 있어선 안 되는 곳이라는 판단이 서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 버린다. 그는 그리하는 것이 자신은 물론 타인과 세상에게도 매우 유익한 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 앞에서 사람은 다 그저 사람일 뿐이다. 역사라는 요술상자 속에서 대단하다고 기록되는 사람이야 있겠지. 그러나 그게 얼마나 진실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을 뿐더러 늙어서 죽건 병들어 죽건 사건사고로 죽건 죽으면서까지 대단한 인간은 결단코 없다. 나는 공산주의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를 몇 가지 알고 있는데, 그중 하나만 밝힌다면, 모든 인간은 이미 자신만의 불행과 죽음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85세에 죽었다. 그는 반 고흐처럼 가난하고 불우하지 않았다. 달리는 파블로 피카소만큼의 부와 명예, 그밖에 한 인간으로서 누릴 것들을 정말이지 실컷 다 누렸다. 그런 그도 아내가 89세로 세상을 떠난 뒤 파킨슨병과 우울증, 자살기도, 침실 화재로 인한 수술 등에 시달리며 끔찍한 만년(晩年)을 보내다가 폐렴과 심장병 합병증으로 죽었다. 뿐인가. 죽은 뒤에는 친자확인소송에 DNA가 필요하다며 법원이 관 뚜껑까지 열었다. 이게 인생이다. 인간의 몸속에 웅크리고 있는 회충은 불쌍한 인간들에 관한 꿈을 영화처럼 꾼다. 쥐와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에게 세상은 쥐덫과 같으니까. 어려서부터 나는 권력자보다 위대한 것이 혁명가라고 생각해 왔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는 많은 혁명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 중에 혁명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이 전부 캐릭터가 아니라 페르소나라는 사실 말이다. 내가 만약 인간을 신뢰했더라면 정치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을 불신하기에 문학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 때문에 우울해질 필요는 없었다. 인생이 우스꽝스럽다는 진실이야말로 오히려 인간을 구원해 주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래, 너나 나나 안 죽었으니 됐다.” 이렇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바이러스는 라틴어로 ‘독(毒)’이라는 뜻이다. 포도와 빵의 효모도 꿈을 꾼다고 믿는 난쟁이는 바이러스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듯하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무엇이든 우리에게로 온 것에는 그것만의 섭리 내지는 의미가 있으리라 간주한다. 심지어는 그것이 재앙이라고 해도 말이다. 재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일들,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한다. 가령,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 같은 거. 우리의 삶과 죽음, 타인과 세상,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귀에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등에 관한 깨달음 같은 것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194×년 오랑이라고 하는 알제리 해안에 있는 한 도시에서 쥐들이 각혈을 하며 죽어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책의 맨 마지막은 인간이 페스트를 물리치거나 소멸시킨 게 아니라 페스트 스스로 사라진 것이며 대신 언제고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페스트가 쥐들을 다시 깨우고, 그 쥐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로 보내 죽게 할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나 역시 내가 이런 코로나 바이러스, 일종의 ‘페스트의 은유’ 속을 실제로 살아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 하나 죽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막말로 죽으면 그뿐이다. 이런 심정으로 살게 된 지 이미 오래도 되었고. 그러나 만약 내가 어느 병원으로 잡혀 들어가 격리되거나 죽으면, 토토가 걱정인 것이다. 그런데, 나의 존경하는 편집장께서 내 유고시에는 자신이 토토를 맡아 줄 터이니 아무 두려움 갖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감동하여 침묵처럼 울었다. 과연 보라. 재앙을 통해서 나는 이렇게 나의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고, 또한 잘생긴 바리스타 청년의 고요한 눈물이 어쩌면 속상함의 눈물이 아니라 나의 눈물처럼 감동의 눈물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아름다운 희망을 가지게 된 게 아닌가. 게다가 이런 재앙이 없다손 치더라도 평소에 마스크 좀 쓰고 사는 게 각자의 건강에 여러 모로 나쁠 일이 없겠다 싶고, 인간들이 보기 싫은 얼굴들 좀 가리고 살아주면 서로의 정신건강에 이 아니 좋지 아니하겠는가 말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이렇게 마스크를 쓰고 지내니 훨씬 덜 소란스럽고 예의도 있어 보이고, 무엇보다 ‘개인’이 살아 있는 ‘현대인’으로서의 소양이 발전한 듯해 뿌듯하기까지 하다. 이런 게 바로 ‘낙천’이라는 게다. 나는 나의 친애하는 편집장께서 ‘아주 멀고 먼 훗날’ 남편과 함께 천국에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이 기도가 재앙이 안 되려면 저 부부는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 되며 백수(白壽)를 누릴 동안 내내 정말정말 금슬이 좋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천국에 함께 있다면 그게 지옥일 테니까. 진정한 기도는 물릴 수가 없어서 하는 소리다.
나는 나의 난쟁이 친구처럼 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정령이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 이 시련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고 우리를 강하게 하리란 걸 믿는다. 참다운 성공이라 함은 뭐 대단히 빛나는 일들이 아니라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새로 시작해 본 그 경험 자체이기 때문이다. 신은 고흐에게나 달리에게나 공평하셨다. 왜냐고? 그 둘 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1945년 드레스덴 대공습에서도 살아남았으나 2007년 자신의 뉴욕 아파트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며칠 뒤 숨을 거둔, 내가 이 세상 소설가들 가운데 난쟁이 다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커트 보니것은 ‘예술가의 일’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를 남겼다. 첫째, 예술가는 자신이 온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단다. 둘째, 예술가는 최소한 이 세상의 작은 부분이라도 바람직한 모습으로 만든단다. 찰흙 한 덩어리, 캔버스 하나, 종이 한 장 등 뭐가 되건 말이지.
이에, 대한민국이라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글로 하는 일들 중에는 안 해 본 일이 거의 없는 괴승(怪僧) 같은 작가인 나는, ‘인간의 일’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를 당부하는 바이다. 첫째,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둘째, 메멘토 모리,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지난 봄 어떤 낯선 여자와 묘한 첫 데이트가 성사되어 횟집에 마주앉았을 적에, 소주를 마시던 그녀가 갑자기 감방 동기들이 보고 싶다면서 눈물을 글썽일 때에도 나는 위의 두 가지를 상기하며 급성 우울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알겠는가. 세상의 온갖 환란들은 평소 우리가 감사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던 것들에 사과하고 아직 남아 있는 그러한 것들에 정식으로 감사인사를 보내게 해 준다. 사랑한다고 속삭이게 해 준다. 사랑에 대해 질문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게 해 준다. 신께서 이러한 우리를 포기하실 리가 있겠는가.
어제와 오늘 「저녁의 아름다운 노래」라는 시를 한 편 썼고, 아직은 제목을 정하지 못한 노랫말 하나를 썼다. 저녁 숲을 거닐며 바다의 거대한 고래를 상상하는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그 시가 되었고, ‘슬픈 꿈을 꾸었으니’라는 말로 그 노랫말은 시작된다. 나는 마음이 안 좋을 적마다 고래 그림을 자주 그린다. 주로 대왕고래를 그린다. 어떤 향유고래는 100년을 살고, 나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세 번이나 통독했음에도 종종 성서처럼 들춰본다. 그리고 지난밤 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꿈속에서 만났다. 흰색 홈드레스를 입고 내 어린 시절 그 집 그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계셨다. 엄마가 오른손 검지로 당신의 오른쪽 볼을 가리키면서 요기에 뽀뽀를 해 달라기에 엄마가 원하는 그대로 뽀뽀를 쪽, 하고 해 드렸다. 그러고 나서, 아까 잠들기 전에 그린 흰 고래 그림을 나무 벽에 고정하려다가 떨어뜨린 뒤로 못 찾고 있는 압정 얘기를 좀 나누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이 없다가, 약간 슬펐다. 하지만, 몸이 아프지 않은 어머니를 보아서 좋았다. 그리고 금방 우연히 마룻바닥에서 압정을 발견하였고, 엄마는 내가 이런 작고 날카로운 것에도 다치지 않길 바라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하얀 고래에 대한 진실은 이렇다. 고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상처가 늘어가고, 그것들이 아문 자리가 바다에서는 하얗게 보인다고 한다. 흰 고래의 신비로운 흰빛은 상처의 빛이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고백하건대, 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들도 믿고자 하면 믿는다. 나는 ‘남몰래’ 좋은 종교인이 되기 힘들어 나의 뛰어난 군인은커녕 예나 지금이나 방랑자일 뿐이다. 나는 솔직한가? 내 문학은 겨우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천박해 무사(武士)도 시인도 못 된다. 대체 이런 엉터리 주술사(呪術師)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괴승(怪僧)일 뿐이다. 이제 문득, 내 유일한 친구인 난쟁이 소설가는 겨자씨만큼 작아져 내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나는 그것을 홀씨처럼 입김으로 불어 날린다. 그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딘가로 가서 무슨 이름으로든 자라 나무가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위해서 다른 존재에 스며들었던 나와 이별한다. 나의 난쟁이는 이제 반딧불이가 되어 먼 우주로 날아가고 있다. 내가 너무 싫어서 싫어할 수밖에는 없었던 사람. 이 별에서 이별을 꿈꾸게 했던 사람. 인생은 우스꽝스럽지 않다고 내게 속삭여 나를 괴롭혔던 사람. 나를 영원히 떠날 것 같지 않던 아픔 같은 나. 내 속에서 나온 나의 또 다른 나. 그가 저기 사라지고 있다. 슬픈 꿈을 꾸었으니,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어둠 속에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어둠이라고만 말하렴. 그가 내게 남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