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세계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밤길
창가의 그림액자가 쓰러져 옷깃을 여미듯 창문을 닫게 되는 밤. 가을의 태풍이 서서히 바다 너머로 사라드는 소리를 듣는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리라. 혹독한 겨울이 오리라. 술에 취한 밤이면 아버지 어머니가 이 서울 어디엔가 살아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무엇이 살아 있는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지는 삶이 있다면 그 인생에는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어느 나무의 씨앗 하나를 은접시 위에 올려놓은 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저 작디작은 씨앗 안에 거대한 나무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내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은접시 위에 놓인 거대한 나무의 작디작은 씨앗 한 톨은 있는 그대로 선(禪)이고 성(聖)이며 과학이자 우주이어서, 결국 시(詩)다. 나는 시인이라는 직업 아닌 직업이 죽는 그 순간까지 어색할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편을 갈라 멸시하고 증오하는, 죽일 수만 있다면 정말로 죽여 버릴 사람들끼리 득실득실 우글우글한 세상이 불구덩이 지옥 같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어찌 되었든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렇게 되었다. ─만약에 사람에게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면, 오직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못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만약 사람에게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이 없다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무슨 수단이라도 다 쓰지 않겠는가? 삶보다 귀한 게 있기 때문에, 살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며, 죽음보다 더 싫은 게 있기 때문에 재난이 닥치더라도 피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다.
가을 태풍의 마지막 숨소리를 들으며 『맹자(孟子)』의 한 대목을 읽는다. 진정 이러한 지조로 내전(內戰)하는 것이라면 굳이 말리고 싶진 않다. 나는 무력한 시 말고 가진 것이라곤 허무밖에는 없으니.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있으면, 미움과 저주를 사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왕보다 떠돌이가 더 나은 것이다. 어쩌면 거의 항상.
인기 정치인 R. 억울하게 잡혀 들어갔던 감옥 안에서도 그렇게 독하게 몸을 만들어 다시 세상으로 나왔을 적에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더랬다. 내가 원래 그런 거에 감동을 무진장 하는 편이거든.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육신을 단련하고 정신을 맑게 거두는 사람에게 말이다. 그러나 이제 인기 정치인 R은 인기를 잃어버린 채 역사적 산송장이 되고 말았으니, 이게 인생이다. 자신의 규율이 아무리 자신을 강하게 한들 언제든 언뜻 사소해 보이는 사건에 의해 빌딩 옥상에서 떨어뜨린 테라코타 화분처럼 박살이 날 수도 있는 것. 하긴 며칠 전 시인이자 건축가 함성호 형이 전화통화 중에 했던 말,
인간 따위에게 규율은 무슨 얼어 죽을 규율.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그게 타락이야.
그토록 철저하고 처절하게 자신과 이 세계에 도전하던, 유사 이래 인류 최고의 산악인이자 탐험가 박영석 대장마저도 ‘그의 원칙으로 인해’ 2011년 10월 18일 아직은 젊은 나이에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 도중 6500m 지점에서 눈사태 사고로 사라졌다. 멈추지 않는 자의 숙명. 박영석은 쉬운 루트를 버리고 남들이 가지 않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등로주의'를 추구했다. 이미 그는 탐험가로서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늘 죽을힘을 다해 새로운 도전에 임했다. 그는 서 있을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아직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어디든 가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나는 단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포기하지 않는다. 그 1퍼센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 때는 마지막 1퍼센트까지 완벽하게 진다. 그래야 다음 도전이 가능하다.”라고 충고했다. 그는 놀라운 업적을 이룬 뒤 은퇴한 다른 모든 탐험가들처럼 평온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다고 그를 평가절하 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리 없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그가 산악인으로서 이룰 만한 다른 어떤 것이 있으리라 상상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깨부수러 남극으로 갔고, 북극으로 갔고, 하얀 지옥의 얼음절벽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했다. 요컨대 그의 원칙이란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죽었다. ……인간 따위에게……인간 따위에게…… 나는 의심이 없는 사람들이 무섭다. 타인을 추종하고 자신에 대한 의심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무섭다. 노인학대 가해자 10인 중 9인이 가족이란다. 이게 이 사회의 인간이다. 이 사회가 그런 인간을 만든 게 아니다. 그런 인간이 이 사회를 만들었다. 이 진실은 이데올로기에 선행한다. 제발 남 위하는 척들 좀 그만해라. 대신 일과 중 틈만 나면 눈을 감아보자. 꼭 필요할 적에만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덜 피곤하고 더러운 꼴들도 덜 본다. 무엇보다 일부러 찾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불필요한 말을 줄이는 것과도 같다. 사람은 기도할 적에 눈을 감는다. 한 남자가 평소 믿고 따르던 선배에게 답답하고 슬픈 마음으로 털어놓는다.
“형. 사실은요, 내가 암에 걸렸어요. 너무 무섭고 힘이 드네요.”
이에 선배는 언성을 높이며 말한다.
“너는 새끼야, 나약해빠져 가지고 말이야, 정신상태가 글러먹었으니까 암에 걸리지 빙신아. 줄넘기를 해. 줄넘기를. 왜 줄넘기를 열심히 안 해서 암에 걸리고 지랄이야. 그리고 신문배달을 하란 말이야. 알았어?”
이럴 때 잘못은 암에 걸린 그에게 있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평소 믿고 따르던 선배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조금의 위로와 용기라도 얻어 보려 했던 그는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과대평가’라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사람은 듣기 싫은 말을 듣기 싫어한다. 그리고 그 듣기 싫은 말을 듣기 싫은 말로 결정하는 것은, ‘암에 걸려보지 않은 그 사람’이다. 명심하라. 이를 명심하지 못하는 자는 다 죄인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가 황당한가? 정말로 그런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암’을 ‘우울증’ 내지는 ‘자살기도’ 정도로 바꾼 뒤 그것을 제 경험의 메타포로 느끼게 될 사람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제 가슴에 손을 가만히 얹고, 당신은 당신의 인생 중에 저 후배였고, 저 선배였을 수 있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고통조차 다독여주기 피곤해하는 족속이라는 점을 간곡히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서로에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것이다. 진정한 소통과 우정과 사랑을 하려면 상대에게 너무 많은 이해와 내 것이 아닌 이득을 바라서는 안 된다. 나는 인간과 사회에 기대가 많은 사람은 별로 신뢰가 안 간다. 사람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은 의외로 늘 가슴속에 안녕의 인사를 새기고 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창작’이라는 게 뭐 대단한 건 줄 아는 모양인데, ‘무엇을 하든 그것으로써 나 자신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창작이다. 창작이란 이렇듯 소박하고 ‘개미의 일’ 같을 적에 더욱 강한 신비와 기적을 우리의 인생에 선물하는 법이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든 자신의 예술가는 될 수가 있다. 게다가 이러한 예술가는 언제든지 세상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개인과 사회에 대한 사랑 역시 이러한 창작 안에서 수행되어야만 그 개인과 사회는 낙담과 폭력 대신에 수긍과 희망을 갖는다.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유대인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는 천체망원경의 렌즈를 가공하는 것을 생업으로 두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신에게도 육체가 있으며 천사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등의 철학적 논설들을 서슴지 않았고, 그것들은 물론 그의 동족들에게는 사탄의 요설에 불과했다. 어느 날은 유대의 회당에서 나오는 스피노자를 다른 유대인이 칼로 찌르려 했고 칼날에 옷이 찢어졌는데 그는 그때의 그 옷을 찢어진 그대로 보관했다. 철학자로서의 삶이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유대인 랍비와 지도자 들은 스피노자에게 공개적으로 참회하면 거액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답했다.
“제게 히브리어를 가르치느라 고생들을 하셨으니 그 보답으로 저를 파문할 기회를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은 파문 같은 것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1656년 7월 27일 암스테르담 광장에서는 진짜로 스피노자에 대한 파문선언이 낭독되었다.
스피노자는 파문되었으니
더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신의 분노가 임하고 성서의 모든 저주가
내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영원히 지워지리라.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스피노자에게 여섯 걸음 이내로 접근해서는 안 되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1677년 2월 21일, 스피노자의 집주인은 이 위대한 철학자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21년 간 우주를 관찰하는 천체망원경의 렌즈를 갈면서 들이마신 유리가루와 유리먼지가 그의 폐에 쌓인 것이 원인이었다.
─신은 우주이며 본질이며 자연이고 바로 너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삶에 목적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무엇을 이루거나 무엇이 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는 거니까. 우리는 이미 그곳에 있다. 또한 우리는 죽어서 단지 우리가 태어난 신적인 근원으로 돌아갈 뿐이다. 살아서 가지게 된 우리의 감정과 기억 들은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와 함께 가지 않는다.
나는 스피노자의 이 말이 그 어떤 시보다 슬프고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잃어버릴 만큼 슬프다.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권력자에게 사상검열당하는 국가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 그리고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대중에게 사상검열당하는 국가는 절망적이다. 그런데.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다른 지식인이나 예술가 들에게 사상검열당하는 국가는 ‘절망’이다. 우리의 이 시대는 권력자가 개인을 파문하는 시대 정도가 아니다. 우리의 이 시대는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각자 여럿 발자국 떨어져서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집 안에서 코끼리 시체가 썩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악취 때문에 창문을 연다. 그러나 그런다고 코끼리의 시취(尸臭)가 없어질 리 만무하다. 대신 죽은 코끼리를 집 안에서 멀리 내다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 코끼리 시체는 사람들 각자 속에 누워 있는 까닭이다. 인기 정치인 R. 그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육신을 단련하고 정신을 맑게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복수심에 각성 받는 독하디 독한 사람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 누가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죽었다고 그를 모욕하는가. 그는 히말라야의 눈과 비와 바람, 태양과 구름이 되어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너무 사랑하다가 죽어 아예 그것의 신이 돼버린다면 히말라야의 그가 바로 그러할 것이다. 박영석은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 때문에 도전했다. 그는 비천한 인생에 휘말리지 않고 깨끗한 영웅의 마지막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주었다. 그는 닭들처럼 땅에서 죽지 아니하고 매처럼 솟아올라 아무도 모르는 하늘 속으로 눈보라와 함께 사라졌다. 맹자의 저 말은 그런 그에게만 적용된다.
제게는 잘못된 세계를 가지르는 아름다운 밤길이 필요합니다, 라고 기도드린다. 하나님, 저는 당신이 그 누구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덫에 발목이 잘린 채 산속을 헤매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저 같은 짐승이라고 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부디 저에게, 저희에게, 이 잘못된 세계를 가로지르는 밤길을 인도하소서. 내가 지금 기도드리는 이 하나님이 스피노자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일지언정 그것이 나의 기도를 더럽힐 리 없다. 또한 나는 이러한 말도 들었다. 화장(火葬)을 하면 불구덩이 안에서 시신이 한 번 일어난다고. 그렇겠지, 뭐. 시신도 불에 오그라드는 물질이니까. 술에 취한 밤이면 이 서울 어디엔가 살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내 아버지도 필경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죽어가고 있다. 나도 당신도 당신의 가장 아끼는 누군가도 당신이 가장 미워하는 그 누군가도.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살면서 죽어가고 있음을 늙어가고 있음으로 순화시키지 마라. 자유를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삶이란 허무와의 투쟁이다. 그 나머지는 전부 삶의 부스러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허공에 먼지처럼 떠 있으면, 햇살 속에서 금싸라기처럼 빛난다. 세상과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는 인생은 어리석다. 스스로 벗어났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내가 나의 등불이 되어 나의 어둠 속을 간다. 입술을 고요히 닫고 가만히 눈을 감으라. 우리 안에 누워 썩어가고 있는 코끼리의 시체는 거대한 나무의 작은 씨앗 하나로 변할 수 있다. 가을의 태풍이 사라지는 소리를 듣는다. 곧 겨울이 오리라. 아름다운 겨울이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