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바오밥나무와 하나님과(11)
질문이 많은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스무 살 무렵부터 질문하는 게 직업이 돼 버려 지금에 이르렀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 질문이 많으면, 인간을 경멸하고 세상과 불화하기가 쉽다. 몸이 자주 아프고 마음이 심하게 무너진다. 은유나 상징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요즘은 더하다. 고질을 넘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예 질문 자체가 답처럼 여겨지는 지경, 하긴. 그게 문학의 본질이긴 하지. 이게 내 파탄의 알리바이다. 어제도 나는 몸이 무너지고 마음이 아팠다. 불만은 없다. 나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뿐이다.
얼마 전, 어느 출판사의 대표인 시인 J형이 전화를 해 나더러 바오밥나무를 키우라고 말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로 그 바오밥나무 말이다. 거대하게 자라 뿌리로 작은 별을 바수어 버리는. 어린 왕자가 양을 찾는 이유는 양이 작은 별을 돌아다니며 어린 바오밥나무를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 너 식물 돌보는 거 좋아하잖아. 바오밥나무를 씨앗부터 화분에다가 키우는 거야. 그 과정이 굉장히 선적(禪的)이거든.
─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요?
─ 그걸 매일매일 글로 써 나가는 거야. 변화가 생길 적마다 사진도 찍으면서. 이쯤 되니 알 수 있었다. 내게 그런 글을 쓰게 만들어서 자신의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하려는 요량인 것이다. 아직도 내가 어디에 쓸모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 나 어디가 좀 안 좋아서 병원 다니고 있어요. 그런 일 할 수 없어. 신경 쓰는 일은 될 수 있음 줄여야 해요.
나는 어느 출판사 대표이자 시인인 J형의 선적(禪的)이지 않은 계획을 무산시켰다. 바오밥나무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열대와 아열대의 반사막지대에서 생육한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바오밥나무를 신성시해 죽은 이를 그 속에 집어넣기도 한다고 한다. 꼭 바오밥나무가 아니라도, 나는 모든 나무에게서 하나님을 본다. 동물이나 꽃에게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동물이나 꽃에게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흔들리는 인간 같은 것을 본다. 대단한 양반들이 단 한 순간에 몰락하는 소식이 낭자한 나라다.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직 능력이 아니다. 그 능력을 스스로 사용하고 무엇에게 이용되어지는 것까지가 그의 능력인 것이다. 능력이 있으면 뭘 하나. 무용지물에 악용까지 하고 또 그렇게 되는 인간들이 대부분인데. 겉으로 잘난 것들은 많아도 정작 진정한 능력자는 적은 까닭은 그래서이다. 나는 여러 죽음을 목도한 사람이다. 나는 안다. 그 어떤 위대한 인간도 일단 죽으면 한 줌 재만도 못하다는 것을. 예외는 제로. 그래도 위대하다면 그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풍문과 허무가 그럴듯할 뿐이다.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불덩이일 뿐이다. 아무 의미 없이 이글거리는 죄일 뿐이고, 곧 꺼진다. 이 역시 예외 제로. 하여 인간은 차라리 고독한 게 낫다. 불필요한 죄를 비교적 덜 짓고, 죽어도 그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에 좋으니까.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데,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해탈’이다. 언뜻 아닌 것 같지만, 불교의 이론이 그렇고 부처님의 현상(現象) 또한 그러하시다. 예수님도 세상 너무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신 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다. 사탄까지는 잘 모르겠고, 우리가 욕심 부리다가 괴물이 될까 봐서. 사탄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사탄은 전직이 천사인 타락천사(墮落天使)다. 인간이 천사였을 리가 있나. 자신의 위선을 고백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일 수가 없다. 시인들이 모이는 곳에 안 나간지가 한 20년도 더 된 거 같은데, 한 10년 전쯤인가 누구로부터, 요즘은 시인들이 모이면 문학 얘기는 안 하고 연예인 얘기만 한다는 소릴 전해들은 적이 있다. 나한테는 그 얘기가 무슨 나라가 망했다는 말 같았지만, 받아들였다. 워낙 어리석은 짓을 많이 저지르고 살아온 탓인지, 오히려 후회는 별로 안 하는 편이다. 나는 J형에게, 지난 내 인생 스무 살에 실수로 살인을 범하고 감옥에 들어가 30년 만기복역 뒤 출소한 거로 치겠다고 말했다. 세상이 더럽고 치사하고 지긋지긋하지만 세상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면, 인간은, 특히 작가는, 자학보다 무서운 무기력에 빠지기가 쉽다.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위악’을 선택한 거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들을 사랑해 주기는 싫은데, 나를 미워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러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괴로운 진술에는 나의 위선을 고백하는 것만큼이나 용기가 필요하다. 내 인생의 모든 한 순간 속에서 내가 끝이 없는 검은 구멍처럼 여겨지는 밤이 지나가면, 대낮은 내게 읽을 수 없지만 버릴 수는 없는 어떤 책과 같다. 어제 오늘은 책을 많이 읽는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이 세상 어디로부터도 고립이 가능하다. 나는 사주(四柱)에 나무가 많고 꽃보다 나무를 더 좋아하는데, 책은 나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도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면 내 재산은 ‘고요함’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침묵함으로써 말하는 침묵이다. 들을 수 있는 자들만이 이 속삭임을 들으리라. 소란스러운 것들은 일제히 다 허접하고 비열하다. 인간은 침묵할 때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된다. 침묵하는 인간은 행동하는 신을 볼 수 있다. 소란스러우면 나는 거지가 된다. 어쩌면 모든 인간들도. 며칠 전 집 앞 카페에서 무슨 일 때문에 누군가를 처음 만났는데,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미세먼지 차단을 위한 마스크조차 착용하는 법이 없는 나로서는, 그의 제 삶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내내 나는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내가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그의 저 다소간 병적인 자기애(自己愛)가 아니었다. 내가 나라는 모순덩어리 자체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슬픔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어루만진다.
요즘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속으로만 기도를 한다. 생각을 할 적에도 그런 기도로 대신하여 기도처럼 한다. 빈티지에 대한 취향은 삶에 관련된 모든 물건들에는 물론이요 삶 자체에까지 적용되는 것이 좋다. 상처와 흠집을 좌절과 핸디캡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능력과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쪽이 훨씬 지혜롭고 멋있기 때문이다. 어떤 삶도 어떤 물건도 상처가 나고 흠집이 생긴다. 낡고 바래진다. 구멍이 나고 꿰맨 바늘자국이 남는다. 이것을 미학으로 수용하는 태도는 강자의 태도다. 강자의 유머다. 강자의 패션이자, 자기합리화가 아닌 실제로 아름다운 전투력이다. 사람은 예민함만큼이나 둔감력이 필요하다. 둔감력이 부족한 예민함은 예리함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물건도, 죽거나 불태워지기 전에 상처와 흠집을 피해갈 수는 없다. 삶과 그 삶에 관련된 모든 물건들에 대한 빈티지 취향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 사실은 가장 튼튼하다. 아닌 것 같지만, 막상 만들어 놓거나 대면해 보면 그렇다.’라는 ‘나의 미학적 모토’가 참이자 그 역도 참임을 증명해 줄 뿐만이 아니라, 상처와 흠집이 우리를 강하게 함과 동시에 아름답게 한다는 이론의 요술 같은 실현이다. 나는 낡은 나 자신과 낡은 그대의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대여. 또 그리고 나여. 부디 아무것도 기다리지 마라. 기다리면 함정과 늪에 빠지게 된다. 전부 잊어라. 잊는 것이 기다리는 것보다 뛰어나고 옳은 방법이다. 물론 나는 진실의 힘을 믿는다. 그러나 거짓의 힘도 믿는다. 거짓을 따르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수로 거짓의 힘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진실은 강하다. 그러나 거짓 또한 적어도 그 이상은 힘이 세다. 진실과 거짓은 비슷한 힘을 가지고 매번 승부를 가릴 뿐인 것이다. 그게 뿔 달린 고양이에 관해서일지라도. 바로 이것이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진실이다. 그러니 나는 죽음 앞에서라도 강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질문으로 가득 찬 내 생의 이 여름은 나의 독선 같다. 벌레를 먹고 자란 예쁜 새 같은 우리, 내가 몰래 지어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나의 독설 같다. 하지만 ‘사랑에 관하여’의 반대말은 ‘이별에 관하여’가 아니라 ‘멸망에 관하여’이어서, 내가 스스로 바로서면, 설령 불행이 찾아온다고 해도, 그것은 그냥 ‘불행’이라는 고체일 뿐이다. 만지면 벽돌처럼 감각되는. 그래서 그것으로 멋진 집을 지을 수 있는. 내가 남몰래 좋은 종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좋은 군인이 될 수 있다.
시인 J형은 전화를 끊기 전 내게 이렇게 말했다.
─ 스무 살에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 30년 만기복역 뒤 출소한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 …….
─ 그냥 빵 하나 훔쳐서 살고 나온 거라고 생각해. 장발장처럼.
과연 나는 시인과 대화를 나눈 것이었고,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하루 하고도 반나절 가까운 긴 잠 끝 새벽녘에 눈을 떴는데, 베개가 무언가에 좀 젖어 있었지만, 꿈에서 나는 내가 아프리카의 사막 같은 평원 위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바오밥나무 속에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같은 바오밥나무와 그 그늘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편히 쉬고 있는 걸 보고 난 뒤였다.
노래의 바람을 타고 검은 별에서 멀리(12)
그 여름의 끝도 지나가 버렸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죽어 준 것만 같은 그런 여름이었다. 이런 기분이야 뭐 그저 이상한 기분일 테지만, 실지로 내가 아는 두 사람이 하나는 7월에 하나는 8월에 죽었다. 그들은 젊은이는 아니었으되 늙은이는 더 더욱 아니었다. 둘 다 갑작스럽고 비참하고 고독한 죽음이었다. 나는 그들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각각 한두 차례인가 잠시 스쳐 지나갔던 것이 사석에서의 전부였고 목전에서나 풍문 안에서나 나로서는 별로 좋아할 타입들도 아니었다. 생전에 그들이 나를 염두에 둔 적이 있다면 그들도 나를 마찬가지로 여겼을지 모른다. 내가 그들을 잘 모르는 것만큼 그들은 나를 알아도 왜곡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실 세상 인연이라는 게 여기서 크게 벗어나질 않는다. 오히려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 있음에도 잘 알지 못하는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는 일이 훨씬 위험하고 흔하다. 아무튼, 희한하게시리, 나는 둘의 죽음에 무작정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아픔이라기보다는 괴로움과 비슷했다. 그와 그가, 마치 나 대신 죽은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다니. 젠장, 쓸데없는 망상, 피곤한 죄책감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들을 잘 모른다. 물론 그들도 나를 잘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그는, 예술가였다.
내가 언제부터 왜 바오밥나무에게 매혹당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랑에 빠진 남녀들 가운데 대부분도 자신이 정확히 어느 순간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아리송할 것이다. 사랑은 사랑의 시원(始原)을 안개로 만드니까. 이 안개가 걷히면 사랑의 마법은 끝나 그 사랑의 모든 것들을 낱낱이 판단하게 되고, 현실이 이별이다. 나는 사진 속의 바오밥나무만 봐도 즐겁고 편안하여 이윽고는 진짜 바오밥나무를 가지고 싶었지만, 좀처럼 바오밥나무를 구할 수 없었다. 어떤 경로를 통하면 바오밥나무의 씨앗은 얻을 수 있다고는 하나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그게 아니라 작은 바오밥나무였다. 바오밥나무는 다 자라면 아파트 7층 정도의 높이가 된다. 나는 아파트 7층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바오밥나무의 꼭대기에 서서 태양과 구름을 바라보는 심경을 대강은 유추할 수 있다. 바오밥나무의 씨앗은 내게 죽음의 뒤편처럼 너무 먼 미래였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오로지 작은 바오밥나무였고, 그것을 나는 거대한 바오밥나무로 키워보고 싶었다.
세상이 시끄럽다. 자고로 세상이야 항상 그렇다지만 날이 갈수록 더욱 그러한 가운데 요즘은 차마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전쟁터에는 지옥과 비극의 위엄이라도 있으련만 이 아수라장에는 시쳇말로 ‘가오’가 없다. 그야말로 음식물쓰레기통이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들리고 아무리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은 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이니 선승(禪僧)이 되어 산중 동굴 속에서 면벽수행을 하지 않는 한은 피하기가 불가능하다. 돌이켜보건대 남몰래 처음 시를 쓰던 그 시절에 정작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시가 아니라 노랫말에 가까운 무엇이었거나 노랫말이었다. 현대시니 뭐니 하는 문학은 내게 있어 눈이 내리고 난 다음에 동네 어귀에 서 있게 된 눈사람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 눈사람이 아무리 용하다 한들 창밖에 내리고 있는 눈보라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세상에서 발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처받는 것이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돼 문명을 건설한다는 것이고, 어쩌면 상처보다 독해진다는 뜻이다. 유행이라는 역병(疫病)에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이야기는 가짜고, 노래는 진짜다. 우리가 열광하고 시달리고 편들고 하는 모든 이야기는 오염범벅이다. 노래에는 우리를 순수하게 하는 묘한 주술(呪術)이 깃들어 있다. 뛰어난 글을 쓰고 싶거든 뭐든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냥 그것의 본색을 드러내면 될 일이다. ‘노래’가 바로 이와 같다. 세상은 적개심과 분쟁과 고통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무지와 불안을 달래기 위해 타인을 증오하는 인간들로 부글거린다. 우리들은 어떤 거대한 검은 별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의 가슴 속 그만그만한 검은 별 안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노래를 잃고 이야기에만 중독돼 이야기만을 광신하면 인간은 인간의 검은 별에 갇힌다. 누군가가, 혹은 ‘누군가들’이 설계한 검은 별에 갇힌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신의 검은 별이 된다.
지나버린 그 여름날 밤, 누구를 좀 만나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지하철역 대로변에서 사시사철 웅크리고 앉아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쓰레기 같은 것들을 늘어놓아 팔고 있는 할머니를 또 보았다. 술을 마신 탓이었을까, 그 할머니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88세. 자식은 아들이 둘인데 다 미국에서 살고 있고 할머니는 근처 어디 작은 방이라도 있는지 거기서 홀로 연명하며 지내신다고. 나는 도시의 가로수 길에 고려장(高麗葬)을 당한 늙은 어미의 노란 눈을 들여다보았다. 주머니를 뒤적여 보니 웬걸 2만 원이 있길래 드렸더니 복 받을 거라고, 이걸로 나 밥 사먹어야 돼, 그러시는 게 내 마음을 더 괴롭혔다. 집 앞 골목에 접어들며 나는 뭔가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조금 전 저 할머니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가족 하나 없이 시나 쓰고 있는 내 앞날이었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바보가 보기에, 이 사회에는 좌파니 우파니 그런 거 없다. 좌파 특권층 우파 특권층과 그들의 노예들만이 있을 뿐이다. 정치가 아니라 정신병이 있을 뿐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세계의 노예는 쇠사슬에 묶여 있는 자가 아니다. 거짓말과 거짓말쟁이를 못 알아보는 자이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일까. 취기에도 새벽이 밝아오기까지 잠이 오지 않았는데, 문득 벌떡 일어났다. 나는 스케치북을 꺼내어 바오밥나무를 그렸다. 나는 내가 그린 바오밥나무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오밥나무 그림이 아니라 나의 바오밥나무였다. 그냥 바오밥나무가 아니라 나의 ‘진짜 바오밥나무’였다. 바오밥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바오밥나무라는 노래였다. 비로소 나의 바오밥나무가 구차하고 비겁한 설명의 장막을 걷어 버리고 자신의 본색을 내게 환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삶의 다른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노래라고 나는 믿는다. 인생이 온통 헛것 같고 사람들이 전부 거짓말하는 시체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갈 길을 잃고 시들어가거나 파괴된다. 이럴 적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각자의 수공업이다. ‘영혼의 수공업’이다. 내가 자신의 수공업이 없는 자들을 멀리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허망함에 대한 화풀이를 타인에게 해대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이러한 계절이 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잘 몰라도, 그가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처럼 여겨지는 그런 계절이.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의심해 봐야 할 것은 혹시 누군가 나를 대신해 살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과 내가 내가 아니라 남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이 바오밥나무의 씨앗이 아니라, 작은 바오밥나무가 아니라, 거대한 바오밥나무가 아니라, 어쩌면 바오밥나무의 그림조차도 아니라, ‘바오밥나무를 그림 그리는 나 자신’이라는 노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노래의 바람을 타고 어떤 거대한 식물의 작은 씨앗처럼 자신의 가슴속 검은 별에서 벗어나 멀리 자신만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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