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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식물성의 저항

by 자한형 202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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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성{고종석}

1

문학에 대한 작은 느낌들 - 문학을 시작하는 자리 (1981-1983)

문학은 눌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지. 달변을 믿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저들'의 체계이자 함정이므로, 문학은 더듬거리며 허우적거리며 자기 말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닐지. 마치 모든 것을 처음으로 말하듯이 그토록 어렵게.

눌변이란 침묵이 최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침묵할 수 없는 자들의 서투름이라고나 할까. 더듬거리는 꼴에도 결국 삶을 사랑하므로 침묵으로 초월하지 못한 자가, 또는 그런 초월을 거부한 자가 침묵하듯 말하는 방식. 덧붙여, 이 모순을 끝끝내 밀고 나가는 방식. 고쳐지지 않는 서투름 때문에 그는 언제나 실패하겠지만, 그렇지만... (pg.13)

논쟁적인 것은 결국 '저들'의 정체이다. '저들'의 권위와 명예는 어떠한가. 그것은 무시할 만한가. '저들'은 매문을 일삼는 헛똑똑이 사이비인가? 혹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학자들인가?

우리가 살아내는 모든 것이 현실이라면, 현실은 '저들'이 단언하는 바와 같지 않다(필경 '저들'이란 '우리'의 쌍생아겠지만)... (중략)...

신 없는 순교에의 도박, 도박에의 순교. 도박과 순교를 동시에 행하기... (pg.14)

"우리 시대에도 순교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 20>)

다시 그렇다면, 글 속의 모든 마침표는 의미상의 쉼표에 불과하며, 모든 문장은 보이지 않는 물음표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pg.14)

문학의 끝간 욕망은, 물론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지만, 입의 언어를 폐기시키고 글의 언어로 세상을 덮는 것이다. (pg.15)

그의 문학관은 언문일치 내지 소박한 리얼리즘과는 다르다

'전위'의 인식, 그리고 소설 - 80년대적 상황 속에서 (1983)

다시 말해, 어떤 이데올로기가 괄호 속에 묶여 있는 것과 수식어로 표출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중략)... 여러 논의 차원 중에서, 간단히 문학의 현실 관련성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보자면, 의미 규정적 수식어와의 갈등이 가장 잘 해소되는 경우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드러내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페터 한스케가 지적하는 점이지만,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도대체 어떤 작가가 현실에 참여당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다. 그 수식어는, 문학은 현실을 개혁하는 적극적 행동이어야만 한다는 당위론의 의지적 표현인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그들에게 그런 수식어들은 매우 필요하고, 또한 긍정적이다.

이제, 위의 경우에 비교해 보면, '전위'라는 수식어가 불러 일으키는 갈등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전위'라는 용어는, 그것을 자청하지 않는 그 누군가와, 그 누군가를 전위로 규정하려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사이에 모호하게 떠 있다... (중략)... 다시 떠올리건대, 누가, 누구에게, , 그런 수식어를 붙여주는가? 아니, 과연 '전위'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은 일반적으로 합의된 공유 개념을 가지고 있는 용어인가? 나아가 그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인가?... (pg.18-19)

문제는 그것을(avant-garde, 앞장서서 지키다) 문화 용어로 그대로 옮겨놓은 데서 더욱 미묘해진다. 그 미묘함은 문화와 군사학을 고의로 동일 차원에 놓고 보려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문화적 전위가 반전통성이나 관습의 파괴와 흔히 연관되어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전위'가 일종의 적극적인 문화적 반체제 운동의 의미로 사용되는 데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파괴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다다이즘'처럼 아주 단순하게 문화적 파괴 그 자체만을 목표로 삼았을지라도 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지킨다'는 완곡어법도 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pg.21)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점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전위'란 말이 20세기적 특성을 요약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위'는 영미 비평에서 사용되는 '모더니즘'이란 용어와 어느 정도 동반자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중략)... '모더니즘''리얼리즘'과 동등한 자격으로 비교되는 세계관의 어떤 형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 규범을 벗어나려는 일체의 것이다. 규범이라는 어휘를 쓴 까닭은 위와 같은 조작 방식으로 그 내용의 문제가 의식적으로 교묘히 제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뒤집어 보면 서구문화사에서 '전위'란 부르주아지 문화 질서에 대한 이 시대의 대항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전위'를 해체-해방의 추구로 보면, 그것의 제3세계적 적용은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pg.24-25)

이른바 전위 의식은 소설의 모습을 실제로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 (중략)... 집요하게 추구되는 가장 큰 외적 경향은 '이야기의 파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계층의 생각과 밀착해 있었던 소설 양식이 애당초 이야기의 전개에 그 중심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장르에 대한 고정된 관점에서 보자면, 이야기의 파기는 거의 소설 그 자체의 파기와 맞먹는다... (중략)... 발단.전개.절정.파국의 이야기로 정식화된 그 기본 선율이 세계를 인과율과 결정론으로 파악하는 선적 과학관.역사관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음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중략)... 그런데 20세기는 여러 방면에 걸친 새로운 발견과 성찰을 통해 그 단면적 관점이 다면화.입체화된 '현대'의 인간을 해석하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중략)... 이렇듯 이야기의 파기에서 출발한 20세기의 전위적 소설들은, 로브-그리예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과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를 표현"하려는, "인간을 발견"하려는 다양한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중략)... 실상 언어의 기술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은 그것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전위적 소설에 나타나는 공통적 특성으로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언어의 현대적 문제에 대한 충만한 의식"을 갖는 것은, 김치수의 지적대로, 체제의 근본 바탕인 언어에 대한 '묵계'를 문제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pg.27-29)

현재의 억압적 체제가 서구 열강의 침탈과 관계 있을진대, 그때 우선적으로 서구 정신 자체의 극복이 목표로 등장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제3세계에서는 동시에 그 침탈을 가능하게 한 전통적 정신의 무력함으로 곧바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다른 변수 또한 작용하고 있다. 내가 제3세계 문학의 미래가 더 풍요로울 수 있으리라 예상하는 것도 바로 그 양자에 대한 고뇌를 동시에 껴안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pg.30-31)

'전위'라는 주제에 대한 이인성 스스로의 통찰과 '자리-찾기'가 돋보이는 에세이

사회적 욕망의 문화적 출구를 찾아 - 80년대를 건너온 뒤 (1991)

사회적 기능직과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틀 앞에서 부딪쳐야 하는 이 한계, 귀족 계급을 무시하거나 전복시킬 수 있는 의식화된 이념의 부재, 이런 양면적 조건이 부르주아 계급의 열등감을 조성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리고 흔히, 열등감은 모방을 낳는다. (pg.37)

막 상승을 시작한 그 부르주아 계급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들의 주체적 인간관과 세계관, '자기동일성(정체성, indentite)'이었다. 그 당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새로운 '모랄'의 요청이다. 그러나 모랄의 정립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모랄만으로 욕망은 제어될 수 있는가? (pg.39)

인류학적으로 보면, 모든 사회는 그 욕망의 배출구로 축제라는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중략)... 다시 그렇다면, 카니발과 같은 욕망 배출의 장치이면서 사회적 폐해를 주지 않는, 그러면서 가능하다면 창조적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장치는 없는가? 인류의 역사는, 그래서 그 욕망 배출의 간접화의 길을 끝없이 모색해 왔고, 그것을 욕망의 예술화라는 방법으로 모두어왔다. (pg.41)

... 특기할 점은 그 욕망이 체제에 의해 조장되고 스테레오 타입화된다는 것이다... (중략)... 이제 예술은 욕망을 간접화하면서 동시에 삶의 질을 승화시키는 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어려움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그 예술마저 사물화.소비화하려는 교활하고 흉포한 욕망과 싸워야 하고, 한편으로는 삶의 방향성을 포착해서 그것을 욕망 속에 침투시켜 욕망을 창조적으로 변형시켜야 되므로. (pg.43-44)

'전위'에서 '욕망'이라는 주제로 옮겨간 그의 화두의 궤적이 남아있는 글

눈을 뜨고 꿈꿔보는 미래의 문화 - 1990년에 응시하는 21세기 (1990)

그런데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까닭은, 그 불안을 야기하는 전망의 부재가 어쩌면 기존의 사유체계로는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인간과 세계의 근본적 변화를 열망하는 데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우리를 사로잡는 데 있다... (중략)... 우리는 지금 일정 기간 지속되어 온 선적 역사의 흐름이 마침내 뒤집히고야 말 전복적 역사의 순간에, '인식론적 단절'의 시기에 놓여 있는 셈이다. (pg.48)

문학 이야기를 위한 노래 이야기 - 90년대의 몇 장면 (1990-2000)

음악 평론도 잘 쓰신다

소설이냐 자살이냐 - 다지털 시대의 '이야기' 비판

'문화의 시대'를 위한 두 반성 -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서며

아무래도 미래에 대한 예측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과거의 예측은 멋쩍어 보인다

2

행복했던 지옥의 한 시절 - 70년대 서울대 풍경 (1996)

더 깊은 진실을 향한 상상 세계 - 젊은 날의 책읽기 (1993)

내 생애에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했을 무렵, 그런 상상적 언어의 삶을 선택하기 두려워하던 나의 등을 떠밀어준 두 권의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중략)... 조이스나 베케트가 보여준 그러한 선택과 추구의 기원이 매우 오랜, 희귀해 보이지만 소중한 어떤 인간적 욕망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내 독서 영역을 의식적으로 넓혀가면서였다. 그것을 알게 해준, 내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뚜렷이 떠오르는 작가는 플로베르이다. 그런 관심을 끌고 시대적으로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갔을 때 내가 만난, 뿌리 깊은 나무처럼 우뚝 서 있는 또 다른 작가는 오로지 극작과 연기만을 위해 살다 무대 위에서 쓰러진 몰리에르다. (pg.125-26)

정열 다듬기 - 습작 시절 (1986)

...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산문시대>이후에 신통한 동인지가 없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60년대 초처럼 재학중에 글판에 나간 사람은 없었지만, 문학적 자존심과 열기만큼은 그 무렵 못지않게 고조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서로를 부추기며, 과외 아르바이트도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이 될 만한 것은 전당포에 쓸어넣으며, 세 권의 <언어탐구>를 엮어냈던 것이다. (pg.129)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나 자신을 새롭게 출발시킨다는 뜻에서, 내가 산 우리 시대의 젊음을 소설화시켜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나는 젊음의 눈을 통해 시대의 온갖 모습과 복합적인 정신의 양태가 함께 들끓는 어떤 형태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pg.131)

이 한 줄의 인용에 <낯선 시간 속으로> 집필 당시 그가 가졌던 문학관이 집약되어 있다(젊음-시대-정신-형태). 그는 '젊음'의 감각을 흉중에 간직한 채 그가 경험했던 '시대'를 소설로 재현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가 시도하는 재현은 결코 시대의 전형을 추출하여 제시하는 리얼리즘의 태도가 아니며, 논리와 도식의 칼날로 시대를 객관적으로 분등하려는 학문의 태도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역사가 아닌 시대만이 간직할 수 있는) 시대의 '온갖 모습'을 모조리 제시하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그는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시대라는 무기물을 '복합적인 정신의 양태'에 깊이 담가, 시대가 젊은 지식인의 의식 속에서 용해되고 왜곡되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관찰한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얻어진 시대의 결정(結晶)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소설적 형태'를 요청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의 소설에서 눌변과 혼종의 '언어적 형태'로 나타나 난해와 전위라는 선입견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쑥스럽게 되새겨본 처지지만, 그러나 감히 말하자면, 그 시절의 행로는 어쩌다 보니까 내 앞의 유일하게 남은 문학을 나 자신의 숙명으로 스스로 판결 지으려던 암중모색의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pg.133)

숙명이나 선택이 아닌 여분/잉여로서의 문학

내가 참여한 '소집단 운동' - <우리 세대의 문학>에 대해 (1984)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지금 잠정적인 단계로 결성되어 있는 '우리 세대의 문학'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문학'이다. (pg.138)

세대라는 것이 한 인물의 역사를 좇아 흘러가는 - 다른 세대와 결코 공유할 수 없는 통시적이고 폐쇄적인 연령집단의 흐름이라면, 시대라는 것은 필시 역사의 한계를 초월하는 어떤 '감각'으로 남아있는 - 한 사회의 스펙트럼을 구성하는 구성원 모두의 기억 속에 각인된 공시적이고 집단적인 흔적일 것이다.

소설의 변화, 변화의 소설 -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소감 (1989)

지금-이곳의 나에게, 문학은 변화하는, 변화해야 할 세계와 삶의 한 국면으로서의 특수한 언어 활동이며, 동시에 한 언어 체계로서의 전체적.소우주적 세계이자 삶으로 보인다. 이때, 전자로서의 문학은 저 자신의 구체적 기반-언어 자체와 글쓰기.글읽기 등등-에 대한 반성 위에서 다른 국면들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도모하는 것이고, 후자로서의 문학은 이 세계와 삶의 변화를 체현해 내는 탈제도적인 인간 능력의 상징적 지표가 되는 것이 아닐는지. 해체는 언제나 재구성이다. 그리고 그 재구성은 불가피하게 하나의 제도, 틀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학은 저 자신의 틀로부터조차 스스로 해방되고자 하는 역설적 지향 속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pg.143)

흐르면서 가라앉으면서 - 새로운 환경에서의 새로운 글쓰기? (1995)

문학의 언어는 아마도, 살로 살아내고 있음을, 살아내면서 살아서 가고 있음을, 살아가면서 다른 살이 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실존의 실감과 질감의 언어일 것이다. (pg.146)

이런 살-몸 담론이 이인성 스타일의 재현-리얼리즘의 단초인가?

... 바뀌어간 것은 문학을 보는 근본적인 눈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의 언어의 구체적 발혅 양식, 각 작품의 저마다의 실존 방식일 것이다. 그건 내 삶의 여정과 매듭, 그때 선택되는 내 언어의 투기와 관련된다. (pg.146)

실존은 욕망 - 욕망은 적극적 환상이다 - 과 상황의 한계 사이에 걸려 있다. 실존의 언어로서의 문학의 언어는 상황과 욕망 사이에서 팽팽해진다... (중략)... 그 여행기들은 각기 다른 어법으로 씌어졌는데, 그것은 물론 그 여행들이 매번 다른 실존의 층위로 옮겨져 시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pg.147-50)

다만 변명하는데, 나는 이 세계의 문화 조류에 견주어 내가 너무 낡았다고 줄곧 느껴왔고, 그러면서도 낡은 소설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상 소설이 갈 수 있는 끝까지 가보자고 생각했고, 또 지금도 그럴 뿐이다. (pg.160)

명확해진다. 소설가 이인성을 추동했던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결코 동시대 작가들의 소설 - 그것도 특히 아시아 변두리에 위치한 한국 소설 - 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음이. 그는 오히려 범세계적 총체로 나타나는 이 시대의 '문화'와 경쟁하고 있었다. 그의 소설이 관습적인 소설의 범주를 넘어서 시, 연극(이인성은 프랑스 연극을 전공하였다), 그리고 당시 새롭게 떠오르는 영상매체였던 영화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차용하며, 그와 구별되는 소설만의 '문학성'을 확보하는 데에 노력한 것은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언어의, 언어에 의한, 언어를 위한 - 21세기 문학 또는 식물성의 저항 (1998)

두 장르의 존재 근거가 애당초 달라서, 그것들이 목표로 삼는 효과도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략)... 그 말에 나는 만족스러웠는데, 그때 내게는 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영화적 소설'들에 맞서 문학이 '영화적인 것'을 활용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의도가 감추어져 있었던 까닭이다... (중략)... 문학과 영화는 다르지만, 문학이 '영화적인 것'을 문학적으로, 영화가 '문학적인 것'을 영화적으로 활용할 수는 있다. 문학 편에서 이야기하자면, 그 핵심은 언어를 '보게' 만드는 데 있다(반대 경우로, 가령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영상을 '읽게' 만든다)... (중략)... <그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에 이어지는 연작 <그를 찾아가는 우리의 소설 기행>에서 굳이 '소설 기행'이라는 표현을 쓴 것, 그 연작의 마무리인 <한없이 낮은 숨결>이 끝없이 분절되는 말만을 보여주는 것도 그 연장선에서 언어만이, 소설만이 작동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추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내가 오랫동안 실험을 계속해 온 인칭 사용을 하나의 예로 들겠다. <이미 그를 찾아간 우리의 소설 기행>에서 "기어이 당신이 이 앞에 떠오른다"고 썼을 때 이 '당신'의 영상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더 먼저, <낯선 시간 속으로>의 한 장면에서 '-'라고 1인칭과 3인칭을 동시에 겹쳐 썼던 그 표현은 또 어떤가? 그것들은 문학이 아니면 환기시킬 수 없는 어떤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반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런 것이야말로 문학만이 삶의 질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자, 문학이 문학으로 살아가는 방법, '문학의 실존'을 지탱해 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pg.175-76)

위에서 설명한 그의 문학관이 구체적으로 부연된다. 다만, 이인성이 탐구한 문학의 실존 근거(문학의 정체성 내지는 자기동일성)는 문학과 영화라는 두 매체의 특성을 고려하여 얻어진 결과일 뿐, 그를 통해 얻어진 결과물의 향유와 유통 과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문학이 영화보다 뛰어난 지점은(플라톤의 말을 빌리자면 아르테) 언어 매체와 시청각 매체라는 두 예술의 본질적인 차이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분명 개별독서와 집단관람 이라는 수화자의 향유 배경 차이나, 전근대적인 출판-홍보로 진행되는 문학시장과 보다 정교한 투자-배급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산업의 유통 구조 차이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3.

죽음 앞에서 낙타 다리 씹기 - 김현 선생의 마지막 병상

... 나는 김현 선생의 마지막 어떤 모습을 가능한 한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하는 글을 쓰고 싶다. 사실을 바라보는 내 주관적 시선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김현 선생 식의 어투대로, 내 주관의 일관성을 지켜 최소한의 객관적 공감이라도 구할 수 있도록 애쓰면서 말이다. (pg.190)

나중에 사모님은 김현 선생의 마지막 말들을 좀더 자세히 재현해 주었다. 녹즙 잉야기 직전, 아직 선생의 의식이 또렷했던 상태에서, 사모님이 "이 몹쓸 병이 당신을 몽땅 잡아먹으려나 봐"라고 말하자, 선생은 "아니, 아직 다 잡아먹지는 못했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pg.223)

종소리와 판소리 사이 - 여행 연출가로서의 이청준 선생

'영원한 바깥'으로 떠나고 싶은, 떠나기 싫은 -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 부쳐

작가 소묘

이인성 생각 (고종석)

... 그의 소설을 한 편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이 어원적 의미에서 시이고, 자연에 맞서는 인공.인위로서의 예술이라는 것을 느꼈으리라. 이것은 인성의 소설에 대한 욕일까? (pg.272)

방학 동안 나홀로 진행했던 이인성 프로젝트가 막을 내렸다. <식물성의 저항>은 밀도 높은 텍스트였다. 20년동안 그의 소설을 규정해온 '전위', '욕망', '매체', '언어', '시대' 등의 프레임에 대한 깔끔한 자기 변론이자 매력적인 문학론이었다.

사실 아직 네 개의 신작 소설과 두 개의 희곡, 그리고 꽤 많은 양의 산문과 대담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가 가능한지를 물었고 이인성은 우리 시대에도 순교라는 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나는 묻는다. 그렇다면 개강 이후에도 책읽기가 가능할까요?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