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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글(수필, 여행기, 편지글, 일기 등)

윈스턴 처칠

by 자한형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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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단히 반갑습니다.

윈스턴 처칠

그는 1874년 영국 귀족 명문가에서 랜돌프 처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수학적인 재능은 없었고 공부에 소질은 없었으나 역사 문학 등에 관해서는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수의 과정을 거쳐 육군사관학교 기병과에 입학했다. 그는 어린 시절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를 구해준 이가 있었는데 그는 정원사의 아들이었던 플레밍이란 청년이었다. 그가 아들을 구해주자 처칠의 아버지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해서 그가 의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는데 의과대학 졸업까지의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그의 부친은 영국정부의 재정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단 그는 만년에 매독이 발병해 죽음을 맞기도 했다. 부친은 늙은 매춘부와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병이 든 것으로 추정되었다. 언젠가 신문기자의 언론 인터뷰에서 처칠에게 매독에 관한 질문이 있었는데 처칠이 몹시도 불쾌해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보병도 아니고 기병과라고 하니 아버지는 기절할 노릇이었다. 다시 또 아버지를 놀라게 할 입학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말 두 필을 가지고 입학해야 한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입학할 때에는 하위 성적이었지만 졸업할 때에는 우수한 성적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후 군 복무를 했고 후에는 종군기자로도 활약을 펼쳤다. 그는 뛰어난 글솜씨를 갖고 있었고 보어전쟁에 종군기자로 참가했다. 우연찮게도 보어인들은 처칠이 탄 열차를 습격하기도 했다. 포위된 열차에 갇혔던 처칠은 결국 다른 군인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로 심문을 받았다. 포로로 호송중에 그는 기회를 포착해 간신히 탈출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가 홀로 탈출해서 찾은 집은 기막히게도 영국계 백인 거주하는 곳이어서 그들의 우호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보어인들이 현상금을 걸었다. 금액은 40파운드 수준이었다. 그는 후에 출세하고 성공한 다음 그에게 도움을 준 은인에게 은혜를 갚기도 했다. 그는 그 집을 나와 400킬로미터를 이동해서 남아공의 케이프타운까지 올 수 있었다. 이렇게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자 영국에서는 이미 그가 전쟁영웅으로 각광을 받을 수 있었다. 언론에서 처칠의 억류 소식과 탈출 등에 관해 상세하게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본국으로 귀국하자 처칠은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고 전쟁 영웅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 그는 하원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그는 의원 시절을 거친후 장관이 되었고 통상장관-경제장관- 해군장관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해군장관에 재임중에 그는 1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그 시절 오스만 제국에 배를 수주받아 건조 중인 배가 2대(3천톤급)와 여러 소형선박이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수주 중이었던 배를 영국에서 자체적으로 인수해버리고 오스만 제국과는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결국 이로인해 오스만은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은 발칸반도 부근의 갈리폴리에 공격을 가하게 되는데 그것이 실패로 끝나게 됨으로 인해 결국 그는 해군장관에서 물러나게 된다. 갈리폴리는 해안가였고 거의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었음에도 무리하게 육군과 공군과의 도움없이 해군만의 독자적인 상륙작전을 도모하려다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고 상륙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처칠은 10년 동안 시련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가 본래 검은 개(블랙 독)라고 불리는 우울증을 앓아 고생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여전히 시가를 물고 또는 들고 작업에 매진한다. 그 시절 그가 그린 그림은 유명세를 탔고 고가에 팔리기도 했다. 그것은 안젤리나 졸리의 손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렇게 암울한 시기를 자숙의 시간을 보낸 후 처칠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영국의 체임벌린 총리는 뮌헨 회담을 독일 히틀러와 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슈데텐란트의 독일 병합을 허용하는데 합의한다. 이로써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기게 된 일반 영국 국민과는 달리 처칠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경고했고 예언했다. 체임벌린에게 당신은 불명예와 전쟁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당신은 불명예를 선택했고 곧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독일은 역시뮌헨회담의 약속들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 2차 대전을 시작한다. 전쟁이 시작되자 처칠은 국민들의 신망을 다시 얻어 해군장관으로 복귀하고 얼마 후에는 사임한 체임벌린의 후임 총리로 추대된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가 취임했던 때의 전황은 서유럽 전역은 사실상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수상 취임 후 첫 연설에서 제가 들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 눈물, 그리고 땀뿐이다. 우리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고 위기 상황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처칠이 히틀러의 침공으로부터 영국을 구할 수 있었던 것 중의 하나는 연합군의 뒹케르크 철수작전이다. 대륙에 고립된 40만 명의 연합군을 철수시키며 세기의 철수작전으로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338천 명에 이르는 연합군 병사들이 무사히 철수했고 이후 결정적인 전력의 핵심으로 활약을 펼쳤다. 히틀러는 결정적인 순간에 공격을 3일간 멈추었고 절호의 철수 기회를 갖게 된 처칠은 성공적인 철수작전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브이자 형태의 손 모양이었다. 그는 실의에 빠져 있는 국민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트레이드 마크인 브이자 손모양을 취했다.  또한 쿠바산 시가를 든 모습도 그의 특징이었다.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포효하는 사자라는 사진은 사진사 유서프 카쉬가 처칠이 손에 들고 있던 시가를 빼앗은 것에 분노해 험악한 표정이 되어 인생 컷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영국지폐 5파운드 지폐에도 이 사진이 삽입되었다. 그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1,100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루스벨트로 870통의 답장을 보냈다. 처칠은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도 내가 프랭클린에게 한 것만큼 못할 것이다”라는” 농담을 남기기도 했다. 집요한 영국 수상 처칠의 요구에 프랭클린도 무기와 군수물자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300억 불에 이르는 배와 무기, 군수물자 등을 보냈다. 대금은 없다고 하자 프랭클린이 남아공화국의 캐이프타운 금고에 금괴가 있다는 것을 얘기했다. 처칠은 금시초문이라고 발뺌을 했고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음은 영국의 대 항공작전이었다. 히틀러는 런던에 대한 항공작전을 통해 런던 폭격을 감행했다. 공군을 통한 서로 간의 항공작전이 공습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런던 공격과 베를린 공격에서도 영국은 독일을 제압하고 승리한다. 항공기의 성능 , 레이더 망을 통한 적기 포착 등에서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었다고 평가된다.

최후의 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처칠은 직접 참전할 결심을 하고 국왕 조지 6세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국왕은 자신에게는 후계자라는 것이 있어 죽어도 상관없지만 처칠이 죽으면 대체할 인물이 없다고 하고 처칠은 참전의 뜻을 굽혔다고 한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자 처칠은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195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총리직을 수행한 후 91세로 1965년에 서거했고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한 수많은 조문객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연설 중에 '철의 장막'이란 말이 언급되기도 했다. 또한 모교에서의 연설에서는 포기하지 말라. 결코 포기하지 말라.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말라 라는 연설도 인구에 회자되는 연설로도 정평이 나있다. 세상에 수 많은 일화를 남겼고 영국 국민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엘리자베스 여왕, 셰익스피어, 뉴턴 등을 제치고 선정되기도 했던 지도자 윈스턴 처칠은 20세기 최고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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