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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을

남자의 의미

by 자한형 202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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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의미

 

남자란 무엇인가. 이것을 파헤쳐보기 위해 나름대로 개념을 정립해보려고 한다. 남자와 관련해 인간 전체를 대표해서가 아닌 한 개체로서 다가가 보자. 한때 이런 사념을 품은 적도 있었다. ‘검지가 잘렸으면 군대도 가지 않고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의 모철학자는 여자와 노예로 태어나지 않고 희랍인으로 태어나게 해준 신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남성이 있고 그와 대비되는 존재로 여성이 있는데 흔히 얘기하듯 핵심은 성적인 것이리라. 남성은 아주 성숙한 개체로 그 자체로서 주체성을 가짐과 동시에 결정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야성적이어야 하고 강건해야 하며 용기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자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사전적 의미를 떠나 철학상의 어감만으로 접근한다면 부분집합의 범주 속에 포함되는 개념일 듯하다. 남자가 갖는깊은 의미 속에는 노동이 관계되어 있으며, 역사의 주체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남자의 자존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존재 의미를 찾고 그 근거를 갖는 것에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남자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상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는 의미 부여가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목숨을 불사하는 여자와는 사뭇 다르긴 하다. 예전 청년 시절에 애용하던 언어로 단독자란 말과 자유’, 그리고 잔인하다는 말이 있었다. 모든 속박과 굴레로부터 이탈한다는 뜻으로 쓰 던 말이다. 학교의 수업을 자유롭게 빠질 수도 있었고 어디든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여행할 수도 있었으며 술도 마실 수 있었던 자유로움을 만끽했던 때가 있었다. 끽연까지 허용되었다. 아주 제한적이라 더 스릴이 넘쳤지만 말이다. 난생 처음 새 양복을 맞춰 입고 기쁜 마음으로 거리를 활보하다가 허름한 양복을 입은 거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순간 그 푸르고 벅찬 감동이 물거품처럼 사그라지며 자기 비하에 빠지게 되는 것을 통렬하게 느꼈다. 다시 속박의 규칙 속에 얽매이게 되었으며 책임을 배워야 했고 인내를 알게 되었다. 신뢰가 갖는 그 뜨거운 열정도 느꼈으며 또한 배신이 갖는 인간의 추악한 일면도 보게 되었다. 결국 풀어지지 않는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는 근원에의 문제로 귀결되기도 했다. 일본 중세 막부시대 일본 무사에게 있어서 자존심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 속에는 주군(主君)에 대한 충성도 연결고리가 되어 있고, 상관이나 친구와의 연관도 깊다. 젊은 날에는 친구가 전부일 수 있다고 느꼈던 적이 꽤 있었다. 우정만큼 소중한 가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밤이 늦도록 얘기꽃을 피우며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토론에 열을 올리곤 했었다. 이후에는 홀로서기를 배워야 했고 상관도 그 어떤 절친한 전우도 남의 무거운 짐을 결코 대신 져주지는 못한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스스로 변화하지 못한 채 젊은 날의 그 기개와 야망을 안으로 감추고 일상적인 길목에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그 환경에 배치된 굴곡으로 엄청난 전환과 난관을 겪은 후에야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초지를 잃지않으려고 애썼지만, 상당히 탈색된 모습으로 연륜만 첩첩이 안고 서 있었다. 무모하리만큼 애절했던 동경과 향수를 안고 찾아온 파라다이스로의 회귀는 결코 꿀처럼 달콤하진 않았다. 나만은 그런 통상적이고 평범함에 묻히지 않으려 했건만 많은 방황과 갈등만이 남은 채 이미 타성에 젖어들고 말았나 보다. 야망과 초지를 잃었을 때 생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무력해진다. 꼭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과 보람을 찾고, 누군가에게 일말의 의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노력했었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된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꿈을 먹는 인간만이 진정한 남자일까? 야망이 없고 비전이 없는 남자란 과연 무가치한 것일까? 권력을 쫓고 명예에 연연해하며 이 모든 것을 한몸에 안은 덕망까지 겸비한 이가 결국 최상의 남자가 되는가? 과연 이 모든 야망을 이루는 총체적인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가?

혹여 이 모든 것을 다 이루면 어떤 상태에 처하게 될지가 절로 궁금해진다. 현재로서는 가히 볼품없는 일상 속에서 알량한 기득권까지 맞물려 벗어나지도 탈출하지도 못하는 초라한 상황에서 도약과 창조적 에너지의 분출(噴出)을 기대할 수는 있을까? 권력과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얼마나 세속적인 것에 보조를 맞추며 여기까지 이르렀는가? 그렇게 매혹적이고 마력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부처의 말처럼 그렇게 무소유의 달관된 자세를 가질 수는 없을까. 자식과 내자에 충실하면서 큰 욕심 부리지 않고 그저 그렇게 자족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처럼 대단한 역사적 위업을 성취해야만 남자다운 것일까? 아니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다소 엉뚱한 교수의 책 제목처럼 그렇게 명성과 인기나 얻으며 살고 싶은 것일까?

인생에는 대개 목적을 위한 것과 창조를 위한 것 또는 성스러움을 위한 것이 있다고 한다. 즉 끊임없는 회의와 관조 속에서 자아를 발견해 가는가 하면, 찬란한 태양과 계절의 조화 속에 생을 구가해 가는 게 있고, 오로지 인류를 위하여 자기 한 몸 돌보지 않고 역경에 처한 이를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이의 모습도 있을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생을 그 지향하는 목표에 따라 분류하지 않고 살아가는 형태로만 나눈다면 더 각양각색으로 묘사될 수 있으리라. 최근에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것이 한참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여자와 남자의 분명한 차이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해석한 것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여자는 상당히 감성적이고 남자는 대단히 이성적이다. 남자는 야망에 살고 여자는 사랑에 산다고 한다. 평생부부로 생활하고도 모르는 것이 여자 속이라는 노작가의 함축된 한 마디가 모든 걸 대변해주고 있다. 남자라는 의미는 자신이 원하고 지향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과정에서 의미가 빛을 발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마침내 목표를 이뤄 좋은 결과를 얻는 예도 있고, 마지막까지도 그 지향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하는 예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한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진지함 속에서 남자의 의미이자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끊임없이 노력하는 시지프스처럼 말이다. 인간이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현현(玄玄)해 있다. 근래에 들어선 여자가 남자와 지향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게 변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특히 남자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는 속에서 자기 본질을 구하려는 실존적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본성을 구가하는 남자가 위대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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