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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을

내 집 마련기

by 자한형 2023.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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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마련기

 

 

처음의 시작은 별반 집에 대한 의식 없이 시작되었다. 내 집을 가져야 한다는 부분도 없었던 듯하다. 일단 결혼했을 때 신혼집은 부산 시댁에 마련되어 있었다. 통영에서의 집은 부엌 딸린 단칸 셋방이었다.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은 탓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기도 했다. 살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만 자는 곳이었다. 가끔씩이기는 하지만 한 번씩 집사람이 오기도 하면 청소며 빨래며 음식을 해놓고 가기도 했다. 방학기간 중에는 단칸방에서 둘이 지내기도 했다. 아궁이가 있는 연탄방이었다. 88년도에는 드디어 서울에 입성했다. 집사람은 학교에 딸린 관사에 살았기 때문에 집에 관해서는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 연후에 서울로 올라가서 처음에는 하숙을 했다. 숙대입구의 반지하방이었다. 하숙생들과 같이 숙식을 하며 일하러 나가곤 했다. 그러다 혼자 살던 친구의 제의가 있었다. 둘이서 같이 비용을 분담해서 방을 한 칸 얻어서 자취를 해보자고 말이다. 그래서 대림동 부근에 방을 하나 얻었다. 조그만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가재도구는 장인어른이 조그만 트럭으로 날라다 주었다. 밥을 직접 해 먹거나 하는 것은 공휴일이나 그랬고 평상시에는 사서 먹고 들어왔다. 그런 시절을 2년여를 보내고 나자 집사람이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 용산에 방 두 칸짜리를 얻었다. 여러 가구가 어울려 살았고 화장실도 공동화장실이었다. 아이는 근처 어린이집에 맡기기로 하였다. 6개월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제주도로 발령이 났다. 집사람은 4개월 정도가 지난 뒤 3년간 육아 휴직을 내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처음 제주도로 가서는 방을 한 칸 얻어서 지냈다. 그러다 집사람이 내려올 때 쯤 해서 사무실 부근의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방이 세 칸이었고 2층이었다. 처음으로 가정의 안온함을 느끼며 결혼후 3년의 주말부부 이후 같이 생활한 최초 6개월이었다. 세 가족이 그런대로 생활이라는 미명하에 한 지붕 가족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듬해 3월에 집사람은 둘째를 해산하기 위해 몸조리 등의 핑계호처가로 갔다. 그런데 집을 비워달라는 것이다. 하는 수 없었다. 인사시기가 한두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는 수 없이 또 방을 구하고는 짐도 풀지 않은 채 한달여를 생활하다 올라갔다. 이사는 현지직원들에게 부탁해서 하라고 하고 서울에서는 이삿짐을 받기만 했다. 이사비가 만만치 않았다. 제주도에서는 주말마다 여러 유명관광지를 돌아다녔다. 거의 아는 사람들이 없는 낯선 곳이었기에 마땅히 사람을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간혹 육지에서 친한 이들이 제주로 가끔씩 내려오면 안내를 하기도 했다. 처제가 한번 오고 동기가 출장을 가족을 데리고 오기도 했었다. 제주도에서는 신구간이라 해서 정월 대보름부터 입춘까지 기간에만 이사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신림동쪽에 신축빌라 2층에 집을 구했다. 5년 정도 살았는데 언덕배기에 있었다. 집사람이 육아휴직을 한 상태였기에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처제가 대학원을 다니느라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휴직 막판에는 집사람이 방송사 리포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덕에 TV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어떻게 하든지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집을 장만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95년경에는 20평형대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방이 3칸이었다. 5층 건물에 2층이었다. 120세대의 조그만 아파트였는데 지은 지가 꽤 오래되었고 낡은 집이었다. 어떻게 된 셈인지 아래층에 비가 새서 일주일간 공사를 하느라 여관방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도 하였다. 자동차를 마련하기도 했다. 2년 후에는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으로 이사를 하기도 했다. 남향이었다. 옆동에 처제네가 이사를 와서 잘 지내게 되었다. 95년부터 3년간 주택조합아파트에 참여를 해서는 본격적인 내 집 마련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안양 호계동 쪽이었고 기아자동차의 주택조합 중 일반 모집하는 것에 참여를 하게 된 것이다. 3년여의 우여곡절 끝에 집을 장만하게 된 순간이었다. 대부분의 비용부담이 대출에 의한 것이었다. 분양받은 곳은 전층이 28층 높이 가운데 23층이었다. 전세를 주었다. 이자 부담이 제법 되었다. 전세가 끝날 무렵쯤 해서 집을 팔아버리기로 했다. 참으로 성급하고 잘못된 결정이었다. 친척 누님까지 동원했었는데 결국은 팔고야 말았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내 집 마련의 꿈이었다. 제대로 된 코스를 밟아야 했음에도 잘못된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10년 전쯤에 친척누님이 서울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그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그분들은 화곡동 빌라에서 시작을 했다가 얼마 지난 후에 서초동 단독주택에 살다가 평촌아파트로 분양을 받아갔다. 꼭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았다. 보다 그럴듯한 곳에서 제대로 된 소형아파트부터 시작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주 성격자체가 이재(移栽)에 밝은 편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미련이 남았다. 워낙 출발부터 열악한 상황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어려움이 있었다. 같이 사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렵게 성사된 터라 다른 여러 가지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그런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아파트를 공동구입하기 위해 직장주택조합을 결성해서 만들었던 조합장 일을 맡았던 직원이 있었다. 내가 젊은 나이에 승진시험에 합격하자 아파트 한 채랑 승진이랑 바꾸지 않겠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던 것이다. 축구선수 출신이었는데 승진에 애로를 겪는 고충을 다른 식으로 토로한 것이었다. 집에 대하여 보다 신경 쓰고 집중했었다면 좀 더 다르게 어떻게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은 늘 갖게 된다. 부모님의 도움이나 기타 적절한 조언 등 외적변수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하였으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그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밑의 동생들도 많은 상황에서 기대할 바가 아니었다. 그와 더불어 부모님의 가세도 기울어져 더 이상 여력을 갖지 못할 지경이었다. 참 단순하면서도 쉽지 않은 것이 집 문제인 듯하다. 어떤 이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사람은 일찍부터 이재(移栽)에 눈을 떠 처음 시작을 아파트에서 했다고 한다. 그것도 금상첨화로 강남에서 시작한 것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살 게 되지 않았나 한다고 했다. 도곡동에 분양을 받아 입주해 살고 있는데 무척 잘된 일이고 정말 부러웠다.

 

2001년이 되었을 때쯤 해서 보다 넓은 아파트로의 이사가 시작되었다. 동부아파트라는 곳이다. 대규모 단지는 아니었지만 중소규모 였었다. 19층에 2층으로 방은 세 칸이었고 거실은 좁은 편이었던 곳으로 전세를 얻었다. 결혼한 지 14년 만으로 큰애는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작은 애는 5학년이었다. 차도 아반테로 바꾸었고 6개월은 서울에서 생활했다. 뭔가라도 해볼 요량으로 수영장을 다녔다. 그런 후에 교육원에 발령을 받았다. 작은 애가 자전거를 탔던 관계로 주말야외행사에 많이 쫓아다녔다. 그리고 신녹사(자전거 타는 아이들의 부모들의 모임)사람들도 집에 많이 놀러 오기도 했다. 하반기에 교육원으로 발령받아 갔다. 주말에만 올라오는 생활이 되었다. 3년이 지나자 큰애는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고 작은 애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던 차에 교육원에서 서울로 전근이 되었다. 집사람은 집 부근의 S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웠던 관계로 출퇴근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큰 애가 서초동으로 학원을 다녔다. 그래서 2005년도에 서초동으로 가기로 했다. 큰애는 고2 작은 애는 중2학년생이었다. 엄청나게 무리를 해가며 전세금을 마련해 이사를 했다. 작은 애는 학교를 전학하였다. 집사람도 D중학교로 전근되었고 큰 애는 고3이 되었고 학원이 가까워져 편안해했다. 학교간의 격차는 엄청났다. 그쪽에서는 한두 명이 특목고를 갔는데 비하여 이쪽은 28명이 갔다고 하니 그 수준 차를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영어시험을 보면 반의 3분의 1이 만점이라고 했다. 대부분 외국에서 일이년씩 살다온 애들이 태반이었다. 한번은 전세금을 올려준 적도 있었는데 그 부담이 만만하지가 않았다. 정말 10억없이 강남에 산다는 것은 간 큰 남자에 속한다는 말이 옳은 듯 했다. 작은 애 때문이기도 했지만 물가도 보통이 아니었다. 삶의 질 자체가 예전 살던 곳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집사람은 2006년부터 전문직시험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007년에 합격을 하고는 2008년에 교육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장학지도도 거주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강남으로 온 것의 혜택을 보게 해주는 것이었다.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면서 매일 늦은 퇴근이 이어졌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기회를 갖게 되었다. 판교를 시작으로 해서 여러 곳에 일반분양 신청을 하였지만 당첨이 이루어지질 못했다. 그런데 신대방동의 보라매 E 편한 세상이 당첨이 되었다. 200812월에 계약이 성사되었고 분양대금의 납부가 이루어졌다. 입주 시기는 20107월이었다. 3년여동안 중도금등을 납입해야 했다 6개월마다 다가오는 중도금의 입금이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중도금대출로 납기를 맞출 수 있었고 대출이자는 시공사에서 분담해 주었다 당첨기념으로 부서에 축하기념 떡을 돌리기도 했다. 그전 집사람의 발령에 떡을 돌리기도 했던 터라 모두들 축하해주었다. 큰 애의 대학입학도 있었다. 복을 뺏어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직원도 있었다. 그것만 해도 큰 부담을 줄인 셈이 되었다. 20089월에는 큰 애가 군에 입영을 했다. 경기도 파주 문산 법원이 쪽에 배치를 받았다. 한 번씩 간헐적으로 면회를 가기도 했고 휴가 외출 외박을 나오기도 했다. 작은 애는 치아교정을 시작하기도 해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기도 하였다. 2010년이 되었을 때 다시 A교육원으로 집사람은 지역교육청으로 작은 애는 시골대학교로 각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네 식구가 모두 다른 곳에 사는 형상이 되었다. 계약기간이 남았지만 1년을 기한으로 해서 전세를 놓으려 했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두 집 살림을 해야 될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6개월의 기간차이 때문에 말이다. 살기는 서초동 쪽이 편하고 좋은데 다시 그쪽으로 가는 것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이 되기는 했다. 결국 맹모삼천지교처럼 자식의 교육을 위해 엄청남 부담과 비용을 감수하고 이주해왔지만 여러 가지 미비한 점만 드러났고 제대로 된 성과와 효과를 얻지 못한 채 끝이 나고 말았다. 큰 애는 이제 제대를 해 복학하여 잘 다니고 있다. 작은 애도 반수를 해서 서울 소재 대학교에 입학을 해서 집에서 다니는 호사를 누리게 되어 네 식구 중 셋은 상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그래도 집에 오면 사람이 사는 것 같기는 했다. 워낙 주변시세에 비해 분양가가 높아 이것이 잘하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베란다 등은 확장을 해서 좀 넓어 보이기는 하는데 현재의 짐이 다 들어가면 좁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냉장고, 세탁기, 소파 등 바꿔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잔금을 치르고 나니 숨이 콱콱 막혀 온다. 그렇게 했음에도 부채비율이 만만치 않은 것이 그랬다. 올 연초에 만사를 정리하고는 입주를 하였다. 결혼한 지 24년 만에 내 집에 들어와 살아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24년씩을 모으고 저축하고 해서 이제야 내 집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서울 시내에 집을 하나 가지게 된 것이다. 서로간의 볼을 꼬집어가며 꿈인지 생시인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대부분의 가재도구를 새로 장만해서 입주를 했다. 냉장고, 세탁기, 소파, TV , 장식장 등 새로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제 의식주의 주()하나가 해결이 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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