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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노을

상가

by 자한형 202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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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통상 인륜지대사로 일컬어지는 것에 관혼상제가 있다. 관은 남자로서 20세가 되면 갓을 쓰는 것으로 여자는 15세가 되면 비녀를 꼽는 것으로 어른으로 대접했다. 이렇게 관은 어른이 되는 시기를 말하며 요즘으로 치면 성인식이 이에 해당이 되고, 혼은 결혼이다. 상은 그 다음으로 장례에 관한 것이다. 제는 죽은 이후의 제사에 관한 것이다.

엊그제 부음을 듣고 상가를 다녀왔다. 상사에 관한 것은 시기를 종잡을 수가 없는 부분이 가장 큰 애로일 것이다. 시도 때도 없는 것이 상례의가장 곤욕스럽게 하는 부분일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대비하고 준비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상가는 창원의 모 병원이었고 장지는 산청의 선영이었다. 모친상이었고 발인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연세로 봐서는 90을 넘겼으니 호상이었다. 부음을 통보받은 바로 다음날이 발인이었기에 가느냐,

느냐를 결정하면 되었고, 가게 되면 하루를 완전히 소요할 듯했다. 상사에게 말씀을 드려 양해를 구하고 하루를 휴가로 신청했다. 그 먼 거리를 갔다 오기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긴 하지만 상주와의 정의(情誼)가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시간을 아껴야 했기에 점심도 거른 채 가까운 역으로 나갔다. 중간 기착지인 동대구까지 새마을호를 끊었다. 소요 시간이 두 시간 반 정도였다. 차편을 가늠하기 어려워 일단 대구역에 내려 창원행 기차를 알아보았다. 마침 30분 후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었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출발역이 대구역이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정경은 풍성한 가을녘 그 자체였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벼도 누렇게 되고 산들도 단풍에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모처럼 일상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온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하였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라는 겸손의 극치를 표현한 말도 되새겨졌다. 기차는 경북 영천, 청도, 경남 진영을 거쳐 창원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병원의 장례식장으로 곧장 달려갔다. 가는 길에 택시기사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창원의 통합에 대하여 고깝게 생각하는 듯했다. 마산은 함안하고 합쳐야 하는데 창원하고 합쳐서 손해를 보았다고 했다. 인구가 창원, 마산, 진해가 각각 50, 40, 30만가량이라고 했다. 통합 후에는 백만 이상의 거대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예전 박 대통령이 21세기를 내다보고 호주의 시드니를 모델로 해서 만든 계획도시 창원이었다. 시원한 가로 8차선도 차들로 빽빽했다.창원도 막히는 곳이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지금이 길도 다시 또 더 넓혔음에도 러시아워에는 막힌다는 얘기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와보는 도시였다. 도청의 이전 계획에 대해서는 다른 곳으로의 이전은 없다고 했다. 단지 제 2도청이 진주쪽으로 논의 되고 있다고 했다. 오륙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여서 10여 분 후 병원에 도착이 되었다. 상주가 직접 나와서 마중을 해 주었다. 문상하고 따로 마련된 자리로 갔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있을 줄 알았는데 별로 눈에 띄질 않았다. 울산유통센터 분사장이 보였다. 인사를 하고 같이 합석했다. 맥주를 두어 잔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지역으로 내려온지 3년째 라고 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이곳에 눌러앉아 있으려고 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서울에 다 있고 아내만 내려와 있다고 했다. 테니스회를 구성해서 한달에 한번씩 지역유지들과 운동을 하며 화합을 다지고 있다고했다. 사무 소장으로서 생활하는 것이 편안해 보였고 안색도 밝아 보였다.

아련한 추억으로 문득 20여 년 전의 상가에 일을 하러가 고생을 했던 것이 떠올려졌다. 지역은 충청도 천안 병천 부근이었다. 유관순 열사가 삼일운동 때 만세를 불러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아우내가 지척이었다. 충청도 양반이었기에 상사가 보통 엄격하고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굴건제복을 입었었고 한쪽팔은 끼지 않은 채로 였다. 초겨울쯤이었는데 밤에는 제법 쌀쌀했다. 예법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장작불을 마당에 피워 놓았는데 나중에는 그것을 밑불로 해서 그 위에 여러 개의 연탄으로 장시간 화력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뻘건 불꽃이 마당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대청마루 등 문상을 하는 곳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난로 등 다른 것이 전혀 다른 것이 필요하질 않았다. 계속 연탄을 올리고 다탄 연탄은 끄집어 내고 하는 것이 일이었다. 세 명 정도가 갔었는데 혈기방장한 터에 음식을 나르고 상을 차려서 갔다놓고 자리가 끝난 상을 끌어내 오고 수없이 반복되는 일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마을이 생긴 이래로 그렇게 많은 문상객이 온 일은 없었다고 한다. 부의금도 처음에는 정리하고 셈을 하곤 했는데 나중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냥 봉투째로 마대자루에 담아 두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문상객 접대용으로 돼지를 6마리를 잡았다고 하니 그 문상객들의 수효를 짐작할 만했다. 상여가 운구되는 행렬은 장관을 연출했다. 상여꾼들은 가는 내내 근성을 부리기도 하며 얼마간의 노잣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장례를 하는 속에서 무덤을 만들고 길을 만들고 하는 것은 굴착기의 몫이었다. 시원시원하게 척척 잘 해내었다. 그 시절로서는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었고 이례적인부분이었다. 장례가 다 끝나고 무덤가에 늘어 세워놓은 조화는 멀리서 보기에도 화려하고 멋있어 보였다. 서울 시내 약 80여 개소의 사무소장이 다 오는 판이니 보통일이 아니었다. 23일간의 상례에 관한 지원이 끝났다. 그런데 또 다시 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23일간의 고생스러운 상례에 관한 노력봉사가 또 이어졌다. 예전만큼의 문상객이 온 것은 아니었지만 수고로움은 매한가지였다.

자고로 관과 혼은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는 것이고 상제는 자식이 부모에게 해 주어야 한다. 간혹 부모보다 먼저 자식이 가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일 것이다. 요즘의 시대에는 혼도 상도 모두 간편하게 하려고 하고 장례문화도 화장이 더 선호되는 세상이 되었다. 후손에게 상제의 모든 것을 기대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 되어 가고 있는 세태가 되었다. 그러나 인륜지대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례의 기본 정신과 의의만은 길이길이 보전되고 유지 발전되어야 하리라. 조상을 섬기고 그분들을 기리는 정신만은 항상 온전하게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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