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병아들:서정문학
이제는 완연히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느끼게 한다.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뒹굴어 다닌다. 시간이 참 빨리도 지나가는 듯하다. 아침에는 네 동생이 춘추복으로 갈아입고 학교로 갔다. 시월 일일부터 시험이라 눈코뜰새가 없다고한다. 어제는 두 번째로 너의 육필로 된 편지를 받았구나. 네 사진의 모습을 무척 궁금해 하던데 다 모아놓고 있다. 네가 훈련받는 모습이랑 폼을 잡고 있는 모습 등이 담겨져 있었다. 내무반이나 분대별로 찍은 것으로 군복차림도 있고 반바지 차림도 있었다. 이제는 상당히 군에 적응한 듯한 모습이 느껴진다. 오늘로 3주차가 끝나고 2주만 있으면 명실상부한 군인이 되는구나. 훈련병에서 이등병으로 승격하는 것이다. 사회인에서 군인으로의 변신이 되는 것으로 엊그제는 그런 합격기를 한번 읽었다. 군복무를 하던 중에 중대결심을 하고서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아 공대생이 고시에 도전을 해서는 3년 만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고 썼더라. 참으로 군생활이 인생의 한 전환기를 만든 촉매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 된 것이다. 그냥 하루 온종일 게임만하고 허송세월하던 이가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훈련병 생활이 끝나고 나면 후반기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바로 자대로 가는지 아직 알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만약에 후반기 교육을 받으면 면회를 할 수 있는 것이 언제쯤 된다고 하더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행군이랑 사격 등은 생각대로 잘했는지 모르겠구나. 핸드폰은 네 엄마가 전화해서 네 친구녀석이 보내주기로 했다더라.
11월 초에는 너희 외가쪽 식구들이랑 제주도로 가기로 했다. 너의 외삼촌, 너의 엄마, 아빠, 이모부와 실력을 한번 겨뤄볼 참이다. 제대로 실력발휘를 해서 창피는 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은 걱정이다. 거의 팔 년 만에 다시 제주도를 가보는구나. 지금쯤 한창 갈치와 고등어가 한철인 모양이더라. 회에다가 소주 한 잔을 하게 될 것이다. 너는 고생하는데 엄마 아빠만 신이 나 있어 미안하구나.
나폴레옹과 사과 장수 얘기를 해주마. 나폴레옹이 학교를 다닐 때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군대학교로 우리나라로 치면 사관학교 정도의 학교를 다녔는데 나폴레옹이 가난해서 매일 굶었다. 학교 앞에는 과일 가게가 있었는데 그 가게 아주머니가 나폴레옹을 안타깝게 여겨서 매일 사과 한 개씩을 공짜로 주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그 사과를 한 개씩 먹으며 아주머니에게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나서 자기가 다녔던 학교에 다시 오게 되었다. 그리고 과일가게가 생각나서 가봤더니 아직 아주머니가 할머니가 되어 거기 있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사과를 사면서 아주머니에게“저를 기억하겠습니까?”했더니 할머니가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과를 사면서 금화를 내밀고 “제가 황제 나폴레옹입니다.”라고했다고한다(나폴레옹이 황제라서 금화에는 나폴레옹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주머니에게 그동안의 사과 값이라고 하면서 금화를 잔뜩 드리고 “이걸 보고 제 얼굴을 영원히 잊지 말아 주세요. 할머니는 제 은인입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그렇게 사과를 얻어먹던 이가 프랑스황제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지 않느냐. 우리나라 같으면 당장에라도 사단이 났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또한 엄청나게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얼마나 창피한 노릇이고 숨기고 싶은 과거였을까. 그런 부분에 배려하고 그 비밀을 지켜준 이에게 황제는 보답을 한 것이다. 나폴레옹에 관한 일화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백미(白眉)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선비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 한 번 느껴보렴. “마마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자신과 가족 친지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생사여탈권(生死與奪牶犈)을 가진 절대군주에게 감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분들이 선비였다. 역사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고문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글거리는 숯불 속에서 벌겋게 단쇠꼬챙이로 죽으라고 지져대는 가운데서도 선비들은 소신(所信)을 굽히지 않는 독기(毒氣)가 있었다. 그리고 혼자 방안에 있어도 많은 사람이 지켜보
는 번잡한 저자거리에서와같이 질서와 규율을 스스로 지키는 자제력을 가지고 항상 타의 모범이 되었다. 굶어도 밖으로 시장기를 표현하지 않고 참으며 어쩌다 밥이 생겨도 범인들과 같이 게걸스레 먹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밥을 구하기 위해 소신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어 벼슬자리를 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사전에서는 선비라 했다.
군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관생도시절에는 바로 이런 자제력과 인내를 단련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한계에 부딪쳐 모든 것을 팽개치고 싶은 유혹이 일어날 때에도 스스로 이겨나가도록 훈련한다. 그리고 장교가 되었을 때 부하들이 마음대로 먹고, 싸고, 잠자더라도 고고한 한마리 학(鶴)처럼 관심 없는 듯 먼 허공을 응시하다가 부하들이 없을 때 그들은 조용히 볼일을 보는 것이다. 그래야 흔히 이야기하는 명령이 먹혀드
는 것이다. 똑같이 먼 거리를 구보하고 와서도 아무렇지 않은 양, 목마르지 않은 것처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부하들 앞에서 피곤해하면서 목마르다고 물을 벌컥벌컥 마셔대면 그뒤로는 상관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쉽게 여기고 깔보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 된다. 지도자는 언제 어디서든 참고 견디며 초능력을 가지고 현명한 판단을 해줄 것을 부하들과 사회는 바란다. 그래서 장교를 국제신사(International Gentleman)라고 했는지 모른다. 이런 면에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우리의 선비정신과 영국의 신사도는 너무나 닮아있다. 그런데 지난날 이 모든 어려움의 과정을 지키는 진정한 선비정신을 우리는 영국의 신사도와 같이 발전 계승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실질을 숭상한다면서 싸잡아 모아서는 허울 좋은 겉치레만 하는 양반이라는 나쁜 이미지의 이름을 붙여 배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질을 숭상한다는 내면을 보면 그것은 오히려 배금주의(拜金主義)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실제 그 가치와 달리 세상에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무서운 사고방식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때문에 사회야 어떻게 되던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과 그 후손만 잘 살면 된다는 지도자들과 기업인이 주위에 판을 친다. 밀수로 돈을 벌고, 탈세로 자식에게 상속하고, 권력과 결탁하고, 환경에는 관계없이 자기가 만족하는 곳에 별장을 지으면 되는 것이 그들의 세상이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의 냉혹한 현실은 선비정신을 이어가려는 이들을 폄하하고 손가락질함으로써 비굴함을
강요하고 있다. 특히 권력으로부터의 강렬한 유혹을 이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그 중에는 권력의 단맛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면 미련 때문에 ‘노’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첨하고 아부까지 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권력지향적인 해바라기 같은 이도많긴하다. 자신의 뜻이 아닐 때 자리에 미련을 갖지 않고 낙향하는 그런 선비는 이제 약에 쓰려고 해도 없을 것이다. 끝까지 오직 자리에 대한 욕심으로 버티다가 쫓겨날 뿐이다. 마음 가득 욕심으로 채운 사람에게 조상이 무슨 가치가 있고 선비정신은 또한
어디다 쓴단 말인가. 그들에게는 다만 케케묵고 거추장스러운 과거일 뿐이다. 우리의 오랜 전통 속에서 어르신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던 것이 이러한 선비정신인 것을 그들은 까마득히 잊은 것이다. 카페에 올라가 있는 사진 등을 보면 5주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듯하다. 막상 닥치고 보니 꽤나 다른 모양이다. 내가 군 시절을 회상해보면 그 때에는 보리싹이 나고 있었는데 그 보리가 피어야 그곳을 떠난다고 했으니 얼마나 길고 멀게 느껴졌겠느냐? 그래도 이제는 상당히 익숙해졌고 충분히 적응되었으며 생활화가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처음에 눈빛이상당히두려움에떠는듯했는데요즘의모습에서는활기가느껴지는 것 같구나. 다한증 약은 필요 없는지 모르겠다. 필요하면 연락해라. 소포를 보내도록 할게. 입대한지도 20여일이 지났구나. 당당하고 멋지게 변해가는 모습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이등병으로 탄생하게 되는 10월 10일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처음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시간도 하루하루 지나다 보면 금세 다가오는가 보다. 양동근과 강타가 이등병과 일병으로 뮤지컬을 한다고 연예뉴스에 나오더구나. 군복을 입은 모습이 낯설던데 내 아들도 저런 모습일 것이라는 사실에는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꼈다. 비만소대 사람들에게는 간식이 나와도 안준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게 사실인지 모르겠구나. 훈련병이냐 교육생은 돌아서면 배고프고 잠오고 피곤해하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척 해도 다 그럴거야. 보내준 편지는 잘 받았는지 모르겠구나.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이니 감기조심하고 잘 지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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