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치 : 문장21
프랑스 소설가인 알베르 카뮈[AlbertCamus, 까뮈, 1913.11.7 ~ 1960.1.4]의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책에서는 처음 시작하는 말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로 되어 있다. 그것에 대한 답변으로 긍정이면 사는 것이고 부정이면 자살을 택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살다보면 정말 구구절절하게 삶을 살아야하는 당위성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꼭 집어 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은 모두가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그야말로 삶의 질곡(桎梏)에서 허우적거리며 마지못해 모진 목숨을 이어가며 죽지 못해 사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苦海),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해서 덧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총체적이고 종합적이지 못한 부분이 들어있음은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인생이 다 장미빛으로만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니리라. 어떤 때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혼재되어 있어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 그 속에서 한없이 나락으로 빠져들고 몰입하다 보면 자칫 엉뚱하게 외곬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식의판단과 인식은 좋은 인생관이 될 수는 없다. 살아가면서 인생은 세 가지 선택을 가진다고 한다. 하나는 배우자의 선택이고 둘은 직업의 선택이고 셋은 인생관의 선택이라고 한다.과연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확신하는 것이 당연히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또 여의찮은 상황과 여건에 처하게 되면 부정적이고 피해망상적인 생각에 몰두하거나 빠져들게 되고 급기야 극단적인 선택으로 주위사람이나 세상사람을 안타깝게 만들기도 한다.이런 원인의 하나로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우울증이다. 병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고 극복하기가 썩 간단하지가 않다. 임산부나 갱년기의 중년에 이르게 되면 한 번씩 빠져들게 되고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인생을 살면서 지향하고자 하는 바와 세상을 바라보는 인생관에 있어서 확고한 사생관(死生觀)을 가져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자기목숨이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거나 시도 때도 없이 자포자기 하거나 무분별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심심치 않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뉴스거리로 제공되는 사례들에서 교훈을 삼아야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다. 이는 비록 아무리 어렵고 힘든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있게 되어 죽음밖에 해결책이 없는 때라 할지라도 결코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모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축사를 하면서 세 마디를 했다고 한다. 그것은 ‘포기하지마라. 결코 포기하지마라. 절대 포기하지마라’였다. 살아있는 한 실날 같은 한 줄기의 빛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고 목표하는 바를 향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고통스럽고 아픔이 극에 달해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게 되면 과연 어떤 선택이 이루어질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게 인생인 것이다.
얼마 전에 아름다운 죽음이란 소위 안락사라는 것이 논쟁의 핵심이 된 적이 있다. 말기암 환자나 기타 병력이 불가항력인 환자의 통증을 없애주기 위하여 당사자의 동의하에 제반여건이 충족되었다고 판단되어지면 의학적인 처치를 종료하는 걸 허용하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인 만큼 많은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는 부분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자나 창조주가 부여한 생명을 인위적이고 자의적으로 말살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의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 일각에서도 이를 허용하면 살인을 저지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악용할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다. 의도적인 살인을 안락사로 위장하는 인간의 간악함을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사극에서 본 장면이 한 번씩 떠오른다. 대역무도한 죄를 짓고 사약을 받는 장면이었는데 억울함 때문인지 당사자는 사약을 내팽개치고 사약 먹기를 계속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강제로 사약을 먹이는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끈질긴 삶에 대한 인간의 집념을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었다. 또다른 영화의 한 장면이 동시에 클로즈업되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한 사형수를 전기의자로 사형을 집행하는 장면이었다. 사형집행관이 사형수와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이 있었는지 사람의 몸과 전기를 통하게 하는 스펀지에 물을 적셔야함에도 이를 생략한 채 감전사할 사람을 소살(燒殺)시키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본래 전기에 의한 사형은 사람을 가장 편안하고 고통스럽지 않게 해서 저 세상으로 보내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약하게 변질된 채 최악의 상황에서 고통스럽고 처절하 아파하면서 저승길로 향하게 된다. 여러 갈래가 있긴 하지만 인생은 결코 무가치한 것은 아니리라. 한번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인생관으로 생의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이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에서 의의와 보람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것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놓지 않으면 삶에 회의적이 되기 쉽다.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혁신해서 목표한 바를 성취시켜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인식하여야 한다. 살다보면 난관에 봉착하기도 하고 좌절에 빠지기도 하고 위기를 겪기도 한다. 하
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경험하고 이겨내고 뛰어넘었을 때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의 완성을 이루게 되고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러한 고통을 극복하고 이겨내고 목표한 바를 성취시켜나가는 것에서 참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예화를 몇 가지 들어보고자 한다. 목표를 갖기 위해 훌륭한 사람을 멘토로 삼고 그것을 추종해가고 추구하는 것은 삶의 한 태양일 수 있다. 미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어린 시절에 백악관을 방문해서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지향점이 되고 목표가 되어 결국에는 미국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꿈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정권말미에 영예롭게 대통령직을 수행하진 못하여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최근 유엔사무총장으로 재선의 영광을 안은 반기문 총장도 유년시절에 케네디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었고 악수까지 나누었다고 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반총장에게 어떻게 작용했고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다. 다만 그런 최고지도자와의 만남은 삶의 목표와 지향점, 비전을 설정하는데 커다란 동기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공자의 말씀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속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다. 착한 이를 가려 그를 따르고, 착하지 못한 이는 나를 고치는 귀감으로 삼는다 라고 했던 것이다.
[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통상적으로 피동적인 단조로움에 얽매여 있는 삶에서는 보람이나 의의를 찾기가 힘들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분명한 인생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과 당위성을 인식한 상황에서 혼신의 열정을 쏟는다면 삶의 참된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살아야하는 의지, 즉 살고자하는 뜻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역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복할 의지를
잃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위대한 지도자들이 가졌던 꿈이나 목표를 누구나 가질 수는 있겠지만 차후 이 목표를 성취한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 사람과는 분명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보통사람들이 갖지 못한 행동양식과 추진력으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물이 바로 성공이라는 것을 투철한 의지를 점철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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