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의 정사와 내 남자의 여자
<수요일의 정사>를 보았다. 일드(일본드라마)란 장르였고 불륜을 소재로 한 것으로 11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2001년도 방영분을 보았다. 출판사의 편집자로 있는 남자주인공과실내인테리어디자이너로 일하는 부인이 단란한 가정을 꾸려간다. 편집자는 신인소설가를 설득해서 연애소설을 쓰도록 종용한다. 아내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여자는 치명적인 유혹 후 남자에게 칼을 건네며 마누라를 죽이고 오라고 부추긴다. 과연 그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실제로 이와 비슷하게 엮여 들어간다. 결혼후 2년 만에 남편을 잃은 여자 친구의 장례식에 부부는 참석하게 되고 서로간에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교환하면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과거의 얘기로 친구간에는 빚이 남아 있었다. 한 남자를 두고 자웅을 겨루게 되었는데 여주인공은 남동생을 시켜 연적을 유혹하게 하고 남자를 가로챈다.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여주인공은 남편에게 남동생의 아이를 가진 친구가 결국은 임신중절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남동생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가출을 하게 된다. 사실은 키스 정도로 관계가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속인다. 여주인공은 미망인이 된 여자에게 집 부근의 다리 건너편에 있는 집을 소개해주게 된다. 과거의 잘못했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친구에게 속죄의 대가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 남자는 출근하는 길에 애인의 집에 들러 아침을 두 끼씩 먹고 출근을 한다. 남자는 그곳에서 처남 내외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불미스러운 현장을 발각당하고 만다. 호텔을 찾아 수요일의 정사를 즐겼던 두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고백을 강요받게 되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만다. 곧장 짐을 싸게 되고 이혼서류를 제출하고 종말을 보게 된다. 그로부터 1년 뒤 다시 시작하고 싶은 남자는 여자를 찾게 되고 재회하게 된다. 서로의 속마음을 확인하게 된 두 사람은 첫 데이트를 했던 곳에서 똑같은 상황에 맞부딪히게 되고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극적으로 애인이 훼방을 놓게 된다. 예전 같지 않게 느껴진 애인은 결혼식을 올리자고 해놓고 남자에게 치욕적인 망신을 선사한 후 결별을 고하게 된다. 친구와 동일선상에서 똑같은 상황과 여건 아래에서 자신도 새롭게 행복을 찾기로 다짐하며 새로 출발한다. 3년 후 모임을 갖게 된 세 사람. 남자는 이혼남인 채로 두 여자는 새로운 가정을 꾸려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는 상태로 나타난다. 세 사람은 신나게 수다를 떤 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런 와중에 수요일의 데이트 신청이 들어오게 되고 남자는 예전의 그 불륜기질이 발현된 것이 아닌가 하고 흐뭇해하며 전화를 끊으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드라마 수요일의 정사는 일본판 불륜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여주인공이 연적의 뺨을 한 대 갈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죽기 살기로 불륜을 단죄하는 폭력은 나오질 않는다. 반면 한국의 드라마였던 내 남자의 여자에서는 그것이 핵심으로 여겨진다. 여러 가지로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수요일의 정사에서는 매형의 불륜을 알게 된 남동생도 결코 그것에 대하여 누나에게 발설하거나 고자질하지 않는다. 반면 내 남자의 여자에서는 언니가 애인에 대하여 속 시원하게 단죄해주고 온갖 치욕을 다 안겨준다. 시청자들은 그 속에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갈증해소 내지는 욕구해소를 맛보았다.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때리고 얼굴이 멍든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평온한 가정을 파괴한 부분에 대한 반작용으로 애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불륜의 뜨거운 맛을 가감없이 표출시킨다. 차이점을 살펴보면 일드는 30대의 결혼 3년차 아이없는 전문직 여성인데 반하여 한국은 현모양처 그 자체인 40대 중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한국은 대학교수인 남자와 일본은 편집자인 남자의 불륜이 초점이다. 너무 잘해주는 순백의 여자에게서 일탈하고 싶은 남자를 보여주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극적인 상황 아래에서의 키스씬도 유사하다. 일드에 있어서는 여자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 압권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이다. 여자간의 한 남자를 둔 쟁탈전이 흥미진진하게벌어진다. 결혼기념일과 애인의 생일이 겹쳤을 때의 숨막히는 외줄타기가 극적으로 묘사된다. 불륜 후 자신의 불륜 사실을 당당하게 털어놓고 허탈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정서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숨기려 하고 은폐하려 하며 발뺌하려는 것에 비하면 당당하고 솔직하며 정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간통죄라는 현행 법률위반이 있고 일본은 그것이 아닌 것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한참 홍역을 앓는 과정을 거치는 우리와는 달리 일드에서는 단 하루 동안에 짐 싸서 나가는 것으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종료되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랑은 월요일과 화요일에 하고 목요일 등은 회사회식이 있으니 통상적으로 가장 밀회를 즐기는 것이 적절한 때는 수요일이라고 한다. 일 년 후 재회의 순간에 다시 시작할 것을 종용하는 남자에 대해 자신의 견해뿐만 아니라 친구의 처지까지 고려해서 자신이 뺏어오게 되면 친구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뺏고 빼앗기는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에 두려움을 내비친다. 사무치도록 그리워했고 가슴 아파 했던 전 남편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에는 부모의 간섭이 깔려 있고 자식이 연계되어 있다. 모든 것을 집중하여야 한다고 했던 애인의 요청에 남자주인공은 난감해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교수직까지 아들로서의 역할이나 아버지로서의 의무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여자에게만 매달려야 한다고 하는 여자의 집착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현모양처는
그렇게 오랫동안 헌신해왔던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아들과 살면서 아픔과 슬픔, 그리고 고통스러움을 삭혀가면서 자립의 홀로서기를 모색한다. 샌드위치 가게를 해가며 사회에 눈을 떠가고 연하의 후배와 데이트도 해보지만, 자신의 마음을 다잡지는 못한다. 신나게 오토바이도 타며 애인과와 밀회를 즐겼던 남자도 공기와 물 같은 존재였던 아내와 떨어지면서 겪게 되는 불편함에서 익숙했던 것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애인의 남동생이 나타나 그의 누나에게 부정한 부분에 대하여 매섭게 질타한다. 하늘이 무섭지 않냐고, 죄의 값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렇게 착하고 예쁜 사람의 남편을 빼앗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거침없이 꼬집는다. 피붙이로서 당연히 누나를 옹호해야 함에도 세상을 올곧게 바로 보는 눈을 가진 이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두 나라 간의 사랑하는 방식의 차이 또는 불륜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묘
하게 대비되는 두 드라마였다. 일드에서 남자는 연애소설의 소재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한번 불륜에 빠졌다 하더라도 바람 같은 사랑이었기에 금방 본처에 대한 회귀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렇게 결론지어지진 못했다. 애처가로서 자신의 사랑에 자신을 가졌던 여주인공은 어떤 이가 유혹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유혹당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었다. 그럼에도 예상을 빗나가게 되고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후 당당하고 깨끗하게 추호의 미련없이 이혼해버리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남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비는 구질구질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보였다.
아직도 한국은 본처와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그리고 ‘조강지처를 버리면 언젠가는 패가망신한다.’ 라는 옛말이 있듯이 결혼을 파기하는 것이 결국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란 압박감을 마치 원죄처럼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애인은 본처만큼의 현모양처가 못된다는 선입관도 늘 따라다닌다.
과연 진실한 사랑이란 어떤 모습일까. 마음 가는 대로의 격정적인 것이 진실한 것일까아니면 제대로의 순리에 합당한 적절한 절차에 의한 합법적인 것만이 사랑의 참모습인가. 구질구질하게 자신의 죄책감에 속병을 앓아가며 갈팡질팡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그 굴레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 필요한 건 아닐까.
사랑의 기한은 3년 정도라고 한다. 그 이상은 타성이나 정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의 그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웠던 것은 금세 시들어버리고 열정과 격정도 식기 마련이다. 혼인서약이나 맹세는 식상해지기 마련이고 일상의 틀 속에서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는 것이 생활의 일면이리라. 참다운 사랑과 진실한 사랑을 찾아 일생을 허비하는 이도 있고 일생토록 한번도 제대로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일생에자신의 전부를 바칠만한 멋진 사랑을 한번은 해보고 싶은 게 모든 보통사람의 더도 덜도 아닌 공통된 꿈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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