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만의 해후
엊그제에 오랜만에 가족모임이 있었다. 일년에 세차례 모이는 모임이었다. 어르신 생신에 두 번 그리고 한번은 가을철 무렵의 모임이었다. 여섯명의 남매가 있어 각각의 개별로 행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자매간 오누이간으로 해서 두가족이 유사를 맡아 모임이 이루어지는 형식이었다. 대도시 주변의 별장을 하나 빌려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했다. 일찍 서두런다고 했지만 워낙 단풍철이고 교통혼잡이 가중되다보니 예상외로 늦어졌다. 아침에 출발한 것이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느 별장과는 달리 품격이 느껴졌고 상당히 고급스럽게 지어진 집이었다. 5년전에 3억5천만원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놀랄만 하였다. 잔디가 곱게 깔려져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집이 자리잡은 방향은 동쪽으로 치우친 동남향 정도였다. 들어오는 입구까지의 길이 소로였고 외길이어서 불편함이 있었다. 더욱이 입구 골목길에는 ‘제차통행금지’ 라는 팻말까지 붙여져 있어 어리둥절했다. 겨우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집구경을 하였다. 현관을 들어가서 좌측에는 응접실 겸 서재로 여겨졌다. 앞쪽으로 창문이 크게 조성되어져 있고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반대편으로는 좁은 창문으로 해서 높게 되어져 있었다. 굳이 커튼까지가 소용이 없을 듯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커튼이 칠 수 있게 마련되어 있었다. 그 밑으로는 서재로도 손색이 없을만큼 깔끔하게 만들어진 책 서가가 조성되어져 있었다.
간간히 한복입은 여인상의 작품이 조그만 유리상자에 담겨져 있었다. 한껏 멋을 부리고 있는 여인네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죄측편으로는 예쁜 액자에 그려진 몇몇 그림이 오밀조밀하게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오른쪽 벽면으로는 어디 외국에서 가져온 듯한 목제 인물상이 거치되어져 있었다. 서가에 비치되어 있는 책은 철학류에서부터 미술관련 도록 등이 즐비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존철학, 고등학교 철학교과서 등 도올의 논어, 등이 서가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 한쪽에는 몸을 회전시키는 운동기구가 하나 그리고 나무탁자, 외에 나무침대겸용 소파가 놓여져 있었다. 침대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도록 나무을 둘러놓았고 그 위에는 경칩류의 금속조각도 부착되어져 있었다. 주인장의 풍류와 취미와 고상한 품격을 느껴볼 수 있었던 집이었다.
가족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고 자정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다 모일 수 있었다. 한가족은 외국에 있는 관계로 참석이 어려웠다. 준비해온 음식들로 식사를 하며 여러 가지 화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누릉지에 관한 얘기가 시발이 되었다. “누가 준 것이냐?” “전원장이 준 것이다.” “이름이 무었이냐?” “전 OO이다.” “의사냐” “그렇다.” “어떻게 아는 사이냐?”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27년만의 해후가 이루어졌다. 27년 전에 이별한 후에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었다. 전원장은 28년 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고시에 합격하고 의사가 되어 군복무를 하러 갔다.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던 사이였다. 한사람은 군의관이었고 또 한사람은 인사참모였다. 군생활을 하면서 친하게 지냈었고 많은 대화도 했었고 서로간 임의로우리 만큼 절친하게 지냈던 듯했다. 그 때 당시를 회상해보면 철없던 시절이었고 혈기왕성했던 젊은 날이었던 것으로 여겨졌다.
두사람 사이에 얘기되던 한가지를 떠올려 보면 이런 것이었다. 자신의 친구한사람이 좋은 대학을 가서 고시공부를 했고 합격을 한 후 부잣집의 규수를 맞아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못마땅할 수가 없고 자신은 그 친구가 경멸스러워 어쩌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고 맞는 것이지 않는가 하고 의견을 물어왔다. 물론 애정없는 조건에 의한 결혼이라는 것이 문제없이 제대로 영위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고 제대로의 성취를 이루었다면 그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차원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지 않는가 하고 긍정적인 면도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니 어떻게 그런 속물적인 생각을 하느냐는 둥 참으로 허허로운 논쟁과 토론으로 대립하고 갈등했었다. 하지만 서로의 기본적인 호의는 그대로 유지가 되었고 좋은 관계로의 지속이 이어졌다. 얼마간의 군생활 후 전원장은 후방으로 갔었고 그것으로 별리가 오랫동안 유지가 되었다. 언젠가 한번 여수에서 병원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이후로 광주로 와 병원생활을 하던 중에 한번 통화해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딸아이가 대학에 다니느라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어 가끔 한번씩 서울로 왕래를 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전원장 본인은 27년전 그때 당시에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었다. 재벌가의 양갓집 규수와의 조건에 의한 결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여성과 진실된 결혼을 했었다. 군에 묶여져 있는 생활로 인해 결혼생활의 초창기 신혼생활이 제대로 영위되지는 않았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부분을 제대로 파악하고 항상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고 더욱 의학적인 부분에 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듯했다. 의사로의 투철한 직업의식도 갖고 있었다. 1년정도의 짧은 생활이었지만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의과대학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이 무등산을 가는 극기훈련이라는 것이었다. 선배들로부터 의사로의서 직업의식도 배우게 되지만 가장 혹독하게 교육받는 것은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의지에 있어서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강력한 신념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었다고 했었다. 어떠한 극한 상황하에서도 이겨낼 수 있고 버텨낼 수 있는 정신력과 의지 각자 개인이 갖게되는 것이었다고 회고 했었다.
인턴 레지던트를 거치지 않은 상태라 자신의 의학적 지식이나 소견에 대해서는 임상경험이 전무한 상태여서 무척이나 불안해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직업의식만은 투철했고 책임감도 강했던 사람이었다. 비록 몸이 건실하고 군 훈련을 완벽하게 소화해낼 만한 체력은 보유하고 있지 않았지만 정신력 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었다. 한번은 홀로 뒤쳐져서 행군해 오기는 했지만 끝까지 자신만의 힘으로 행군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어 있고 지역의 유지로 명망이 높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우연하게도 집사람도 같은 학교의 서클을 같이 했던 터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어렵게 통화하면서 27년만의 해후의 회포를 풀었다. 이렇게 살다보면 만나게 되는 것이 인연의 섭리인 듯했다. 다음에 제대로 만남을 가져 만나면 실컷 오랫동안의 옛얘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