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삶의 자세
때는 바야흐로 10월 유신이 조금 지난 시기였다. 1973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 도심의 산중턱 쯤에 자리한 산동네에 살던 때였다. 언덕배기로 150여 미터쯤 북쪽으로 내려가는 길옆에 교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때때로 교회종이 마을 전체로 울려 퍼지기도 했다. 중학교 이학년 여름방학 쯤이었다. 동네 형들을 따라 우연히 가본 곳이 교회였다. 대한예수교중 침례교였다. N목사란 분이 담임목사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였다. 시발은 여름성경학교라는 것이었고 원어민에 의한 영어교육도 있었다. 성경말씀과 영어공부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원어민의 본토 영어발음을 듣는 것도 그 당시로서는 아주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합창단 성가대도 있었다. 한쪽에는 찬송가와 성경책이 있었다. 기다란 의자에 성경과 찬송가를 받쳐 놓고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찬송가도 불렀다. 목회활동을 신기해하며 호기심에 가득한 채 그 말씀을 들었다. 그때 당시의 상황으로 학교내 공작부라는 특별활동을 하고 있었고 부장의 강압적인 리더십에 상당한 시달림을 받고 있던 터라 종교가 큰 위안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처음 교회가기를 권고했던 이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앙에 빠져들었고 계속 해서 꾸준히 다녔다. 크리스마스가 왔고 밤을 새워가며 신도들을 심방하며 찬송가를 부르기도 할 만큼 열성적이였고 심취해 있었다. 수요일 예배에도 나가 성경을 배우고 공부를 했다. 이렇게 접하게 된 기독교는 3년간을 몰두할 정도로 빠져있었다.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많은 이들과의 접촉도 있었다. 신앙이 가져다주는 위안과 만족에 엄청나게 색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서구문명의 바탕에 깔려 있는 한 축을 접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모세, 욥, 아브라함 등 생소하고 낯선 위인들이었지만 그들의 독실한 신앙에 감동했고 시대를 초월한 그들을 추종하게 되었다. 어렵고 힘들고 복잡한 역경 속에 빠져 있는 시간이었지만 신앙에 의한 위안을 받고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3년이 거의 지날 무렵에 침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다가오는 대학입시로 인해 종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지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중대결심을 하고 교회에의 발걸음을 끊고 학업에 매진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처음 접하게 된 원어민 영어, 선물, 친구 등 외적요소에 의해 접근되었지만 계속적으로 접촉하면서 믿음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방인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어려웠고 무신론자를 이해하려야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신앙이 향후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지만 심오한 영향을 미쳤음은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 구약과 신약 등을 두루 공부하고자 했다. 많이 들어보았고 공감도 하였지만 전통사상과의 배치 또는 독특한 문화내지 신앙인 간의 화합에 의한 부분 등 동화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물론 그 속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상당히 집중했고 독실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동래 쪽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다시 시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서클친구 중에 H란 녀석이 있었는데 그 녀석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종교생활과 혼인할 정도로 전념했고 몰입될 만큼 그것에 빠진 친구도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독실한 분들을 상관으로 모셔보기도 했다. 초등학교동창생 중에는 아예 신학대학원으로 진학해서 목회자가 된 이도 있다. J부 시절에는 동료직원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적도 있었다. 사회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신랄하게 세상살이를 풍자하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고 나름의 신앙생활이 갖는 의미조차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90여세에 이르러 아들을 얻게 되었다. 아이가 조금 자라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명령을 내리셨다.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 모일 모시에 실정상 웅덩이에 아이를 빠뜨려야 한다.” 그렇게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금지옥엽으로 길러온 아들인 이삭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웅덩이 속으로 내던지려는 순간 하나님말씀이 있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을 내려놓아라. 내가 너를 의심한 게 잘못이었다. 너의 믿음을 조금도 의심치 않겠다. 네가 나를 믿어준 만큼 나도 너에게 크나큰 은혜를 내리도록 하겠다. 네 자손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번창하고 융성하도록 하리라.”
일본에는 도쿠가와 이예야스란 대망을 품은 장군이 있었다. 새가 울지 않으면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인내의 화신이고 전국시대의 통일을 이룬 거인이다. 그가 집권 초창기 아들과 아내를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 명분은 원정을 나가있는 동안 첩자의 간계에 빠져 내란을 일으키려하다 적발된 것이었다. 동맹국이었던 나라의 수장이었던 노부나가의 암묵적 종용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식에게 할복을 명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분에 대해 그가 느꼈을 회한과 아픔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10년 이상 적국에 인질로가 인질생활을 할 때 인내하며 가문의 부흥을 권토중래했던 터였다. 그런 속에서도 다섯째 아들에 대하여는 중요한 전투에 출전이 늦은 것에 대한 벌로 생면부지의 명을 내린다. 아들을 보지 않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리라. 너구리라는 별호를 갖고 있었고 때를 기다리고 끊임없는 노력과 성찰을 통해 대망을 이루었고 막부시대의 초석을 다진 이였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길을 가는 것이라는 말을 한 이로도 유명하다. 결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도 없고 중도에 길을 포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과연 그는 그 아픔과 고통과 쓰라림을 어떻게 극복하고 감내하였을까. 위대한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장부의 위엄이 거기 있었다.
다음은 작가P씨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분은 가엾게도 장성한 금쪽같은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왜 그렇게 가혹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야만 하는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원망하며 그 슬픔을 삭이기 위해 처절한 발버둥을 치기도 하였다. 수녀원을 찾기도 하였고 외국에 있는 딸네집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속 시원히 그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하기는 실로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현생에서 죄지은 바가 없는데 절대자는 왜 그렇게 가혹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게 했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이해할 길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왜 상황은 이렇듯 황당하고 난감한 일을 당하게 하는 것인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어느 한 사람의 책임도 아닌 당사자에게만은 절대 그럴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농민 운동가였던 Y의 일화이다 소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뇌종양에 걸려 단명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에게 드리는 간구는 실로 성스럽기 그지없다. 그 슬픔으로 인해 세상에 더럽혀져있던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함이었음을 감사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그 슬픔을 충분히 감내하고 영혼의 정화로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늘의 뜻이지 않겠느냐는 확대해석을 한 것이다. 그 숭고함이 뼛속 깊이 진한 향기로 다가온다. 세상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태도이자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훌륭한 선구자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아브라함의 강철 같은 믿음도 신앙인에게는 절대적인 귀감으로 전해져오고 영혼의 정화를 감내하는 그 숭고한 모습에서 성스러운 인간의 일면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작가P씨 같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은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보통사람의 범주 안에 밖에 들지 못하는 범부(凡夫)인 것이다. 자신을 갈고 닦고 정화하지 않으면 세상의 묵고 닳은 먼지를 다 덮어쓸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 안에 살게 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자신을 가꾸고 닦으며 삶의 관점이 넓어진다면 굳이 신앙의 턱을 넘지 않아도 권력의 문지방을 넘어서지 않아도 우리는 달라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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