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어느 날 한 남자가 커다란 홀에서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피아노를 연주하고 나왔다. 그런 상황 하에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것은 결코 만나서는 안 될 만남이었다. 결국은 피아니스트가 그 남자를 살해하는 것으로 극은 시작된다. 왜 그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한 남자를 살해한 것일까?
그렇게 일드의 ‘모래의 그릇’은 의문의 살해 장면에서 출발한다. 본래는 마츠모도 세이초의 원작소설이 극화된 것이었다. 그 주검은 무척이나 처참한 상태로 발견된다. 지하철 제조창의 철도길 사이에서 얼굴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 지문도 손가락이 모두 짓이겨진 채여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 동안 피살자의 신원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피살자와 그를 살해한 듯한 남자와 한 선술집에서 환담을 나눈 것을 목격한 것으로 증언한다. 피살자의 억양은 도쿠후지역의 방언이었고 그것은 특이하게도 북쪽지방의 사투리였지만 남도의 일부 지방에서도 사용되고 있음이 집요한 추적결과 드러난다.
주인공은 굴지의 농산성장관을 지낸 현역 국회의원 고명딸을 약혼녀로 갖고 있었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리려던 전도유망한 이였다. 연주회를 마치고 살인을 종료하던 찰나에 옷깃을 스치는 운명의 여자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만남을 불편해한다. 항상 일정한 시각의 해거름에 만나 낙조를 바라보는 것으로 공감대를 갖게 된다. 그가 해그름에 낙조를 바라보기위해 나타날 때면 어김없이 한 여선생이 멜라디온을 갖고 있는 어린이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와서 연주를 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그 멜라디온에 얽힌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한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끝없이 유랑생활을 해야 했던 그들은 어느날 한 한적한 학교에서 멜라디온을 훔쳐갖고 나오게 되고 주인공은 그것을 평행 반려자처럼 애지중지해 하며 그것을 통해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가게된 것이었다. 그녀는 극단의 여배우였는데 주연으로 발탁되었다가 곧바로 경질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고 또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의 죽음까지 통보받게 된다. 그녀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고향땅을 찾게 되고 그 뒤를 주인공이 밟게 된다. 결국은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하려는 여주인공을 구해 낸 상태에서 권고한다. “강하게 살아야 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여배우로서 종국을 맞게 된 그녀는 결국 의상담당 스탭으로 변신을 꾀하게 되고 남자주인공과의 끈끈한 관계로 맺어지게 된다. 한편 수사국에서는 피살자의 신원을 파악하게 되고 그가 경찰공무원으로 근무했던 사실 등을 밝혀내게 된다. 살인이 있었던 날에 입고 있었던 목 긴 티셔츠는 주인공의 옛 애인의 불찰로 달리던 기차에서 하얀 눈송이처럼 뿌려지게 된다. 그것을 목격한 기자는 그것에 상상력을 가미하게 되고 결정적인 살인의 증거로 포착되어지게 된다. 그 휘날리던 티셔츠의 조각을 찾아 피살자의 혈흔임을 확인하게 된다. 한편 피살자의 행적을 쫓던 형사에 의해 피살자가 거두어준 한 부랑자 부자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고 그들의 행적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북쪽의 마을에서 죄를 짓고 쫓겨 온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거둔 피살자는 지극정성으로 그들을 보살폈고 아버지를 설득시켜 스스로 범죄사실을 자수하게 한다. 아버지는 지병을 갖고 있었고 결국 의무형무소에 수감되게 되고 치료를 받으며 수형생활을 하게 된다. 한 부락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배척당하게 되고 질타되자 그들은 치명적인 아픔을 겪게 된다. 어머니가 아파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외면했던 마을 사람들은 결국 분노한 아비의 손에 의해 집단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대규모의 살육이 이루어진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마을 전체를 불 지른 후 방랑의 길을 떠난 부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득히 머나먼 남쪽 지방으로까지 흘러들어오게 된다. 산사의 마루 밑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들은 결국 스님의 신고를 받고 나타난 경관에 의해 돌봄을 받게 된다.
피살자의 극진한 보살핌속에 건강을 회복한 두 부자에게 남겨진 것은 영원한 이별이었다. 10살 난 아이는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와 결별을 하게 된다. 홀로 남게 된 아들은 피살자의 돌봄을 받으며 제대로 성장해가던 중에 친구 한명이 홍수에 의해 죽게 되자 그로의 변신을 꾀하게 된다. 완벽하게 히데오에서 와가 에이치로 변화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순풍의 돛을 단 격이 되었고 새로운 삶의 모색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그는 손이 따뜻했다. 그러나 가슴은 차가웠고 냉정했다. 그것이 그의 숙명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평생을 피아노에 매달린 아들은 평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숙명’이라는 교향곡의 작곡에 몰두한다. 그러나 좁혀져오는 포위망은 결국 그를 올가미에 옭아매게 된다. 교향곡 완성을 3일 남긴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체포위기를 맞게 된 그는 결국 3일간의 유예를 요청하고 교향곡을 완성한다. 화려한 연주회를 통해 교향곡 ‘숙명’은 대성공을 거둔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형사의 배려를 받으며 아버지를 만나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피아노와 비슷한 어린 시절의 피아노를 대신했던 멜라디언으로 아버지앞에서 ‘숙명’을 연주한다. 그는 한평생을 살인자의 아들로 살고 싶지 않아 히데오라는 인물에서 다시 태어나고 변신을 꾀한다. 그렇게 해서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청천 벽력같은 일이 벌어진다. 자신의 과거를 모조리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자신의 생이 송두리째 뽑혀나갈 상황에 처하게 된 그는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되고 파국을 맞게 된다. 인간으로서 완전한 자리 매김을 원했던 한 천재는 과거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다 아버지와 같은 치명적인 선택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최고의 환상적인 상황에서 맞이하게 된 비참한 최후는 인간의 굴레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인간의 심연을 꽤 뚫어보게 해주었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도 바닷가의 모래로 그릇을 만들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자아이도 어머니의 칭찬을 듣기위해 심혈을 기울여 모래그릇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에 의해 힘없이 사그라져버리고 망가지고 말았다. 기대를 꿈꾸고 칭찬을 바라면 그 걸 이루기 위해 무한히 노력해도 힘든 건 언제나 자기 자신임을 결코 잊어선 안 되리라. 언제 어디서든 이루려던 꿈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즐기며 그 일을 행복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삶이란 늘 모래그릇처럼 결코 쉽지 않은 형태의 그릇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 일드속에 나오는 핵심은 숙명이라는 교향곡이었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쓴채 살아가는 숙명을 지닌 주인공이 이를 초극하고자 애쓴 일생이 담담하게 묘사되고 그려지고 있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이의 숙명에 애련함이 느껴지는 부분이 잔잔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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