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에 관한 단상(斷想)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큰 보람 중의 하나는 승진이다. 누구나 희망하고 그에 버금갈만한 것은 별로 없을 듯하다. 유능하고 일 잘하고 제대로의 성과를 창출하는 이에게 그 공과가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세상의 이치인 것이다. 통상 맨 처음의 승진은 시험에 의해 판가름이 난다.
그것은 대리시험이라고 했고 승진고시라고도 명명되었다. 주관식이 30%정도 수준이었다. 임용, 옐로우, 그린, 등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군을 제대한 이에게는 입사 후 3년 정도가 경과하면 자격이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있다. 승진을 하려면 상당한 실력을 쌓아야 했고 하늘의 별따기라고 할 정도의 어려움이 있었다. 일선에 근무했던 곳에서는 오랫동안 제대로 된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서울로 가야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구조였다. 다행스럽게 입사 후 1년여 만에 서울로 갈 수가 있었다. 시간이 1년 반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반년은 금세 지나가 버렸다. 결국 1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갖고 갔었던 것은 실무책자 4권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정품의 교재가 아니라 정품을 복사하여 제조한 복사본이었다. 고시공부 때처럼 그것을 20회독을 하여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조직생활은 업무를 비껴갈 수 없었고 그것은 항상 술자리 등 여러 가지 회합에의 참석이 요구되었다. 시간을 좀 내어 달라는 요구를 한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정년을 얼마 앞 둔 한 직원이 자신도 승진시험을 볼 테니 자기에게도 똑같이 시간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아무튼 오전시간을 허락받았기도 했고 일정시간이 지난 후에는 오후 시간이 허용되기도 했다. 사무실 지하2층에 골방이 하나있었다. 그곳을 공부장소로 삼고 홀로 그곳에서 공부에만 매진하였다. 가끔 직원이 호출하러 오기도 했다. 올 때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잠만 자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일과시간 중에도 거의 잠을 자고 있는 상황이었다. 공부는 밤에 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있었다. 100일전 쯤 도저히 주관식 시험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아 경험 많은 고참 직원에게 상담을 했다. 그랬더니 그냥 해온 대로 제 페이스를 유지하며 정진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과목 중에 제일 취약한 것이 회계학이었다. 용케도 수요가 많은 탓이었는지 사무실에서 강좌를 열어주었고 몇 차례에 걸쳐 모의시험을 치룰 수 있었다. 12월 중순쯤이었다. 서너 차례 모의시험이 있었고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시험일은 익년 3월초로 예정되어 있었다. 갑작스레 부장의 모친상도 있었다. 당연히 소속직원으로서 2박3일간의 노력봉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2개월 후에는 또다시 부친상이 있었다. 손님들이 전번만큼은 아니었지만 노력봉사의 강도가 약해졌을 뿐 황금 같은 시간이 허비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시험이 임박한 상황에서 자칫 페이스를 흩뜨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어김없이 시험날짜는 다가왔고 시험을 응시하게 되었다. 전공 농협법, 실무 등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회계만은 여전히 취약과목이었다. 시험을 치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간신히 합격은 했다.
어떤 이는 시험에는 합격했다고 했는데 인사고과를 합한 최종 부분에서 탈락하는 멍에를 안기도 했다. 입사동기 중 셋 정도가 그랬고 전체에서는 대여섯 명되는 듯 했다. 일반 임용이 있었고 자격이 달랐다. 그것도 근무연수에 따라 등급이 있었고 다행히 임용에서 합격이 되었다. 발령은 3개월이 지난 6월이 되어서야 났다. 인사부에서 발령을 받기 전에 발령을 받겠느냐 아니면 다음해로 미루겠느냐는 의사를 타진하는 부분이었다. 젊은 나이의 합격이었기에 미루는 것도 한 방법이긴 했지만 우선 받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렇게 해서 발령을 받은 곳이 남제주군지부 대리였다. 이역만리로 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19명이 발령을 받았다. 입사동기 셋이 있었다. 둘은 제주시와 지역본부였다. 제주시에서도 한 시간을 더 가야하는 곳이 남제주였다. 승진의 기쁨이라는 것도 잠시였고 살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답답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승진을 하지 않고 있으면 그때의 관행으로는 일선으로 배치를 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출납을 맡게 되었다. 또 다시 출납을 해야 한다는 거에 대한 상당한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부담을 떨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능하면 승진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 본래 솔직한 심정이었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발령을 받고 보니 이역만리였고 절해고도였다. 책상에 앉으면 바로 한라산 정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곳을 보며 육지를 그리워했다. 다음해 4월에 상경할 수 있었지만 처음 제주로 갔을 때의 암울한 심정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낭패감이었다. 대구경북쪽으로 발령을 받아가는 이들은 오히려 제주가 더 나은 곳이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봉화 영양 청송 등으로 발령을 받으면 대구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제주보다 더했던 것이다. 인생 삼고(人生三苦)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에 초년 출세가 하나의 고통에 들어간다고 되어있다. 그런 셈이 된 게 아니냐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승진은 했지만 가족과의 별리가 남아있었다. 결혼 후 3년을 주말부부로 살았는데 3개월을 같이 산 후 또 다시 찾아온 이별이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인가. 인사부서 담당자를 찾아가 발령취소를 호소하기도 해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입사 후 근무했던 통영군지부의 경우 수년 동안 승진자를 배출하지 못한 경우를 봤었고 서울지역본부에서도 기획부 쪽에서 두 명 정도뿐이었기에 제대로의 승진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어떤 동료는 농협인으로 생활을 하면서도 그 승진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 그냥 그대로 일반직으로 퇴직을 맞이하기도 했다. 아무튼 첫 고비는 순조롭게 넘은 듯했다. 직명도 바뀌었고 호봉도 2호봉가량을 건너뛰었다. 13호봉에서 시작해서 16호봉정도였던 것 같은데 18호봉으로 2호봉을 더 받게 되었다. 순풍에 돛 단 듯이 흘러간 세월이었지 않나 여겨진다. 지나치게 잦은 이별로 인한 가정적인 불운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승진은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더 높은 긍지를 갖게 해주는 훈장 같은 것이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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