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에 관한 소회(所懷)
직장생활에서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승진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이야 편안히 얘기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지만 예전에 직접 당하는 심정으로는 답답하며 처절하고도 아픈 고뇌를 앓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에 해당하는 중간관리자로서의 승진이 임박했던 때의 처절했던 몸부림을 곱씹어 보려 한다. 그때 당시의 상황으로 재연해 보고 싶다. 당초 그 부서에 전입했었던 동기로 치면 너무 많은 인원이 몰려왔었다. 40여명의 정원이었던 곳에 10명이 전입을 왔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최초 승진 대상에 들었을 때의 대상자는 5명이었다. 89년도 승진자 1명 90년 승진자 4명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89년 1명 90년 1명 91년 1명으로 3명만이 승진을 했다. 전입을 92년도에 했으니 7년이 지난 셈이었다. 99년도의 승진은 치열한 상황이 되었다. 왜냐하면 98년도 IMF의 영향으로 인하여 승진이 없었다. 정체가 심한 상황에서 99년도에는 새롭게 발탁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래서 최초 해당자가 91년도에 해당했다. 발탁이라는 것이 특정부서 위주였고 8년 만에 승진이 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대상자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영광이고 광영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누락의 고배를 마신사람의 입장에서는 죽을 쑨 맛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99년도 승진이 끝이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91년 승진자는 나이도 나이였고 다른 부서의 승진 몫을 양해 하에 하나 더 받아온 연유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듬해가 되었다. 아니 그전 몇 개월 전이었다. 농협과 축협, 인삼협과의 통합 작업을 위해 실무 작업반의 차출이 있었다. 부부장께서 승진대상자 3명을 불렀다. 너희 중 한명이 가야겠다고 선언을 했다. 방법이 없었다. 그 대상자 중에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차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도 말인 11월에 파견을 갔다. 3개월 후면 승진이 발표되는 시기였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이었다. 결국은 다시 또 두 번째 고배를 마셨다. 재차 고배를 마실 때에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갔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그렇게 승진이 누락되어 절치부심하고 있던 차에 난감해할 새도 없이 고시출제로 인해 차출을 당해야 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황망한 마음이 들었다. 한 동기 녀석은 승진한 채로 차출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행운의 여신이 내게 비쳤는지 차출 다음날 가정사로 인하여 빠져나오기는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치과에서의 수술도 이어지게 되었으니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파견도 끝나고 승진도 되지 않은 채로 다시 그 부서로의 복귀가 이뤄졌다. 그런데 더 설상가상이고 가관이었던 점은 그 예전 팀에서 받지 않겠다고 옹니를 부린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다른 팀으로의 파견복귀가 이루어졌다. 이제는 승진을 해도 전 승진으로 보면 2년차가 나는 이들과 같이 승진을 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한 다리가 천리라는 속담도 있고 바쁠수록 둘러가라는 선인들의 지혜가 내포된 경구도 떠오르긴 했다. 하지만 그건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동기 녀석은 승진해 지방으로 내려간 이후 다시 본부로의 전입이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이고 보면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때 당시 승진을 겨루던 이들의 연배로는 서너 살 위의 거의가 55년생 수준이었으니 그 격차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작년으로 명퇴를 할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는 토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분은 그 직급 그대로 승진도 못한 채 지점장으로 명퇴를 했었고 또 다른 한 분은 공판장장으로 마무리를 했었다. 그전 99년도에 승진했던 이는 한 분은 그 이상의 승진을 이루지 못했다. 사무소장으로서 다면평가에서 연속해서 지적당하므로 인해 결국 일선으로 전출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한 분은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다 그 부서에서 전출을 당해야 했고 말년정도에 겨우 승진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2년간의 누락으로 인한 혜택이었는지 모르지만 발령은 거의 본부수준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받았다. 또한 발령 전 6개월간의 MBA교육을 받는 행운까지 누리기도 하였다. 처음 실시된 교육이었고 대학에 위탁해서 하는 교육이었다. 파견이었고 오로지 학업에만 매달리면 되는 것이었다. 기라성 같은 사람들과 같이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본래 가기로 약정이 되어 있었던 분이 사정이 있어 제외 되는 바람에 대타형식으로 끼어들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새옹지마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막판의 승진할 때의 상황에서는 천연기념물이란 우스갯소리도 들었을 정도였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때 당시 외곽까지 다 아울러서 본부에 남아있었던 이가 6명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결국은 2년이나 늦은 이들과 같이 승진을 했었다. 아직 일선의 상황은 더하고 지금의 상태도 그때보다 나아진 게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지금도 11년 이후에 승진하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공무원조직에 비교해서는 안 되지만 그쪽에 비하면 그래도 양반인 셈인 것 같다. 공무원들을 보면 거의 한 직급을 올라가는데 걸리는 기간이 13년에서 15년 수준이다. 발탁과 비교하면 3년차가 나게 되는 데 그것이 어떻게 더 큰 격차로 벌어지게 되는 지는 추후에 볼일이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중간관리자로서의 승진이 이루어졌다. 40대 즈음에 이루어진 일로 40대 후반의 상관을 모시게 되었다. 경이로울 정도의 빠른 승진이 이루어 진 듯했다. 같은 연배의 팀장급도 있었음에 비하면 승진이 일찍 이루어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얘기도 들렸다. 너무 빠르게 가다보면 빨리 끝나버릴 수도 있다고 말이다. 실제 그렇게 빨리 끝난 분도 여러분이 있었던 듯하다. 또 한편으로는 늦게 대기만성 형으로 성취를 이루어가는 이들도 있었던 듯하다. 어느 선배의 조언에 결코 조급하게 굴지 말라 안달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하고 진력을 다한 후에는 반드시 그 결실을 보게 된다는 것을 귀동냥해 들은 적이 있다. 어느 것이 제대로 된 정도인지는 마지막 행로를 보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국은 정년으로 가고 월급쟁이의 끝은 다 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겪는 입장에서는 마음아파하고 억울해하고 자신의 회한을 곰삭도록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어쩌면 인생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