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식당에서의 단상(斷想)
어느 금요일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일주일간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귀경해서 곧 집에 당도할 때쯤이었다. 한 허름한 식당이 눈에 띄었다. 큰길도 아니고 골목 안쪽으로 한참 들어와 있었기에 눈에 띄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 바로 맞은편에는 고깃집이 있었는데 모범음식점의 간판까지 부착하고 있었던 것과는 비교가 될 식당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반쯤 열고 물어보았다. “포장이 됩니까?” 그러자 60대의 주인인 듯한 여사장이 대뜸 “물론이지요.”라고 답을 해왔다. 쿵쾅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식당의 전형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쪽 귀퉁이 뒤에는 TV가 켜져 있었다. 반쪽은 그냥 바닥으로 되어있었고 나머지 반쪽은 조그만 턱이 되어 있어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제법 글씨 꽤나 쓴다고 서예가가 쓴 듯한 붓글씨가 표구도 안 된 채 테이프에 붙여져 있었다. 식탁도 대 여섯 개 수준이었다.
한 쪽에는 연탄난로가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는 가스난로가 활활 타고 있었다. “먼저 계산을 할까요?”하고 물었더니 주방장이 잠깐 배달을 갔는데 오면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장이 왔는데 여느 시골아낙네처럼 수더분해 보였고 얼굴에는 마마자국까지 엿보였다. 내심 이 요리가 과연 제대로 된 아귀찜의 맛을 보여줄지가 의심되었다.. 부엌의 요리장면이 훤히 다 보이는 상황이었다. 콩나물을 담뿍 프라이팬에 넣고 갖은양념으로 조리를 하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의 손님이 차려진 반찬이 있는 탁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냉장고 속에 들어있는 소주를 한 병 갖고 와서는 쇠컵에 두 잔을 따르니 소주 한 병이 동이 났다. 그리고 열심히 저녁식사를 하며 반주를 들이켰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일단은 계산을 하자고 사장에게 요청을 하니 그러자고 했다. 카드를 받아들고 계산을 했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카드체크기를 제대로 작동을 시키지 못했는지 결제된 종이가 물려있질 않았다. 급기야 전화로 누군가를 호출했다, 금방 딸인 듯한 젊은 여자가 왔다. 어떻게 작동을 하니 곧바로 카드의 용지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상당히 어설퍼 보였던 식당운영이 젊은 처자가 오자 갑자기 생기가 흐르면서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사장이 “요리를 맵게 할까요, 아니면 덜 맵게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덜 맵게 해 주세요.”라고 했다. 반찬 한 가지를 포장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탁자에 차려진 요리 가운데 가장 맛있게 보이는 문어무침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게 다 동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요리된 것을 포장해 주었다.. 건물이나 식당 내부는 한없이 허술해 보였고 어설퍼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 내재된 솜씨와 정성은 일류에 뒤지지 않는 듯했다.. 집에 와서 식사를 하면서 맛을 보았다. 감칠맛이 보통이 아니었다. 설마 했던 기대가 감탄으로 변해 절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제대로 된 맛집 하나를 발견한 듯 여겨졌다. 사람을 함부로 겉보기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두 어 시간이 흘렀다. 아들이 저녁잠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밥과 함께 찬을 챙겨주었다. 잔뜩 기대한 내게 아들의 반응은 “괜찮은데” 하는 말이 전부였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맛에 대한 관심이 극에 달해 있는 듯 여겨진다. 어딜 가나 맛집이고 맛있는 집을 찾아다니는 식도락가가 넘쳐나는 듯하다. 오랜 세월 동안 먹거리에 풍족함을 느껴보지 못했던 세월이 있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세태가 이제는 얼마만큼 먹는 것에 달관할 때도 된 듯한데 아직도 맛있는 집에 대한 집착은 남다르고 유별난 데가 있어 보인다. 프랑스에 가면 요리나 먹는 것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점심시간 자체가 2~3시간 정도이고 제대로 된 정식을 먹는 것에 그만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맛을 즐기고 식사하면서의 대화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한류 열풍을 일으켰던 드라마 대장금도 예전 음식에 관한 것이 주류였다. 또한 식객이라는 만화와 영화도 그에 못지않은 광풍의 열기를 불게 하였다. 일본에도 초밥 왕이라는 것이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초밥을 만드는 과정과 그 맛을 내는 비결 속에 담겨져 있던 여러 가지 일화가 적나라하게 파헤쳐져 한층 재미를 더했다. 시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음식에 배어있는 미각이 천양지차이고 색다르다는 것이 화제를 몰고 왔다.
요리의 중요성은 무척이나 중요한 화두의 하나이다. 잘못된 식습관이 생활의 습관으로 굳어지면 그것에서 만병이 비롯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각에 대한 집착이 음식의 맛을 제대로 즐기거나 고착화시키는 데에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다. 우리의 드라마 속에는 식사장면이 곧잘 등장한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음식을 먹는 장면이 극히 예외적으로 꼭 필요한 장면이 아니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상적인 부분으로 통속적인 것이 굳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보다 사색적이고 심사숙고하고 고뇌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가 각인되고 투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 입고 자고 하는 인간의 일상화된 부분이 정상적으로 통용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 인간의 기본적인 요소에 해당하는 의식주부분에서 식(食)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그 으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선진국의 드라마를 보면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는다거나 일상적인 내용들은 항상 부수적이고 양념처럼 자연스럽게 묘사되고 극화된다. 하지만 문명화되지 않을수록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부분의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심리묘사나 핵심적인 것의 비중이 좀 더 심도 있게 다뤄지질 못한다.
이제 우리도 소득 3만 달러 시대로 가고 있다. 꾸준한 성장과 발전으로 3만 달러시대가 도래한다면 의식주에 대한 집착이 조금은 덜해지지 않을까. 한세대 정도만 지나고 먹고 사는 것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그런 기본적인 부분은 무리 없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 대장암을 극복한 지인의 이야기를 듣자니 맛있는 것을 먹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했다. 가끔씩은 거친 음식을 섭취해줘야 우리 몸이 그것에 대응하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고 했다. 예를 들면 청양고추를 먹는다던지 홍어를 한 접시를 코가 얼얼해지도록 먹으면 몸이 그것에 적응하도록 변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몸에는 우리 것이 최고로 좋다는 신토불이를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먹거리를 소중히 가꾸고 계승발전 시켜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절실한 때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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