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구 교육장
교육•학예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게 하기 위해서 1개 또는 2개 이상의 시•군•자치구를 관할구역으로 하여 설치된 하급 교육행정기관인 교육청의 장을 교육장이라 한다. 시•도교육청에 따라서는 교육장 공모제를 채택하는 곳도 있는데 교육장 공모제는 외부인사 등 8명으로 구성된 전형위원회가 정년이 3년 이상 남은 장학관, 교육연구관, 교장들을 대상으로 서류심사와 면접을 실시한 후 3명을 교육감에게 추천하면 교육감이 이들 중 1명을 임명하는 제도이다.
지난 3일이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인사발령이 있었다. 아내가 성동광진교육지원청 교육장으로 발령 났다. 모든 교육자들의 선망의 대상인 자리였고 최고의 지위였다. 86년도에 처음 중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지 37년만이었다. 참으로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3년 6개월의 근무를 한 첫 발령지 전남 고흥 두원중학교에서 90년에 서울 장충여중으로 전근했다. 남편의 주소지가 서울로 변경된 후 2년만이었다. 처음에는 야간직업학생들을 맡아 지도하기도 했었다. 산업현장에 근무를 하는 나이 많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6개월 후에는 3년간 육아휴직을 하기도 했다. 남편이 제주도로 발령을 받은 이유 때문이었다. 육아휴직 후 3년이 지난 다음 다시 복직해서 교사생활을 이어갔다. 장충여중에서의 근무는 첫서울 생활이어서 어려웠고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고 열심히 근무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내는 교사로서 열정과 희망을 갖고 아이들에 관해 진심으로 대했고 최선의 노력으로 진력했다. 아이 둘을 근사하면서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한 힘든 시기였었다. 참으로 곤궁했던 때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근무한 곳은 관악구의 난곡에 위치한 난우중학교였다. 대부분 빈곤하고 열악한 환경의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결손 가정도 많았다. 시골의 학생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학생들도 많았다. 다음은 신림동의 신관중학교였다. 얼마 후에는 생활지도부장을 맡아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확실하게 다잡았다. 학년부장, 연구부장도 거쳤다. 5년의 근무기간을 꽉 채우기도 했다. 2002년도에는방학기간 2년에 걸친 교육대학원 수학을 통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아내가 근무한 곳은 동작중학교였다. 그곳에서 아내는 전문직에 도전을 시도했다. 2006년도였다. 큰아들이 고 3인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도전했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2007년도에는 제대로 충분히 준비를 해서 도전했다. 거의 교직생활이 20년을 넘기고 있었다. 3개월쯤 독서실에서 밤늦도록 수험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무난히 전문직에 합격했다. 전문직 장학사가 된 것이다. 곧바로 서울시 교육청 본청에 발령을 받았다. 본청 장학사 업무는 학교교사시절의 근무와는 차원이 달랐다. 잦은 야근이었고 늦은 귀가의 연속이었다. 한 때는 중부교육지원청으로 1년 반을 나갔다 오기도 했다. 8년이 지난 2015년에 장학관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경기고 교감이 되었다. 최초의 경기고 여자교감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경기고는 전통의 명문답게 교감선생님도 두 명이었다. 2년 반의 교감직을 봉직한 후 본청 장학관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출제도 자주 들어갔다. 각종 출제의 단골이었다. 전문직, 교원 임용 등 여러 종류의 직원채용에 전문 출제요원으로 교장시절까지 계속 이어졌다. 장학사 시절에는 교장 연수를 시키러 강원도 속초로 연수를 주관하기도 했다. 주무장학사로서 그들을 모두 술 한잔씩 권하고 마무리를 하기도 해서 명성이 자자하게 퍼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연수원이나 교육지원청으로의 강의도 빈번하게 나가기도 했던 듯하다. 학교폭력 업무를 맡아 전교육지원청에 전담변호사를 배치해 업무효율화를 기하기도 했다. 학교폭력업무를 맡아 장기간에 걸친 힘든 업무에 지칠대로 지쳐 지역교육지원청으로 전근을 신청해서 성동광진교육지원청의 지역협력과장으로 보임되기도 했다. 그나마 생활에 숨통이 틔였고 어느 만큼 운신할 활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다음해에는 승진했고 언주중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나도 서울시 교육청에서 임용장 교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년 말부터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었고 수업도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중대재해법도 시행되어 교장의 책임이 무거워졌다. 학교 급식시설의 최신식화를 위해 10여 억원의 예산을 배정받아 급식시설의 현대화를 실현시키는 기초를 만들고 남부교육지원청 교육지원국장으로 영전했다. 1년 반동안 열심히 국장으로서의 업무를 처리하고 업적을 쌓았다. 그리고 교육장으로 승진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받은 보직인 셈이었다. 직장생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최고위직에 오른 셈이다. 아내는 지난해 회갑을 맞았다. 그리고 손자도 보았다. 아내는 이제 정년을 2년 남기고 있다. 마지막 기간동안 교육장으로서 최선을 다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언제나 최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고 진심으로 교육에 헌신했던 이로 기억되기를 소망해 본다.
아내의 이름으로 지어진 삼행시를 직원들이 지었다. 주요 서울정책을 구안하여 서울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시고 소나무처럼 든든하게 남부교육을 이끌어주시는 보물이시며 연꽃처럼 향기롭고 강인한 내강외유의 지원행정 모범을 실천하시는 우리의 포에버(Foever) 국장님! 건강하시고 앞날에 꽃길만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남부교육지원청 학교통합지원센터 가족 일동 다음은 한 장학사의 국장을 떠나보내며 쓴 편지글이다.
멋쟁이 국장님!
지난 주말 신랑이랑 나들이 갔다 잠깐 구경한 곳에서 차 구입하면서 국장님 생각이 나서 가져왔습니다. 주말 끝나고 가져오려 했는데 장염으로 정신이 없어 워크숍 당일에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
국장님을 1년 6개월 모시면서 느낀 점은 참 따뜻하고 어려운 부분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멋진 분이라는 점입니다. 누군가는 알지만 나서지 않는 부분을 용기 있게 정리해 주시는 부분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나도 전문직 후 관리자가 되었을 때 국장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실천해 보려 합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특히 이번 예산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장학사님들께서 국장님 떠나신 후의 남부교육지원청 걱정을 많이 합니다. 특운위 때 국장님의 현명한 진행모습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성동광진에서 더 멋진 생활 하시고,,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특히 눈이요) 꼭 챙기세요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장학사 올림
성동광진교육지원청 교육장이 된 아내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