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회고기 1
이제부터는 40개월간의 군 생활을 평가하고 이해득실을 헤아려보고 싶다. 군 생활에 접어들면서 결심한 것은 속죄하는 심정으로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보국할 마음으로 뛰어들었으며 여건이 허용된다면 대학원이나 고시를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했다. 처음 군에 입소해 후보생 생활을 영위했던 경북 영천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감내하기 힘들었다. 매일 막사에서 뛰어서 오르내리며 서산에 지는 웅장한 해를 보며 임관의 그날을 그리며 꿈을 키웠다. 실제로 군에 와보고서야 말로만 듣던 군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군용 보급품을 지급받으며 머리를 깎으면서도 특별할만한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거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입대한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전력이었고 신검시는 엉덩이의 흉터가 문제를 야기 시킬 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위에 서기위해서는 모든 굴욕을 참아야한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얼차려와 여러 가지 상황에서 대응하고자 하고 경험해보려 했었다. 교육기관에서 요구하는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기에는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군이란 생각이 극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같이 생활하게된 내무반원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 전북, 전남, 충청, 경상도 등 곳곳에서 왔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도 많은 애를 먹었다. 중대장은 아주 군인으로서 충실한 군인정신을 갖고 있었고 ROTC 18기와 학사 선배 3명의 구대장은 군생활의 모범인 FM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처음 야외훈련 PRI를 받으러 가서 선착순을 하던 도중에 탄창을 잃어버려 40분간의 취침을 못하고 동물수준으로 취급받으며 얼차려를 받았던 것이었다. 기합이 끝나고 하늘을 보았고 어머님 은혜를 부를 땐 모두가 울음바다가 되었으나 홀로 너무 값싸게 감상적이 되는 것 같아 눈가에 뜨거운 것을 가슴으로 삼켰다. 중대장으로부터 질타를 받으며 홀로 막사를 돌아올 때에는 눈물이 비 오듯 했다. 가장 힘들다고 했었던 각개전투 훈련중에는 M60이 자동으로 발사되는 가운데 중간 중간의 TNT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각개전투를 했다. 그리고 그 훈련을 마치고서는 흙탕물 속의 빗줄기 속에서의 점심식사는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훈련받은지 4주가 지나고 처음 면회가 실시되던 날 걸신들린 것처럼 마구 먹어대던 기억도 있다. 난생처음 70키로 행군을 하면서 소총을 소홀히 취급하여 학생대장으로부터 역행군을 명받고 허망하게 오던 길로 되돌아가며 가슴 졸이던 일, 화산유격장에서 유격훈련을 입소하면서 중대장의 분노를 사서 도착하자마자 선착순을 한 일, 전투사격시 학교장의 방문을 받고는 엉망의 정리로 마지막 얼차려를 받을 때의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사격에 합격하고도 30분간 면회 후 사격장을 가서 착오임을 알고 앉아서 합격자를 기다린 일, 사격을 합격하고 얼차려로 고속버스를 타고 앉은 자세로 구경 하던 일, 소총의 영점을 잡지 못해서 소총을 철모위에 올리고는 오리걸음을 하던 일, 독도법을 하러가서 농부로부터 막걸리를 한 사발 얻어 마셨던 일, 체육대회를 하며 신나게 응원하던 일, 충성 연병장 잔디 제초작업을 하던 일, 울타리 담장너머 오리를 보며 빨리 자라기를 기원하던 일, 70키로 행군시의 그 장엄한 행군 대열과 새벽에 떠오르는 해의 찬란함 속에 기운을 차리던 일, 유격에서 돌아오던 날 울려 퍼지던 팡파르 속에서의 군가 ‘전선을 간다’와 ‘조국이 있다’는 눈물짓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 깊게 안고 있었기에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부대로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힘들고 고생스러운 상황에서도 분열을 하러 연병장으로 가기도 했다. 꿈같던 특박의 기간, 임관전야의 잠 못 이루던 날, 화생방 훈련 중 가스를 마시고 생 눈물과 콧물을 흘렸던 때의 아득한 .기억, 화생방교장에서의 휴식시간에 앉아 가족사진과 편지를 뚫어지게 쳐다본 적도 있었다, 임관전의 학교장과 함께했던 축제 공연 등은 잊힐 수 없는 추억거리였다. 식목일에 있었던 토끼사냥, 새까맣게 위장 크레용을 칠하고 분대공방을 하던 곳, 아침마다 런닝을 입고 구보하던 일, 면회를 마치고 사제기름을 뺀답시고 무장구보를 하던 일, 군사대학의 여유와 군의관들의 면회는 저 세상의 아득한 일처럼 느껴졌다. 성당을 들락거리며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일, 사진 촬영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쫒아 다닌 일 목욕탕에서의 쇼쇼쇼, 옥상에서의 통닭파티, 교실에서의 군가연습, PX출입의 묘미, 학교장과의 악수, 학생대장의 정신훈화 등은 잊힐 수 없는 그리운 향수이다. 987명 가운데 하위 등수를 맴돌았다. 임관후 다음은 OBC교육을 받으러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로 갔다. 점호 시에 군화를 광내지 못해 입에 군화를 물고 밀착 했던 기합, 팬티바람의 기합, 불침번 교대의 지연으로 밤새도록 막사를 왔다 갔다 했던 일, 담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기합에서 빠진 일, 수업이 끝날 때마다 커피를 뽑아 먹던 일, 아이스크림 돼지바를 사먹던 일, 교회 목사님의 요구르트를 받아먹던 일, 광주 황금동 사건, 무등산으로 놀러갔던 일, 목포출신 아가씨랑 미팅하던 일, 외박을 나와 밤새도록 눈이 벌개지도록 VTR를 보던 일, 무등산을 행군하며 낙오자들이 구타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며 아찔했던 생각, 특수훈련 중 도피탈출 때의 무지막지한 기합, 특공훈련을 하면서 젖은 담배를 피우던 일, 야외 훈련장인 평동에 가서의 수박 사먹던 일, 사동을 가서 밤 따먹던 일, 장애물 과목의 0.3초 미달로 인해 외박이 금지되던 일, 구대장을 미친X라고 해서 고통을 당했던 녀석의 일, 돈을 잃어버린 녀석의 돈을 찾아준다고 콜롬보 흉내를 내던 일, 자대배치 발표 때의 암담한 심경이 되었던 일, PX를 돌아다니며 온갖 것을 먹던 일, 금을 선물하던 일, 영화 버닝을 외출 나가보다가 실제상황(이웅평소령의 월남)이란 소리를 듣던 일, 광주시내에서 김치찌개를 먹던 일, 독도법을 하러갔다 돌아오며 버스 속에서 노래 부르던 일, 실제의 지뢰를 겁도 없이 안전핀을 뽑던 일, 동복 유격장의 노천 목욕탕에서의 목욕, 변소청소를 하며 골탕 먹던 일, 대학동기생인 숙현이랑 모교 철학교수의 피랍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던 일, 과자를 꺼내 먹던 일, 준비태세 훈련을 하며 군장 구보를 하던 일, ‘나를 따르라’는 구보를 하며 요령을 피우던 일, 체력시험을 보던 일, 볼을 차며 기량을 겨루었던 일, 자동 사격장에서의 우중의 자동사격, 화생방 교장에서의 가스실습, 박격포를 쏘러가서 교관으로부터 구수한 군 생활을 듣던 일, 철책과 방카를 둘러보던 일, 박격포 시간의 공수부대의 얘기 중간 중간의 오침, 컨닝 페이퍼를 만들던 일, 11시까지 연등을 하며 공부하던 일, 포병교육을 받으며 여군하사를 만났던 일, 강 도하훈련을 하면서 물에 빠져 새앙쥐가 되었던 일, 종합 훈련을 하면서 전장체험, 이동 PX에서 과자 다이제스트를 사먹던 일, ‘왜’를 강조하는 교관의 말에 귀를 기울인 일, 군단장의 전사교육 시 졸던 일, 학생장과의 기념촬영, 평동에서 보전조합동훈련을 구경한 일, 쌀 한가마 값이란 무반동총 포탄을 쏘던 일, 전술훈련을 가서 밤 따먹던 일, 비 내린 후의 전원 풍경에 매혹되었던 추억, 대상을 그리며 짝사랑하던 이를 위하여 보냈던 숱한 사연, 뽀빠이 아줌마에게서 떡을 사먹던 때의 그 짜릿한 맛, M203총의 교관으로부터 들은 숱한 음담패설, 포병과의 배구시합, 타중대와의 축구시합, 별명이 살로우만이었던 구대장 고추장이랑, 김치 등을 갖다먹던 때의 일, 퍼진 라면을 먹던 일, 중추절 특식을 먹던 일, 외박 금지자만 모여 구대장 성토대회를 하며 파티를 열던 일, 구대장과의 한잔, 자대배치 이틀 전의 식당에서의 파티, 진주 녀석의 선착순 1등의 체력 법학과 출신들을 만나 정보를 교환하던 일, 부산출신끼리 모이던 일, 외박 나가기 전 장교 정복을 입고 돌아다니던 일, 주양으로부터의 연작 편지를 받던 일, 외박을 나오다 4년 선배 우사형을 만나던 일, 지적보고서를 쓰던 일, 시험에 대비한 컨닝 페이퍼를 들켜 곤욕을 치르던 일, 자술서를 쓰던 일, 훈련 12주차에 공수영화를 보며 지원하던 녀석을 부러워하던 일, 고향 자랑하던 얘기를 듣던 일, 공산주의에 대한 정신전력을 발표를 하던 일, 영화를 보며 즐거워하던 일, 신나게 하드를 사먹던 일, 탱크에 대전차 매복을 섰던 일, UDT출신 교관으로부터 숱한 무시무시한 얘기를 듣던 일, 기갑에 매료되던 일, 뙤약볕 아래서 환담을 나누던 얘기, M60 기관총 사격을 하러 가 밤하늘에 빛나는 예광탄의 위력을 구경하던 일, 수류탄을 던지러가서 들었던 고구마 얘기를 '호 밖에 수류탄' '호 안의 수류탄'의 섬뜩함으로 하던 생각, 후방사격을 하다 호형가늠자에 둘이 똑같이 눈가가 찢어졌던 일. 203포탄에 의한 불끄기. M60의 예광탄에 의한 발화로 인한 착탄지점의 불끄기 등은 정말 재미있는 추억거리였다. 자대생활로 들어가자 자대에 온 그다음 날에 화천 보병부대 중사 구타사건이 터졌다. 5일 후에 24키로 급속행군을 갔다. 소대별 측정이었는데 중대전체가 보조를 맞추어 대열을 갖추고 걸었다. 4시간안에 24키로를 주파해야 했으니 무척이나 빠른 걸음이었다. 용호리를 지나자마자 종아리가 저려왔다. 중대장이 소금과 바늘을 준비하라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쥐가나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늘로 피를 내야 했는데 바늘이 없으니 대검으로 피를 내기도 했다. 출발에서 반환점까지 겨우 대열을 갖출 수 있었으나 조금 있자 본래의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반환점이었던 구만리 탑 앞에서 대열을 가다듬고 다시 또 급속행군에 들어갔다. 나중에 보니 같이 가는 것이 최병장이었다. 주머니속에 가지고 있던 소시지를 내주었다. 부대로 돌아오니 다 들어와 있었다. 모두들 경운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온 모양이었다. 중대장으로부터 훈시와 얼차려로 혼나고 나서야 일단락이 되었다. 자대에 온지 일주일 후에 화악산 특공훈련을 떠났다. 가평부근 산입구까지 차량이동을 해서 3박4일간 계속됐다. 육사출신의 재구상에 빛나는 중대장은 치밀했고 빈틈이 없었다. 박격포랑 203을 임의표적을 주고 조준하고 거리를 판별하게 하는가하면 지뢰지대 통과요령을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실습시켰다. 집결요령, 상황조치 등을 훈련했다. 화악산은 정말 높았다. 한참을 올라갔음에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듯 느껴졌다. 조중사랑 함께 갔다. 처음으로 야전에서 반합에 밥을 해먹는 것을 보았다. 특공훈련이 끝나자 지속적인 주야간 사격과 또한 준비태세 훈련이 잇따랐다. 특공부대별 전투력측정이 예정되어져 있어 그것에 부대의 모든 총력이 경주되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전투력 측정일인 10. 31일이 왔다. 준비태세는 완벽하게 신기에 가까울 만큼 잘했다. 부대의 측정은 주특기가 걸렸다 13. 15중대가 체력검정 14중대가 급속 행군 16중대가 특공무술이었다. 벽돌격파를 하면서 많은 부대원이 다쳤다. 처음에 수도(手刀)로 격파를 하고 다음은 주먹을 쥔 정권으로 마지막은 이마로 격파하는 것이었다. 68명의 대원들이 다 해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 격파를 해냈다. 격파에 성공한 이들에게는 휴가증이 수여되었다. 손 ,이마가 깨어져 찢어진 부위를 수술용 실로 기우면서도 표정은 밝아 있었다. 손에 포상 휴가증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다친 이도 제법 있었다. 전방작전에 들어가면서 선임이었고 1소대장이었던 황중위가 그랬다. 60키로미터 정도였는데 막판에 말고개 승암고개가 고비였었다. 앞으로 20번은 다녀와야 전역을 할 것이라고 말이다. 무사히 전방 작전을 마치고 복귀했다. 3차에 걸쳐 포상휴가를 갔다. 공주사대 영문과 출신의 지원소대장이 전출 발령을 받아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로 떠났다. 아주 큰 덩치에 지휘관으로 훌륭하게 임무수행을 잘했는데 가버렸다. 이듬해인 84년이 밝았다. 부대 뒤에 있는 성불령에 올라갔다. 새해를 밝혀준 첫 햇살은 웅장했으며 장엄했다. 떠오르는 해를 보게 되었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흥분과 감동을 주었다. 자연의 신비를 보여주었다. 시무식 행군에서 중대장이 전 병력을 거의 한 시간 동안 직접 얼차려를 실시했다. 중대장은 무소불위의 왕이었고 보스였다. 어느 누구도 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총책임자였고 지휘관이었다. 소령 진급누락으로 인한 영향이 컸었던 듯했다. 겨울동안에 스케이트 대회를 열었다. 스케이트를 처음 접해본 나는 소대대항 대회에서 방법이 없어 맨발로 뛰었다. 참으로 진귀한 해프닝이었다. 대대대회가 있었고 연대대회가 있었다.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추어 1월말 전방작전을 들어갔을 때의 북한군 대남방송을 통해 다음날이 설날이고 그날이 섣달 그믐날인 것을 알았을 때 수색정찰을 하며 매복을 들어가면서 느낀 비장감이 있었다. 조국이 처한 냉엄한 현실 등을 생각했다. 중대장이 같이 들어갔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폭설이 쏟아지는 속에서 영하 29도였었다. 제2대는 혹한으로 매복 취소가 되었다. 본인 소대인 제4소대는 다음날에 투입되었다. 영하 27-8도에서의 꽁꽁 얼어붙은 추위속에서의 임무수행을 통한 강한 유대를 느낄 수 있었다. 2월 한 달은 사단기동 훈련으로 보냈다. 14중대 2기선배와 황중위는 전출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출발했다. FTX때의 추태로 인한 중대장의 진노, 이중위의 고립, 벼랑으로 내려가던 일 무전기 통을 끼고 산위로 올라가던 일, 드디어 2. 25일 출발했다. 작전을 수행하던 침투중의 간격이 벌어짐으로 인해 대열을 잃은 끝에 4소대로 인해 혼줄이 났다. 작전이 끝나고 소총의 한 부품인 복좌용수철이 없어 수소문 끝에 민가에 가서 찾아오기도 했다. 야전에서 얼음위에 침낭을 펴고 자기도 했다. 눈이 군화속으로 스며들어와 군화가 질퍽거렸다. 포위를 해서 공격명령만 기다리며 병사들을 둘러세워 놓고 담배를 피우게 했다. 파푸리 고개를 넘어 적군들의 기관총진지를 습격, 첩보수집에 막대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전투 상황도를 다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최병장과 다시 찾은 복좌용수철을 들고 뛰던 때는 정말 아찔했다. 3월이 되어 대대장이 TS 통제관을 나갔을 때의 단합된 힘은 정말 부대의 저력과 단결력을 다시한번 실감시켰다. 하늘같았던 중대장에게 경례하지 않은 녀석이 동상에 걸려 제대할 때까지 곤욕을 치루었다. 스케이트 장까지 여자친구였던 이가 왔다갔다. 화천사건으로 하사관들의 영창 루머가 퍼져 아주 자포자기의 상태로까지 되었다. 4월부터 특공3단계가 실시되었다. 중대훈련 때의 도피탈출 중에 선임하사의 생일잔치를 호화스럽게 해먹었다. 최병장과 강하사의 알력과 김병장의 불협화음, 서일병의 수통 소주사건, 상황판 분실, 급소를 차임으로 인한 부상, 기적같은 언덕위의 곰보빵, 생지옥을 경험하고 온 사람들은 상관없이 모두 취침하고 있는 것에서 부대로 돌아왔을 때의 허탈감, 서일병과 용화산에서 성불령까지 오며 수업이 비몽사몽간에 걸었다. 다음은 5월 중순이었는데 천리행군을 떠났다. 행군도중 해산에서의 중대장의 불호령, 대대장의 진노가 있은 후 행군은 순조로웠다. 화악산에서는 5월 중순이었음에도 터널속에 얼음이 얼어 있었다. 권중위의 안타까운 낙오는 눈물겨웠다. 최종적으로 춘천 배후령에 도착했을 때의 기념촬영, 화악산 입구에서의 땀에 젖은 빵조각은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화악산 터널에서는 M60을 메고 내려갔다. 입구에서 타켓을 놓고는 크레모아를 발사했다. 3개의 탄구가 생겼다. 천리행군 기념촬영이 있었다. 예전 전입초기 특공훈련을 하며 진저리를 치는 기억이 갖고 있던 화악산이었는데 반대방향에서 거꾸로 내려오니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천마산에서의 중대장의 기지는 중대원을 안심시켰다. 최병장은 제대말년에 20여알의 진통제로 천리행군의 고통을 감당해냈다고 한다. 제대말년에 낙오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애쓴 흔적이었다. 정말 멋진 녀석이었다. 부대로 돌아왔을 때의 위병소에서의 막걸리 한잔은 모든 고통을 덜어주기에 충분할 만큼 값진 것이었다. 병사들은 한시간반 이상을 서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6월에는 유격훈련이 있었다. 이중위, 다른 이중위, 김중위 등이 잘해 나갔다. ROTC 20기들이 어영부영하다가 대대장으로부터 곤욕을 치루었다. 대대장이 바뀌었다. 연대 작전주임이 왔다. 음어집체다. 매복이다. 여러모로 한참 신고를 한다며 들락거렸다. 연대에서 집체교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