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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향을 향한 여정

남도기행

by 자한형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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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기행

 

 

여름이 한창 무더웠던 8월 중순이었다. 우리는 점심을 잘 먹고 광주 인근인 곡성군 옥과에서 출발했다. 목적지였던 벌교까지 한 시간여가 걸릴 것이라고 했다. 일행은 넷이었다. 처남이 운전을 했고 동서 두 명과 함께였다. 가로수는 외래종인 메타세콰이어가 언뜻 언뜻 눈에 띄었다. 담양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에 가로수로 많이 보였다. 차량에 부착된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주소대로 찾아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엉뚱한 곳이 나왔다. 분명히 장양리라고 입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한 곳은 장암리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리저리 묻고 찾고 해서 겨우 찾아갔는데 길을 찾느라 허비한 시간이 30분정도였다. 숙소에서 좀 쉬었다가 본격적인 남도의 볼거리를 찾아 나섰다. 먼저 찾은 것은 태백산맥 문학관이었다. 벌교는 조정래님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였다. 속설에 그런 것이 있다고 했다.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하지마라. 여수에서는 돈자랑 하지마라. 벌교에서는 주먹자랑 하지마라. 목포에서는 노래자랑 하지마라.” 태백산맥은 조작가의 첫 대하소설이었다. 100쇄 이상이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원고지 16,500매라고 한다. 실제 원고지에 필사를 한 것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그것은 아들과 며느리가 필사를 했었고 독자들도 필사를 해서 3부가 더 전시되어져 있었다. 아들 며느리도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강과 아리랑까지 해서 3부작으로 되어 있었다. 작가의 인터뷰에서는 처음에는 시를 쓰다가 소설로 바꿨다고 했다. 시를 쓰기가 어려워 시인하고 결혼했다고도 하였다. 요즘은 정글만리라는 것으로 신작을 내놓고 있었다. 자신이 40세라면 중국에 건너가 사업을 한번 해볼 각오인데 그러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태백산맥은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가 되기도 했었다. 여순반란 사건에서부터 시작해서 격동의 세월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문학관에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뱉어내는 육성이 녹음되어져 있기도 했고 그것을 들어본 이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2층에는 작가의 방도 마련되어 있었고 휴식공간도 있었다. 신문에 보도된 내용이라든가 비평된 내용 등도 전시 되어져 있었다. 입장료도 꽤 비싼 편이었는데도 관람객들이 줄을 이었다. 해방이후 이념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황폐해졌던 것을 뼛속깊이 느껴볼 수 있었던 것이다. 90년쯤에 제주도에서 생활하던 때에 읽었던 듯했다. 벌교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외서면이 있었다. 태백산맥에서 염상구가 빨치산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간 강동석의 처 외서댁을 겁탈하는 부분이 있었다. 벌교는 아무래도 꼬막의 고장이었다. 식사는 꼬막정식으로 먹었다. 여러 가지로 요리된 꼬막을 맛볼 수 있었다. 참꼬막도 있었다. 일일이 그것을 까야하는 것이 무진장한 고역이었다. 꼬막을 주재료로 해서 무쳐진 것도 있었고 그냥 생으로 된 것도 있었다. 꼬막만으로 좀 밋밋한 듯해서 짱뚱어탕을 하나 시켰다. 오랫동안 맛보고 싶어 했던 것 중에 하나인 남도별식이었다. 철에 맞추지 않으면 맛볼 수가 없는 것 중에 하나였다. 추어탕과 흡사하게 느껴졌다. 맛은 더 고소한 풍미가 났다. 꼬막맛도 잘 표현되어져 있는 것이 또한 태백산맥이기도 했다. 아무튼 대단한 걸작이요 수작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음으로 간 곳은 보성녹차 밭이었다. 벌교에서 4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거의 2번 국도를 달려서 가는 길이었다. 길 양옆으로는 배롱나무가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붉게 핀 백일홍이 장관을 이뤄내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햇볕이어서 양산을 써야 했지만 녹차 밭의 숲길은 무더위를 날려주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식물원이었다. 여러 나라들의 차나무를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다음은 박물관이었고 그다음은 직접 차를 만들어볼 수 있는 곳도 있었으나 시간이 이른 탓에 다시 와야 할 것 같았다. 차밭을 가보기로 했다. 인근에 녹차 밭이 있었다. 차를 한번 맛보기로 하고 다원으로 들어갔다. 차 세트가 있었다. 일인분에 천원이었다. 아이스크림도 하나 시켰다. 다섯 번을 우려서 먹었다. 개운하고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본격적으로 차밭을 직접 보기로 하고 걸어서 올라갔다. 산등성이에 길게 늘어서 있는 차밭은 잎들이 무성해 있었다. 사진을 몇 장 찍고서 내려왔다. 외국인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차밭을 둘러본 후 다시 박물관으로 갔다. ()잎을 수확해서 차로 만들어지고 마시기까지의 과정이 모형 인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이 동서의 작품이라는 것에 하나하나 더 세밀히 눈여겨보게 되었다. 휴대용전화기로 급기야 동영상까지 촬영했다. 2층에는 역사관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곳을 나와 숙소로 돌아왔다. 열심히 준비한 식사는 전복삼계탕이었다. 전복을 손질하는데 유사가 많은 고생을 한 것 같았다. 보양식으로 그저 그만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박이일의 남도기행은 끝이 났다. 오랜만에 온 가족들이 모여 즐거운 한 때를 보낸 것이다. 아이들은 갯벌에서 게와 조개를 잡고 갯벌의 머드를 온몸에 바르면서 한껏 신이 났다. 가족 간에 이야기의 화두(話頭)는 부부중심의 삶이었다. 아이들이 시샘을 할 만큼 그렇게 부부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모든 것이 자식 중심이었고 부모중심이었던 그런 삶의 행태에서 이제는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부부가 중심이 되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가 행복의 중심에 있어야 하고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들이 그렇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게하는 원동력으로 작용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매일 싸우고 불화하고 갈등(葛藤)하고 반목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고자란 아이들이 자라난 후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자명(自明)해지는 것이다. 가족관계의 중심축이 수직적인 것에서 이제는 수평적인 것으로 옮겨져야 한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서 자식을 교육시키고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진력(盡力)을 다했던 세대였다. 그리고 자식의 봉양(奉養)을 받아야 하는 세대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자식의 봉양이나 부양을 받는다는 자체가 어렵게 된 것이다. 각자가 알아서 노후를 챙기고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다음 모임 때에는 해가 바뀌는 것도 있겠지만 식구도 더 늘어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증손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11월이 예정이라고 하니 머지않은 시기이다. 한적하고 조용하면서 번잡스럽지 않은 숙소였기에 다시 한 번 더 오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였다.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될 날도 멀지않은 듯했다.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활기차게 생활해나가야 한다. 쉽사리 바뀔 수 있는 패러다임은 아닐지라도 부부중심의 삶으로 만들어가고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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