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등불과 만해
영국에 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가차에서도 원고뭉치로 된 시를 읽었고 버스안에서도 읽었다. 식당에서도 읽었다. 낯선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감동하는지 알아볼까 두려워 가끔 원고를 덮어두기도 했다. 그는 예이츠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었다. 그를 감동시킨 원작자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였다. 예이츠는 그를 감동시킨 원고를 추천하게 되었고 곧바로 출판되게 되었으며 서구에 원작자(原作者)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타고르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타고르는 본명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라비)였는데 1961년 캘커타의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힌두교의 개혁에 앞장선 위대한 성자라는 뜻의 마하르시라고 존경받는 훌륭한 이였다. 그는 14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였다. 다섯째 형 조티린 트라나트와 형수 카담바리가 라비에게 부모 노릇을 해주었다. 어린시절 7세에 학교에 들어가고 8살부터 시(詩)를 썼다. 12세에 부친을 따라 히말라야를 여행했다.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서부평야지 산티니 케탄을 방문하기도 했다. 청년기인 78년에 영국에 유학하였지만 1년반 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1883년 22세 되던 때에 평범한 소녀 ‘바바 타리니‘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녀이름을 ‘므리날리니’라고 지어준다. 17년간 동거동락(同居同樂)하게되고 5명의 자녀를 둔다. 1890년에는 유럽을 여행한다. 그리고 여행후에는 시집 ‘마나시’를 펴낸다. 1901년에 산티니케탄에 대안학교를 설립한다. 12년에는 농업공동체를 조직한다. 그것은 인도의 정치가 간디보다 20년 인도정부보다 50년이 앞선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그에게 불행(不幸)이 연속해서 겹친다. 그의 소중한 가족 부친, 아들, 딸, 아내 등을 수년사이에 연이어 잃게 된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학교 등은 재정난에 빠져들게 된다. 1910년에 그러한 그의 울분과 고통이 응축된 시집 ‘키탄잘리’가 탄생한다. 157편의 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12년에 뱅골어로 된 일부를 번역해서 영국인 화가 친구에게 준다. 그러자 화가였던 그 친구는 문인이었던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예이츠에게 전해졌던 것이었다. 1913년에 노벨 문학상을 동양인 최초로 수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영국정부로부터 기사작위까지 받았다. 1919년 4월에는 인도의 암리차르 학살사건이 일어나게 되자 항의의 표시로 그는 영국정부에 기사작위를 반납한다. 31년에 70세 생신을 맞았다. 40년에는 옥스퍼드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향년 80세를 일기로 41년에 서거하였다.
타고르와 간디의 일화를 보면 두사람의 차이가 극명해진다. 간디가 어느날 타고르를 찾아왔다. 간디의 지지자들이 바깥에서 소란스럽게 시위를 하고 있었다. 타고르가 말했다. “베란다 너머로 당신의 무저항주의와 당신의 추종자들이 벌이는 난동을 보시오. 저것이 무저항주의 입니까?” 그러자 간디도 지지않고 응수한다. “인도는 현재 상황이 불난 집같이 위급한 상황이다. 이렇게 현실을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하고 있는 것 아니냐. 모든 사람은 인도의 실을 잣고 있어야 한다. 타고르 당신도 자신의 외국산 옷을 불태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의무이다. 내일은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자 타고르가 다시 응답했다. “새들은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노래도 한다.” 참 의미심장한 부분이고 두 성자의 차이를 대비해 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간디는 타고르에게 ‘구르데브’라고 존경했다. 그것은 ‘위대한 스승’이란 의미였다. 타고르는 간디에게 ‘마하트마’라고 해서 ‘위대한 영혼’이라 칭했다. 1930년 아인슈타인과 타고르가 만났다. 그리고 70세의 축하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당신은 온화하고 자유분방한 당신의 사상을 만방에 전하여 전인류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의 학교에서는 위대한 인물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그중 한명은 1998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티아 센도 있었다. 1916년 캐나다를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렀다. 그리고 그는 예언했다. “일본이 다른 민족에게 입힌 상처로 일본 스스로가 고통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며 일본이 주변에 뿌린 적의의 씨앗은 일본의 경제적 장벽으로 자라날 것이다.” 이때 우리나라 신문기자가 타고르에게 직접가서 간곡히 한국의 방문을 권유했다. 그시절은 한국과 인도가 똑같이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동병상련의 국가였었다. 그러자 그는 일정상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상황임을 얘기했다. 그리고 메시지를 써주었다. 그것이 그 유명한 ‘동방의 등불’이었다. 후에 그것은 그의 시(詩)가되어 더 보완된 상태로 남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만해 한용운으로 넘어가자. 그는 대학자요, 사상가요, 독립운동가요, 스님이었다. 3.1운동시 33인의 민족대표로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고 출가를 했다. 백담사에 거처를 두고 정진했다. 그러던 와중에 만주 등 독립운동지를 둘러보며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일본에서 6개월 정도를 머물기도 했으며 최린 등과도 교유하기도 했다. 그는 불교유신론을 펴내기도 했고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그는 1926년에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88편의 시가 실려있었다. 그 시집속에 세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논개와 계월향 그리고 타고르였다. 1924년에 김억이라는 분이 키탄잘리를 번역해서 내놓게 되었다. 그러자 만해는 그것을 보고 상당히 심취했었던 듯했다. 그래서 그는 ‘타고르의 시 가드니스토를 읽고’ 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가드니스토는 에스페란토어이며 정원사를 의미한다. 만해는 독립선언서 작성때 상당히 더 치열하고 강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서 육당와 의견 다툼이 있었다. 결국은 공약 3장을 말미에 넣는 것으로 낙착이 되었다.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후에 길거리에서 육당을 만났다. 그냥 허깨비가 지나가는 듯 그렇게 사람을 흘려보내자. 육당이 와서 소매를 붙잡고 만해에게 물었다. “어떻게 자네가 나를 몰라볼 수 있단 말인가?” 라고했다. 그러자 만해가 말했다. “내가 아는 육당은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만년에 심우장을 짓는다고 해서 지인들이 뜻을 모아 성북동에 집을 지었다. 남향으로 반듯하게 지을 요량이었는데 만해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게 집을 남향을 해놓으면 매일 그 꼴보기 싫은 조선총독부를 봐야하는데 내가 그꼴을 어떻게 보고 살 수 있겠는가?” 라고 해서 집의 방향이 북향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해방이 되는 광명의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민해는 우리에게 님의 존재를 각인시켰고 지조가 무엇인지 대한독립을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보여준 선각자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동방의 등불과 만해는 서로간 교분은 없었지만 뜻이 통한 선지자였고 나라의 등불에 다름 아니었을까? 요즘처럼 세상이 어려운 때에는 이렇듯 훌륭하게 삶을 살아간 사람의 발자취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