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_/ 하나의 주제를 향해서 달려가는 세 개의 각기 다른 이야기 movie column / 누비아
공포와 코미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은 두 단어가 절묘하게 결합된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영화이다. 82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이 영화는 기존에 보기 어려웠던 '공포와 코미디', '코미디 속에 녹아있는 공포'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장르를 한 데 뭉쳐 그럴싸한 영화 한 편을 탄생시켰다. 물론 영화 후반, 이 영화 속에 녹아있는 공포라는 장르답게 잔인함이 강조되어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근래에 보기 드문, 새로운 방식의 공포 영화 한 편을 탄생시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노르웨이의 숲 감독 노진수 출연 정경호, 박인수, 서윤, 조명연, 지현, 송현진, 박주환, 도균, 권태진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볼 때,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것들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자칫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요소를 놓치게 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노르웨이의 숲'도 그렇다. 표면적인 것들에만 신경을 쓰고 보면, 이 영화는 그저 영화관 한 켠에 며칠 걸리다가 방치되기 십상인, 아니면 아예 상업영화로서의 운명을 포기해야할만한 그런 비주류 잉여물에 지나지 않을 여지가 많다. 하지만, 영화를 곱씹어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한 눈에 꿰뚫어볼 수도 있다. 어떤 면을 더 잘 보느냐는 관객들 시선의 다양성과 함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눈, 즉 이해의 폭과도 관련이 있다.
하나의 주제를 향해서 달려가는 세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힘이 느껴지는 코믹.공포물
이 영화는 총 세 개의 에피소드가 각각 낱개로 독립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세 가지 이야기들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세 가지 이야기들은 모두 다 '숲'이라고 하는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이다. 여러분들은 '숲'하면 제일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스며드는 평화로운 공간인가? 아니면, 뭔가 나쁜 일을 음밀히 도모하기 위해 찾아드는 비밀스러운 장소로서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가? 물론 '숲'이 가지는 특성은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하지만, 영화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목하고 있는 '숲'의 이미지는 바로 후자이다.
'숲'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폐쇄적 특성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혹은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음밀하고도 음침한 일들이 갖는 폐쇄적 특성과 속성을 같이한다. 영화는 바로 그런 숲의 폐쇄성에 기대어 인간의 탐욕스럽고, 음침하며, 음산한 욕망과 일의 도모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코믹이라는 요소! 마치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요소를 아주 맛깔스럽게 버무려 놓았다.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은 영화 후반부를 강타하는 잔인함이다. 이 잔인한 장면들 몇 컷을 드러내고 나면, 이 영화는 근래에 보기드문, 완성도 높은 공포 영화의 반열에 이름을 올려도 좋을만한 것으로 보인다.
SCENE #1 시체를 암매장하기 위해 숲을 찾은 두 남자
이 영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총 세 가지 이야기! 그 세 가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각각의 서로 다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이른바 자신들이 '대장'이라고 부르는 이가 살해한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숲'으로 찾아든 두 남자의 모습이다. 이들은 '숲'이 가지는 음밀하고도 폐쇄적인 특성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인간의 속성과 맞닿아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에서의 찌든 때를 벗고, 상큼한 공기와 바람, 햇살을 느끼게 위해 숲을 찾는 반면, 이들은 가장 사악한 인간의 행태를 숨기기 위해 숲으로 찾아든 이들이다.
그들은 그 사악한 일을, 누구의 눈에도 띄지않고 은밀히 처리하기 위해 밀려드는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서로 담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기도 하고, 찜빵과 호빵의 차이점을 궁금해하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지만, 그들의 뇌리 속에 그 순간, 가장 뿌리 깊게 박혀있는 감정은 바로 공포와 두려움이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선 안된다는 절박함! 그것이 바로 이 두 남자가 느끼는 공포감의 근원이다.
SCENE # 2 연애질을 하기 위해 숲을 찾은 두 남.녀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감독이 주목하고 있는 '숲'의 부정적 이미지! 그 이미지를 대변하기 위한 두 번째 장치는 바로 연애질을 위해 숲으로 찾아든 한 쌍의 커플이다.
이들은 소위 말하는 카 섹스를 벌이기 위해 숲으로 찾아들었다. 인간의 탐욕스러운 욕망! 누군가의 눈에 띄지 말아야할 인간의 성적 욕망은 '시체를 매장'하는 일만큼이나 은밀히 행해지기를 원하는 속성을 지녔다. 변태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성적 욕망은 다른 이들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가장 은밀하고도 깊숙한 인간의 욕망에 해당한다. 숲이라는 공간은 이러한 은밀한 욕망을 표출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아닌가?
하지만, 이들 역시나 시체를 묻는 두 남자들만큼이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작은 소리하나에도 민감하게 열리는 그들의 귀는 실상, 그 들끓는 성적 욕망마저도 포기하고 잠재울만큼의 두려움이며, 공포이다. 그들에게 누군가의 눈은 곧 무서운 공포의 또다른 이름이다.
SCENE # 3 본드를 흡입하고, 일탈을 꿈꾸는 탈선한 고등학생 남녀 3명
대개의 청소년들은 바르고, 착하다. 그러나 일부는 어른들보다 더 무서운 폭력과 범죄를 일으키기도 하는 집단이 또한 그들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 사회만 해도 청소년, 중.고등학생도 아닌, 심지어 초등학생들이 일으키는 범죄도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청소년들의 이런 일탈을 꿈꾸는 장소로서의 숲!
'노르웨이의 숲'에는 마지막 상황으로 본드를 흡입하고 해롱해롱한 채로 춤을 추거나, 혹은 함께 온 여자애를 겁탈하려는 시도를 일삼는 남학생과 이를 말리는 또다른 남학생, 그렇게 3명의 탈선 고등학생들이 등장한다. 부모님이나 혹은 선생님, 다른 착하고 바른 친구들 앞에서는 행할 수 없는 일! 그런 일들을 행하기 위한 장소로서 '숲'은 그들의 그늘막과도 같은 공간이다. 적어도 숲은 그들에게 집이나 학교이상의 안정감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장소임에는 틀림 없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각각 전혀 상관이 없는 세 가지 상황을 제시해놓고, 이 세 가지 상황이 어느 순간엔가 뒤죽박죽 믹스되면서 벌어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공포감'을 '숲'이라는 한정되어 있으면서도 같은 공간에 모인 이들이 느끼는 극도의 공포감과 그 공포감으로 인한 파국을 치밀하고도 잔인하게 그려내고 있다. 적어도 그 잔인함의 수위는 문제될 수 있으나, 이들을 엮어 '숲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나쁜 일을 저질러 온 사람들이 서로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서 느끼는 극도의 공포감'을 현란하게 믹스해서 코믹함으로 버무려놓은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세 가지 상황이 믹스되면서 벌어지는 극도의 공포감을 숲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이용해서 잘 표현
이 영화가 똑똑한 이유는 '숲', '인간의 사악하고도 탐욕스러운 욕망과 들키고 싶지 않은 속성', '숲이라는 공간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공포감을 보이지 않는 다른 대상의 존재를 통해 배가'시킨 세 이야기의 융합 과정은 실로 완성도 높은 공포물의 범주에 포함시켜도 좋을만한 수준이다.
영화 중반부를 흐르면, 초반에 제시되었던 각기 다른 일들을 수행하려고 숲을 찾은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서로의 발자국 소리나 주위의 소리에 민감해져서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발생하게 되는 잔혹극을 코믹한 대사 + 잔혹한 설정으로 완성시켜 놓았다.
겁탈하려는 동기 남학생을 피해 숲으로 도망친 여학생이 시체를 묻으러 온 두 남자와 마주치는 설정, 연애질을 하러 온 커플 중 남자가 숲에서 나는 소리의 원인을 찾아 나선 이후 돌아오지 않자, 한없이 차에서 기다리던 여자가 도망친 여학생을 찾아나선 두 남학생과 맞딱드리게 되는 장면, 그리고 사람을 죽여 '간'만을 낫으로 쓱삭쓱삭 도려내가는 사이코패스 같은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이들 모두와 순서대로 맞딱드리게 되는 장면 등, 서로 독립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처럼 보이던 이들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 속 캐릭터들이 한데 뒤섞이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은 어떤 면에서 인간의 사악한 욕망에 대한 신의 처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미친 놈들이 자신보다 더 미친 놈들을 향해(실은 관객들이 보기엔 그들 모두가 미친 놈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이 미쳤다는 생각은 못하고, 상대가 미친 놈이라고 발악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야이, 미친 **야"를 외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미친 인간의 욕망과 죄악에 대한 굉장히 의도적인 상황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미친 놈들이 결국, 자신보다 더 미친 놈에게 당한다는 상황' 설정은 코믹하면서도, 씁쓸한 일이 아닌가?
"야이 그새 왜 시체 기장이 안맞아? 그새 키가 자랐나?"(뒤바뀐 시체를 자루에 넣은 두 남자의 대화)
"야이 병신 같은 *아, 내가 말한 D는 '뒤'가 아니라 'D'라고 이 병신아!"(숲에서 나는 소리를 찾아나선 연애질 男이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여자가 친구랑 통화하던 중, 운전을 못하는 여자에게 친구가 소리치는 말)
등, 영화 곳곳에는 마치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중화시켜주기라도 하듯, 아니면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풍자하듯 코믹한 대사들이 여러 차례 나와서 이 영화가 공포물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할만큼의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영화는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후반부 '낫질'과 같은 잔혹한 장면들이 등장해서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이런 영화의 잔인함이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지극히 평화로운 공간인 이 '숲'을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는 건 결국 '인간들의 탐욕과 나쁜 일은 몰래 숨어서 저지르고 싶어하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숲'이 지니는 상징성을 이용해서 비유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의 어떤 면을 더 잘 보고, 못 보고의 차이는 결국 영화의 전체 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측도가 된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집착하다보면, 정작 영화의 소리와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관객들의 시선과 주의가 요구되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여, 궁극엔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향해 달려가게 하는 힘이 있는, 괜찮게 만들어진 코믹.공포물이다. 영화는 말한다. 인생은 코딱지 같은 것이라고. 흘려도 흘려도 자꾸만 흐르는 이상한 눈물 같은 거라고. 호빵과 찜빵의 차이가 궁금하지만,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거라고.
이 영화의 제목 '노르웨이의 숲'에서 '숲'은 바로 그런 사람의 인생의 한 단면(주로 어둡고도 음습한, 알 길이 없는 인간의 욕망 같은)을 들추기 위한 상징성이 돋보이는 공간이다. 이러한 한정된 공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은 연출은 이 영화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담보하고 있다는 또다른 반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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