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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향기 (5권)

삶의 준비기

by 자한형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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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준비기

 

자칭해서 위대하고 거룩하다고 속칭되면서 항상 자만했고 그 누구에게도 뒤지고자 하지 않았던 청와대를 향한다는 각오로 세계인의 유토피아를 갈구하고 그 본질 궁극을 통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하는 한 인간의 고뇌와 한탄과 여정을 이에 남기노니 비록 졸렬하고 억누르지 못한 여러 감정처리가 미숙해 보일지라도 포용하면서 끝까지 숙고하면서 뭔가를 감동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주소연님께 이글을 바칩니다. (1986.12. 14)

 

추수를 끝낸지 얼마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앓아오던 지병이 도져 노모는 숨을 거두었다. 병풍처럼 둘러쌓인 마을에는 적막이 감돌고 있었지만 상가는 많은 문상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술상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너댓명의 장년이었다. 아들의 외할머니 상을 당해 산너머 가락골 마을에서 문상을 온 것이다. 마주 앉은 사람은 같은 성씨는 아니었으나 조모의 친정이었다. 조모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아들 둘을 데리고 친정마을로 돌아와 생활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계속 생활하고 있는 것이 이제 3대째가 되었다. 한참 술자리가 무르익자 엉뚱하게도 혼사얘기가 나왔다. “자네 좋은 누이가 있다는데 우리동생과 선을 한 번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한 집안은 몰락한 양반댁이었지만 관록이 있었고 명문으로 전해져 온 좋은 집안이었다. “그럼 어떻게 한번 추진해 봅시다.” 이렇게 운만 떼어놓고 일단 헤어졌으나 그것이 두사람을 맺어지게 한 시발점이 되었다. 얼마 후에 사주단자를 들고 신랑측에서 신부집으로 보내졌으나 완고한 신부측 아버지는 새로이 사주단자를 보낼 것을 종용했고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중매인으로 적합한 사람이 사주를 갖고 신부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예전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전격적으로 얼굴도 모르는 두남녀는 양가의 합의에 쫓아 결혼을 하게 되었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초례를 치렀다. 신랑은 이제 약관 20세였고 신부는 꽃다운 나이 열 여덟이었다. 동짓달이라도 매우 매서운 추위속에서 신랑신부는 혼인행사를 어른들이 시켜주는대로 따라서 했다. 신부가 아직 어렸던 탓에 1년동안 처가에서 생활하도록 배려했다. 1년의 기간이 지난 후에 시댁으로 온 새색시는 참으로 어렸고 대갓집 집안일을 처리해내기에는 아직 미숙했다. 5남매의 막내로 형님과 같이 생활했으며 주업은 농업이었다. 시숙이 딸을 많이 낳았던 탓에 식구가 12명이나 되었다. 그들에 대한 식사와 빨래를 담당하기에도 상당한 고충이 따랐고 새색시의 어려운 시집살이는 말그대로 고추보다 매웠다. 시어머니는 없었지만 형님들의 지시와 조카딸들의 뒷시중은 말할 수 없는 고역 그 자체였다. 제대로 쉴 틈도 없이 살림살이에 매달려야 했고 하루빨리 저금을 나 살림을 따로 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럼에도 여러 여건과 조건 환경은 좀체로 호전될 기미가 없었다. 1년이 지나자 하늘처럼 떠받들던 힘없던 남편이지만 그나마 입영을 하고나니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입영을 할 때는 이미 산기가 임박해 있었다. 시숙이 대를 이을 아들을 보지 못한 탓에 애를 먹고 있었다. 남편이 입영후 20여일이 지난 후에야 첫 아기가 태어났다. 남편은 훈련소에서 전보를 받고 득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3개월이 지난 후 시숙도 대를 이을 아들을 보았다. 아들을 나은 형님은 거드름을 피울만 했지만 새댁은 그럴 처지가 되지 못했다. 시아버지의 은밀한 도움이 유일한 힘이었고 생활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 생명줄이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들던 시집살이도 어느만큼의 기간이 지나고 익숙해지자 차츰 생활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지만 지긋지긋한 그곳을 떠나야겠다는 일념은 더욱 공고해 지고 있었다. 입영한지 3년이 지나고 첫아기가 태어난지 3년이 지났다. 남편은 아주 어른스러워지고 늠름한 모습으로 전역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새댁은 강경하게 빌어 먹는 한이 있더라도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더 이상 시집살이의 고통 속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실권은 형에게 있었다. 남편이 8살 때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강력한 주도권이 잃게 된 뒤에 시아버지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고장을 떠남은 조금은 돌아올지도 모를 부친의 유산을 모조리 포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알았기에 어느정도는 망설임도 있었다. 결국 성화가 대단한 아내의 권고를 쫓아 출향을 결심하게 되었고 그것은 곧바로 실해이 되었다. 새벽밥을 해먹고 의령으로 걸어서 갔다. 그리고 의령에서는 군북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군북에서는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출향에 대한 설레임으로 밤새 잠못이루며 낯선 땅에 대한 불안과 함게 또다른 감흥에 젖어서 푸석한 눈망울엔 이슬이 맺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지겨운 시집살이를 벗어난다는 해방감에서 마음이 밝아졌다. 된장과 고추장 등속과 가재도구를 챙겨가지고 네 살이된 아들을 업고 보따리를 챙겨서 들고 정든 고향땅에서 이별을 고했다. 버스에서 일가족은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과 낯선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군북에서 열차에 올랐는데 처음 타보는 기차라 요동을 이겨내지 못한 뱃속이 뒤틀려서 기어코 먹었던 음식물을 죄다 차창밖으로 토해내는 곤욕을 치루고서도 좀체 거북한 뱃속은 가라앉혀지지 않았다. 부산에 도착해서 활명수를 사먹고서야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낯선 도시생활은 참으로 힘이 들었고 먹고 살길도 막연했다. 남편은 여러직종을 전전했다. 부두 노동자에서부터 막일꾼 군수기지의 문관, 품팔이 등 숱한 고생을 하다 겨우 하게 된 것이 국수를 만들어 파는 장사였다. 오늘날엔 인스턴트 식품이 판을 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끼니를 떼우는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국수는 품귀현상을 빚었고 날개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그러던 중 동생이 태어났고 사돈뻘 되는 고학생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 동거를 하게 되었다. 단칸셋방에 5명이 사는 형태였다. 태어난 딸아이는 한여름에 태어났다. 그래도 위안이 되었고 힘이 되었던 이는 인근에 살고 있었고 제법 먼저내려와 안정이 되었던 고모들이었다. 끼니 때가 되면 일을 도와주고는 한끼씩 얻어먹기도 했는데 상당한 에피소드도 많았다. 대부분이 배고픈 시절의 섧움을 받는 것이 주였다. 고모집이 살림집을 두고 신정이라는 곳으로 집을 늘려가자 우리가 예전 고모가 살던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기와집에 방이 둘이었고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모친이 구멍가게를 꾸려갔다. 물건은 부친이 자전거로 시장에서 구해가지고 왔다. 대연동 고개에서 성지공고쪽으로 올라와서 대연침례교회를 지나 10분가량 고지를 숨을 헐떡이며 올라와야 하는 곳에 구멍가게만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부친이 시장에서 구입해온 물건을 모친이 팔았다. 한번을 명절 때가 되어 고향에 가게 되었다. 지금은 한시간 30분이면 고향에 도착하지만 그시절에는 4-5시간이 걸렸다. 바로 그곳까지 가는 차편도 없었고 몇 곳을 거쳐서 가야만 했다. 새벽 일찍 가족이 집을 나왔다. 대연동 고개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에 성급하게 무심코 엉뚱한 버스에 올라타 버렸다. 어린애 혼자 버스에 올랐으니 졸지에 미아가 된 것이다. 버스 종점에 내려 파출소에 앉아 있었다. 경찰아저씨가 물어 보는데에 따라 성명과 나이를 말하고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는 교회 옆이라고 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그 어린아이의 사고속에 집옆의 교회가 세계 유일의 교회로 알았던 모양이다. 아주 기쁜마음으로 충분히 그 교회를 알 것이라고 답했는데 그것은 불행하게도 전혀 도움이 되주지 못했다. 얼마후에 부모님들이 오셔서 잘못하면 고아원 신세를 질뻔한 위기일발의 순간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었다. 그때 이미 두 동생이 더 태어나 31녀가 되었다. 집 맞은편에는 와이셔츠를 가공하는 건물이 스레트 지붕으로 지어져 있었다. 또한 앞쪽으로 해서 집을 한 채 더 지었다. 블록을 찍어서 만들고 직접 인부를 고용해서 집을 지었던 듯하다. 방이 두 개 부엌하나 다락이 딸린 독채였다. 가게 방이라 방이 좁았고 세를 놓고 있었기 때문에 다섯가족이 살기엔 무척이나 비좁았다. 새집을 갖게 되었고 제법 멋있게 보였다. 건물을 지어놓고 신문지로 도배를 하고 식사를 처음 하던 모습이 추억속에 남겨져 있다. 집은 짓는 와중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학교래야 조그만 2층 건물이 하나있고 저학년은 군용텐트 속에 책상과 의자를 놓고 수업을 했다. 학생을 다 수용할 수가 없어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고 야구를 즐겼다. 4학년때 손영삼이란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 그는 손문관의 아들이란 소릴 들었다. 같은 반이어서 같이 과외를 했다. 녀석의 집은 아랫동네에 살았는데 과외는 우리집에서 10미터쯤 되는 곳에 있는 석환이란 얘의 집 작은 방에서 했다. 처음으로 학교외에서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은 것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어떻게 과외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부모님의 기대가 상당했고 자식교육에 대한 열의가 컸기 때문이었다. 한학기를 하고나자 성적표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아마 보통쯤 하던 얘가 우등생이 되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것이다. 한학기가 끝나고 그 과외 선생님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과외를 받게 되었는데 인원이 많았던 탓에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담임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았음에도 별로 신통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 때 당시 무시험이라는 것이 보편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입시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한해 위부터 추첨이 되어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도 제대로 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처음 버스통학을 하게 되었다. 아주 왜소한 체격에 만원버스에 시달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입석과 좌석이 있었는데 입석의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속에서 진을 빼고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등교하면 맥이 다 빠졌다. 새로운 세계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낯설고 생소한 중학교는 언제나 낯설었다. 그리고 촌티를 벗어나지 못했다. 영삼이는 수영중학에 배정을 받았고 가끔씩 만났지만 그렇게 내실있는 만남을 갖진 못했다. 70명 가까운 인원에서 키로는 두 번째로 작았다. 녀석들이 모두다 우락부락하고 소란스러운 말썽꾸러기 반이었다. 3학년은 입시를 치룬 수재들이었기에 상당히 괄시를 받았다. 처음 들어가기전에 학원이라는 곳에 가서 영어를 한달간 배웠다. 처음 성적은 반에서 10등이었다. 학생복을 입고 버스를 타는 생활에서 또다른 멋과 흥취가 있었다. 이런일이 있었다. 비를 맞고 귀가했다. 친구녀석은 옷의 바지 밑단을 다 접어올려 갔는데 나는 그런 요령이 없었다. 그렇게 얘기를 하자 다음부터는 비가 오면 바지를 접어올려 비에 젖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2학년에 진급이 되었다. 4월초쯤으로 기억이 된다. 34월 미술성적이 모두 만점이었다. 무얼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에 반공 포스타 공모에서 상을 한번 받은 기억이 있고 불조심에 관한 포스타 실기대회에 학교대표선수로 참가한 추억이 남았다. 특별반 모집이 있었는데 공작반에 들어갔다. 첫 대면이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공작반으로 직행했다. 이미 1학년때부터 가입해 있던 박철수란 녀석을 만났다. 이동엽이란 친구와 함께 공작반원이 되었다. 얼마간 돈을 내서 합판과 기타 공작에 필요한 재료를 샀다. 톱질부터 시작해서 목공일을 배웠다. 미술반은 따로 있었다. 석고를 조각칼로 깍기도 했다. 공작반에 같이 들어왔던 상업이란 친구는 엉덩이에 20대를 매타작을 맞고 탈퇴했다. 얼마만한 시련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만큼 새롭게 특이한 세계였다. 따로 미술반과의 교류는 없었다. 부장이라는 선배가 있었는데 무척이나 무서웠고 절대적인 권력으로 반원들을 통솔했다. 중학3년생인데 술, 담배로 어른 흉내를 냈다. 공공연하게 담당미술 선생님을 비방하고 다녔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텅빈 교정에 외로이 부원들만 모여앉아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심리적 압박감과 불안은 상당히 심했다. 탈선의 소굴이었고 아주 조숙할 수 있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심각한 불안의 문제가 있었고 잘못된 길로 접어든 듯한 착각이 있었다. 술 담배를 권하기도 했고 방탕한 길로 몰아갔으나 물들지는 않았다. 여름방학에 여름성경학교가 있었다. 방과후의 대부분의 시간을 공작반에 뺐겼으나 성적이 결코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항상 상위층에 유지해서 4-5등의 수준이었다. 언제 공부할 시간도 없었지만 크게 문제시 되지 않았다. 시간 많은 유휴시간을 보낼 길이 없어 집 인근에 있는 교회에 나갔다. 동네 친구들과 같이 갔는데 흥미를 잃은 친구들은 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나만 유일하게 남았다. 목사의 설교는 열을 띄었고 회개하고 감동하며 오열하는 사람들 속에서 성령의 충만됨을 맛보았고 유열을 느낄 수 있어 심적인 고통을 무척 무마시켜 주었다. 수요일마다 참석하기도 했다. 여학생들도 있었고 외국인의 영어성경강좌는 무척이나 영어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어린애의 호기심으로 여겼고 기특하게 보아 주었다. 여름방학을 고비로 부원들은 조각으로 전환되었다. 최초의 작품은 두꺼비였다. 실제 칼로 만들어 보았다. 지하여장군, 천하대장군이란 장승부터 시작해서 여러 모형의 형태로 작품을 만들어 갔다. 부산진역 앞에 홍익미술학원에 부장이 다녀서 익혀온 것을 사사받는 식이었다. 평면적인 것에서 입체적인 것으로 전진이 되어 나갔다. 한해 위 선배였던 노규환이란 분이 와서 교습하기도 했다. 당시에 경남공고에 다니고 있었다. 이부장은 170센티미터의 키에 무척 마른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었다. 집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 듯 여겨졌다. 누나를 소개시켜달라는 등의 요구로 여자들과의 교분도 유도했다. 일반학생들이 그려낸 도화지를 들고나와 고물상에 팔아서 우동을 사먹기도 했다. 주로 둘이서 매우 친했다. 웬지 모르게 뭔가가 통했고 방탕하긴 했지만 인간적인 기질이 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그 부장의 조각 실력은 대단했다. 아주 멋있게 조각 작품을 만들었고 재능있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자신이 그렇게 타락해 있으면서도 기성세대의 불의를 보면 용납지 못했고 증오감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담당미술선생이 동창회에서 기부한 기계류를 팔아서 사복을 채운 것에 분격해서 엉뚱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학교 울타리 축대 위해서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고는 독약을 구해오라고 종용했다. 감당할 수 있는 성격의 상황이 아니었다. 축대위에서 사람을 밀어버렸을 때 그것을 살인이라고 추측해서 수사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에 세상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또한 용납할 여유를 가질만큼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고 유혹했고 비밀 누설시에 배신에 대한 댓가를 각오하길 종용하는 것에서 무척이나 고민하고 방황했다. 독물을 구해 오라는 것이 요구내용이었다. 하키때 쓰는 스틱 같은 것으로 수업이 끝난 후에 홀로 선생님이 계단에서 내려올 때 주사바늘을 장총식으로 발사해서 아프리카에서 동물을 사냥할 때 하는 식으로 위해를 가할 계획이란다. 동기는 선생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을 다반사로 하는 부정을 저지른 몹쓸 선생이라는 것이다. 화분에 소금물을 주어 화초를 고사시키는 방법으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을 경찰에 가서 신고를 해야하나 독극물을 구해주었을 때 어떤 죄목으로든 감옥행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친구에게도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안색의 특이함이 발각된 기회에 부모님께 털어 놓았다. 실로 대단한 음모였고 비밀을 누설 시킨 것이다. 그러고 나니 얼마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독극물은 구해주지 않았다. 어떤 의도에서 그런 얘기를 꺼냈고 무엇을 시험하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어린 소년의 분노와 객기에 따른 조그만 발상이었고 그것이 당장 실행될 것으로 믿었던 어리석음에서 빚어진 쇼였다. 그날이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얼마후 그는 졸업했고 동의공고 야간부에 진학을 했고 최고 학년인 3학년이 되면서 부원을 지휘통솔하는 부장이 되었다. 이상야릇한 의식을 마친 후에 취임을 했다. 중도에 가입한 사람이 대를 잇는다는 것도 큰 문제였고 반발을 일으킬만 했다. 박은 일학년때부터 생활해 왔다. 그런데 부장은 계승하지 못했다. 이부장의 악행으로 인한 악영향은 부원을 감소시켰고 몇차례 모집을 시도했지만 제대로 후계자를 물색하지 못했고 부를 이끌어 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녀석이 있었는데 가정환경의 곤란으로 인해 제대로 생활해 나가지 못했다. 결국 대가 끊어진 것이다. 아주 큰 고통이었고 이것은 학교 성적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반에서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던 실력이 형편없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졸업식때에는 공로상을 받았다. 재학중에 경남공전에서 주최한 미술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것이 인정되었고 공작반 부장을 한 공로가 수상이유였다. 학교생활을 통해 그런 상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배정을 위해 추첨을 했다. 10번을 뽑았다. 극소수여서 두려움이 있었으나 신설학교에 떨어지기를 기대했고 전통이 없음으로 인해서 보다 더 학생들의 실력향상에 노력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인데 행인지 또다시 최고의 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중간에 한달간 과외를 했는데 영삼과 같이 했다. 과외 중간에 추첨결과발표를 들었다. 상당히 집에서 거리가 멀었고 또다른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당부받은 얘기는 알아서 하라라는 것이었다. 상당히 성숙된 자세와 책임있는 행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미술에 있어서의 재능은 두드러졌지만 미련을 가질 수는 없었고 조직에 가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상당히 고등학교 생활에의 적응은 초기에 힘들었다. 체벌이 심했다.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3자 뺏지를 달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점심시간마다 응원 연습을 했고 야구장에서 일과를 마치는게 다반사였다. 어색한 동작과 기어들어가는 응원가로 모교를 응원했지만 실력은 형편없었다. 라이벌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제법 어른스러운 감정을 가질 수 있었다. 전통에 쌓여진 명문의 유물들을 보면서 모방하려는 몸짓이 있었다. 퇴색된 교복과 교모가 멋있어 보였고 가방의 늘여진 끈을 어깨에 메고 등교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서울대에 수석합격자를 냈고 수영에서도 모교의 명예를 드높였고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하는 영광도 안았다. 둥그런 원형관과 나라의 훌륭한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는 자랑스러운 전통에서 상당히 멋진 캠퍼스에 정감이 갔다. 성적은 형편없었다. 한자리 수에도 들지 못했다. 적응이 상당히 어려웠다. 월요일마다 시험을 치렀고 뭉둥이 찜질은 아주 참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거리가 먼 탓에 등하교도 중학교와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일학년이 끝났을 때 이종 누님이 집을 부산으로 이주해 오는 바람에 이사를 갔고 외사촌 형도 집에 기숙을 하고 있었는데 군에 입대했다. 2학년이 되었다. 교실앞에는 파초와 분수 그리고 금목수 은목수 나무가 있었다. 담임은 또 영어선생님이었다. 아주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좋은 선생님이셨다. 설악산 경포대 수학여행이 있었다. 2학기가 되자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교회도 절교했다. 집안은 공부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박철수를 전도해서 교회에 몇 번 나오게 했는데 세례를 받은 날이었다. 모처럼 일요일이어서 회를 사가지고 와서 가족이 모여앉아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 했는데 교회에 가 있으니 아버지의 진노는 극에 달했다. 미국 선교사가 와서 같이 세례를 주었다. 거죽같은 옷을 입고 죄의 사함을 받는 의식을 치뤘다. 아주 기쁜 순간이었는데 집에 돌아오자 난리가 나 있었다. 꿇어앉아 부친으로부터 장황한 설교를 들었다. 공부를 해야 한다. 더 이상의 신앙생활은 공부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그만 출입하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장남인데 제례도 지내지 않으려고 하느냐. 어쩔 수 없는 절대적 명령이었고 지엄한 분부였다. 한없이 울음을 울었고 슬픔을 삭혔다. 몸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는지 쉴새없어 흘러 내렸다. 한시간여를 울었다. 깨끗이 잊기로 했고 용서를 구했다. 언젠가 다시 재개될 것을 다짐한 채로 보류하기로 했다. 신앙생활은 여러 가지로 실생활에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세계에 접목될 수 있게 해 주었고 알지 못하는 여러 내용에 관해 눈뜨게 해주었고 인생관을 형성시키는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항상 조용히 기도하고 간구하는 가운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었고 인간과 세계와 믿음과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크리스 마스 이브일에 각 신도의 집을 방문하며 소리높여 찬송가를 불렀고 이브날의 행사 선물교환에서 멋진 르노아르의 그림이 담겨진 사진대를 받았다. 날짜와 내가 너에게란 글귀가 너무 멋있었다. 공식화되고 배타성이 강한 것에서 빚어지는 비인간적인 여러 요소들이 있었지만 색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로인해 지능도 높아져 133이 되었다. 2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도시락을 싸서 다니며 학교 교실에 앉아서 책과 씨름했다. 뿌듯한 포만감을 가지고 구덕산을 내려올 때면 상당한 자만과 긍지를 갖고 외롭고 쓸쓸한 순간을 이겨나갔다. 아마 이때 부친은 부도를 당해서 상당히 곤란에 빠져 있었던 모양으로 극도로 지쳐있었던 듯했다. 공부에 빠져 있었기에 그런 가정사에 관해서도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어떤 석차를 올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않아 있었는데 상당한 성과가 있었던지 거의 앞에 있던 인원을 반쯤 줄일 수 있었다. 1977년 새아침이 밝았다.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작심했다. 원단에 말이다. 결코 친구를 사귀지 않겠다. 홀로 외로이 길을 가겠다라고 했고 기회는 한번뿐이라고 다짐했다. 어떠한 잡념도 물리치고 몰두해서 일단은 대학의 문을 밟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장애가 부닥쳐 온다할지라도 목표한 바를 성취시키고자 했다. 특별반 편성이 무척 신경이 갔다. 전교 68등 이었기에 한반만 뽑는다면 불가했는데 다행히 이과가 있어 두 개반으로 뽑으니 충분했다. 덕의 향기를 널리 퍼지게 한다는 뜻의 덕형관에서 수업을 받았다. 가장 햇볕도 들지 않고 화장실 옆이라 몹시 냄새가 나 좋지 않았지만 참으로 편안했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수업에 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달이 지나기 전에 평등에 반한다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우열반 편성은 근정되어져 해채되고 말았다. 자습실에 자리를 잡았다. 고색창연한 건물이었고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던 명소였다. 곧 무너져버릴 듯한 건물이었지만 상당한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었다. 매일 출석을 불렀고 찌든 고3생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일로매진하는 모습이 매일 펼쳐지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식당에 가서 국을 하나 사서 밥을 말아서 먹고는 자습실로 올라와 책을 보았다. 매일 꼭 같은 생활이 반복되었고 계속되었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토요일과 같은 날이다. 평형이 깨어졌을 때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제어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쏘다니고 싶어했고 울타리를 넘어 바로 옆에 있는 대학의 뒷동산과 대신공원을 돌아다니며 불타는 젊음의 더운 피를 식혀보려했다. 그러고나면 한없는 후회와 헛되이 보낸 시간들이 아까워 안절부절했다. 이성에 눈을 뜰때쯤이어서 여학생 꽁무니를 쫓아다니기도 했으나 별다른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마간 생활의 리듬을 찾았고 페이스를 유지시켰다. 울창한 숲속을 산책하며 울타리를 따라 홀로 걷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자습실에서의 생활이 끝나면 홀로 어둠이 깔린 구덕산을 내려오며 마음 뿌듯한 자신감과 보람을 느껴볼 수 있었다. 버스를 탔을 때는 거의 막차였다. 항상 앉은 자리에 앉아 영어책을 펴들고는 읽어가다 보면 곧 정류장에 도착하게 된다. 자정이 가까워 올때면 세상이 모두 고요에 빠져있게 되고 집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도 얘기할 수도 없었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방으로 가 다음날을 대비하게 되는 것이 평상적인 하루일과였다. 거의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1학기가 끝났을 때 문과 20등이었고 전체 30등이었다. 상당히 어려운 지경이었다. 일주일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매일 학교에 나갔다. 5월과 6월의 유혹되기 쉬운 달을 보낸 후였기에 큰문제는 없었다. 개학을 이틀 남기고 큰집 사촌동생이 부산으로 학교를 옮겼다. 2였는데 하숙을 정하게 된단다. 당장 짐을 싸들고 오게했다. 그게 어떤 문제를 야기하겠는가. 적어도 몇군데의 친척을 가진 사람이 생판 모르는 사람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한다고 했을 때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으며 당사자는 어떤 심정이 되겠는가 아무런 없는 것처럼 주장해서 짐을 옮겨오게 했다. 거의 대부분이 학교에서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별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개학이 되면서 시험을 치렀다.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왔다. 문과 7등이었다. 장학금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을 탈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예비고사까지 객관식 시험을 보았는데 성적은 아주 저조하였다. 문제의 패턴이 달라진 탓인지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했다. 차츰 나아졌지만 크게 심각한 문제로 부각이 되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렸다. 체력장이 치루어지고 예비고사를 쳤다. 본고사를 향한 또다은 각고의 행진이 계속되었다. 발표가 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빚어졌다. 원서를 넣는 것까지 모험으로 간주될만큼 불안한 점수였다. 해가 바뀌고 눈이 내렸다.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했다. 눈물이 날만큼 쓰라린 기분이 되어 눈내린 구덕산을 뒤로 하고 내려왔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12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기분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원서를 제출했다. 졸업식이 중간에 있었다. 제복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강당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정계의 쟁쟁한 인물로 후에 대통령이 된 이도 와서 첫발을 딛게 되는 후배를 위해 치사를 했다. 학교에서 내려와서는 불고기 식사와 사진촬영을 하고 영화를 한편보고 해운대에 홀로 갔다. 넘실거리는 겨울 밤바다를 보며 12년간 학창시절을 정리하며 오랫동안 삼켜왔던 응어러진 슬픔을 풀었다. 그렇게 3자 뺏지를 부러워했던 어린 학생이 이제는 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자인해야 했고 결심해야 했다. 5일후에 입시 본고사를 쳤다. 응시표가 교부될 예비소집일에 엄청 놀랐다. 입술이 새파랗게 변색이 되어버린 애가 있었다. 얼마만큼 밤을 밝혔기에 저렇게도 육체적인 변화까지 일으키게 되었단 말인가. 그렇게 무서운 생존경쟁의 장에 뛰어들었단 말인가. 경쟁률은 21이었다. 교정에서도 아니고 인근 중학교에서 쳤다. 사촌형님이 택시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시험장까지 태워주었다. 정말 놀랄만큼 두근거리는 흥분과 긴장을 갖고 시험에 임했다. 문제는 크게 어려운 것이 없었다. 아주 즐거운 기분이 되어 시험을 끝내고 나왔다. 환대나왔던 사촌동생들과 서면으로 나와서 타워링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가공할 불의 위협속에서 빚어지는 인간의 의지와 본성 같은 것이 세밀하고 밀도있게 펼쳐졌다. 일단은 결전은 끝이 난 것이다. 문을 더 이상 볼 기회가 없을 경우를 예상해야 했고 대비해야 했지만 그렇게 뚜렸한 어떤 모색점을 찾지 못했다. 고향을 방문했다. 가벼운 기분이 되어 발표일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있었다. 드디어 발표일이 임박했다. 하루 전날에 아는 이를 통해서 전화해서 알아 보았다. 합격했단다. 그러나 쉽게 판단내릴 수 없었다. 밤잠을 못잔채 잠못이루는 밤을 위하여란 원고를 쓰며 뒤채며 밤을 보냈다. 학교에 도착해서 벽보판을 보았다. 수험번호와 성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으로 기쁘다기보다는 허망해졌다. 어떻게 원서도 써주지 않겠다는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12년의 총결산인가 이제 시작일 뿐인데 하는 기분이 들었다. 80명중 16명 내에 들었다. 출발이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벌써 모여들고 있었고 서클에 가입이 되어 있었다. 동엽은 서강대를 쳤는데 떨어졌고 영삼은 인문사회계열에 합격했다. 3때의 친구들이 모여 써클에 합세했다.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이었고 자유를 찾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성취감이 뿌듯하게 쏟아 올랐다. 입학도 하기전에 써클 모임을 가졌고 술을 마셨고 담배부터 배웠다. 온통 세상이 장밋빛 세계였다. 손아귀에 온 세상이 다 들어온 듯한 충족감과 포만감에 가득찼고 더할나위 없는 완성된 마음을 가졌다.

 

3 시절에는 잡문 나부랭이를 쓰기도 했다. 속앓이를 무척해서 한의원에서 한약을 지어먹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외사촌네 집이 인근에 있어서 그곳에 가서 역기와 아령을 거의 1년가량 했다. 때때로 고향집에 가면 옻이 올라오곤 했다. 어느 가을에는 피부병으로 심하게 고생을 한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축구와 야구를 즐겼다. 학교를 마치면 볼을 갖고 놀았다. 야구 글러브가 두 개 가량 있었고 축구공도 가죽 공이 아닌 비닐 공으로 놀았다. 장독을 깨기가 일쑤여서 자주 꾸중을 듣고는 했다. 부산공고 운동장이나 대연중학교 운동장에서 자주 놀았다. 입시에 대비해서 운동장을 20바퀴씩 뛰는 일도 있었다. 사촌동생이 한명 있었는데 녀석이 하도 장난을 저질러 무심결에 밀었는데 큰 화근이 되었다. 머리가 깨어져 피를 흘렸다. 호통이 무서워 다락방에 숨어 있기도 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바둑을 즐겼던 모양이다. 동네에 항상 바둑판이 벌어지는 곳이 있었다. 어깨너머로 구경하면서 바둑을 익혔다. 처음 가르쳐 주었던 이보다 오히려 강해져 있었다. 장기는 항상 부친에게 졌고 억울하게 질때마다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내기에 상당히 약했다. 여름철에는 그런 장기나 바둑 같은 것이 커나큰 낙이었다. 3명이 있었는데 모두들 바둑이 막상막하였다. 친구형이었는데 모이기만 하면 바둑을 두었다. 절집아들 왕건, 전용준이라는 형과 찬호형 건호 들이 그 멤버였다. 팽팽한 접전이 항상 계속되었고 일승일패씩으로 상대적으로 강적과 스타일이 있었다. 어느만큼 자란 후에는 모두 헤여졌고 제갈길로 갔다. 항상 가장 좋은 조건과 환경속에서 부러움을 받으면서도 좋은 상태에 있는 줄 몰랐다. 초등학교시절에 박인식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꽤 친하게 지냈다. 담벼락을 올라가다 떨어져 머리를 다쳐 된장으로 치료한 적도 있었다. 명절 때에는 화투를 즐겼는데 항상 빈털터리로 바닥을 치곤 했다. 사촌형이 한번은 다락방에서 아랫방으로 내려와 기식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화투에 관해 방법을 전수받았다. 둘이서 같이 해수욕장에 가기도 했다. 중학시절 공작부에서 조각을 하다 왼쪽 집게 손가락을 비어서 흉터가 남기도 했다. 했다. 3시절에는 개방식 도서관 서가를 돌아다니며 책을 읽기도 했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성과 학이라고 관념짓게 되었고 무지할만큼 맹목적인 독신주의자인 척 했다. 혐오감에서가 아니라 별로 필요가 없을 듯했고 그러는 것이 보다 인간의 완성이나 자아를 확립시키는데 충분히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2쯤이었을 것이다. 고향집에 갔다. 먼저 조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와 마루에 앉았다가 잠을 자는데 아마 송아지가 태어날 때쯤이었다. 소가 진통을 시작하는 바람에 집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백부는 어딜 간 모양이었다. 백모와 조부만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 대문간에 가서 소변을 보다가 뱀을 만났다. 지게 작대기로 뱀을 후려쳐서 죽여버렸다. 소의 진통은 별났다. 조부가 소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외양간을 치우고 소를 마당으로 끌어냈다. 마당가로 나온 소는 한밤이 깊었을 무렵에야 새끼를 생산했다. 눈도 못뜬채 나온 송아지는 시신처럼 마당가에 내팽겨쳐져 있었다. 어미는 정성스럽게 혀로 갓나온 새끼를 핥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새씨는 벌떡 일어나 기운차게 새로운 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인간은 오랜시간이 지난연후에야 겨우 제구실을 하는데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거친 생존경쟁의 장에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탄생이 되는 것에서 경이감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은 그 직후였다. 소소동으로 얼마간의 소란이 있었던 것이 가라앉고 휴식을 하려하던 차에 갑자기 마루에 걸터 앉았었던 백모가 쓰러졌다. 소위말하는 중풍이 일어난 것이다. 뇌졸중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한바탕의 소동을 겪었다. 한밤중에 칠흑같은 시골밤길을 걸어서 의사겸 목사를 데리고 왔다. 온갖 민간요법이 시술되기도 했다. 뽕잎을 삶아서 자리에 깔고 물을 먹이는 등 수선을 피웠지만 좀체로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간 병고로 고생하셨다. 이제 호강이라는 것을 해야될 때였고 그 젊은 날의 고생을 보답받을만한 때가 되었는데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어린나이 시집와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골이 건장하고 장신이었던 백부에 비해 왜소한 체구였지만 아주 치밀했고 대단히 여성스러운 분이셨다. 젊은 날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여유에서가 아니라 생활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첫애기는 그곳에서 낳았다. 건장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엇는데 홍역을 하다 그만 명을 다하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계속 딸을 낳았다. 넷을 두었다. 해방이 되자 귀국했다. 그 시기를 전후해서 조모가 돌아가셨다. 상가를 갔다가 복통을 일으켜 50을 갓 넘긴 상태에서 수많은 가족을 두고 돌아가셨다. 조부가 단신이었던데 반해 건장한 체격을 가졌던 분이었다. 맏며느리로서 막대한 중책을 지게 되었다. 대를 이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던 백붛로서는 아들을 얻기 위해 후처를 얻게 되었다. 고령이 고향이었던 밀양박씨 아내를 얻게 되었고 아들을 포태했다. 그때쯤에 모친이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많은 식구들 속에서 제대로 철도 들지 않은 상태에서 상당히 고된 시집살이를 겪게 되었다. 한다리가 천리라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게 되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윈 부친은 책가방을 들고 중학생 모자를 쓰고 학업에 열중하던 동기생들을 보며 참으로 학업에 대한 한과 열망을 갖게 되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형님이 동생을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 어휘인 것이다. 백모도 한많은 삶을 살았다. 용한 의원의 약도 무익했고 점쟁이의 궂도 소용이 없었다. 투병생활이 어느만큼 된 때에는 반반이지만 어느정도 기동도 할 수 있었는데 발병후 이태가 지난 다음 돌아가셨다. 모질게 살다간 한 여인의 생이 종말을 고한 것이다. 조부는 며느리가 사망하고 난 이후 얼마 있다가 돌아가셨다. 거의 백수를 다하고 가셨다고 볼 수도 있었다. 너무 좋은 마음씨를 가졌고 야물지 못한 성정에서 여러 가지 많은 한을 가진채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3개월 가량씩 아들네와 딸네들 집에서 휴식을 취하시다 막내아들 집에서 갑자기 변을 당해 돌아가셨다. 술은 전혀 하시지 않았고 담배를 아주 즐기셨으며 구수한 옛날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오로지 순박하게 일밖에 모르던 분이었다. 몹시도 늦게 둔 자식을 귀여워 했고 사랑했지만 욕구하는 바를 성취시켜줄 수 있는 위인이 되지 못했다. 90을 넘기신 나이에도 일에 손을 댈 정도였으니 일만이 유일한 낙이었고 보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격적인 것과 사상적인 것에 대해서 피력해보자. 초등학교시절 이런일이 있었다. 아침마다 조회시간이면 부동자세로 훈시를 듣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꼿꼿하게 서서 하나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경청한다고 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남의 모범이 될만하지 않았는데 그런 것 같아 얼굴이 홍당무가 된 적이 있었다. 수줍음을 몹시 탔다. 여자 앞이라든가 별로 그럴 기회도 없었지만 그랬다. 음악시간의 가창 시험시간이 되면 마음졸여 긴장이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하루종일 화를 돋우는 친구를 만난적이 있었다. 하도 화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아 얼마만큼 참을 수 있는가. 어떻게 화를 내는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고 실토를 했다. 중학교3학년 시절에는 아주 친숙하게 지냈던 녀석이 있었고 또 한 친구는 몹시도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라이벌 같은 친구가 있었고 성석에서 겨루기를 잘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신경 곤두세우게 하던 친구가 더 보고싶어졌고 추억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요했고 처음보다는 마무리에 강했다. 포용할 수 있는 만큼에서는 충분히 양보하고자 했다. 고동학교 시절에는 이종사촌동생의 지도를 맡기도 했다. 녀석의 성정에 몹시도 부러움을 많이 느꼈다. 마음대로 화내고 응석부리고 철부지 같은 짓을 하고 제약이나 책임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적으로 발산하고자 하는 욕구를 마음껏 풀려는 그런 것에 얼마만큼 부러움 가진 적이 있었다. 책임감에서 도덕적인 의무감에서 빚어지는 욕구불만인지도 모를 일이다. 제대로 응어리진 욕구를 전혀 풀지 못한 탓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언제나 모범을 보여야 하고 기성의 관념이나 어른스럽고 젊잔게 처신해야 하는 굴레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 훗날의 어떤 불만요소로 작용되고 응어리진 채 남아 있다가 풀려버리는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언젠가 중학생때 가정방문을 왔었는데 성적이 나보다 못한 녀석의 지능지수가 오히려 더 높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항상 아래로 보고 못한 사람들 틈에서 자란 탓에 엉뚱한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엉뚱한 사념만 가득차 있는지 알 수 없다. 고등학교 시절 한녀석의 집에 간적이 있었는데 그녀석의 지능지수는 145였고 수재였는데 그집은 너무도 형편없는 지경이었다. 엄청난 충격과 회의에 휩쌓였다. 어떻게 그렇게 유능한 사람이 하꼬방같은 누추한 곳에서 산다는 말인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것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상과대학에 진학해서 기필코 이런 부조리를 척결하고자 하는 열망을 강렬하게 가진 적이 있었다. 학교앞에 몰려있는 등산객들이 자가용이나 아침마다 테니스를 즐기는 그들의 세계를 그냥 막역하고 이유없이 거부하고자 하는 배타성을 갖고 있었다.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성 이념으로 해결되기 힘든 근원적 인간의 본성이나 윤리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오래전부터 잡문 나부랭이를 썼었다. 집안에 대한 얘기랑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허구화해서 실감나게 시도하려고 했다. 줄화음에 얼마간 언급을 해야한다. 어떤 원천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는지도 알 수 없고 내성적으로 포태되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무척이나 많은 정성을 쏟았지만 10대의 이유없는 반항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이상야릇하고 불가사이하게 비끌어졌다. 어떤 탈선이나 해탈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간의 불협화음은 숙명적이고 운명적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고집이 무척 셌다. 아버지의 권위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고 가정내에서의 힘이란 무한대인 것이다. 무척 많이 부딪치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적인 갈등에서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역작용을 가져왔다. 한없이 순조로울 때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관계였고 분란이 없었으나 때때로 폭발할 때면 감당하기 힘들었다.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므로써 간단히 끝나버릴 문제도 그게 그렇게 순조롭지 못한 것은 여러 가지 마찰을 가져올 수 있는 소이를 갖고 있었다. 20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항상 동거가족이 있었다. 외사촌이나 사촌 또는 이종 등 여러 관계된 이방인이 있었고 그 사람들에 의한 영향도 상당했다. 그들의 아픔이나 외로움을 어느만큼도 이해하고 포용하지 못했다. 불화의 근원은 서로간의 고집을 양보하지 않는데 있었다.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아무런 이익없는 헛수고를 하면서도 제대로 주제파악을 하지 못했다. 모친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마음대로 전권을 행사하려는 부권에 상당한 반발을 가졌고 때때로 상당한 물의를 빚었다. 불만이 많아서가 아니라 생리적인 역작용이 있었다. 좁은 시야와 관계에서 경험적인 것에 바탕을 둔 제 판단 요소가 항상 타당하게 받아들여 지진 않는 것이다. 권력이나 힘에 의한 핍박의 상당한 응어리나 교육열은 어떨 때는 아주 좋은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으며 또 때로는 악영향을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여동생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어 그렇게 퍽 원만한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상 존경해 왔고 어느 선에서는 무척이나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항상 정직을 최상의 원리로 알도록 교육했고 주도권을 이끌어 왔으며 사회적으로도 어느만큼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순수성에서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만큼 인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지만 기성의 권위나 관념이 갖는 집착성은 상당한 작용을 하는 것이다. 왜 그다지도 반발했고 숙이지를 못했는지 알 수 없다. 자수성가가 가져다 준 자만이나 집념에서 빚어지는 외곬의 집착이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무섭고 엄한 것에서만 빚어진 기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위엄에서 작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연민에 가득찬 운명에 선의를 가지는 것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제대로 올바르게 자기세계를 구축해 가는 기성의 보수주의에 대한 항의였는지도 모른다.

건물이 세채 있었다. 방이 9개였다. 사는 사람이 거의 20여명에 가까웠다. 어떻게 그곳에서 살았는지 모를만큼 궁색한 살림살이였지만 훈훈한 인정이 있었고 더할나위 없는 편안함이 있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항상 여유를 잃지 않을만큼 풍족함을 누릴 수 있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고 생이 있었다. 거의 20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밭농사였지만 농사를 지었다. 콩을 심었고 고구마를 심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콩을 거둬 지게를 지고 내려오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엄두도 못낼 일이지만 그 아득한 옛날에는 그런적도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할 때면 제대로 삭히지 못해 안절부절 하곤 했었다. 장기를 한수씩 두다보면 이이 오를 때로 올랐고 그것을 즐기는 어른들의 심술에 더욱 화를 참지 못했다. 제대로 남앞에서 얘기를 할 수 없을만큼 수줍음을 타는 아이였고 순진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초라함을 갖고 있었다. 주위에 친구는 언제나 끊이질 않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거의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항상 작은 키 덕에 맨앞에 앉았기 때문에 몹시도 뒤에 앉는 것을 희망했으며 장대한 녀석들과 사귀기를 자주했다. 방학이면 2-3일 가량 친가와 외가를 갔다 오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도시인이 가면 꼭 동물원의 원숭이 취급을 받았지만 그곳은 그리웠다. 산들과 냇가와 하늘은 항상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처음엔 호롱불이었다. 어떻게 그런 불편함을 견디며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일만큼 비 문화적인 생활이었지만 정취가 넘쳤고 인정의 물결이 있었다. 수박밭에 가서는 한참 수박을 먹고 빨간색 변을 보고 참으로 신기한 것에 깔깔거리며 어쩔줄 몰라 하기도 했었다. 반갑에 맞아주던 백모와 백부 그리고 더할나위없이 귀여워 해주던 조부가 있었다. 외조부는 근엄했고 상당히 위엄이 있었다. 교통의 불편함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사촌동생과 함께 자골산에 오르기도 했다. 눈속의 설화를 보며 신묘한 경치에 도취된 채 태백의 줄기가 여기까지 이어져 옴을 느끼며 아득히 보이는 마을을 바라다 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학교뒤 구덕산에 올라가 뒤로 내려오다 산림감독원에게 붙잡혀 고생을 하기도 했다. 산을 무척 많이 돌아 다녔다. 곤충채집을 위해서가 아니다. 마냥 돌아다니는 것에 무척이나 흥겨워 했고 즐거워했다. 운동이나 음악에서는 상당히 미숙했고 부끄러워 제대로 재능이 발휘되지 못했다. 중학 2년때 럭비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팔꿈치나 무릎이 까지면서 스크럼을 흩트리고 방어를 하는 것에 무척이나 흥미를 가졌던 적도 있었다. 전환기라면 초등학교 4년 때와 중학 2년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처음으로 과외를 했었고 이로 인해 공부에 흥미를 가졌으며 우월감이 배태되었다. 후자에 있어서는 무척이난 탈선할 수 있는 소지가 많았던 때였다. 예민한 감수성에서 쉽게 유혹될 서 있었음에도 종교를 접할 수 있었던 이유로 상당히 순진무구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변란을 겪을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었다. 편안하고 화목한 가정 가운데 자랐던 탓에 순수성을 간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결국 선성에서 빚어졌던 모양이다. 어느만큼 때가 묻을 수 있는 여지가 많았으마 그렇게 탁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장을 맞이할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쇼펜하우워의 인생론을 읽었다. 첫부분 얼마간과 여성론에 대한 부분을 집중해서 읽었다. 책은 그렇게 많이 읽지는 못했다. 그렇게 많은 소스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열중하지 못했다. 통속적인 대중소설이나 추리소설류에 약간 빠져 들었을 뿐 그렇게 내세울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거의 말이 없는 가운데 웃기를 잘하는 내적으로 많은 난제를 간직한 이는 10대를 끝내고 20대로 넘어 가게 되었다. 더할 나위없이 곱게 단장된 채로 남겨져 있던 날들을 이렇게 넋두리처럼 엮어 놓고보니 상당히 치졸한 감상을 지울 수 없으며 치밀치 못한 산만함과 난잡함이 드러나 몹시도 부끄럽다.

 

조그마한이라 속칭되었던 이의 젊은 날을 엮어보리로 한다. 꿈만 같았던 현실은 새로운 장으로 다가왔다. 무엇을 성취한다는 것만큼 보람된 일은 없을 것이다. 진한 고통을 겪고난 후 시지프스가 올려놓은 바위덩어리처럼 그렇게 정상에 도달한 기쁨이 있었다. 얼마만큼 기다려 왔고 그리워 했으며 갈망해 마지 않았던가. 오랫동안의 숙원이 아주 미미한 부분이었지만 충만된 보람을 안겨주었다. 본관앞에 게시된 수험번호 4613을 본 순간의 희열은 따사로운 추운 겨울의 햇발을 마음껏 포옹하고픈 심정이었다. 바다를 보며 겨울 밤바다에서의 자신의 약속과 각오가 새롭게 되살아 났으며 오늘이 있기까지 노심초사 뒷바라지를 해주었던 가족과 모든이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원서도 써 줄 수 없늘 만큼 높은 벽처럼 여겨졌던 것이 우수한 성적으로 무난히 합격한 것이었다. 비록 일부분이지만 자유를 보장받는다는 것이외에는 별로 크게 와 닿는 것이 없었다. 애초의 목표대로 였다면 고시를 추구했어야 옳았지만 그렇게 순탄하지만 않았다. 여러 강좌를 들었다. 논리학을 들었으며 이곳 저곳 강의실을 들락날락거렸다. 반에는 29세의 노학생도 있었고 8년 선배도 있었다. 여학생도 한명 있었다. 고등학교 동기생은 전무했다. 6명이 상대에 갔다. 서클은 부지기수였다. 입학도 하기전에 대면식을 가졌고 먼저 입학한 선배를 만났다. 어떤이는 고무신을 신고 나왔다.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고 그 선배는 우정과 연애 학업에 대해 열중할 것을 당부했다. 오랫동안 외곬로 걸어왔던 시간에서의 해이가 왔다. 그동안 안면으로 익여져 왔던 친구들과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맨먼저 다가선 것은 우정이었다. 의기가 투합했다. 정상을 갈구하는 청운의 야망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했다. 남학생 15명 여학생 15명이었다. 고교동기들이 모였다. 여락생은 경여고와 부여고생들 이었다. 여자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단은 갇혀있었던 봇물이 터진 격이었다. 연애에도 열중하려 했으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신연령이 상당한 수준에 와 있었던 터의 여학생과는 쉽게 친근해질 수 있는 세계를 갖지 못했고 나쁜 관심에 휩쌓여 있었던 터여서 친숙해질 수 없었다. 새롭게 해후하게된 죽마고우는 떨어질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를 유지시켜 주었다. 그는 불교에 매료되어 있었고 철학을 전공할 예정이었다. 그는 불교학생회에 나가고 있었고 그를 따라 다녔다. 어떤 종교에 대한 열의나 신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악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았았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서 형식적인 집단에의 귀속이었다. 가출이라는 것을 꿈으로만 그렸고 어는 만큼의 암시만을 가졌었는데 시도가 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밤을 세우기가 다반사였다. 언젠가는 거의 보름동안을 외유한 적이 있어 집에 돌아갔을 땐 놀란 얼굴이 되어 맞아준적이 있었다. 모든 것이 신비했고 꿈만 같은 낭만과 꿈에 가득찬 속에서 우주의 이법은 변함이 없었고 세월은 흘렀다. 소위말하는 호시절이었다. 체육대회도 있었고 놀러가는 놀이도 많았으며 잔치도 자주 있었다. 통속 대중소설부터 독서열풍은 시작되었다. 하루를 여러사람의 1년처럼 긴요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고 하루에 한권씩을 탐독했다. 법형회란 회가 있었다. 고등학교 동문들의 법과대학 재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입생을 한명이었고 선배는 너무 많았다.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술잔이 권해졌다. 마침 서클에서 체육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선배들은 새로운 후배를 보기위해 자꾸 밀려들었다. 자리를 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같은 서클의 상대친구가 찾아왔다.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선배들은 방안에서 잡아당기고 동기는 밖으로 끌어내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대자로 뻗은 상태에서 팔다리가 이해관계가 얽힌 양측이 몸하나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은 끌어내는 쪽으로 기울었다. 직속 한해 선배랑 나와서는 학교로 올라갔다. 축구경기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10으로 패하고 있었다. 시함에 참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뺨을 서너차례 얻어맞고도 출전을 고집했다. 그 이후는 기억이 없었다. 그 술집에 신발을 신고 귀가를 했는데 다음날 축구 골대 옆에 구두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처음으로 과음을 했고 오바이트를 했다. 생활이 무절제하기 그지 없었다. 대부분이 1-2년 선배들의 집이었고 친구들의 집도 있었다.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피부로 느끼고자 했으며 나름대로의 주관을 세우고자 했다. 어느 선배의 집에서 처음으로 사이먼 앤 카푼클을 알았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를 들었다. 괴상하고 기괴한 짓을 너무 많이 했었다. 첫 미팅에서 만난 간호 전문대학 초년생에게 워낙 짖궂게 전화질을 하는 바람에 걱정된 춘부장의 충고어린 전화를 부친이 받아야 하기도 했다. 집에서는 오랫동안 찌든 생활 속에서 억압되었던 자아를 어느만큼 발산시키도록 용인해 주었고 크게 문제될 만한 것이 없었다. 제대로 대학다운 데를 가본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처음 대하게 되얶고 말로만 들었던 낭만과 풍류를 마음껏 즐겨보자는 심보가 있었다. 파출소도 자주 들락거렸다. 통금이 있을 때여서 자칫하면 위반하기 십상이었다. 처음에는 학교앞 파출소에서 정중한 접대를 받았다. 먼 아득한 세계로 보였던 파출소도 대학이한 신분보장 덕에 별 부담감없이 드날들 수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밤을 밝히는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온갖 종류의 세상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해 정신을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두 번째에는 집에 연락이 되어서 불벼락을 맞은 적도 있었다. 발뒷꿈치가 까지고 피부가 벗겨지기도 했지만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어떤 심정으로 저지른 행동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특색있는 행동을 곧잘하고 다녔다. 복장이나 용모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 축제가 있었고 시험이 있었지만 꼬삐풀린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6월에는 입영훈련이 있었다. 스포츠 머리형으로 교련복을 입고 10일간 신병교육대에서 교육훈련을 받았다. 빡빡깍은 머리로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는 초년병들이 무척이나 안스러웠다. 예비역 출신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별문제없이 입영훈련을 마쳤다. 이때를 전후해서 운동권이라는 것에 상당한 호기심을 발동시키게 되고 그것에의 접목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파와 비둘기파라는 것이 있는데 소위 말하는 온건과 과격이었다. 아주 무난하게 비밀스러운 것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실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에서는 너무나 무모했다. 책과 모임이 주활동이었다. 중신은 종교계였다. 개신교와 천도교가 주축이었다.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범법행위라는 죄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으로 진정한 인간의 소리가 있으며 대의를 위한 진실을 구현코자 하는 번득이는 예지를 느꼈다. 핵심처럼 여겼고 심취했다. 고교 선배를 통해서 접촉될 수 있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그것이 갖고 있는 반대편을 전혀 고려해 보지 못한 순진성이 있었다. 후세에 부끄럽지 않을 역사의 주체자로서 떳떳하게 주장하고 싶었고 외치고 싶었다. 이념서라는 것을 탐독했고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친구가 병영 훈련을 들어간 틈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선배랑 동기들과 허름한 선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인며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얘기에 취하며 인생을 철학을 논했다. 현실참여의 논의도 상당했다. 토요일이면 영삼과 함께 법당에 앉아 스님의 설법을 들었다. 선령학우회에도 참석했지만 수대생이 회장을 했는데 대단했다. 지역연고를 꼬투리 삼아 힘이 대단했다. 열심히 더할 나위없이 열정적이고 정열적으로 하루 하루를 구름위를 나는 기분으로 살았다. 무수하게 많은 선배들과 안면을 익혔고 지기를 만들었다. 거의 한학기가 끝날 즈음에 선배의 소개로 학교 인근에 산재해 있는 한 하숙집을 방문했다. 단칸방에 있었던 그는 상당히 현학적이었고 투철한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분명한 자기확신을 갖고 있었다. 심취했다. 그가 설하는 논리에 빠져들었으며 광적으로 메모를 했었다. 대학가에서 유행하는 어휘나 문제들이 숱하게 기록되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매파였다. 무신론자였지만 분명한 자기의지를 갖고 있었다. 양서조합이란게 있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 있었는데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었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의 집결지였다. 4년 선배가 있었는데 서울 농대를 수석입학한 사람이었다. 집안 형편이 무척 어려워 장학금을 받고 다닌다고 했다. 아마도 입영문제로 책방의 일을 보아주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항상 만날수가 있었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많은 얘기를 주워들을 수가 있었으며 정보의 소스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회비를 내고 가입을 했다. 유지라 할 수 있는 병원장의 아들이고 유신론자라 할 수 있는 의학도 선배가 있었는데 그는 온건파라 할 수 있었다. 대리시험으로 인해 유급을 당한 모양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사회 개조론을 폈다. 기도회가 많았다. 대부분 긴급조치 등으로 구속된 학생이나 목사를 위한 모임이었다. 그곳엔 항상 경찰과 상담 지도관들이 배치되어 분쟁이 난무했었다. 진리와 정의 그리고 자유를 찾고자 하는 이와 현상유지를 위한 질서 책임자간의 알력과 갈등 그리고 불화였다. 무수한 사람들과의 교제가 있었고 여러 얘기들을 들었다. 제대로 자기 주관도 갖지 못한채 단지 어떤 느낌이나 어섪은 추측을 통해 산만한 과격과 온건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것의 이면과 올바른 중심을 갖지 못하고 외곬로 치달았다. 기말시험을 전후해서 페인팅 사건이 있었다. 대운동장 로얄 박스에 반정부 어휘를 그려 놓은 것이다. 당시 재학생이었던 한명과 같은 교회를 다녔던 친구 둘이서 저지른 사건이었다. 벽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발견되어 지워졌으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모두 도망간 상태였으나 체포는 시간문제였다. 결국 재학생이 다 뒤집어 쓰고 주범으로 되고 재판이 벌어지게 되었다. 방학은 일찍 찾아왔다. 계획은 많았다. 10일간의 하계봉사가 있었고 갖가지가 계획되어 있었다. 10권의 책을 싸들고 갔고 외등아래서 3권째를 읽다가 문제의 초점이 되었다. 단체행동에 물의를 빚은 것이다. 엉덩이를 5대씩 때리고 맞은후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하계수련회에 갔다. 처음으로 서쪽으로 갔다.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삭발한 두 선배도 있었다. 일학년이 주축이 아니라 4학년이 주도적이었다. 어떤 다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어찌보면 감당하기 힘든 고행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님 한분이 지도를 해 주었다. 바루에 밥을 담아 먹었고 스님들처럼 예불과 좌선의 일과가 계속되었다. 그때 당시 연대에서도 왔다. 효봉선사의 사리탑을 다 돌고 있었고 절 전체를 개축중에 있었다. 환속해 있던 고은 시인도 비록 머리를 길렀지만 먹물옷을 입고 수도방 옆방에 기거하고 있었다. 구산스님의 설법은 아주 강렬했으며 잠자고 있던 자아를 새롭게 되새기게 해 주었다. 대처승들도 있었으며 외국에서 온 스님들도 있었다. 조용한 산사에서의 의미있고 뜻있는 56일은 꿈같이 흘렀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우쳐 주었고 선의 진미를 느낄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서릿발같은 진노와 꾸짖음은 젊은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계식도 있었다. 법정과 고은의 설법이 있었다. 마지막날의 조계산 등정과 계곡 연못에서의 수영 목욕은 언제까지나 가슴 가득히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개학을 얼마남기지 않은 8월 중순이었다. 예의 그 페인팅 사건으로 구속중인 학생들 위한 기도회 소식이 전해졌다. 조합에서 여학생 두명과 같이 갔다. 부근에서 떨어졌다가 산위에 우뚝 솟아있는 교회는 오랫동안 가보지 않은 먼 세계였었다. 주위는 한적했다. 주위를 빙둘러 보았으나 들어갈 수 있는 재주가 없었다. 교회를 돌다가 상담지도관에게 붙들렸다. 급기야 몸수색을 당했고 애궂은 학생증만 빼앗기고 말았다. 학교로 찾으러 오라고 했다. 충고를 듣고는 학생증을 받아왔다. 조합일을 보던 선배가 입을 하기전에 집을 방문했다.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다. 그는 후에 걱정을 많이 했었다는 후일담을 남기고 있었다. 몸소 농사일을 체험했었고 실감나게 부조리를 느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정치한 이론적 체계나 이데올로기 보다 생활에 뿌리를 둔 감성을 강조했다. 2학기에 들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고향엔 방학중에 다녀왔다. 2학기에 들어간지 20여일이 지난후였다. 금요일에 조합에 가서 국사책을 빌렸다. 알림판에 예의 그 페이팅사건이 재판에 계루된다는 정보가 적혀있었고 팜프렛이 있었으며 조합의 행사를 알리는 팜프렛이 있었다. 별다른 고의나 유포의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작의에서 몇부를 들고 귀가했다. 다음날 신발을 바꿔 신으려고 동문 서클 파크에 갔는데 친구가 없어 예의 그 선배 하숙집에 찾아가려고 후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수위 할아버지에게 제지를 당했다. 담바속에 넣고 있었던 것을 보자는 얘기였다. 한창 실갱이를 하다가 걸음아 날살려라고 도망을 쳤다. 토요일 한낮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하수구에 유인물을 버렸으나 그것은 눈감고 아웅하는 식이었고 뛰어야 벼룩이었다. 스케줄은 꽉 짜여져 있었다. 상담지도관실로 붙들여 들어갔을 땐 고무신도 한짝밖에 걸쳐져 있지 않았다. 부친이 호출되었고 심문이 여의치 않자 경찰서로 호송이 되었다. 그곳의 전문가에 의해 심문을 당했다. 어처구니 없는 상태가 벌어졌고 악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에게 사채는 심각했다. 밤늦게까지 심문을 당하고는 다음 또다시 갔다. 그후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상실되었다. 자유라는 날개는 쓰라리게 아픈 상처를 남겨준 채로 떠나가 버렸다. 손아귀에 든 그 고운 보석을 날려버린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허망함에 휩쌓였다. 한달을 끌다가 결국 휴학으로 결정이 되었다. 소속의 욕구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으리라. 무지한 진통과 아픔을 가져다 주었다. 결국은 세월이 약이라는 것에 젊음의 끓는 피를 식힐 수밖에 없었다. 새로이 입시를 해서 원대한 포부를 실현시켜라려 했다. 한달여를 허송세월한 후 고향에 올라갔다. 자연과 순박함을 벗삼아 지내는 것도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12월 초 쯤이었다. 예의 마을 뒷산에 올라갔다. 자주 고향을 방문하면 옻에 걸리고 해서 옻나무를 잘랐다. 한참을 자르고 올라간던 중에 낫에 손가락을 베였다. 검붉은 피가 그침없이 솟았다. 지혈을 하고는 내려왔다. 조그만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관사에 사촌 누님이 살고 있었다. 그집에 가서 간단히 치료를 했는데 결국은 손가락 치료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선거열풍이 불고 있었다. 인근 병원에 갔는데 무척이나 속이 상해 접수계 아가씨에게 몇마디를 한게 화근이었다. 엉뚱하게 빗나가 있는 상태에서의 불똥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담당의사는 간단한 치료 마치고 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간곳이 정신병원이었다. 일주일간의 치료로 나았다. 퇴원을 해서는 집에서 책을 보면서 세월을 보냈다. 한해를 보내는 송구영신의 날이었다. 친구와 영화를 보았다. 소림사 36방이라는 것이었다. 무뢰한 청나라 군사에 의해 살해된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소림사에 들어가 무예를 익혔다. 끝내는 원수를 갚는다는 얘기였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밤새 불면의 밤을 보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다. 깊어지는 상념에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다. 다음날 곧바로 새로운 병원에 갔다. 강박관념과 피해의식을 떨쳐버리기 위해 치료를 받았다. 전번 병원보다 병원시설은 형편없었다. 구구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감옥과 별다를바가 없었다. 2개월간 약물치료를 받았다. 주일이면 모친이 면회를 오곤 했다. 대학생활을 새로 시작할 요량으로 복학을 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얼마후에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는 가족만이 살게 되었다. 큰 대지에 멋진 정원이 곁들여진 단독주택이었다. 장이 세 개여서 동생들이랑 같이 사용했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소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2학기에 들어 복학을 했다. 그로부터는 날개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려야 했다.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1년이 늦어졌다. 얼마후에 정치적 변동이 있었고 너무나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메워질 수 없는 젊은 날의 아픈 상처가 오랜시간동안 옹이가 되어 남겨졌다. 한번의 탈선은 쉽게 치유되는게 아니었다. 일체의 행동에 제약을 받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파랗게 꿈길처럼 아롱졌던 대학이란 곳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위한 세계로만 남았다. 그 자신만만하던 의기와 패기가 사그라 들었다. 결국은 바위친 계란의 무참한 좌절의 맛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괴리와 고독은 깊고 진하게 여울졌다. 두 번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픈 상흔이 되어 너무나 큰 아픔이었지만 굴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투혼과 의지로 다시 설 날을 위해 고군분투하고자 했다. 세계가 더 이상 포용되지 않았다. 너무 쉽고 안일하게 자기 뜻대로 세상은 돌아가 주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더할 나위없이 친숙하게 지냈던 사람들과도 소원해졌다. 움직일 수 없는 명약관화한 관념에 의해 평가되어지고 판단되어져야 했다.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지난날이 되어버렸다. 천진난만한 순수성과 선의로 세계를 능히 떠받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너무나 큰 오산이었따. 무감각해졌고 무심해졌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천편일률적인 생활 속에 빠져들었다. 휴교령이 내렸고 학업은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그런 속에서도 학업에는 열을 올리지 못했다. 불안한 공기와 세상속에서 조용히 침잠해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해가 바뀌고 학년이 올랐지만 지난날의 그 활기를 찾을 수는 없었고 굴레지워진 례테르는 고착된 상태로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더 이상의 탈선과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다. 조용히 살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5공화국이 만들어지고 광주사태가 꼬리를 물어 또다시 학교문이 닫혔다. 그런 상태에서도 서클은 학교앞에서 딸기잔치를 했으며 우스꽝스런 세태를 조소하며 한탄했다. 민주화의 열기가 불면서 이념지하서클이 양성화되었고 공공연하게 활동을 재개했다. 노동문제연구소라는 곳에서 제법 발표와 토론 독서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2학기 접어들면서도 학교는 조용하지 못했다. 기말시험때 쯤에 사촌 여동생의 소개로 교대여학생을 알게 되었다. 굵은 금테 안경을 쓴 아가씨였다. 동래여고를 나왔고 같은 동네에서 자란 탓에 잘 알고 지낸 아가씨라고 했다. 그 다음날이 기말시험날인데 그렇게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상당히 자유분망한 아가씨였고 쾌할한 여자였다. 31남의 장녀인 사람이었다. 매우 날카롭지는 못해도 똑 소리가 날만큼 자존심 강한 여자였다. 다음 일주일 후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만남은 계속되었으나 사시준비관계로 시험날 만나기로 하고 당분간의 결별을 선언했다. 활기를 엉뚱한 방면에서 되찾기 시작했다. 여자를 만나는 것에서 위안을 구했고 1년간을 기쁜 가운데 어느만큼 즐거움을 구가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철학관을 찾았다. 과연 발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냐 못받을 것이냐의 답답함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교회를 나가고 있었다. 철학관 주인의 얘기는 발령을 확신시켜주었다. 허리를 다쳤고 어머니에 대한 염증에서 정신병원 신세를 진적도 있었다고 했다. 여러사람에게 소개를 시켰다. 여럿이서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손톱만큼도 엉뚱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 여자에 대한 혐오증내지 연민에서 제대로 인식치 못한 때였기에 정신적인 교감만을 구했다. 정신적인 만남을 원했다. 탁구를 치러 갔었는데 그곳에서 편지를 주었다. 사연이 아니었다. 자작시로 상당히 장편의 얘기였다. 그 의미를 캐취하지 못했다. 그니는 교사로 생활하고 있었다. 대단한 재기와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교직을 수강하고 있던 상태였기에 아주 공통된 얘기를 많이 할 수 있었다. 기타를 잘쳤고 노래를 즐겨불렀고 많은 남자를 알고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줄곧 그녀를 사모한 소아마비를 앓은 오빠같은 이가 있어 대좌할 기회를 갖고자 했는데 제대로 매치가 되지 못했다. 자유분방한 자기세계를 갖고 있었으며 거리낌이 없었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사연들이 오갔다. 술도 곧잘 마시기도 했다. 10월엔 휴일을 골라 인근 야외에 놀러가기도 했다. 물속에서 오래 서있기를 하는 등 무척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날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1년이 지난 후였으니 참으로 냉랭하기 그지 없었고 무뚝뚝한 선머슴 그 자체였다. 편지 받는 낙을 가지고 학교를 나갔다. J S 라고 쓰기도 했고 King이라기도 했다. 한주일에 꼭 한통씩은 왔다갔다. 어떤 강연회 티켓을 구하게 되어 일주일간 연속해서 만난적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면 술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늘어 놓았다. 직접적인 개인의 감정이나 의사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알고자 했고 이해하고자 했다. 엉뚱한 방향에서 여자를 알게되었다면 큰 착각이고 모색되었음에 오로지 지성을 갖춘 여자가 들고올 정신적이고 보다 예지화된 공통의 유대를 갖고자 했으나 결국은 실패작이었다. 위치자체가 맞지 않았는지 모를일이었다. 고별 선언이 있었고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1년만에 헤어졌다. 비가 내렸다. 현란한 불빛속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의 부루스를 추었다. 집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 안타까웠고 허무했다. 얼마후 그니는 결혼식을 올렸고 득남의 소식까지 들려왔다. 큰 충격까지 줄 것은 없었으나 엄청난 빗나간 모색의 파란을 겪어야 했다. 무서운 각오를 하고 산사를 찾다가 바닷가로 갔다. 사촌동생과 공부를 같이 했다. 한적한 바닷가의 절이었다. 제법 그런대로 못해낼듯한 타지생활도 어느만큼 익숙해질 수 있었다. 초식의 식사와 풍경소리에도 어느만큼 익숙해질 수 있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깊은 밤가운데 침묵하는 바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각오와 결심을 다져갔다. 그 중간에 결혼식이 있었고 쓸쓸하게 책장을 넘겨야 했다. 개학이 되자 너무 늦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 맞는 것 같았다. 재정비하기에는 엄청난 시간을 보낸 후가 된 것이다. 도서관에 앉아 별밤을 벗삼았으나 너무나 촉박했고 시간이 없었다. 실패와 좌절의 쓴맛을 진하게 겪어야 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빈 공간이었고 입영한 친구들만 있었다. 정신없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훗날 되돌아 보았을 때 전혀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었는데 그렇게 알차게 보냈음에도 소득과 성과는 거의 없었다. 늦었지만 불꽃을 태우기 위해 미팅도 하기도 했으며 젊은 날의 낭만을 간직하고자 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면 꼭 빨간 불빛의 술집을 찾아들었었고 빈털터리 신세일망정 호기롭게 젊음을 핑계로 끓어오르는 욕망의 불길을 잠재우고자 했다. 2학기를 개학하자 거의 종식되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동생까지 학교에 같이 다니고 있었으니 무척이나 힘든 상태였는데 지하철 개통관계로 집이 수용되어 대연동으로 다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한시가 바쁘고 촉박했지만 조용하게 강물이 흐르듯 지나가 버렸다. 교생실습까지 11월에 걸렸다. 한달동안 넥타이를 매고 졸업논문과 중복되어 문제가 많았다. 그런 와중에도 취직시험을 치렀다. 조흥은행이었는데 불경기였던 탓에 경쟁이 무척 치열했다. 오랜만에 가본 서울이어서 시험장소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골목길을 헤메다가 내리는 보슬비를 피할 요량으로 들어선 곳이 밤의 꽃을 파는 곳이었다. 밤새 뒤척이다 다음날 시험에 응했다. 마땅한 사람이 없어 교생실습 중에 연구수업을 했다. 여러 가지 입에 발린 공치사가 있었다. 거의 다 끝난 상태에서 건진 소득은 전무했다. 아름답고 황홀했던 순간이 다 지나가고 있음에도 성취시킨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12월에 대학원을 응시하러 갔지만 제대로 준비가 안된 상태였고 아무것이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상은 호락호락 그런 방만한 사념을 용납해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정신문화 연구원을 생각했으나 겹쳤다. 결국은 군을 선택하기로 했다. 체력시험을 하루 치르고는 삼일동안 몸살을 앓았다. 허무했다. 지푸라기도 잡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새해가 밝았다. 공군을 치러갔다. 상당히 사고력을 요했고 난해한 문제였다. 마지막 한가닥의 희망은 결국 소망한 바를 이루었지만 공허했다. 입영날짜가 결정되자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되고 말았다. 사립고에서 권유가 왔다고 연락을 받았으나 발아들일 수가 있는 입장이 못되었다. 친구의 권유로 아르바이크를 하러갔다. 육체 노동을 하며 풀죽은 무능한 자신을 학대했다. 생활의 일단면을 볼 수 있었다. 삽질을 하며 위험스러운 단순노동을 일주일간 하면서 많은 것을 느껴볼 수 있었다. 이제는 다가오는 그날만을 기다려야 했다. 친구들을 불러 간단히 술자리를 마련했다. 생일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꺼지지 않는 정염의 불꽃을 사그러뜨리고자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 하고자 전집을 읽었다. 가난한 육체 노동자들의 세계가 많은 위안이 되었고 극한 상태에 빠져있는 인간군상의 적나라한 원초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송광사에서의 각고와 파란많은 생을 살아온 것에서 그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일지라도 감내할 수 있으리라 다짐했다. 운명의 그날까지 담담한 가운데 어느만큼의 생활을 정리하면서 보냈다. 5년의 대학생활을 정리하면서 느끼는 것은 참으로 무모하게 보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설계를 가지고 뭔가를 성취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좀체로 이렇다할 소득을 남기지 못했다. 프래쉬맨의 시절의 그 활력과 열정을 계속시켜나가지 못했고 단절과 공백으로 인하여 정기를 잃어버렸다. 맥을 제대로 찾거나 집지 못한채 흘려보내고 말았다. 많은 것을 해보고자 했고 더할 나위없이 열심히 주어진 삶을 살아 가고자 했으나 별반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78년 여름에 타동문 서클의 한녀석이 비진도에서 익사했다. 일박 2일의 MT 중에 벗어나 묘소를 찾았다. 그렇게 친하게 지낸 사이도 아니었지만 두명의 친구와 함께 갔다. 무슨 전생의 업을 갖고 태어났기에 제대로 피지도 못한채 시들어 버렸는가 대학 3학년 때에도 고시를 한답시고 자취를 하던 녀석이 연탄가스 사고로 죽은 일이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했다. 젊은 날에 저세상으로 간 한많은 생을 보았고 숱한 죽음이 버려져 있는 곳에서 인간이 느껴야 되는 비애와 아픔을 맛보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학기중에 입영하는 바람에 무척이나 쓸쓸하게 보냈다. 전역을 하고 만난 사람들과는 큰 갭을 느낄 수 있었다. 외톨이가 된 기분으로 경원시 되었고 소외된 채로 남겨져 있었다. 많은 여행을 다녔다. 경남일대에는 대부분 다 갔었고 즐겁게 보냈으며 보경사란 곳에 두어차례 가기도 했다. 자유분방하게 젊음을 발산하면서도 내면에는 깊은 고독과 우수가 남겨져 있었다.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교제의 범위와 폭도 몹시 한정되었다. 변해가고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힘차게 도약해야할 때가 되었다. 마음은 정의와 대의를 따르고 있었지만 현실에 무척이나 집착하게 되었다. 무엇이 정도인가를 찾고자 했다. 졸업을 얼마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 경영학과에 복학해 있던 1년성배와 얘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별로 쌓은 지식이 없고 실패에 대한 상당한 불안을 갖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좌절과 실패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헤쳐나가야 하는 고충과 어려움이 안고 있는 제약성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졌다. 좋은 데로만 선의로만 만인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속에서 여하히 자기 뜻을 펼쳐갈 것인가가 문제였다. 거추장스럽게 눈살찌푸리게 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너무나 기대와 촉망을 받은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끝은 그렇게 멋있게 장식되지 않았다. 무섭게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린 복학한 이들에게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하던 회의도 이젠 얼마만큼 납득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철학논의는 주로 영삼의 방에서 논의되었다. 입학 얼마후에 이사를 가버렸고 마찬가지로 이사를 갔지만 자주 얘기를 나누었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였건 초창기에는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을 듯이 떠벌렸고 그만큼 우의를 돈독히 했다. 면회도 한번씩은 꼭 갔다. 논산에 갔었고 영천에 갔으며 창원에 갔고 또 파주까지 가기도 했다. 성적은 형편없었다. 2학년 2학기 이후부처 제대로 페이스를 찾았고 놓은 점수를 받았다. 학과애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못했다. 아주 쓸쓸하게 보내면서도 아주 기쁜 것은 교직을 듣는 것이었다. 교육철학이나 심리학 등은 아주 흥미를 촉발시켰으며 젊은 여교수의 재기발랄한 강의는 참으로 명쾌했고 멋이 있었다. 더할 나위없이 회한이 남기도 하고 제대로 성공적으로 보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만족할만큼 뜻있게 영위했던 소중한 순간이었다. 도꾸가와 이예야스에 사로잡혀 한달간을 파묻혀 산적도 있었고 산기풍자의 대벌에 빠져 14권을 독파하기도 했다. 박경리님의 토지에 빠져 있기도 했다. 미친 듯이 몰두하면서 자신을 불태울 때면 무척이나 큰 희열과 안락이 있었다. 다양하게 많은 것을 접해보고자 했고 여러 가지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잡동사니가 되어 제대로 깊게 어떤 외줄기를 파헤치지는 못했지만 더할 수 없는 열정과 성의를 갖고 임했었던 시간이 아니었는가 했다. 자유롭게 젊음을 구가하고자 했으나 제대로 자신을 다 발산시키지 못했고 정열을 불사르지 못했다. 어떤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과감히 헤쳐나갈수 있는 용기와 저력을 체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자의 죽음처럼 초지일관하지 못한 어섪음이 있었지만 인간존재의 나약성이란 것으로 변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꼴이 되고 말았다. 너무나 안타까운 상흔이 되어진 채로 남았다. 오랫동안 지워버릴 수 없는 멍애가 되어 간직될 것이다. 철학의 현실화를 시도하고자 했고 멋진 신세계를 창출하고자 했으며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처럼 그렇게 유토피아를 갈망했지만 나름대로의 체계화 구조를 갖추지 못한채 아쉬움만 남겨두고 상아탑의 은둔처를 나와 내동댕이쳐진 현실에 살아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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