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신
인간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 내지 한계에서 탈피하려고 하는 노력의 결정이다. 인간은 영과 육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이성과 감정 또는 본능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인간의 상호 모순성은 인간의 궁극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이성을 가지지 못할 때를 위하여 목을 맬 줄을 준비해 두라는 철학자의 명언도 있다. 우리가 궁극으로 추구해 나가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며 그것은 어떠한 절대성 때문에 우리를 구속하고 속박하는가. 우리에게 지워진 양심의 존재는 이성에로의 추구를 정당화 시켜 주는가. 그것은 무엇을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철리 속에 내재해 있는 그 무엇이란 말이다. 인간사회가 가지고 있는 영원의 수수께끼의 하나는 원칙과 예외이며 또하나는 완전과 불완전 그것에서 유래하는가. 그것에서 도출되는 것은 신과의 문제이다. 우리는 그것을 절대의 것으로 개념지우고 완전으로 관념지운다. 그것에 예외는 없고 모순도 없으며 다른 이단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의지 또는 완전무결한 절대성을 간직하고 있고 근원성을 지닌다. 인간은 도저히 그와같이 될 수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어쩌면 종교와 학문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신과 진리를 구별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은 종교에서 말하는 신학상의 것이고 진리는 모든 학문에서의 근본이 되는 것이디 그것이 구별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신과 진리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신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지한 것으로 완전한 인격체로서 인간과 대비되는 것이다. 진리는 철학적으로 보편성을 지니고 절대 타당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삼라만상의 시원이 되는 궁극의 실체를 지니는 것을 말한다. 소위말하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의 본질을 얘기한다. 기독교에서의 신에 대한 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의 등의 3신의 삼위일체에 대한 것으로 개념지운다. 전지전능한 것으로 표현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는 의욕만은 일을 완성시킬 수 있는 완전한 절대적 존재를 말한다. 그에 대한 인식의 그의 독생자 예수에 대한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다. 어느정도 감지해 볼 수 있다. 의문시 되는 것 모든 세상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믿도록 하지 않았는가. 즉 왜 이브에게 선아과를 먹게 했는가. 그것에서 하나님은 이미 세상을 상정했고 선악을 이미 예정해 둔 것이 아닌가. 왜 에덴의 동산에서 인간을 추방시켰는가. 인간의 유한성을 가지게 했고 인간에게 지워진 굴레 고통 번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된다. 여기에서 종교인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법칙과 같은 신의 법을 관념한다. 신에게도 어느정도의 한계성 내지 제약을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이고 모순이지 않는가 하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 내지 선택권의 부여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에게 하나님에게로의 선택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자신의 선택에 따른 자신에로의 믿음을 더 위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간에게 어떤 여지로 남겨두고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럼 과연 그러한 것을 하나님은 아시는가 하는데 초점을 두어보자. 우리 인간 중에 어떤이는 하나님에게로 믿음을 둘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소위 말하는 예정설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인간자신에 의한 어떤 신의 선택에 관하여 인간에게의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럼 신도 인간과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것에서 말이다. 물론 인간을 신과 동등하게 관념하는 것은 아니고 그 속성에서의 조그만 부분에서의 비슷한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되돌아가서 예정설에 의한다면 인간의지에 의하지 않는 것이 된다. 즉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조금 부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 또는 예정에 의해 지정된 자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 그런데 여기서 각자의 단독의 의지가 아니다. 인간의 신에 대한 믿음의 갈구와 신의 인간의 신에 대한 믿음 즉 자율과 타율의 일면 상반된 것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의지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이 인간 자신을 믿도록 한 것의 차이에서 신은 전자를 택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금 상태의 인간이 즉 현존하는 세계인들에게 어느정도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자유의지나 선택의 자유 혹은 이성에 신에 대한 불신과 부정을 책임지울수 있겠는가. 즉 신이 창조한 인간은 피조물이고 신의 의사대로 움직이도록 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어찌보면 신의 실수 혹은 과오인가 그렇지 않다면 피조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귀착이 되는가. 예를 들어서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든 생산물이 제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결함 혹은 모순으로 인하여 그 목적한 바대로의 효용을 발휘하지 못할 때와 같은 경우이다. 이 문제는 이정도로 문제 상정에 그치고 다음으로 넘어가 보자.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만물의 근원 즉 본질적 요소의 발원지 인간만사에 내재된 그 근원에로의 복귀를 위한 것을 인간성의 목표로 본다. 쉽게 얘기하자면 석가모니의 행동 즉 불타의 그 자신 그가 행한 수행의 결과 얻어진 성불을 위하여 모범을 보인 그것에 우리는 따라야 하고 자신을 그와같이 해서 그 어떤 진리에 접근하려고 한다. 인간의 모든 번뇌와 세속의 욕망을 벗어나서 석가의 도를 깨우치도록 하는 것에 그들의 신앙의 중심을 두고 있다. 즉 그들은 석가와 같이 되는 것에 지상목표를 세우고 있다.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고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인간 본연의 실체를 깨닫고 그것에 접근하도록 노력하고 성의를 다함으로 인해서 인간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종교가 가지고 있는 현실과의 관련을 찾아보자. 궁극적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만사와 만물은 인간 자신이 갖고 있는 의식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즉 종교의 가장 중요한 면은 인가들의 현실의 혹은 미래의 당면한 고통이다. 고뇌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나 수단이라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현실과 유리된 좀 더 깊이들어가서 인간이 갖고 있는 각가지 문제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제요점에만 종교의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그것은 종교의 일 단면이나 속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왜곡하고 인간의 제문제를 따로 떼어놓고는 종교는 의미가 없다. 현실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충만되게 하는 점에 종교가 지니는 가치성의 일면이 있다는 것이다. 천당이나 극락 등 이상세계도 현실과 연결되어지지 않을 때 공허한 것이 된다. 물론 인간을 전제하고 인간의 제문제점이나 복합체로서의 인간 존재의 다양성은 그 근간으로 한 후의 일이다. 최근들어 부쩍 그러한 경향들이 많아지고 있다. 신이라든가. 절대적 보편적 진리에 관한 엉뚱한 시도가 줄기차게 일어나고 있다. 물론 한국내의 일인 것 같지만 말이다. 인간적이고 너무 어리석고 실패한 신을 정신적 지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유무는 그렇게 확실하게 결론지울 수 없다. 어떤이는 우리가 신이라 관념하는 것에서 신의 실체를 증명하려 하기도 한다. 허나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의 공상 속에 관념속에 형성되어져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적극적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서 혹자는 그것을 애매무라고도 한다.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와 같은 상태를 일컫는 논리학상의 용어라고 한다. 이와같은 신에 대한 혹은 종교에 관한 고찰이 얼마만큼 유익한가. 그것과 연관되는 인간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규명될 수 있다. 인간은 크게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그리고 그 중간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혹은 종교인과 비종교인으로 구별될 수도 있다. 신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 하는 것은 인간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