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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연재물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9)

61년생 정동분5

by 자한형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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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정동분 5 : 학교 밖 소녀의 생애/꼬마목수추천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게 없다. 머리가 비상한 것도, 끼가 넘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나에게도 개미 똥구멍만 한 재주가 하나 있다. 글쓰기다. 그 덕에 여태껏 먹고산다. 하여, 미천한 재주나마 갖게 해주신 부처님, 알라신, 예수님께 늘 감사 인사 전한다. 작은아들이 이 개미 똥구멍만한 글재주로 기자 일을 할 때 동분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그래도 내 핏줄 물려받아서 먹고사는 겨. 니네 아빠 닮았어 봐라. 글은 무슨. 엄마가 그래도 한때 문학소녀 아니었냐. 너 임신했을 때도 책 얼마나 많이 읽었다고. 다 그 덕에 네가 글을 잘 쓰는 겨.”

1988, 28살의 동분과 두 아들.

내 첫 책이 나왔을 때도, 다시 두 번째 책이 나왔을 때도, 동분은 표지에 적힌 송주홍 세 글자를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니가 그래도 엄마 닮아서…….”

그 말에 나는 차마, 내가 10대와 20대 때 얼마나 치열하게 책을 읽었으며, 기자 할 때 국장과 선배들에게 얼마나 많이 깨져가면서 글을 배웠고, 그 뒤로 지금까지 또 얼마나 많은 글을 썼으며, 그 글들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을 거쳤는지, 얘기할 수 없었다. “니가 그래도 엄마 닮아서…….”라는 말에 담긴 속뜻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아마도, 작은아들에게 더 많은 걸 해주지 못해 늘 미안하게 생각하는 엄마가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이자 위안의 표현 아니었을까. 그렇게 안도하고픈 엄마의 소중한 마음을, 나는 감히 깨트릴 수 없었다. “정동분의 아들로 태어나 과분하게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어요. 참으로 행복한 아이였어요. 진심으로 감사해요.”라는 말 덧붙였어야 했는데. 무뚝뚝한 아들은 이렇게 글로만 적는다.

어쨌든, 나 또한 늘 그런 생각은 했었다. 작가로서 내게 노력한 것 이상의 어떤 재능이 있다면 그건 필히 엄마 DNA일 거다. 말주변 없고, 글 쓰는 거 본 적 없고, 평생에 걸쳐 신문 외에 책 읽는 거 본 적 없는 아빠한테 작가 아들이 태어났을 리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야 하고, 팥 심은 데 팥 나야 옳다. 그게 세상 이치다.

20002, 동분 40살 때.

작은아들 주홍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만화방 만담꾼 소녀

때는 1970년으로 거슬러 간다. 동분 나이 열 살 때다.

, 그 가난한 시절에 책이 어딨어~! 그전까지 교과서 말고 책이라는 건 구경도 못해봤지. 그러다가 열 살 때 니네 작은 외삼촌이 날 만화방에 데리고 간 겨. 그게 시작이었지.”

동분은 만화방에서 충격받았다. 살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리하여 상상할 수 없었던 세상이 만화책 속에 펼쳐져 있었다. 그 가상의 세계에서 동분은 바다 깊은 곳에 갔다가, 우주에 나갔다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아프리카와 유럽에 갔다가, 시계를 거꾸로 돌려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두루 다녀오곤 했다. 동분은 수중에 돈만 생겼다 하면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이 세상에 만화책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겠냐만, 동분의 아들인 나 또한 만화책 덕후로 동네에서 이름 꽤나 날린 역사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보람책방(도서 대여점, 영화마을과 함께 양대 산맥이었다)에서 장르 가리지 않고 수많은 만화책 섭렵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드래곤볼>, <원피스>, <슬램덩크>, <명탐정 코난> 등은 당연히 서너 번씩 완독했다. 그 당시 용돈 전부를 보람책방에 갖다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성인 만화방에 다녔다. 아저씨들 틈바구니에 끼어 허영만의 타짜 시리즈 시작으로 김성모, 박인권, 박봉성 등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만화책 덕후 DNA도 엄마에게 물려받았나 보다. 어쩐지 학창 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만화책만 읽어도 엄마가 잔소리 안 하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다.

다시 동분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동분은 머시매들만 바글바글한 만화방에 홀로 끼어 만화책을 탐독해 나갔다.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모른 채 만화책 읽다가, 언니한테 끌려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돈 없어도 그냥 거기서 사는 겨. 머시매들 읽고 있으면 그 옆에 앉아서 같이 읽고, 저쪽 구석 가서 몰래 읽기도 하고. 주인아저씨도 다 아는데 그냥 눈감아주는 거지. 호호호.”

저녁 먹고 나면, 동분과 친구들은 한 집으로 모였다. 작은방에 이불 하나 펼쳐놓고 빙 둘러앉았다. 그 이불 밑으로 하나같이 다리를 쭉 집어넣고 동분이 시작하길 기다렸다.

엄마가 그때는 만담꾼이었어. ‘자 그러면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나~!’ 하면서 시작하는 거지. 애들은 내 입만 쳐다보고 있는 겨. 그럼, 엄마는 그동안 만화책에서 읽었던 내용에 살을 붙여서 즉흥적으로다가 이야기를 꾸며내는 거지. , 우주 괴물 나오고, 조선 호랑이 나오고 외계인이랑 싸우는 그렇고 그런 얘기 있잖어. 호호호. 그게 일과였어. 학교 끝나면 만화방 가서 만화책 읽고, 저녁 먹으면 친구 집에 모여서 애들한테 얘기해주구.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재미로 만화방에 더 갔던 거 같어. 애들한테 얘기해 주려면 엄마도 소재가 있어야 할 것 아녀. 말하자면 그거 수집하러 간 거지.”

뒤뜰의 지지배들

그렇게 즐거운 나날 보내던 열두 살 동분에게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동분보다 8살 많은 언니가 결혼하게 된 것.

동분 아버지는 술로 인생 허비한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밥벌이했다. 아버지가 무능하니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하고, 그러자니 누군가는 또 어머니 대신해 살림 책임지고 막둥이 돌봐야 했다. 그동안은 동분의 언니가 그 역할 해왔다. 동분 큰 오빠와 작은오빠는 일찌감치 출가한 상태였다. 동분 나이 열두 살, 국민학교 5학년 때 언니가 결혼했다. 어머니 대신하던 언니가 출가해버렸으니, 남은 건 동분뿐이었다. 동분이 학교 그만둘 수밖에 없던 이유다. 그런 시절이었다.

엄마가 몇 번 얘기했잖어~! 니네 작은이모는 내가 업어 키웠다고. 엄마 열두 살 때 니네 작은이모가 네 살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어린애가 더 어린애를 키운 겨. 그때부터 엄마가 살림하고 밥하고 그랬어. 니네 작은이모 한글도 가르치고.”

동분은 열네 살 될 때까지 집안 살림 챙기고 동생을 돌봤다. 그런 동분에게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사실보다,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보다,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어린 여동생보다 무서운 게 있었다.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버지.

그때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딸린 셋방 집에서 아부지랑 엄니랑 나랑 니네 작은이모랑 넷이 살 때였거든. 어둑어둑해지면 니네 외할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서 오는 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어. 저 멀리서부터 니네 외할아버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햐. 그러면 니네 작은이모 손잡고 후다닥 뒤뜰에 가서 숨었어. 왜 숨긴? 소리 지르고 주정 부리니까 무서워서 숨는 거지. 니네 외할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이놈의 지지배들 다 어디 갔어!!!!’ 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아휴~! 동네에서 니네 외할아버지 모르는 사람 없었어.”

동분의 아버지는 한참을 혼자 궁시렁궁시렁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제야 동분과 동생은 살곰살곰방으로 돌아왔다. 그 좁은 방에서 숨죽인 채, 일터에 나간 어머니가 어서 돌아오기만 간절히 기다리곤 했다. 그런 나날이었다. 끔찍하고 지옥 같았다. 당장이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라일락 필 무렵

그런 사정을 잘 알았던 안집 주인 할머니가 어느 날 동분을 불러다 이렇게 말하더란다.

동분아, 할무니의 여동생한테 딸이 하나 있어. 나이가 28살인가 그려. 그 딸이 시내에서 남편이랑 서점을 하거든? 그 집에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두 사람 다 서점에 붙들려 있으니까 애 봐줄 사람이 마땅찮은가벼. 너 여기 있지 말고, 차라리 그 집 가서 애도 좀 봐주고 살림도 해주고 너 좋아하는 책도 실컷 읽으면서 지낼래? 너 안쓰러워서 하는 얘기여~!”

동분은 어린 동생 혼자 두고 가야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그럼에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면 이 지옥 같은 집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동분은 어머니, 아버지 허락받고 보따리를 쌌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는 제법 큰 서점으로 손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대전 중구 은행동의 동아책방. 그 사장 댁으로 들어간 거다. 동분 나이 열네 살이었다.

동아책방이 어디 있었냐면, 너 그 시내에 이안경원 알지? 그 맞은편 건물 1층에 있었어. 사장님 댁도 그 근처였고. 서점에서 일한 건 아니고~! 14살짜리가 뭘 안다고 책을 팔았겄어. 또 막상 사장님 댁에 가보니까 애 봐주고 살림해 주는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시더라고. 그 아주머니 옆에서 일손 좀 보태고, 점심때 되면 도시락 싸서 책방 사장 부부한테 갖다 드리고. 그냥 책방이랑 사장님 댁 왔다 갔다 하는 잔심부름꾼이었던 거지 뭐. 용돈 쬐금 받고.”

대전 은행동, 당시 서점이 있던 자리

당시 30대 중후반이었던 남자 사장은 동분을 친조카처럼 아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동분 사정을 잘 아는지라, 그 나이에 맞는 책을 골라 동분에게 권했다. 동분은 그 책으로 알파벳과 한문을 익혔다. 말하자면, 남자 사장 도움으로 홈스쿨링 한 거다. 남자 사장은 가족여행 갈 때도 동분을 꼭 데려갔다. 동분은 그때 처음 바다라는 걸 구경했다.

자신을 ~! 이놈의 지지배야!”라고만 했던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 그 이전까지 동분에게 남자 어른이란 그런 사람들이었다. 대단히 권위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유치한 사람들. 동아책방 남자 사장은 달랐다. 늘 책을 가까이하면서 교양 있는 말투와 친절한 마음씨로 자신을 대해줬다. 동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남자 어른도 멋지고 근사할 수 있다는걸. 아버지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 그 결핍을 동분은 남자 사장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메웠다.

그때가 70년대 중후반이었으니까 대학 나온 사람이 드물 때거든. 근데 사장님이 대학 나왔잖어. 더군다나 서점 경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얼마나 교양이 넘쳤겄냐. 엄마한테 엄청 잘해줬어. 지금도 가끔 사장님 생각난다니까. 살아계시면 여든은 훌쩍 넘었겄네. 아무튼 사장님 댁에도 서재가 따로 있었어. 그 서재에 책이 또 얼마나 많았게. 사장님이 읽고 싶은 책 있으면 얼마든지 꺼내다 읽으라고 하더라고.”

봄이 되면 사장 댁 마당에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폈다. 그 향이 얼마나 진하고 그윽했던지, 동분은 지금도 그 시절 떠올리면 라일락 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비록 학교에 다닐 순 없었지만, 하여 교복 한 번 입어볼 수 없었지만, 또 그리하여 책방 오가는 길에 스치는 또래 여학생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봐야 했지만, 동분은 제법 덤덤하게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꽃향기 가득한 마당에 앉아 소설책과 시집을 읽고 있노라면, 세상은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장 댁에서 동분은 김동인, 이광수, 김유정, 이태준, 김승옥 소설을 읽으며 웃을 수 있었다. 김수영, 신경림, 김춘수, 김지하 등의 시를 가슴에 새기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이 헛헛할 때면 공책을 펴고, 시를 썼다.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사춘기 소녀의 울분과 설움 같은 걸 적었던 거 같다고, 동분은 기억한다.

라일락꽃이 세 번 피고 다시 질 무렵, 동분은 동아책방과 아쉬운 이별을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런 나이가 된 거다. 공장에 나가 돈 벌 수 있는 나이, 그렇게 집안 형편 보태야 하는 나이 말이다. 동분의 열여섯 번째 생일이 막 지난 때였다.

문학 소녀 동분의 못다핀 감성과 문장은 아들이 물려받았다.

둘째 아들 주홍의 책이 나왔을 때, 동분은 당신이 쓴 것처럼 기뻐했다.

동분이 저자 이름을 어루만지던, 막내 아들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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