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수직의 도전자』/ 임권산
알프스 몽블랑산의 산악 가이드 조합
오늘은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알프스 산악인들의 삶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경계선에 우뚝 서 있는 해발 4,810m의 알프스 최고봉. 항상 만년설로 덮여 있어 이름마저 흰(Blanc) 산(Mont)인 ‘몽블랑’이다. 이탈리아어로는 ‘몬테 비앙코(Monte bianco)’라 부른다.
몽블랑산.jpg 알프스의 몽블랑 출처-<위키피디아>
이 아름답고 위대한 산은 그것에 비례하는 치명적 위험성을 갖고 있다. 정상 부근에는 늘 눈보라가 치고 있으며 벼락과 낙석, 산사태는 언제나 예고 없이 일어난다. 한국인을 포함해 몽블랑의 유혹에 빠진 많은 산악인들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지금도 몽블랑에서는 매해 조난과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몽블랑이 거느린 두 개의 침봉(侵捧, 바늘처럼 뾰족한 봉우리), ‘베르뜨’와 ‘드류’가 바라보고 있는 샤모니 계곡 아래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평지 위에 맑은 물, 빛나는 초원, 푸른 숲을 가진 마을이 있다.
해발고도 1,035m 지점에 있는 이 마을 이름은 ‘샤모니 몽블랑’이다. 이곳에는 몽블랑을 찾는 전 세계 등반객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샤모니 산악 가이드’들과 그들이 1821년 세운 세계 최초의 산악 가이드 조합인 ‘샤모니 가이드 조합’이 있다.
샤모니 가이드 조합의 제1조는, 샤모니 가이드 조합의 일원이 되려면 샤모니 태생이어야 한다.
이다. 그리고 가이드들이 조합의 규정보다 더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 있는데, 의뢰인을 반드시 살려서 데려오는 것이다.
가이드 ‘라바나’와 포터 ‘삐에르’의 산행
한 명의 늙은 가이드와 한 명의 젊은 포터(짐을 들어주는 사람)가 두 명의 외국인 여성 관광객을 데리고 몽블랑 정상을 내려오고 있었다. 늙은 가이드는 ‘르 루지’라고도 불리는 ‘조세프 라바나’였고, 젊은 포터는 샤모니 산악 가이드 중에서 일류로 평가받는 ‘장 세르베따’의 아들, ‘삐에르 세르베따’였다. 예순 살인 라바나는 이것이 마지막 산행이었다. 그는 조합의 규정에 따라 은퇴를 해야 했다.
“나는 평지에서만 일생을 살아갈 수 없다. 나에게는 산이 없어서는 안 된다.” 사진2.jpg
휘~이~~잉~~~
맑은 날씨가 돌연 폭풍으로 바뀌며 삐에르의 상념을 깼다. 그의 아버지이자 샤모니의 명 가이드인 장 세르베따는 삐에르가 위험한 산악 가이드로 살아가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샤모니의 유력한 호텔 경영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 지방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삐에르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 근처에 수 차례 벼락이 내리쳤고 눈과 진눈깨비가 섞여 내렸다. 경사진 얼음 위에 아이젠으로 버티고 서서 자일을 움켜쥔 삐에르의 손에 모두의 생명이 달려 있었다. 선두에 선 라바나는 피켈(곡괭이)을 휘둘러 손님들이 디딜 스텝을 깎아 만들며 전진했다. 삐에르는 가장 뒤에서 어떤 돌발 사고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팽팽히 자일(로프)를 잡았다.
GettyImages-1341170299.jpg 자일로 몸을 묶고 피켈로 암벽등반 하는 모습 출처-<게티이미지>
임무를 마친 삐에르와 라바나가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구떼’의 산장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산장의 가이드들이 일거에 조용해졌다. 얼어붙은 채 홀 한구석에 놓인 축축한 자일을 보아 그들이 얼마 전 긴 빙하를 지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가이드들은 둘을 보고 식사 중이던 손까지 멈추었다. 삐에르는 의아했다.
침묵을 깬 것은 산장지기 ‘브로슈렐’이었다. 그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머뭇머뭇 말을 이어갔다. 그의 입에서 ‘드류 침봉’ 가이드로 나선 삐에르의 아버지, 장 세르베따의 조난과 사망 소식이 흘러나왔다.
「라바나가 그에게로 다가섰다. 산에서 홀드를 잡을 때 그렇게 억세던 큼직한 손이 삐에르의 어깨 위에 놓일 때는 떨리고 있었다.」
삐에르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고통스럽게 엇갈리며 떠올랐다. 드류 봉의 침니(암벽의 세로로 갈라진 틈, 즉 ‘크랙’ 중에서도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큰 크랙) 어느 구석에서 눈을 맞으며 얼어있을 아버지와 그 주위를 돌고 있을 까마귀들의 환상이 떠 올랐다. 삐에르는 산장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는 몇 개의 별들이 반짝거리고 바위벽은 눈으로 얼어붙어 밤하늘을 무겁게 비치고 있었다. 계곡으로부터 억센 바람이 치불었다. 낭떠러지에 앉아 검은 심연 위로 두 다리를 흔들거리며 삐에르는 생각에 잠겼다. 무조건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를 데려와야 했다. 비극은 산 위에서 일어났고 돌로 된 산장은 꽁꽁 얼어 있었다.
사진4.PNG 출처-<Pxfuel> 죽은 ‘장 세르베따’가 겪었던 일
샤모니의 명 가이드이자 삐에르의 아버지 ‘장 세르베따’는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드류 침봉 정상 밑의 테라스(암벽에서 선반처럼 튀어나와 서 있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가이드 장 세르베따의 눈에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산봉우리와 충돌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지방에서 ‘당나귀 구름’이라 부르는 현상이었다. 당나귀 구름은 순식간에 악천후를 몰고 온다는 징조였다. 세르베따는 위험을 직감했다. 빨리 내려가야 했다.
사진5.jpg출처-<Wallpaper Flare>
「공기의 진동이 점점 커져가며 벌떼 소리같이 들려왔다. 그 죽음의 소리를 두 번째 듣자, 그들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이것은 대기에 전류가 가득 찼다는 공식적인 표식이다. 산에 전류가 충만하여 이제 벼락이 칠 것은 분명하다.」
의뢰인 ‘워힐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기어코 정상 등정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하강 시기를 놓쳤다. 서둘러야 했다. 벼락이 ‘비애르거 봉’을 치더니 바로 그들이 좀 전에 내려왔던 드류 봉을 쳤다. 드류 봉이 부서지는 듯했다. 워힐드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눈보라보다 벼락이 더 무서웠다.
9090.PNG 살려주세요...출처-영화<에베레스트>
장 세르베따와 동행했던 포터 ‘조르즈’가 50m 자일을 두 겹으로 접어 절벽을 굽어보며 엉키지 않도록 힘껏 허공으로 던졌다. 자일은 수직벽을 따라 원하는 장소에 멈췄다. 그 자일을 타고 세 사람이 연달아 내려갔다. 워힐드는 미끄러져 내려간다기보다 떨어지는 듯했다. 먼저 내려간 조르즈가 그를 받았다. 이제 장 세르베따가 내려와야 했다. 순간 큰 광채가 번쩍하고 빛났다. 알지 못하는 무서운 힘에 둘은 허공으로 솟아올라 화강암 반석 위로 떨어졌다. 죽은 사람처럼 널브러진 조르즈의 얼굴 위로 차가운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가이드 장이 보이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장을 찾기 위해 조르즈는 다시 수직벽을 기어올랐다. 장이 누워있었다.
장.PNG 그에게 다가간 조르즈는 깜짝 놀랐다.
「전류는 검은 반점이 있는 손목을 통해 들어가 신발이 반쯤 꺼멓게 타버린 왼쪽발로 빠져나간 듯했다. 다만 유리빛을 띤 두 눈만이 움직이지 않아 조르즈를 소름끼치게 하였다.」
시체가 된 장은 조르즈의 말에 어떤 미동도 없었다. 장은 자일을 감고 내려오려는 순간 벼락을 맞은 것이다. 샤모니 가이드 조합에서도 일류로 평가받던 장 세르베따는 일행을 보살피기 위해 자일을 확보하다가 드류 침봉 암벽의 조그마한 테라스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가이드의 의무를 지킨 조르즈
조르즈는 심한 충격과 공포, 그리고 추위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일에 매달려 이빨만 덜덜 떨고 있는 의뢰인 워힐드를 보았다. 그를 살려서 데려가야 했다. 그것이 샤모니 산악 가이드의 의무였다. 다행히 자일은 파손되지 않았으나 얼어서 쇠줄같이 단단해졌다. 그리고 아직도 600m나 되는 암벽을 내려가야 했다.
워힐드는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에게 자일을 걸어주고 내려주느라 벙어리 장갑 속 조르즈의 손은 마찰열로 이미 화상을 입었다. 얼어붙은 자일을 잡을 때마다 손의 아픔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옷마저 얼어서 철판같이 굳어졌고 심장은 파열할 것만 같았다.
「그는 산과 씨름하면서 퍽 장시간 육박전을 벌였고, 발은 홀드를 더듬었으며 크랙 속에 넣은 오른팔 힘으로 매달려 그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었다.」
워힐드는 졸기도 했고 몽유병자처럼 행동했다. 조르즈는 크랙(바위의 갈라진 틈새)에 자신의 몸을 끼운 채 매 순간 그를 지탱하여 추락을 막야야 했고, 절벽의 움푹 파인 곳을 발견하면 그를 밀어 넣고 다시 하강 루트를 확인하고는 했다. 이미 손의 상처는 터졌고 돌처럼 딱딱해진 등산화 속의 발은 아무 감각이 없었다. 드류 봉 어깨의 첫 번째 꿀르와르까지 가는 것, 그것이 구조될 유일한 희망이었으나 곧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 침니에 도달했을 때 산이 노을로 붉게 타올랐다. 비박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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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박, 산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어이다.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을 때, 다시 전진할 수 있을 때까지 웅크리고 앉아 오직 생존 유지를 목표로 버텨야 하는 시간이다. 추위와 고통과 어둠과 굶주림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며, 잠든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에 졸음과도 싸워가며 해뜨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무서운 밤샘이 시작되었다. 턱이 마주치고 덜거덕거리는 야만적인 음악으로 동굴 안이 가득 찼다.」
조르즈는 30시간을 싸웠다. 그리고 끝내 산악 가이드의 의무를 이행했다. 의뢰인 워힐드를 결국 살려서 데려왔다. 장 세르베따도 없이 혼자서 말이다. 그 대가로 자신의 발가락들을 잘라내야 했지만.
장 세르베따를 데리러 떠난 8명의 원정대
「“저 높은 곳에 그를 남겨 둘 수는 없다.”」
8명의 샤모니 가이드 조합 산악인들이 뭉쳤다. 그리고 거기에 늙은 가이드 ‘라바나’와 장의 아들 ‘삐에르’가 합류했다. 한시라도 빨리 얼음 속에 갇혀 있는 장 세르베따의 몸을 거두기 위해서였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된 산행에서 오르면 오를수록 힘든 건 정비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크랙 속의 눈을 치우고 그 속으로 몸을 끼워 넣고 발이나 손을 위한 작은 홀드를 파란 얼음 위에 다듬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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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곳에서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그것은 산에 대한 정정당당한 공격이었다.」
얼음으로 가득 찬 침니가 그들을 막아섰다. ‘불(가이드 이름)’이 들어갔다. 그는 세심하게 손, 발, 홀드를 진단하며 몸놀림을 계산하고 그 어떤 불필요한 행동도 없이 상승했다. 그러나 중간에서 멈춰야 했다. 그 어떤 홀드도 없었기 때문이다. 침니 중간에 매달린 불을 향해 ‘훼르낭’이 나섰다. 그는 허리띠에 아이스 바일, 카라비너 두 개, 록크 하켄 하나를 매고 공격에 나섰다.
「불은 훼르낭의 어깨 위에 올라서고 그의 등산화의 트리코니 징이 동료의 살 속으로 고통스럽게 파고들어 갔으나 훼르낭은 무거운 짐에도 끄떡 않는다.」
오버행(암벽이나 빙벽에서 90도 이상의 경사도를 가진 부분) 아래 침니에 찡겨서 버티고 있는 불의 발밑까지 훼르낭이 올라갔고 불은 그의 어깨를 딛고 암벽 틈새로 하켄을 두들겨 박았다. 이런 식으로 둘은 교대로 서로의 어깨를 대 주며 한 피치(pitch, 등반 루트의 한 부분이자 등반의 단위) 한 피치를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곧 그들 앞에 정복 불가능한 피치가 나타났다.
보기만 해도 험상궂었다. 상부가 앞으로 내민 크랙에는 얼음의 커니스(눈처마, 벼랑 끝에 매달려 있거나 튀어나온 눈 층)가 가장자리를 장식했고 바위는 얼음이 더덕더덕 붙어 있어 파란 유리 같았다. 용감한 가이드조차 몸을 떨게 하는 난이도였다. 이번에는 삐에르가 나섰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통과하려면 오직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았다. 침니 속에 끼어들지 말고 크랙의 가장자리에 있는 몇 개의 취약한 홀드를 써가며 줄타기 서커스꾼 같이 밸런스를 잃지 않으며 오르는 것이다.」
삐에르는 1m, 또 1m 그렇게 전진했다. 크랙의 껴안기에서 몸을 빼내어 허공에 노출시킨 채. 해머가 필요했다. 삐에르는 등산화 바닥의 한 쇠징으로 균형을 취하고 몸을 벽에 밀착시켜 지탱하면서 천천히 홀드에서 한 손을 놓아 허리띠를 더듬었다. 오직 아버지의 유체를 찾아오겠다는 일념 때문에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의 다리는 누적된 피로로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가 해머를 풀어줄 카라비너의 고리를 더듬던 순간이었다. 삐에르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그의 손가락은 매달리지 못하고 화강암을 할퀼 뿐이었고, 외마디 외침도 없이 머리를 아래로 하고 추락했다. 최후의 반사작용으로 허공 속에서 위험스런 점프를 감행해서 한 바퀴 돌아 두 팔을 십자가형으로 쫙 폈다.」
공중에 던져진 삐에르의 몸은 눈 쌓인 한 장짜리 바위 위에 떨어진 후 다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30m의 추락이었다. 그러나 냉정함을 잃지 않고 삐에르와 연결된 자일에 자신의 전 체중을 실으며 버틴 불 덕분에 추락은 그것 한 번으로 멈추었다. 또한 눈이 추락의 충격을 완화해 주었다. 그러나 자일에 매달린 삐에르의 코와 귀에서는 쉴 새 없이 가느다랗게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공격은 정당했으나 그들은 패배했다.
장애를 얻은 삐에르
6개월이 흘렀다. 겨울은 이 모든 슬픈 일들에 고요하면서도 부드러운 체념을 가지고 왔다. 삐에르는 퇴원했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삐에르는 편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귀에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할 장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삐에르는 자신이 산을 영원히 체념하고 평야의 사람들과 집구석에 쳐박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모험과 몸이 떨리는 투쟁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무력감과 절망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새벽 두 시, 삐에르는 자신의 집인 ‘묀띠외 산장’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고 싶었고 본능이 그의 발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등산화를 신고 있었고 손에는 피켈이 들려 있었다. 신선한 밤공기와 별빛을 친구 삼아 무작정 걷던 그 앞에 ‘브레방 계곡’이 나타났다. 브레방 정면 벽. 짧고 쉬운 코스이나 현기증을 일으키는 곳이다. 삐에르가 초심자 시절 여러 번 올랐던 암벽이었다. 해가 뜨려 하고 있었다. 삐에르는 암벽에 달라 붙었다.
삐에르는 200m를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막다른 골목까지 왔다. 그의 눈앞에는 정상에 이르게 할 테라스가 보였다. 테라스의 다른 쪽 끝에는 아주 작은 크랙이 있었다. 그 크랙에 손을 뻗치려면 현기증 나는 단애 바로 위로 한 발자국 크게 내딛고 그곳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작은 홀드를 잡기 위해 공중에 몸을 날려야 했다. 면도칼로 다듬은 듯한 크랙은 절벽에 열려 있으며 수직의 대암벽 위에 돌출되어 있었다. 수많은 초심자를 포기하게 만드는 이 등반의 유일한 10m짜리 아킬레스건이다.
「“뭘 기다리는 거야. 너는 이 코스를 스무 번은 더 해냈지 않아? 한 발자국 내딛고 몸을 앞으로 구부려 위의 홀드에 매달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눈을 감고도 해낼 수 있어. 자! 가라.”」
구역질과 현기증이 삐에르를 덮쳤다. 삐에르는 테라스에 쓰러지고 말았다. 삐에르는 따뜻해진 바위 위에 배를 대고 누워 어린아이같이 흐느꼈다. 큰 절망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인간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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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에 맞서 싸우다
「대답을 아예 하려들지 않자 뽈은 몸을 굽혀 그의 얼굴을 살핀다. 그는 삐에르가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불, 훼르낭, 뽈.
삐에르는 필사적으로 이 친구들을 피해 다녔다. 그러나 조르즈의 환영식에 빠질 수는 없기에 그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다 발가락들을 잃은 조르즈마저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왁자지껄함과 늘 함께 먹던 퐁듀와 포도주. 그리고 여전히 씩씩하게 다시 드류 봉에 도전하자는 조르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삐에르는 자신의 눈물에 놀란 친구들에게 고백했다. 현기증을 고백했다. 자기가 이제 다시는 산을 탈 수 없다는 것, 브레방 암벽에서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한 것을 고백했다. 발밑에 큰 허공이 뚫린 것 같아 구역질과 현기증에 뒷걸음쳤던 그날의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삐에르는 눈을 조금 뜨고 절망한 사람같이 매어 달린다. 큰 파도 흔들리는 난파선의 잔해에 의지하는 조난자 같다. 모든 산들이 동작을 개시하고바위의 하켄 주위에서 돌고 또 돈다. 빙하, 산림, 목장이 멋대로 롱드 춤을 춘다.」
조르디디디.PNG 삐에르, 우리 해보자
벗들이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발가락 없는 조르즈의 도전과 의지가 삐에르를 움직였다. 삐에르는 친구들과 함께 30m짜리 바위에 붙었으나 현기증이 그를 다시 정상 밑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바위에 들러붙어 있는 삐에르의 바로 발밑에서 도와주던 불이 그의 발을 알맞은 홀드 위에 놓아주었다. 그의 도움 덕에 삐에르는 간신히 정상에 올라 주저앉았다.
바위 북쪽 오버행에 압자일렌(현수하강) 줄이 던져졌다. 25m의 오버행이었다. 삐에르는 두 눈을 감았다. 허공이 자기 아래에서 도망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발이 땅에 닿자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듯했다.
나는 가이드가 될 것이다
여전한 현기증과 두려움에 위축된 삐에르와 다르게 조르즈는 즐거움과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조르즈는 발바닥의 감각만으로 홀드를 찾아 디디는 것이 가능하며 꾸준히 연습한다면 가이드의 꿈을 버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흥분해 있었다. 그 흥분과 자신감이 친구들 앞에서 조르즈를 다시 작은 침봉 앞에 서도록 했다.
작은 침봉. 큰 침봉에 붙어있는 바위의 턱이다. 한쪽은 15m, 가장 높은 사면은 60m, 두 침봉을 가르는 틈바구니는 불과 15m였지만 경사가 심하고 노출되어 있어 극히 소수의 가이드만이 선등을 선 곳이다. 조르즈는 만류하는 친구들을 뿌리치며 암벽을 마주 보고 섰다. 걱정스러운 시선들이 그의 등을 향했다.
「그는 미세한 손 홀드를 꽉 움켜잡고 바위의 그 위치에 불구의 발을 더 잘 놓기 위하여 밸런스를 잡으며 몸을 뒤로 제끼고 바위타기의 달인처럼 올라간다. 그는 신속하게 오버행에 이른다. 잠시 그가 멈칫거리더니 모든 몸짓을 다 계산한 다음 그는 아슬아슬한 트래버스(암벽을 횡으로 타는 것)를 한다.」
그 순간이었다. 조르즈의 발이 미끄러지고 있는 것을 친구들은 보았다. 친구들은 그의 절망적인 버티기를 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조르즈는 온몸의 무게를 손으로만 지탱하고 있었고, 그 손은 경련에 떨고 있었다. 삐에르가 바위에 몸을 던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삐에르는 자일 확보도 없이 조르즈에게 달려갔다. 친구들은 곧 닥칠 참극을 예상하며 몸을 떨었으나 삐에르는 정확한 몇 번의 도약으로 순식간에 오버행까지 올랐다. 그리고 조르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르즈가 그 손을 잡았다. 훼르낭이 불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우리가 이겼다고.
「그들은 계곡 길로 되돌아갔다. 태양은 천천히 대지에서 뒷걸음치고 약간의 구름이 고봉들의 중복에 흘러간다. 저 높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햇빛에 타오르고 황금색으로 물든다.」
포옹.PNG 우리가 해냈어!
6월 말의 어느 날, 삐에르와 조르즈는 샤모니 가이드 조합을 향해 걸어갔다. 가이드 시험에 등록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그 둘은 ‘베르뜨 침봉’ 북벽을 올랐다. 현기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삐에르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삐에르는 그날 이후 늘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가이드가 되리라.
땅바닥에 붙어서만 살 수는 없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최초로 직립 보행을 한, 현생 인류의 조상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직립 보행은 지금까지 인간을 다른 고등 생물들과 구별 짓는 주요한 특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두 발로 땅을 딛고 길을 걷습니다. 허리는 꼿꼿하게 펴져 있으며 당연히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직립 보행이라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은 인간을 영원히 구속하는 중력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라는 숙명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중력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 두 발 중 하나 이상은 반드시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그러니 체념하고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중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꿈꾸기에 우리의 머리만큼은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삽니다.
고개숙인 남자.PNG 영화 ‘화장’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살면 살수록 삶의 무게는 더 무거워집니다. 현재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젊은 날 꾸었던 꿈들을 하나하나 포기하면서 머리는 점점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하게 됩니다. 중력을 벗어나기는커녕 머리마저도 땅을 향해 숙이고 길을 걷습니다. ‘고개 숙인 자’의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다시 네발로 기도록 진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만 슬퍼집니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힘을 써야 하네. 휴식이란 죽음의 시작이고 일하고 투쟁하고 행동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 해. 무위도식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보다는 많은 기쁨을 맛볼 걸세.”」
추락과 부상이 가져온 현기증에 시달리면서도 산악 가이드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삐에르’에게 은퇴한 가이드 ‘라바나’가 해 준 말입니다. 두 발을 땅에서 떼고 살 수 없는 것처럼 현실은 벗어날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꿈을 꾼다는 것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고유의 특성입니다. 머리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현실 앞에 굴복하는 것은 중년이나 노년만이 아닙니다. 청춘들도 마찬가지이며 그것은 더 큰 슬픔과 슬픔을 넘어서는 분노의 감정까지 일어나게 합니다. N포 세대.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 모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을 나타내는 신조어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분노하고 맞서 싸워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말들이기도 합니다.
「그 시대를 기억하시나요! 어둡고 절망! “젊은이에게 숨통을 트게 해 주어야겠다!”고 편집장이 나에게 말했다. ‘공기와 희망을!’ 그 날 저녁 20여 장의 원고를 책상 위에 써 던지며 “적합한지 보아주시오!”라고 하였다.」
후리종 로슈.jpg 후리종 로슈
오늘 소개해 드린 책 『수직의 도전자』 저자인 ‘후리종 로슈’가 직접 밝힌 출판 동기입니다. 기성세대, 기득권, 그들이 만든 사회. 이 모든 중력 앞에서 머리까지 땅에 붙이고 사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처럼 살아가려고 하는 안타까운 청춘들에게 ‘공기와 희망’을!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 보자......
푸른 별이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신석정, 들길에 서서 -
마흔아홉 번째 인생 탐구는 부상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끝없이 거대한 암벽을 오르는 프랑스 샤모니 마을 젊은 산악인들의 삶에 대해 소개해 드렸습니다. 항상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봉우리의 끝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 발 한 발 올라서는 그들입니다. 땅에 붙어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어깨 위에 짊어진 인생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네발로 기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푸른 별 하나는 떠 있습니다. 두 발로 서서 그 별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사르트르가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말했던 사람. 중남미 혁명의 아버지이자 지금도 변혁을 꿈꾸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사람. 39살의 나이로 불꽃 같은 인생을 끝낸 사람. ‘체 게바라’의 말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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