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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마주친 100개의 인생(딴지일보연재물 등)

이방인

by 자한형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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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임관산

아무 의미 없는 인생

어떤 체코인 남자가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그는 성실히 열심히 일했고 마침내 이십오 년 만에 부자가 되었다. 부자가 된 그는 아내와 어린 자식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누이와 함께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들을 놀려주기 위해 그는 우선 혼자 여관을 방문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방을 잡은 그는 어머니에게 가방을 열어 보이며 돈 자랑을 했다. 그날 밤 그의 어머니와 누이는 그를 망치로 살해하고 그의 돈을 훔쳤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강물에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으려 그의 아내가 찾아왔고, 그의 신원에 대해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목을 매 생을 마감했고, 그의 누이는 우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런 게 인생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생은 그냥 우연이며 그렇기에 의미 따위란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짚을 넣은 내 매트와 침대 판자 사이에서 발견한 옛날 신문지 한 조각에 실린 이야기이다. 나는 살인죄로 잡혀 와 재판을 받기 위해 감옥에 있다. 우연히 발견한 이 이야기가 내 무료한 감옥의 시간을 그럭저럭 보내게 해 주었다.

엄마의 죽음과 장례식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은 알제로부터 80킬로미터 떨어진 마랭고에 있다. 나는 2시 버스를 타서 오후 중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밤샘을 할 수 있고 내일 저녁에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사장에게 이틀의 휴가를 청했는데 사장은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 탓이 아니었다.

영화 이방인(1967)’

엄마를 양로원에 맡긴 것이 비난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엄마에게는 잘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엄마는 하루 종일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는데, 양로원에서는 말벗들이라도 있을 테니 말이다.

처음 양로원으로 들어간 며칠간 엄마는 자주 울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단지 습관 때문이었다. 아마 내가 양로원에서 데리고 나오겠다고 해도 엄마는 울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습관 때문에. 그래서 나는 지난해에 거의 양로원을 찾지 않았다. 물론 일요일을 빼앗기는 것도 싫었다.

나는 밀크 커피를 마셨다. 그러자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엄마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을지 어떨지 몰라 망설였다. 생각해 보니, 꺼릴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엄마가 누운 영안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밤을 새웠다. 양로원 원장은 엄마의 장례가 종교의식에 따라 치러질 것이라 말했다. 엄마는 생전에 종교를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그냥 원장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엄마의 양로원 친구들이 영안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함께 밤을 새울 것이라고 했다. 그 노인네들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앉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 그들이 나를 심판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인상을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니스칠이 번들거려 필통을 연상시키는 영구 마차가 엄마의 관을 싣고 움직였다. 나를 비롯한 장례 행렬이 그 뒤를 따랐다. 행렬 속에는 엄마의 남자 친구였다는 왜소한 늙은이 페레스씨도 있었다. 그는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벌써 햇빛이 가득했고 땅의 열기가 급속히 높아졌다. 이 뜨거운 태양 때문에 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태양은 지독했고 비인간적인 느낌까지 주었다. 견딜 수 없는 빛이었다. 나는 자지 못한 지난밤의 피로까지 더해져 머릿속이 온통 혼미했다. 엄마의 관 위로 핏빛 흙이 굴러떨어졌다. 드디어 장례가 끝났다.

그리고 마침내 버스가 알제라는 빛의 둥지 속으로 돌아오고 그리하여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내가 느꼈던 기쁨이었다.

장례식 다음 날의 즐거운 섹스

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토요일인 것을 알았다. 내가 이틀의 휴가를 요청했을 때 사장이 못마땅해한 이유를 깨달았다. 아마도 사장은 내가 주말을 포함해 나흘이나 계속 쉬려고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장례식이 어제였던 것이나 오늘이 토요일인 것 모두 내 탓이 아니다.

수영이 하고 싶었기에 전차를 타고 해수욕장으로 갔다. 바닷물에 뛰어들었을 때 나는 물속에서 마리를 만났다. 마리는 전에 같이 일했던 타이피스트(타자기 치는 일을 하는 사람)였는데, 나는 그녀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마리와 함께 수영을 했다.

가끔씩 그녀의 젖가슴이 스쳤다. 마리는 줄곧 웃었다. 마리는 나에게 페르낭델(프랑스의 유명 코미디 배우)’이 나오는 영화를 저녁에 같이 보자고 했다. 옷을 입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매는 것을 보고 마리는 놀랐다. 나는 어제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마리는 약간 흠칫하는 것 같았으나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마리는 다리를 내 다리에 딱 붙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영화가 끝날 무렵 그녀에게 키스를 했는데 서투르게 되고 말았다. 영화관을 나와 그녀는 내 집으로 왔다.

눈을 떴을 때 마리는 없었다. 나는 마리의 머리카락이 남긴 소금기 냄새를 베개 속에서 더듬다가 10시까지 잤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채 12시까지 담배를 피웠다. 나는 빵을 사러 가기 귀찮아서 계란만 몇 개 익혀 먹었다. 그리고 내 아파트 안을 그냥 어정거렸다.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는 옛날 신문을 읽었다.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하면 오려서 낡은 공책에 붙였다. 발코니로 나갔다.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점점 거리에 인적이 드물어졌고, 담배 가게 옆의 조그만 카페 피에로에서는 종업원 하나가 텅 빈 가게 안을 쓸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요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다름없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이제 엄마의 장례가 끝났고, 나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갈 것이고, 그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층 이웃 '레몽'의 부탁

회사에 복귀한 이후로 계속 힘들게 일했다. 그날도 더운 사무실에서 내내 일했다. 그래서 초록빛 하늘을 보며 부둣가를 따라 걷는 퇴근길이 행복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 삶은 감자 요리를 해 먹고 싶었다.

아파트의 컴컴한 계단을 오르던 중 같은 층에 사는 레몽을 만났다. 사람들은 그가 여자를 등쳐먹고 사는 포주라고 했으나, 그는 자신이 창고 감독일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혀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 나는 그와 가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재미있었다. 사실 내가 그와 말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포도주 한잔 같이 마십시다

레몽은 순대와 포도주가 있으니 같이 마시자고 나에게 제안했다. 나는 끼니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 제안을 승낙했다. 그리고는 그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내가 포도주를 거의 1리터나 마셔 관자놀이가 뜨거워지고 내 담배가 떨어져 레몽의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레몽이 말했다.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자신에게 아랍인 정부가 하나 있으며 그녀에게 먹고 살 만큼 돈을 주고 있는데, 그녀가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속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두들겨 패줬지만, 자신은 아직도 그녀와의 섹스에 미련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나에게 편지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여자가 자신을 다시 찾아오고 싶게 하면서도 후회를 하게 만드는 편지. 그래서 여자가 찾아온다면 잠자리를 같이하고는 끝나려 할 때 여자 얼굴에 침을 뱉고 내쫓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편지를 썼다. 약간 무턱대고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레몽의 마음에 들도록 힘썼다. 왜냐하면 레몽의 마음에 들도록 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레몽의 초대

나는 계속 일을 많이 했다. 토요일에는 마리를 만났다. 젖가슴의 윤곽이 완연히 드러나는 아름다운 옷에 가죽 샌들을 신은 그녀를 보고 나는 격한 욕정을 느꼈다. 우리는 함께 수영을 했다. 수영 후 물에서 나와 옷을 입을 때,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내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로 뛰어들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여름밤이 갈색으로 그을린 우리의 몸 위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닌 것 같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가 써 준 편지를 보고 아랍인 여자가 찾아왔다. 레몽은 그녀를 두드려 팼다. 퍽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비명이 아파트를 흔들었다.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여 사태가 마무리되었으나 레몽은 경찰에 출두해야 했다.

레몽이 나에게 두 번째 부탁을 했다. 자신이 경찰에 출두하면 증인이 되어 달라고, 그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말해달라고. 나는 레몽의 부탁대로 증언해 주었다. 레몽은 고마워하며 내가 자신의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코냑 한 잔을 사 주며 같이 창녀 집엘 가자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그런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레몽은 내내 나에게 다정스럽게 구는 것 같았고 나는 즐거운 한때라는 생각을 했다.

레몽이 회사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자기 친구 하나가 알제 근처의 조그만 별장에서 일요일 하루를 지내자고 했다며 나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마리와 약속이 있어서 힘들다고 했더니 마리와 함께 온다면 친구의 아내도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아랍인들이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말도 아울러 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에서 하는 사적인 통화를 사장이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사장이 나를 불렀다. 혹시 레몽과의 전화 통화에 대해 잔소리를 할까 걱정했으나 사장은 의외로 나에게 새로 여는 파리 사무실로 갈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내가 젊으니 틀림없이 파리 생활을 마음에 들어 할 것이라 여긴 듯했다. 그러나 사실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자 사장은 내게 삶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 게 아니며, 어쨌건 모든 삶이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로서는 이곳에서의 삶에 전혀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살인

일요일, 아침도 먹지 않고 나는 마리, 레몽과 함께 그의 친구인 마송의 별장으로 갔다. 그 조그만 목조 별장은 바닷가 끝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리는 나와 함께 헤엄을 치고 싶어 했다. 우리 둘은 멀리까지 나갔다. 나는 몸놀림과 만족감에 있어 우리 둘이 서로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리와 함께 모래밭에 누웠다. 태양은 거의 수직으로 모래 위에 내려꽂혔고 바다에 반사되는 그 강렬한 빛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녀의 몸과 태양이 내뿜는 두 가지 열기 때문에 나는 얼핏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 점심을 먹었다. 마리와 마송의 아내가 설거지를 할 동안 나, 마송과 레몽, 이렇게 셋은 바닷가 산책에 나섰다. 바닷가 저쪽 끝에서 푸른 작업복 차림의 아랍인 둘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레몽이 말한 미행자들이었다. 둘 중 하나가 레몽의 아랍인 정부 오빠라고 했다. 우리와 그들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싸움이 붙었다. 레몽과 마송이 그들을 두들겨 팼다. 순간 한 놈이 칼을 꺼내 들었다. 레몽은 팔을 베이고 입을 찢겼다. 둘은 도망쳤고 마송은 레몽을 데리고 의사에게 갔다.

나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입가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돌아온 레몽과 함께 해변을 걸었다. 그가 침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태양은 찍어 누르는 듯했다. 우리는 조그만 샘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아까 그 두 아랍인이 누워있었다. 레몽을 칼로 찌른 아랍인이 레몽을 쳐다보았다.

저 생퀴 쏠까?

레몽은 주머니의 권총에 손을 댔다. 나는 흥분한 레몽이 총을 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만약 저들이 비겁한 짓을 또 한다면 내가 쏘겠노라는 말로 레몽을 달래 그의 권총을 받았다. 레몽이 나에게 권총을 건낼 때 태양이 그 위로 번쩍하며 미끄러졌다.

아랍인들이 뒷걸음쳐 사라졌고 레몽과 나는 별장으로 돌아갔다. 내 머릿속에서는 태양이 꽝꽝 울렸고, 나는 힘들게 계단을 올라 여자들과 다시 대면할 생각을 하니 맥이 풀렸다. 나는 다시 바닷가로 걸어갔다. 아까 그 아랍인들을 만났던 서늘한 샘이 떠올랐다. 나는 그늘과 휴식을 찾고 싶었다. 그곳에는 아까 그 아랍인이 혼자 누워 있었고, 그의 작업복은 태양 빛을 받아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불로 지지는 태양의 열기가 내 두 뺨으로 확 번졌고 땀방울들이 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고,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줄들이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펄떡거렸다.

아랍인이 칼을 뽑아 태양 빛 속에서 나를 향해 쳐들었다. 강철 위로 반사된 태양빛이 번쩍거리는 긴 칼날 같은 것이 되어 내 이마를 쑤셨다. 바다가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올 때, 하늘 전체가 갈라지며 불비가 쏟아지는 것 같을 때, 눈부신 빛의 칼날이 내 두 눈을 고통스럽게 후벼 팔 때, 나는 권총을 꽉 그러쥐었다. 날카롭고도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땀과 태양을 흔들어 털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그 아랍인의 몸에 다시 네 발을 쏘았다.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죄

체포 이후 여러 번의 심문과 몇 개 월간의 감옥 생활이 시작되었다. 국선 변호사는 내가 엄마의 장례식에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라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했고, 나를 심문하는 예심판사는 왜 한 발을 쏜 이후 시체에 다시 네 발을 쏘았는지를 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또다시 붉은 바닷가가 눈에 선해지면서 태양의 지지는 듯한 열기를 이마 위에서 느꼈다. 그러나 판사에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판사는 나에게 뉘우침을 통해 신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가로막고는 벌떡 일어서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를 설득하려 들며 내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분개하여 털썩 주저앉았다.

어느 순간 나는 감방이 내 집이고 내 삶이 그 속에서 멈추어 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나를 면회 온 마리에 대한 욕정, 담배 뭐 이런 문제들을 제외하면 내가 그다지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행동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는 후회라기보다는 조금 귀찮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감옥에 들어온 지 다섯 달이 지났고 내 재판이 열렸다.

재판정은 몹시도 더웠다. 세 명의 판사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재판장은 나에게 겉보기엔 나의 사건과 무관한 것 같지만 중요한 질문을 하겠다며 왜 엄마를 양로원으로 보냈냐고 물었다. 그리고 괴로웠냐고 묻기에 나는 돈이 없어 보냈고 어머니와 나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었으며 각자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대답했다.

검사가 채택한 증인들이 하나둘 법정에 들어섰다. 양로원 원장, 영안실 관리원, 엄마의 남자친구였다는 페레스 씨 등이었다. 원장은 내가 슬퍼하지 않았으며 장례식이 끝난 뒤 무덤 앞에서 묵도도 하지 않고 떠났다고 진술했다. 무엇보다도 관리인의 증언이 방청석 전체를 격앙시켰다. 그가 내가 영안실에서 담배를 피웠고, 잠을 잤고, 커피를 마셨다고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검사는 의기양양하게 더 이상 증인에게 할 질문이 없다고 외쳤다. 나는 처음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나는 바보같이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심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사고 있는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내 변호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도대체 피고인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고 기소된 것인지, 살인을 했다고 기소된 것인지를 물었으나, 그에 대한 대답은 방청객들의 웃음뿐이었다. 내가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살인이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을 때는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변호사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하지 말라고 했다.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견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 있어요. 그편이 당신 사건에 더 유리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제발 아가리 좀 쌈지고 있으라구요!

나의 의견을 묻는 일 없이 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검사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닦으며 흉악무도함밖에 찾을 것이 없는 나의 목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 어떤 삶, 여름의 냄새들, 내가 좋아하던 거리, 어느 저녁 하늘, 마리의 웃음과 옷, 이런 것들에 대한 추억에 휩싸였다. 그러자 이 모든 무용한 짓들에 숨이 막혔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빨리 끝나서 나의 감방으로 돌아가 잠이나 자고 싶었다.

배심원들의 평결이 끝나자, 나는 다시 재판정으로 불려 나갔다. 재판장은 내가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느님과 구원 따위보다 중요한 것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서른 살에 죽느냐 예순 살에 죽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나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나는 누워 있었다.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여름 저녁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마리를 생각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나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사형수의 애인 놀이에 지쳤나 보다. 우리의 두 몸 이외에는 서로를 이어주는 것이 없었으니 나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상고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때 교도소의 부속 사제가 들어왔다. 이미 내가 세 번이나 방문을 거절한 바 있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왜 자신의 방문을 거절하냐고 묻기에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나와 비슷한 경우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모두 하느님께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그것은 그들의 권리이지만, 나는 흥미가 없다고 말했다.

사제는 나에게 죄의 짐을 벗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심판이 아닌 하느님의 심판으로 죄를 씻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 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가르쳐 주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하며 그 이상을 나에게 요구하지 말라고 말했다.

사제는 어딘지 슬픔이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점점 사제가 귀찮아졌다. 나는 더 이상 사제와 하느님 이야기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한번 껴안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거절했다. 그러자 사제는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내 속에서 뭔가가 폭발해 버렸다. 나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기도하지 말라고 말했다.

꺼지라고 이 쉐끼야!!

그가 나가고 나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엄마를 생각했다. 왜 어머니는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남자 친구를 만들었을까. 아마도 엄마는 죽음이 다가오자 마침내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 것 같았다.

나는 침상에 누웠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다시 뜬 내 눈 위로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들판의 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 냄새,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신기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밤의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자살할 것인가, 반항할 것인가

천벌을 믿으시나요? 정말로 악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가요? 이미 우리들 마음속 대답은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선하게 살았지만, 평생을 가난과 질병 속에서 고통받다 죽는 사람들과 악당이지만 부와 명예, 그리고 세간의 부러움까지 듬뿍 받으며 장수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니까요. 참으로 부조리(不條理)한 현실입니다.

부조리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말한다고 나옵니다. 악인이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떵떵거리며 사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하늘도 무심하지라 말하며 하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늘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은 원래 조리부조리도 아닌,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겨울 설악산

예전에 겨울 설악산을 12일로 산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겨울 설악의 풍광은 참으로 감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온 천지가 하얗게 덮여 있었으며 그 하얀 것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들은 잎 하나 없이 앙상했지만, 대신 보석처럼 영롱한 눈꽃이 맺혀 있었지요. 대청봉 대피소인가에 하룻밤을 의탁하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헬기가 떴다며 웅성대고 있었습니다. 헬기가 떴다는 것은 누군가가 간밤에 대피소를 찾지 못하고 동사했다는 뜻이지요.

제가 보았던 아름다운 산은 선한 것이고 누군가를 얼려 죽은 산은 악한 산이 아닙니다. 산은 그냥 산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 즉 세계는 합리나 비합리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런 세계에 대해 인간은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조리입니다.

나를 둘러싼 세계,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 그 어떤 의미도 없다고 깨닫는 순간 우리는 절망을 느낍니다. 인생이란 세계 속의 한 구성 요소이니 자신이 살아야 할 의미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유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할까요.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지프는 지하의 신 하데스를 속인 죄로 무거운 바위를 굴려 산 정상으로 올리는 형벌을 받습니다. 무시무시한 고통을 참아가며 바위를 올리지만 바위는 이내 아래로 다시 굴러떨어집니다. 올려놓으면 다시 떨어지는 바위.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의 고통은 끝이 없습니다. 이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시지프를 지탱하게 해 준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반항, 그것이 시지프를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시지프는 굴러떨어지는 돌을 보며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그 돌을 다시 밀어 올리는 것을 통해 부당한 신의 명령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항입니다.

반항은 부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조건 앞에서 이 어이없는 광경으로부터 생겨난다.”

-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 그것이 반항입니다. 이 글 이방인의 저자인 카뮈는 미국어판 서문에서 주인공인 뫼르소를 가리켜 가난하지만, 가식이 없으며 진실된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이며 이 진실이 없다면 자아와 세계에 대한 그 어떤 정복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항이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반항이 내 인생의 존엄성을 지켜줍니다. 그리고 이 반항은 확장되어 우리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도록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의 반항은 참여와 연대를 통해 세계로 확산됩니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에 맞설 수 있습니다.

부조리가 클수록 그것에 맞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이루어 낼 수 있는 것도 커집니다. 세계와 자신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자살이 아니라 그 운명에 반항하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존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카뮈의 말을 소개하며 마흔네 번째 인생탐구를 마칩니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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