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3/ 임관산
"하루 종일 날갯짓을 하다 가는 나비가 하루를 영원으로 알 듯이, 우리 인간도 그런 식으로 살다 가는 것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中 -
영겁의 시간 속에서 찰나에 불과한 인생입니다. 먼 과거의 일이지만 어느 날 문득 떠올리면 어제의 일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많이 해봤을 것입니다. 죽는 순간이 그럴 것이라 짐작됩니다. 꽤 긴 시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인생 순간들이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로 느껴질 것입니다. 생각보다 우리 인생은 허무합니다. 오죽하면 ‘인생무상’이란 말이 있겠습니까.
금복이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와 첫사랑은 자살로 생을 끝냈고 두 번째 사랑은 자신이 스스로 죽였습니다. 이 여러 죽음 앞에서 그녀에게 남은 것이란 오직 생존의 욕구였습니다. 평생 매 순간을 그녀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발버둥 칩니다. 거대한 고래, 그 무엇으로도 감히 죽일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고래는 금복의 살고 싶다는 욕망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었습니다.
고래극장으로 상징되는 생명,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그녀의 욕망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녀의 인생 역시 고래극장 속에서 끝나지요.
펄프픽션이라 불리는 소설, 혹은 소설 장르가 있습니다. 20세기 초중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펄프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실리던 소설들을 뜻하는 말로 시작해 발전한 장르입니다. 당시 질 좋은 고급 종이에 제대로 정성 들인 소설들이 25센트 정도 할 때, 싸구려 종이로 만들어 흥미 위주로만 쓰인 싸구려 소설들을 실은 이 잡지는 대략 10센트 정도에 판매됐습니다. 저렴한 가격에 걸맞게 저렴한 소설들이 실린 것이지요.
이 소설들은 강도, 살인, 섹스, 마약 등의 자극적인 내용들이 주종을 이뤘고, 어떨 때는 외계인이 지구인과 섹스를 벌이다 마약을 먹고 악귀를 물리친다는 장르 파괴 내지는 장르 융합의 놀라운 실험 정신을 보인 어질어질한 소설들도 가끔 있었습니다. 내 인생을 소설로 쓴다면 펄프픽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인생이란 결국 별다른 의미 없이 순간순간을 때우다가는 싸구려 펄프픽션 같습니다.
한 여인의 다사다난한 일대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암흑가 누아르이자 삼류 치정극이며 공포 소설이기도 한, 한편으로는 믿지 못할 성공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내용의 개연성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읽는 순간을 즐기면서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으면 됩니다. 일종의 한국식 펄프픽션 스타일의 소설이니 말입니다.
황당한 내용에 별 의미 없는 시간 떼우기용 소설 잡지를 두 번 이상씩 읽는 독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한번 읽으면 어디 구석에 처박아 놓습니다. 처박힌 펄프픽션은 며칠이고 먼지를 뒤집어쓰다가 어느 날 결국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 아까울 것도 없고 그게 당연합니다. 할 일 다 한 것이고 본분에 맞게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만약 혹시라도 한번 돌아보고픈 소설이 있다면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다시 뒤적거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소장 가치 따위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말입니다.
의미 없는 허무한 인생, 그러나 그나마 누군가 한 번쯤이라도 기억해주는 인생이길 바란다면 가끔은 자신의 인생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틈날 때마다 자신의 인생에 어떤 먼지가 묻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다사다난했던 금복이의 인생과 죽음을 소개했습니다. 서른다섯 번째 인생 탐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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