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사와 인생이모작 / 이동필
퇴임 후 당장 입을 옷가지며 책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온 날,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어둠이 내리는 마을 구경을 나섰다. 언제나 아버지가 지키고 계실 것 같던 지역농협 건물을 지나 이이들과 뛰어놀던 초등학교, 할머니를 따라나서던 장터까지 용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귀성객들을 위해 길어놓은 현수막에 '부모님 계시는 곳, 단촌에 오심을 환영합니다"란 글귀가 어쩌면 그리도 가슴에 와 닿던지. 농부들이 열심히 일해도 가난하게 사는 이유를 공부해 보겠다고 서울로 떠나 사십여 년 객지를 나다니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공직자로서 무거운 짐을 벗었다는 해방감에 코끝에 스치는 공기마저 달콤했다. 얼마나 그리던 고항이던가! 떠돌이 새가 옛날 놀던 숲을 그리워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만두기 얼마 전 대통령께 하직 인사를 드릴 때 '장차 어찌할지' 물으시길래, 고향에 가서 [이동필의 1234]를 새로 쓰겠노라고 말씀을 드렸다. 1234란 소통을 위해 ‘한 달에 두 차례씩 현장을 방문해 3시간이상 머물며 사람을 만나겠다‘던 장관 시절의 캐치플레이즈였다. 새로운 1234란 여느 촌로와 같이 (1)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하루 (2) 두어 차례 밭에 나가 일하고 (3) 삼시 세끼 노모와 같이 밥 먹고,(4) 사람이 찾아오면 말동무나 하며 살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럴만한 능력도 없지만 퇴직 후 지연 ⸱ 학연을 이용하여 유관기관이나 관련 기업 등에 재취업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소위 '관피아' 같은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옛말에 공수신퇴가 천지의 도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평소 '일을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기 때문에 집에서도 별다른 이의는 없었지만, 시골에서 새삼 시집살이를 해야 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으리라.
고항에는 어머니가 옛집을 지키고 계셔서 당장 거처는 할 수는 있었지만 , 집이 비좁고 허술하여 손님이 찾아와도 앉을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게 어떨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어른들 손때가 묻고 어릴 적 추억이 서린 집이라 망설였다. 생각 끝에 마당 가장자리에 '사원제'란 다섯 평짜리 사랑채와 ‘애일당’ 이란 작은 정자를 마련했다. '사원제'는 음수사원이란 고사에서 따온말로 탄핵정국에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리와 은혜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고, '애일당"은 노모와 함께하는 오늘 하루를 즐겁게 보내자는 소원을 담았다. 뒷 개울의 돌을 주워다 꽃밭을 만들고 소나무 몇 그루를 심어놓고 날이 추워도 변함없는 '세한도의 의리와 한결같은 마음을 기렸다. 인근 사촌에 사시는 동천 선생님이 쓴 ‘사원제기’ 에서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명산이오,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소이니라. 여기 토담집 사원제는 이동필 장관의 덕과 향훈이 배어 있으니 비록 화려한 집은 아니더라도 오랜 세월 여운을 남기리라'고 축원해 주셨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마늘 심을 철이라 읍내에 나가 종자는 구했지만 사용할 수 있는 마땅한 농기구가 없었다. 경운기를 가진 이웃집에 '밭을 좀 갈아 달리'고 부탁했지만 바빠서 그런지 한동안 작업을 해주지 않아 때에 늦을까 어찌나 가슴 졸였던지. 어느 새벽 노계 박인로가 제대 후 농사를 지으려 하였으나 소를 빌릴 수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안빈낙도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누항사'란 가사를 읽고 400여 년 전이나 다름없는 현실에 한참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처음에는 모른 체하던 사람들도 흙과 씨름을 하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던지 오며가며 가르쳐 준 덕에 조금씩 요령을 익히게 되었다. 그 흔한 관리기 하나 없이 맨손으로 일을 하는 것도 힘이 들지만, 수확물을 처리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안동장에 팥 4말을 팔러 갔다가 가격을 후려치길래 팔지 않고 들고 온 일이며, 콩 20가마를 농협에 냈지만, 노린재가 찝었다고 선별 과정에서 5가마나 퇴짜 맞았던 일, 그리고 신통치 않은 마늘을 택배로 보내고 지인들에게 돈을 받는 난감한 경험을 하면서 농부들의 애환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영농 규모나 기술로는 돈을 만들 수도 없지만 갈수록 힘에 부쳐 육체 노동을 감당하기 어렵고
틈틈이 돕던 아내마저 손마디가 아파 더 이상 일을 거들 수 없게 되었다. 때마침 사기(史記)에서 '공직자가 농사까지 지으면 농부들은 어떻게 살겠느냐'며 집에서 기르던 채소를 뽑아 버렸다는 노나라 공의휴(公儀休)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제는 들일을 줄일 생각이다.
그럭저럭 몇 해 동안 시골 마을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학생이 없어 애를 태우는 초등학교, 손님 부족으로 줄어드는 대중교통, 전기세를 아끼려 마을회관에 모여 지내는 할머니들, 외식을 하거나 영화라도 보려면 인근 도시까지 나가야 하는 불편한 이웃들을 지켜보며 지방소멸 위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굳이 정도전이 쓴 '답전보'의 늙은 농부처럼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했길래 이 모양이냐? "고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생각 끝에 장관이 5급 공무원이 되었다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주 3일씩 경북도청의 자문관으로 나가 애플밸리 조성, 지역 통계확충과 과학적 행정시스템 구축, 지역의 술과 음식 및 관광개발, 귀농 • 귀촌 활성화, 산림자원 활용, 승계농 육성 등 지역 활성화 방안을 정리해서 보고서로 제출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농촌을 살릴 수 있겠는가? 결국 주민들이 스스로 살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에 2021년 지인들과 '농촌살리기 현장네트워크'란 공부모임을 만들고, 지역농협의 역활에 관한 연구와, 지역특화산업인 사과농사의 6차 산업화를 위한 학교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 주도의 공짜 지역개발에 익숙한 주민들에게 공부를 해서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자주 • 자립 • 협동정신으로 함께 지역을 살려보자는 제안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상이 고향으로 돌아와 보낸 지난 7년여 동안의 간추린 귀거래사이다. 공부하러 집을 나선지 4여 년, 대학원 졸업 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30여 년간 농업 • 농촌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국내외 헌장의 다양한 사례를 살피고, 농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몸을 던져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은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다. 아버지는 마을이장이며 새마을지도자, 단위농협 조합장으로 애를 쓰시다 돌아가신 분으로 개인의 영달보다는 '홍익인간, 수기치인'을 중하게 여기셨다. '일을 마치면 돌아오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막상 집에 와서 농사짓고 수졸하는 자식을 어떻게 보실지? 감히 비교할 수 없으나 퇴계선생도 '염치를 숭상하고 절의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은퇴를 거듭하고, 도연명도 귀거래사를 읊으며 고향집에서 '고궁절'을 지켰다고 하지 않던가.
사실 알고 지내던 선후배며 동료들이 퇴직 후에도 이런저런 자리에서` 인생 이모작, 삼모작을 하는 것을 보면 용하다 싶으면서도 자신이 궁색해 보일 때도 없지 않다. 꿈에도 그리웠던 고항에 돌아왔건만 '고향은 고향이 아니러뇨'라던 '정지용의 싯구절처럼 인심은 예전 같지 않고, 사람 사이의 벽도 훨씬 높아진 것 같다, 이해관계에 민감한 좁은 지역사회라 불필요한 오해에 휘말리기 싫어 바깥출입을 자제하다 보면 문득 허전하다 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평생 연구원으로 나라 걱정만 하느라 마땅한 취미도 없는데 다 초보 농사꾼이 되어 때맞추어 일을 하자니 몸은 피곤하고 행색마저 초라하다. 이런 가운데 노모 모시고 삼시 세끼 하며 텃밭 가꾸고 손님 집대하며 생활하는 것은 집사람의 이해와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자란 아내 입장에서는 친구들과도 멀리 떨어져 교통이나 문화시설이 부족한 적막강산에서 지내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계절에 따라 씨앗 뿌리고, 책 읽으며 유유자적하는 시골 생활에서 아내는 속 깊은 동반자이자, 든든한 후원자이다.
돌아보면 나는 운이 좋아 남들보다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이 공부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라의 큰일을 맡아 나름 뜻을 펼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시골이라 번거로운 인간사 없고, 빈촌이라 세도가의 수레마저 오지 않으니. 대낮에도 사립문 굳게 닫은 내 집, 빈방에 때 묻은 생각 없어라. 이따금 조용하고 한가로운 마을로 나서 사람들과 내왕하지만, 서로 만나도 잡스러운 말 없고 오직 농사일 잘 되는가 물을 뿐이네'. 요즘 내 생활과 같은 도연명의 '귀원전거'의 한 구절이다. 사실 어지러운 세상에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남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며 허송세월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좋은 글을 읽고, 농촌의 밝은 미래와 젊은이들을 응원하며 나답게 살고 싶다. 요행히 공자가 말씀하신 '노인들이 편하게 생각하고, 친구들이 믿어주며 젊은이들이 그리워하며 따르는 인생이 될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라겠는가. 무더운 여름날 사람들이 쉬어가던 옛날 고향마을의 동구나무처럼, 그런 어른으로 늙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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