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文章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힘에서 나온다 /이어령
명문은 두통頭痛을 낫게 한다
조조曹操는 두통이 날 때마다 진림陳淋의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아픈 것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소袁紹의 편에서 자신을 비방해 오던 진림이 포로로 잡혀 왔을 때에도 벌하지 않고 문서계로 등용시켰다. 중국에서는 그래서 명문을 쓰는 일을 傾國之大業(경국지대업)이라고까지 했다.
「달이 밝다」와 「달은 밝다」의 차이
명문을 쓰려면 「달이 밝다」와 「달은 밝다」의 그 차이부터 알아야 한다. 「이」와 「은」의 조사 하나가 다른데도 글의 기능과 그 맛은 전연 달라진다. 「달이 밝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환히 떠오른 것을 나타내는 묘사문描寫文이다. 그러나 「달은 밝다」는 달의 속성이 밝은 것임을 풀이하고 정의하고 있는 설명문이다,
이태백의 시에 「내 어릴 적 달이라는 말을 몰라 이름 지어 부르기를『백옥의 쟁반』이라고 했느니」라고 노래한 것이 있다. 묘사문은 마치 달이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가 달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쓰는 것이다. 습관이나 고정관념의 굳은살을 빼면 늘 보던 사물들도 새롭게 보일 것이다.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하기
이것이 묘사문의 효과이며 그 특성이다. 그리고 그 글들은 항상「지금」「여기」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개체個體로 존재한다
그러나 설명문은 정반대로「낯선 것」을 「낯익은 것」으로 만들어 주는 글이다.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고쳐 주고 모르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옮겨놓는 사전의 낱말 풀이 같은 글이다. 「지금」「여기」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떠오르는 달이 아니라 백과사전의 도해圖解 속에서 운행運行되고 있는 세계의 달, 무한 속의 달이다.
그러니까 기행문은 묘사문이요, 여행 안내서는 설명문이다. 어느 때 묘사문을 쓰고 어느 때 설명문을 써야 하는지,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면 글쓰기의 반은 이미 성공한 셈이다.
文體는 주제이다
폰의 유명한 정의 「문체는 인간이다」라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같은 인격체라도 편지글을 쓸 때와 일기를 쓸 때 그리고 수필을 쓸 때와 소설을 쓸 때의 그 문체는 달라진다. 사람에 의해서 문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따라서 문체는 변화한다.
문체는 외출할 때 옷을 입는 것과 같다. 일하려고 나가는 것인지, 파티장에 가는 것인지, 혹은 가는 데가 장례식장인가 결혼식장인가에 따라 옷의 선택이 전연 달라진다. 문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제이다. 그리고 그 주제는 문장의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울릴 때 비로소 그 특성을 나타낸다. 형식에 치우친 글은 불꽃과 같은 것이고 내용에만 치우친 것은 수풀과 같은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서로 긴장관계를 이루며 손바닥과 손등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것이 될 때 문체는 획득된다. 불꽃도 숲도 아닌 「불타오르는 숲」미국의 비평가 마크 숄러가 한 말이다.
병렬법을 활용하라
「달처럼 보이다가 별처럼 보이다가, 나비처럼 보이다가 티끌처럼 보이다가 염치고개를 넘어간다」
춘향이가 이도령과 이별하는 장면을 읊은 판소리의 한 대목이다. 멀어져 갈수록 점점 작게 보이다가 고개 너머로 사라져 버리는 이도령의 모습이 불과 네 개의 단어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달이 별처럼 작아진 다음에 어째서 별보다 큰 나비가 등장하는가. 선형적인 글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그 대목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달은 별과 짝이 되어 이도령의 얼굴 모양을 나타내고 나비는 티끌과 대비하여 이도령의 걸어가는 동작을 나타낸 병렬竝列구조로 파악하면 그 절묘한 표현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된다. 달과 별은 정태적靜態的인 것이고 나비와 티끌은 날아 다니는 것으로 동태적動態的인 것이다. 크고 작고 정태적이고 동태적인 네 단어의 병렬 구조에 의해서 멀어져 가는 이도령의 모습과 작아져 갈수록 커져가는 춘향이의 별리別離의 정감이 아무런 설명 없이 직물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시詩 散文이든 명문의 조건은 지엽적인 비유나 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의 구조 자체에 의해서 결정된다. 용비어천가의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 역시 그러한 병렬법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예수의 修辭學
예수는 똑같은 주제를 각기 다른 세 가지 우화로 보여준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와 짐을 버려두고 땅 위에 떨어진 한 알의 곡식을 줍는 농부의 이야기와 그리고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자 오히려 더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똑같다. 그러나 첫 번째 이야기는 양치는 遊牧民(유목민)의 경우를 예로 든 것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곡물을 가꾸는 農耕民(농경민)의 경우를 두고 한 소리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식을 키우는 어버이의 심정을 예로 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세 가지 우화는 메시지보다도 메시지를 받는 사람(청자)을 더 중시했던 예수님의 修辭學(수사학)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생산양식이 다르고 생활양식과 그 문화가 달라도 다 같이 느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이다.
名文이란 어느 때 어디에서 누가 읽어도 감동을 받을 수 있게 한 글이다. 시대와 생활공간이 달라도 제가끔 자신의 체험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교가 세계의 종교가 된 것도 바로 유목민이나 농경민의 어느 특정한 부류에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문화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과 다원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반화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토착적인 문화에 修辭의 밑뿌리를 둔다. 詩人 예이츠는 번역권을 보류한다고 했지만 참으로 좋은 글은 번역을 해도 역시 좋은 글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어느 나라에서나 베스트 셀러가 된 聖書(성서), 그래서 聖書의 글들은 名文의 典範(전범 )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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