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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수필 작법, 글쓰기 , 기타 ] 비평 수필이론 등

불광불급

by 자한형 202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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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불급不狂不及 /한상렬

수필에 미친 지 40여 년, 수필평론에 미친 지도 거지반 30여 년이다. 수필집만 14, 문학평론집 그것도 수필평론집만 21권을 상재하였다. 그 밖의 저서까지 합하면 73권이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들앉으면 일없이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 정도의 책을 내었으니 결코 적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도 지난해 연말에는 세 권의 책을 한꺼번에 또 내놓았다. 두 달치 연금을 털었다. 출판비를 건질 염량이 있어서가 아니다. 출판사에서 내어주고 인쇄를 받는 책도 아니요, 자비 출판으로 출판이 끝나면 지우들에게 선사할 요량이었다. 그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이로써 알리려 함이었다.

책을 보내고 난 후, E-메일이 왔다. 일산에 사는 어느 작가의 글이었다. "정말 미치셨나 봐요."라는 제목으로 "글쟁이 모두를 기죽이려고 하시나요?"라고 했다. 짧은 한 구절의 글이 내 문학 활동을 대변해주는 함축적인 내용이라 생각되어 신선한 충격이면서도 나쁜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미친 사람이길 원한다. 사전에는 '미치다'라는 말을 "신경 계통에 탈이 나서 언어나 행동이 이상해지거나, 몹시 흥분해 정신이 보통 때와 다르게 날뛰는 것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과연 내가 그러한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게 신경 계통의 이상이 있는 건 아니고, 다만 한 가지 일에 자신을 몽땅 던지고 몰입해 그 일을 끝장 내야 하고, 어쩌면 '그 일'의 도가니에 빠져 흥분해 있는 듯도 하니,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조금의 언턱거리가 있는 성싶기도 해서다.

비평 활동을 하면서 정작 본업인 수필 쓰기를 한동안 게을리하였다. 남의 글을 이야기하다 보니 내가 쓰는 글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평 활동은 적어도 그 분야에 창작 활동을 하는 이가 가장 적합한 비평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단에서 학문 연구에 집중하는 강단비평가의 경우는 창작의 실제와 거리가 있다고 나는 믿었다. 더구나 노회老獪한 학자의 경우, 문학 일반의 지식만으로 어찌 삶의 문제에 천착할 수 있으랴 싶었다. 그런데 나 또한 자칫 이런 함정을 스스로 파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벗어나기 힘든 벽이었다.

나는 분연히, 참으로 겁도 없이 그동안 한국수필문학의 새 지평을 여는 일에 작은 디딤돌이라도 놓겠다는 생각으로 끝없이 써 왔다. 그 미친 짓이 21권의 평론집을 통해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일에 골몰하게 하였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도대체 언제 그 많은 남의 글을 보고 비평을 하는가 하고 의아해 한다.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보는 듯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 그저 남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뿐이다. 남을 가르치는 일이 본업이었던 나는 가르치는 일과, 남의 글에 도움을 주는 일 외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는 일에 투자했다. 요즘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까지 가급적 피하고 있다. 시간이 아까워서다. 그러니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좋은 수필가는 수필적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삶 그 자체가 수필적인 사람, 이 말은 작가의 하루가 온전히 수필과 연관되는 삶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길을 가면서도 내가 구상하거나 전개하려고 하는 글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진행에 대한 숙고를 계속한다. 주제와 소재가 떠오르면 실제 집필로 들어가기 전에 무한히 생각한다. 끌어올글감과 그 글감 사이사이의 연결고리를 무엇으로 할까 노심초사한다.

비평의 경우에도 매한가지다. 일단 작가의 글을 정독한 다음, 그 작가의 글에 있어 생명이 되는 메시지를 찾아낸다. 그리고 가제목을 정한 다음 이에 맞추어 한 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몇 개의 축으로 경향에 따른 분류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짜맞추는 작업으로 들어간다. 이는 실제 집필이 아닌 구상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구상이 끝나면 실제 집필은 그리 긴 시간이 요하지 않는다. 정독이 빨리 진행되어 주제가 결정되면 다음에 이어지는 집필은 단숨에 이루어진다.

나는 비평 활동을 하나의 창작으로 생각한다. 한 작가의 글을 비평하기에 앞서 이를 통해 하나의 작품을 창작한다는 생각으로 집필에 임한다. 누가 읽어도 이해되기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때문에 나의 비평문은 거의 수필체라 해도 좋다. 애써 학문적 위업이나 어려운 이론을 인용함으로써 글의 생명을 잃어서는 작가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일은 재미가 선행되어야 한다. 독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으며, 창작하는 이에게도 매한가지다. 작가 자신이 쓰는 일에 스스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좋은 글이 될 리가 없다. 나는 쓰는 일, 그 자체에 매료된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써놓은 나의 글에 대하여 때로 만족할 때 그보다 더 즐거울 수 없다.

나만이 갖는 창조의 기쁨이다. 그래서 나의 비평 작업은 애초 당자의 소망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작가의 요청에 의해 비평 작업이 이루어질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나는 작가의 요청의 유무에 관계없이 내가 쓰고 싶은 작가의 작품에 대한 비평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떤 평론가가 자신의 수필작품을 비평한 것에 대해 자신의 수필세계에 틈입이 생기거나 엿보여졌다고 생각하기 십상일테니, 때때로 이로 인한 갈등을 갖는 일도 없지는 않다. 더군다나 작가가 받아들이기에 좋은 비평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겠지만, 단점이라도 지적할라치면 단박에 그 반응이 돌아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작가는 자신이 창작한 작품에 대하여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비평가는 그런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잣대로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선호와는 무관하다. 왜냐하면 작가의 작품은 일단 발표되면 자신만의 것이 아닌 만인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평가는 독자의 몫이 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세상에 얼굴을 내비친 작품을 마치 영원히 자신만의 것인 양 하는 이는 애초부터 발표를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폐쇄적인 작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칼질에 경계심을 갖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다칠까 두려워 말고 자기 보물함에나 보관해 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마땅히 비평의 내용이 혹평이든 아니면 호평이든 겸허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비평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필요 이상의 촉각을 곤두세운다면, 창작 자체를 그만두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때때로 비평 내용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혹평일 경우, 또는 지나친 아집으로 반감을 표시할 경우를 종종 본다.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혹평이 기분 좋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애초 비평가가 인신공격을 위한 의도로 비평한 것이 아닐진대 지나치게 비평에 과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평론가의 비평이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채찍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일들이 비평가의 주변에서 항상 맴돈다.

비평가도 평범한 작가이기에 그에게는 부족한 면이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식이 부족하거나 작품에 대한 이해의 부족, 또는 작가의 의도에 대한 파악의 미흡 등은 때로 작품 평가의 방향을 자칫 곡해하거나 그르칠 수도 있다. 이는 평자의 시선 차이에서 기인한다. 비평가가 삶과 문학 모두를 투시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판단한다면, 이 또한 오산에 불과하다. 부족한 사람이 남의 글을 어떻게 비평하느냐고? 비평가는 비평가이기 때문에 비평을 하는 것이다.

나는 수필가이면서 비평가다. 그러나 나는 지혜롭지 못하다. 사물을 투시하는 안목이나 인생에 대한 지혜로움도 부족한 그저 평범한 작가일 뿐이다. 그래서 늘 부끄럽기만 하다. 언제쯤 이 부끄러움이 내 안에서 사라질 것인가? 아마도 추측건대 사는 날까지 나는 이런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래저래 나는 남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래도 나는 이 일에 미치고 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