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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수필

밥벌이의 지겨움

by 자한형 2023.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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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책머리에

내가 사는 마을은 한강 맨 아래쪽 물가다. 저녁마다 서해에서 번지는 노을이 산하에 가득 찬다. 하류의 강은 늙은 강이다. 큰 강의 하구 쪽은 흐려진 시간과 닿아있고 그 강은 느리게 흘러서 순하게 소멸한다. 흐르는 강물 옆에 살면서 여생의 시간이 저와 같기를 바란다.

나는 이 물가 마을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저녁나절을 보낸다. 이제, 시간에 저항할 시간이 없고, 시간을 앞지를 기력이 없다. 늙으니까 두 가지 운명이 확실히 보인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벼락치듯 눈에 들어오고, 봄이 가고 또 밤이 오듯이 자연 현상으로 다가오는 죽음이 보인다.

공원에서 아이들은 미끄럼을 타고 그네를 타고 흙장난을 하고 인라인스케이트를 탄다. 노는 아이들의 몸놀림과 지껄임은 늘 나를 기쁘게 했는데, 혼자서 바라보는 자의 기쁨은 쓸쓸하였다.

날이 저물면 저녁밥을 차려놓은 젊은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불러갔다. 아이를 부르는 여자들의 목소리는 플루트의 선율처럼 저녁의 허공으로 떴다. 나는 아이들이 사라져버린 빈 공원을 감당하지 못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내가 앉은 마루 밑에는 쥐들이 살고 마당 모과나무 잎 속에서는 새들이 산다. 쥐들은 민첩하고도 경쾌하다. 가지에서 지껄이는 새들고 그러하다. 쥐가 구멍으로 들어가고 새가 날아가고 나면, 바라보던 나는 마루에 남는다. 하루의 시간이 흘러서, 아침과 저녁의 냄새가 바뀌고 빛의 밀도가 성기어진다. 천지를 가득 메운 대낮의 빛들이 사위는 저녁에는 숲의 안쪽까지 잘 들여다보이고 숨쉬기가 편해진다. 빛이 성긴 저녁, 사물의 안쪽은 드러나는데, 그때 대낮의 빛들은 모두 하늘로 불려 올라가 한강 어귀의 노을로 퍼진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빛과 노을과 쥐와 새에게로 건너가지 못하고 마루에 주저앉아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렸고, 세상의 더러움을 말할 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 저물어서 강가에 나가니, 내 마을의 늙은 강은 증오조차도 마침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 비틀거림은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을 게다. 그리하여 나는 말할 수 있는 것들, 말하여질 수 있는 것들의 한계 안에서만 겨우 말하려 한다. 그 작은 자리에서 모르던 글자를 한 개씩 보태면서 나는 말더듬이를 닮으려 한다. 그리고 그 한계는 점점 좁아진다. 다행한 일로 여기고 있다. 책 제목을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정하고 나니, 덜 삭은 슬픔이 창자를 씻어 내린다.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

한평생 연필로만 글을 쓰다보니, 잡지사 편집자들로부터 눈총을 받고 산다. 아무래도 컴퓨터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컴퓨터를 배우려고 한 번도 노력해본 적이 없다. 그 물건의 편리함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 누르면 나오는 물건을 볼 때마다 왠지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컴퓨터 배우기를 포기해버렸다. 팔자에 없는 짓은 원래 하지 않는 게 좋다.

연필로 글을 쓰면 팔목과 어깨가 아프고, 빼고 지우고 다시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다. 그러나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이는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이 느낌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하다.

내 몸이 허락할 때, 나는 내 맘에 드는 글을 쓸 수가 있고 내 몸이 허락하지 않는 글을 나는 쓸 수가 없다. 지우개는 그래서 내 평생의 필기도구다. 지우개가 없는 글쓰기를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지워야만 쓸 수 있고, 지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나는 겨우 두어 줄씩 쓸 수 있다. 나의 글쓰기는 아날로그의 글쓰기다.

아날로그는 이제 낙후된 삶의 방식이다. 아날로그는 다 죽게 되어 있다. 아날로그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슬픔과 기쁨, 고난과 희망을 챙겨서 간다. 디지털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곧바로 간다. 그래서 디지털은 앞서가고 아날로그는 시대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는 아날로그가 끌고 나가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고난과 희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그는 선율과 박자 위에,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를 빚어낸다. 그가 빚어내는 세계는 연약하고 정처 없는 것이어서, 음들은 태어나는 순간에 시간 속에서 소멸한다. 하나의 음이 소멸하고 또 다른 음이 태어나 그 뒤를 물고 이어지면서 다시 소멸한다.

선율은 그렇게 해서 시간 위에 뜬다. 떠서 출렁거리면서 흘러간다. 선율이 흔들릴 때 세계는 흔들리고, 이 세계의 철벽같은 강고함에는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은 살아 있다. 없었던 세계가 홀연 시간 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결핍의 소산인 것만 같다. 스스로의 결핍의 힘이 아니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를 시간 위에 펼쳐 보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상상력은 스스로의 결핍에 대한 자기 확인일 뿐이다.

악기는 인간의 몸의 일부로써만 작동한다. 인간의 몸이 아니면, 그 악기로부터 소리를 끌어낼 수가 없다. 타악기는 팔의 일부이고 관악기는 호흡의 일부이며 건반악기, 현악기가 다 몸의 일부이고 성악은 몸 그 자체이다. 그래서 모든 악기는 인간의 몸과 친숙하게 사귈 수 있는 물리적 구조로 태어난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 악기 속으로 연장되면서, 악기가 인간의 몸 속에서 살아나면서 소리를 낸다. 그래서 모든 음악은 인간의 몸의 소리인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과 생명이 스스로의 결핍을 힘으로 삼아서 소리를 낸다. 그리고 몸과 악기의 교감의 원리는 오직 아날로그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나는 몸을 써서 하는 일에 익숙지 못하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자본론의 각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망치를 들고 못을 박을 때, 못이 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긴다. 삽으로 땅을 파서 김장독을 묻을 때, 삽날이 땅 속에 깊이 박히지 못하는 일을 나는 수치스럽게 여긴다.

연장은 악기처럼 몸의 일부다. 연장은 이 세계를 개조하고 거기에 흔적을 남기려는 인간의 열망의 소산이다. 그래서 망치를 들고 못을 박을 때, 나의 몸은 나무에 저항하고 못에 저항한다. 못과 나무도 나의 몸에 저항한다. 그러므로 '못 박기'는 내 생명의 축제인 것이다.

바싹 마른 나무에 못을 박을 때는 위태롭다. 나는 그렇게 해서 나무를 이해하게 된다. 이 이해는 분석되거나 재구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망치로 못을 박는 순간에만 이 이해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못을 박는 일은 악기를 연주하는 일과 같다. 그러니 못이 휠 때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크다. 이 부끄러움은 아날로그 세상의 부끄러움인 것이다.

나는 개를 데리고 공원에서 달릴 때 나아 개가 똑같은 아날로그의 짐승임을 안다. 나는 개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날로그 세상의 네발짐승인 것이다. 내 콧구멍에서 김이 날 때, 개 콧구멍에서도 김이 난다. 이 세상의 길바닥을 헤매고 다닌 개의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고 내 발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여 있다.

나는 사람이나 개의 몸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은 발바닥의 굳은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의 발바닥이나, 두 갈래로 갈라진 돼지 발바닥, 소 발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 존재들의 개별적 삶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목이 멘다. 그리고 못대가리가 휠 때마다 세상과의 교감에 이토록 서툰, 내 생명의 초라함에 문득 놀란다. 아날로그 세상의 슬픔과 기쁨은 등불처럼 환하다.

한 그릇의 음식도 완전한 아날로그적 방식으로만 이 세상에 태어난다. 나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의 착한 마음과 그 놀라운 상상력을 사랑한다. 음식은 재료와 재료 사이의 교감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된장찌개는 하나의 완벽한 새로운 세계다. 재료들 사이의 교감으로,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었던 '국물'이라는 완연한 세계가 입 속에서 살아난다.

여자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내 바람둥이 친구는 "연애란 오직 살을 부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 저렇게 간단한 것을 몰라서 이토록 헤매었다는 말인가 싶었다.

살은 오직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나는 살의 아날로그를 자세히 쓸 힘이 없다. 그것은 아직도 내 언어의 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살의 아날로그는 언어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의 반대말은 ''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모르기는 해도, 살 역시 악기나 연장의 작동 원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이 ''이 타인의 ''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 대목을 나는 내가 힘이 있을 때 한번 써볼 생각이다.

목수들의 일터에서 놀다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 요즘 나의 일이란 하루에 그저 두어 줄씩 작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그나마도 하고 싶지가 않다. 글이란 아무리 세상없이 잘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몇 줄이라 하더라도 그 물적 바탕은 훈민정음 24글자를 이리저리 꿰어 맞추고 붙였다 떼었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글을 쓸 때 오른손엔 연필, 왼손엔 지우개를 쥔 내 몸은 부지할 곳이 없고 숨 쉴 공기가 없다.

지난봄에는 글쓰기를 아예 작파하고 놀았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집을 짓는 공사장이 있다. 나는 그 공사장에 가서 목수들과 안면을 트고 그들이 하는 일을 들여다보았다. 목수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젊은 목수들의 연장은 아름다웠고, 그들의 망치질이며 톱질과 대패질은 행복해 보였다. 세상의 재료들을 재고, 자르고, 깎고, 다듬어서 일으켜 세우고 고정시키는 자들의 기쁨으로 그들의 근육은 꿈틀거렸고, 날이 선 연장들은 햇빛에 빛났다. 아아, 연필과 지우개는 죽어 마땅하리라…….

나는 목수들이 잘라내 버린 나무 조각 몇 개를 얻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서 그 나무에 망치질을 했다. 나무통을 짜서 거기에 옥수수를 기르기로 했다. 수많은 못이 휘어진 뒤에, 나무통 몇 개를 겨우 만들었다. 거기에 심은 옥수수가 자라서 잎이 제법 늘어졌다. 옥수수 잎은 난초처럼 깔끔하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거칠고 싱싱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옥수수 잎이 거침없이 뻗어나가고, 힘찬 각도를 이루며 꺾이고 비틀리고 휘어진 모습은 언제나 나를 신나게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 바람이 스칠 때, 잎들이 부대끼며 서걱거리는 소리는 늘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한다. 옥수수가 좀 자라자, 연필과 지우개를 쥘 수밖에 없는 내 몸의 조바심은 겨우 진정되었다.

공사 중인 집의 처마 끝에 매달려 못질을 하는 젊은 목수는 그 아름다움으로 나를 주눅 들게 한다. 그러나 누구의 삶인들 고달프고 스산하지 않겠는가. 나무통이 좁아서 뿌리가 비어져 나온 옥수수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새로운 슬픔으로 지나간 슬픔을 위로한다. 옥수수 잎에서, 먼 바람소리가 들린다. 놀다보니 봄은 다 갔고, 내 사랑하는 젊은 목수들은 집을 다 짓고 어디론지 가고 없다.

떨림으로 너를 느낀다

연초에 집배원이 들고 오는 우편물은 대부분이 인쇄물이다. 연하카드조차도 이제는 인쇄된 활자로 쓰여져 있다. 어쩌다가 육필로 겉봉을 적은 편지를 받으면 마음이 부르르 떨린다. 육필은 몸의 진동을 느끼게 한다. 나의 몸과 너의 몸 사이에서 모든 신호들은 떨린다.

대동여지도에는 함경도·평안도의 국경이나 경상도·전라도의 남해안에서부터 서울 남산에 와 닿는 봉수의 연결망이 그려져 있다. 봉수와 봉수 사이에는 시각 장애물이 없어 사람의 육안으로 사람의 신호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봉수망은 나라를 만들고 나라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의 눈물겨운 고난을 일깨워준다. 삶은 그 신호의 떨림에 기대어 있다.

눈 쌓인 시골 간이역에서 철도원들은 깃발을 흔들어 열차를 맞고 또 보낸다. 캄캄한 철길을 따라서 신호들이 길게 이어진다. 신년 아침에, 신호의 떨림과 신호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삶의 하찮음까지도 경건하게 느껴졌다.

신호는 남으로부터 나에게로 오는 것이고, 나로부터 남에게로 가는 것이다. 신호는 깜빡이거나 혹은 떨림으로서 해독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나의 떨림으로 너의 떨림을 해독할 수 있다. 핸드폰을 진동 수신으로 바꾸어놓으면 신호는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내 몸을 울린다. 신호는 떨리는 진저리인 것이다.

지난 여름에는 핸드폰을 티셔츠 윗주머니에 넣고 다녔더니, 신호가 올 때마다 젖꼭지가 부르르 떨렸다. , 나에게 할 말이 있어서 나를 부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말문을 열자고 보내오는 신호가 내 젖꼭지를 부르르 떨리게 하면서 가슴으로 파고들다니! 나는 더 이상 핸드폰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헤어진 옛 애인들이 모두 다 내 젖꼭지로 진동 신호를 보내오기를 바랐다. 옛 애인들의 신호는 오지 않았고, 회사 간부들이 나를 족쳐대는 신호나 쓸데없는 광고 신호들만이 내 젖꼭지를 울렸다. 신호들은 대부분이 쓰레기거나 가혹한 노동의 채찍이었지만, 그 신호들이 젖꼭지를 부르를 울릴 때마다 나는 내가 내 몸의 신호로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태가 행복했다.

새해에는 대동여지도의 봉수 신호나 눈 쌓인 밤의 철길 위로 열차를 보내주는 수신호처럼, 다급하도고 아름다운 신호들이 당신들의 가슴에 도착하기 바란다. 핸드폰이여, 이 쓰레기 신호의 바다에서 울리고 또 울려라, 젖꼭지마다 진동으로 울려라. 부르르 부르르.

밥벌이의 지겨움

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있다. 모든 포유류는 어금니로 음식물을 으깨서 먹게 되어 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장면을 먹는 걸인의 동작과 고급 레스토랑엣 에이프런을 두르고 거위간을 먹는 귀부인의 동작은 같다. 그래서 밥의 질감은 운명과도 같은 정서를 형성한다.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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