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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수필

밥벌이의 지겨움2

by 자한형 2023.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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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2/ 김훈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 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봄에, 새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는 늘 마음이 아팠다. 나무들은 이파리에 엽록소가 박혀 있어서 씨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햋빛과 물을 합쳐서 밥을 빚어낸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인가.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나는 이른바 3D 업종으로부터 스스로 도망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간들의 저 현명한 자기 방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늙기란 힘든 사업이다

세월은 무자비한 불도저처럼 인간의 얼굴을 밟고 지나간다. 아무도 그 불도저의 궤도 자국을 피할 수는 없다. 늙음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것과 같은 자연 현상이지만, 그 자연 현상은 사회적인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다. 노인은 배척받고 소외돼야 마땅한 혐오스러운 인종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도화된 조직사회 속에서 연장자의 권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젊은이들은 이 위계와 권력에 도전하다가는 조직으로부터 영영 소외되기 십상이다. 장유유서가 타락한 조직 원리로 고착된 질서가 연공서열일 것이고, 그 완강함은 한국 사회의 풍토병과도 같다. 그토록 무서운 연장자들이 좀 더 나이를 먹어서 초로의 문턱을 넘어서면 십시간에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무력해진다. 조직 내의 권력을 박탈당할 뿐 아니라 실날같은 권위마저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의 산천을 떠돌아다닐 때, 산골마을이나 어촌에서 만난 어떤 노인들은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권력을 누려본 적도 없었지만, 세상의 이치와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환히 꿰뚫고 있었다. 한 생애에 걸친, 고되고 순결한 노동이 그들에게 배움의 은총을 베풀고 있었다. 그들은 그 배움을 터득했을 뿐 아니라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들의 앎은 건강하고도 아름다웠다. 그들의 얼굴은 삶의 표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노인의 얼굴은 그가 살아온, 생애의 지도이며 궤적이다. 나의 늙음은 어느 쪽인가를 따져보는 일은 진땀난다. 늙기란 이토록 힘든 사업이다.

남자도 오래 살고 싶다

40~50대 남자들이 같은 나이 또래 여자들보다 3배나 더 많이 죽는다는 사실이 통계청 발표에 나왔다. 40대와 50대 남자들이 그들의 아내들보다 훨씬 더 많이 죽는 일이 사회의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죽음이 이토록 군집화되는 배경에는 이 사회의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과 비애가 내장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40~50대 남자들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비리에 가득 찬 생존경쟁의 전장을 뚫고 살아간 사람들이다.

, 담배, 과로의 일상을 거듭해가며 사회의 모순과 비리, 억누름과 억눌림을 번갈아 겪어가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병이 걸렸든지, 무슨 사고를 당했든지 해서 죽었고, 죽어서 한 줌의 재나 한 움큼의 흙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애는, 구석기 시대 이후로 수렵과 약탈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던 수많은 남성들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로 태어나는 일은 유전적으로 세습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운명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한 시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특권'이라는 것의 본질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애로운 것인가. 그 고통과 비애를 저 통계 숫자는 입증하고 있다. 남성성의 본질이란 아마도 '결핍'일 것이다. 스스로 결핍이 아니라면 남자들이 여자를 그리워할 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여자가 아름답다

여고생들이 한꺼번에 까르르 웃을 때, 어느 한 아이가 예쁜 것이 아니라 그들 집단 전체가 예쁘다. 언젠가 설악산에 갔을 때 수학여행 온 여고생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여고생들은 숲 속으로 흩어져 끼리끼리 둘러앉아서 점심을 먹거나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웃으면 일제히 다들 따라 웃어댄다. 나는 그 아이들이 예뻐서 등산길도 잊어버린 채 한동안 주저앉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아이들은 아직 여성성에 도달하지 못한 나이의 불안정과 위태로움 속에서 가벼웠다. 아직 덜 자란 것들의 아름다움은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이 연약한 아름다움은 그 연약함만으로 완벽한 세계를 이루는 것이어서, 그들이 더 자라서 성숙한 여자가 되지 않더라도 좋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라서 큰 여자가 될 것이었다. 내가 느낀 그 아이들의 아름다움은 개별화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대도시의 번화가에서 '미녀'라고 드러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대체로 도발적인 아름다움이다. 그 여자들은 아름다움을 공격적 치장으로 꾸민다. 자본주의의 공과나 상품들이 그 공격술을 완성시켜주고 있다. 그래서 그 여자들의 얼굴이나 몸에서 성장 배경의 문화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광고의 위력이 느껴진다. 타인의 힘에 의해서 가꾸어지는 아름다움이다.

지난 여름에 8·15 통일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북한 여자들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젊은 여자들이었다. 초생달 모양으로 눈썹을 그렸고 입술 빛깔은 크림슨 레드였다. 북한 여자들의 여성스러움, 그들의 교태는 다들 비슷해서 학습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저 어린 여고생의 무리들이나, 고향의 질감을 지닌 여자들이나, 도발적 유혹을 뽐내는 대도시의 미녀들이나, 학습된 웃음을 웃는 북한 여자들 모두가 아직도 덜 자란 여자들일지도 모른다. 그 문화의 토양 전체 위에서 하나의 개별성에 도달한 여자가 성숙한 여자일 것이다.

가슴의 미학

유방 성형수술을 받은 여자들이 집단 부작용을 일으켜서 우리나라 젊은 여자들의 젖가슴이 크게 망가져버렸다고 한다. 젖퉁이를 크고 팽팽하게 만드느라고 그 속에 실리콘이라는 이물질을 넣었는데 모양은 도톰해졌지만 좀 지나니까 진물이 흐르고 염증이 깊어져서 아예 젖을 도려내야 할 지경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의 젖가슴이란 그 주인인 각자의 것이고 그 애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신라금관이나 고려청자나 백제 금동향로보다 더 소중한 겨레의 보물이며 자랑거리다. 여자들은 누구나 다 한 쌍의 젖가슴을 키워내서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젖가슴은 더욱 보편적이고 더욱 소중한 일상의 보물이며, 민족적 생명과 에너지의 근본인 것이다.

그런데 이 착한 젖가슴들을 죄다 곪아 터지게 만든 실리콘이라는 물건은 미국 기업이 온 세계 여자들한테 팔아먹은 것이라고 한다. 제 나라 여자들 젖가슴이 이토록 곪아서 문드러지도록 정부는 대체 무얼 했다는 말인가. 철딱서니 없고 맹하기는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은 이렇다. 여자 젖가슴의 모든 고난은 직립보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포유류들의 젖은 아래로 늘어져서 편안하다. 두발로 걷기 시작한 이후로, 여자들의 젖가슴은 어쩔 수 없이 전방을 향하게 했다. 가엾은 일이다. 크고 무겁고 밀도가 높고 팽팽하고 늘어지지 않은 가슴만이 아름답다고,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렇게 세뇌돼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크고 무거운 것들은 아래로 늘어지게 돼 있다. 늘어지려는 것을 자꾸만 끌어 올리니까 부작용이 생긴다. 생명이나 자연은 인간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본래 그러함처럼 아름답고 편안하다. 그러니 가슴이 좀 늘어지기로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는가.

셋이 함께 날아가는 세상

어떤 새는 저녁 무렵에 혼자서 바다로 나아간다. 혼자서 날아가는 새는 저 혼자서 바다 전체를 감당하려는 듯하다. 한 마리의 새는 바다 전체와 대치하고 있다.

한 마리의 개미 역시 그렇다. 개미 한 마리가 땅을 기어갈 때, 그 개미는 홀몸으로 땅 전체와 대치한다. 한 마리의 사슴이나 사자도 그러하다.

깎아지른 벼랑 끝에 앉아 있는 독수리 한 마리는 저 혼자서 이 세상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한마리는 외롭고 또 위태로워 보이지만, 이 외로움은 완벽한 존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본래 혼자일 뿐이라는 운명을 일깨운다.

새 두 마리가 날아갈 때, 세상의 질감은 완전히 바뀐다. 새 두 마리가 날아가는 풍경은 '함께'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따로따로 혼자서 날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라는 실체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란 그 '하나'의 중첩에 불과한 것인가. 이런 질문은 쓸데없어 보이지만 고통스런 질문이다.

달리는 자동차를 보면

나는 자동차 운전을 할 수 없지만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운전을 할 때, 주변의 자동차들에 대한 정보는 운전석으로 집중된다. 그래서 운전자는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고, 도로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자동차로 붐비는 거리에 나가보면 만인이 만인의 적이고, 일인 대 만인의 싸움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겁주는 판이다.

교통사고에 대한 대책이 개선되지 않은 채 자동차가 이처럼 늘어나고 있는 사태는 무섭다. 삶과 죽음이 일상의 도로 위에 뒤엉켜서 삶인지 죽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길 위로 차들이 달린다. 이것이 경제의 성장이며 이것이 국민의 역동성인가.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사람들이 무섭다.

길의 원리 행함의 원리

길은 생로병사의 모습을 닮아 있다. 진행 중인 한 시점이 모든 과정에 닿아 있다. 길은 이곳과 저곳을 잇는 통로일뿐 아니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모든 구부러짐과 풍경을 거느린다. 밭두렁길이 구부러지는 까닭은 농업이 기계화되기 이전에 길이 인간의 몸의 조건을 따라 이리저리 휘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길은 구부러지고 어떤 길은 곧다. 그 구부러짐과 휘어짐은 모두 길이 산하에 파고들면서 남겨지는 궤적들이다. 길은 산하의 가장 낮고 유순한 지점들만을 골라서 뻗어 나간다. 길은 인공의 산물 중에서 자연에 가장 가깝다. 길은 자연의 가파른 위험을 피해 간다. 그것이 길의 원리이고, ()함의 원리이다.

작년부터 죽령, 이화령, 대관령에 터널이 뚫렸다. 산맥을 터널로 관통해 내는 길 닦기는 자연의 가장 험하고 가파른 곳을 향해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는 길 닦기이다. 이 길 닦기는 '길의 원리'에 어긋난다. 그 원리에 역행함으로써 산맥의 몸통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는 새 길은 빠르고 편리하다.

꽃은 여전히 아름다운데

나무를 심을 엄두는 못 내고, 일년생 화초라도 몇 포기 마당에 심어서 아이들의 성화를 모면키로 하고 동네 꽃가게에 갔다. 농협이 직영하는 대형매장이다. 야생화는 한 포기에 5000원씩이었고, 수입종이나 개량종은 2000원씩이었다. 버려진 들판에 피어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야생의 풀꽃들이 훨씬 더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버려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진 연후에야, 그리고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을 싫증나도록 누린 연후에야, 그 초라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보이게 되는 모양이었다.

고통의 근원을 사유하며

모든 전쟁은 적을 타도해야 할 ''으로 규정한다. 인간에게는 전쟁까지도 문명의 질서와 규칙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허영심이 있다. 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은 이 허영심을 법제화하고 있다. 스포츠는 승부의 세계를 엄격한 질서와 규율의 통제하에서 운영한다. 이 엄격성이 마구 내달리려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함으로써 스포츠의 재미는 고조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삼국지에 또한 열광하는 까닭은 그 승부의 세계 안에 질서와 규칙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세계에서는 무질서와 야비함이 선명한 전술로써 작동된다.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라 삼국지에 가깝다. 제네바협정처럼, 문명개화된 허영의 규칙으로 전쟁의 과정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질서와 규칙을 지켜가면서, 문명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포로를 신사적으로 대접하면서 살육을 자행하자는 예절 바른 전쟁 규칙은 살육의 야만성을 정당화한다.

아이들은 청순하기만 한데

우리 마을에는 남자 고등학생도 많고 여자 고등학생도 많은데, 남자인 내 눈에는 아무래도 여고생들이 더 예뻐 보인다. 여고생들은 언제나 까르르 웃고 있다. 한 아이가 웃으면 일제히 따라서 웃는다. 지난번 대학입시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던 날에는 이른 새벽부터 교문 앞에 고등학생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2학년 아이들이었다. 추운 겨울 새벽에 아이들은 교문 앞에서 커피나 라면을 끓여서 시험을 치르려고 고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3학년들과 재수생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새벽 산책길에 발을 멈추고 나는 그 광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생존경쟁의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그날 새벽에도 아이들은 그토록 발랄하고 청순했으며 인간이 지녀야 할 덕성과 슬픔과 기쁨을 모두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교육이란 국영수를 가르칠 뿐 아니라, 아이들의 저 인간된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지켜내는 일이라야 마땅할 것이었다.

충남 예산의 한 초등학교 교장의 자살을 둘러싸고 전교조 교사들과 이 나라 교장 선생님들이 벌이고 있는 죽기 살기의 싸움은 저 아이들의 찬란한 생명력 앞에서 수치스럽다. 교장이 젊은 여교사에게 차 시중을 시킨 일이 발단이라고 한다. 듣기에도 민망하고 꼴 같지도 않다.

나는 젊은 여교사가 늙은 교장에게 차 한 잔을 가져다주는 선의와 애정은 예()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교장이 젊은 여교사에게 차 시중을 시키는 일은 스스로 삼가는 것 또한 예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양쪽이 인의예지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는 방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양쪽이 이른바 '참교육'을 한다는 교사와 교장이 아닌가. 개인적 자율의 영역을 스스로 포기하고 이를 악물고 끝까지 싸우다가 한쪽이 자살을 하고 나니까 양쪽이 각자의 입장을 세력화, 집단화, 이념화, 정치화함으로써 권력투쟁의 전면전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싸움의 형국은 한마디로 개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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