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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수필

밥벌이의 지겨움3

by 자한형 2023.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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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3/김훈

히딩크 열풍이 주는 교훈

한국팀이 공을 차 넣었을 때, 히딩크 감독의 골 세리머니는 선수들의 세리머니와는 크게 다르다. 선수들은 기쁨에 날뛰는 동작을 해보이지만, 히딩크 감독의 '어퍼커트 세리머니'는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성취의 희열을 폭발시킨다.

히딩크 감독을 모셔 와서 한국 축구가 단기간에 세계 정상으로 치솟았다는 성취를 '족집게 고액 과외'의 효과라고 말하는 자조적인 농담도 술자리에서 떠돌고 있다. 그리고 그 농담의 이면에는 스포츠가 아닌 현실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히딩크의 성취에 대한 가장 유력한 분석은 그가 한국인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외국인으로서 한국 사회의 고질적 악폐인 학연과 지연 등 인맥에 휘둘리지 않고, 재능과 성실성, 조직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태도를 기준으로 선수를 고르고 기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힘이 빠진다. 이것은 스포츠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삶 전체의 문제다. 한국팀이 16강을 염원하며 절치부심했던 지난 48년의 세월은 결국 우리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운명의 자승자박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우리이기 때문에 이루지 못했다는 말인가. 이런저런 연줄에 끈을 대 놓고서 끼리끼리 살려다가 다같이 무너졌다는 말인가. 히딩크의 열광은 그 열광의 배면에서 이처럼 고통스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축구든 먹고 사는 일이든 간에 사회 전체의 보편적 합리성이 확보되지 않고서는 늘 자신의 운명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자승자박의 비극을 거듭하게 돼 있다. 한국 땅과 한국인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외국인이 결국 그 자승자박의 족쇄를 풀 수 있었다면, 우리 사회는 너무나 비참하다.

지금 히딩크의 영광과 한국팀의 성취에 열광하는 만세 소리에 가려져서 그 영광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치욕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족쇄를 풀 수 있을는지는 히딩크가 이 나라를 떠난 후에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동쪽은 당신의 서쪽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한국인들은 '동해'라고 부른다. 한국인들의 방위 감각에 따르면 이 바다의 이름은 의심할 수 없이 동해이다. 나는 이 존엄한 바다를 동해라고 부르는 한국인들의 호칭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동해라는 호칭이 국제적인 공인을 받아야 하며, 세계 모든 나라의 지도에 이 바다가 '동해'라고 표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일본인들의 방위 감각으로 본다면 이 바다는 서쪽에 있는 바다다. 그러니 일본인들이 서쪽에 있는 바다를 어찌 '동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일본인들을 향해서 그것을 요구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오래된 서양 지도들도 이 바다를 동해라고 표기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동해'라는 표기는 서양인들의자기중심적인 방위 의식 속에서 이 세계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바다라는 뜻이지, 한반도를 기준으로 해서 그 동쪽 바다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의 방위 의식이란 모두 자기중심적인 협애한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협애한 공간에서 빚어지는 언어와 개념은 헛되게 느껴진다. 유럽 사람들은 한국, 일본, 중국을 극동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따져서 가장 유럽에 가까운 시리아, 터키, 사우디아라비아는 근동이고, 좀 더 동쪽으로 떨어진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중동이다. 그러나 이 용어들을 한국인의 자기중심적 방위 개념으로 정확히 번역한다면 서양인들이 말하는 근동은 극서가 될 것이고, 중동은 중서가 돼야 마땅하다.

···북은 인간이 현실의 방향을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의 토대를 이루는 자기중심적 시선이 나에게는 인간의 몽매, 그 자체로 느껴진다. ···북이란 오로지 물리적 방위 개념이고 거기서 파생된 언어는 위태롭다. 내가 너의 동쪽에 있을 때 너는 나의 서쪽에 있는 것이다. 남쪽, 북쪽도 이와 같다.

내가 겨우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동쪽과 너의 서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다는 이 총체적인 관계가 인간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운명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서민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서민 흉내를 내고 다녀서 그런지, 구청장이나 군수, 구의원이나 군의원을 하는 사람들도 너도 나도 서민 흉내를 내고 있다. 어렸을 적에 못 먹고 못 살고 지지리도 고생한 궁상을 무슨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떠벌리고 다닌다.

선거 때가 되니까 이 '서민'이 갑자기 성골 대접을 받고 있다. 멀쩡한 사람이 쓰레기 하치장에 가서 썩은 음식물 찌꺼기를 뒤적거리는 시늉도 하고 재래시장 생선가게에 가서 비린내 나는 생선을 맨손으로 주물러 보이기도 한다. 서로 자기만이 진짜 서민이고 상대방은 서민의 탈을 뒤집어쓴 귀족이라고 욕해대고 있다. 쓰레기를 뒤진다고 서민이 아니고 쌍소리를 잘한다고 서민은 아닐 것이다.

서민이 선이고 귀족이 악인 것도 아니다. 가난뱅이가 선이고 돈 많은 놈이 악인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진보가 선이고 보수가 악인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아니다. 부자가 부자의 악덕에서 헤어나기 어렵듯이 가난뱅이에게도 가난뱅이의 악덕은 있다. 또 부자의 미덕이 있듯이, 가난뱅이의 미덕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전면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쌍소리를 찍찍 해대거나 쓰레기통을 쑤시고 다니면서 그것이 마치 귀족적 엄숙주의를 까부수는 발랄함이나 낮은 자세의 삶에 대한 포용력인 것처럼 떠벌리는 꼴은 추악하다. 그렇게 뼛골 속부터 서민이고 서민이 그렇게 좋으면 서민으로 꾸역꾸역 일이나 하고 살면 되지, 대통령은 왜 하겠다는 것인가.

역대 대통령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돈을 훑어먹고 고랑을 차고 감방에 들어갔다. 이것은 말하자면 천민들이 하는 짓거리이다. 대통령과 그 주변에, 귀족의 명예심과 강건함이란 약에 쓰려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말로가 이처럼 극악한 천민주의의 비열함 속에서 끝나게 된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고귀한 것이며 삼엄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기본적 명예심이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서민의 등을 두드려서 서민의 표를 어느 정도 몰아갈 수는 있겠지만, 그 표가 서민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전세금이 오르고 점포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그날그날 벌어서 겨우 먹고살 수 있었던 '서민'들이 그보다 더 하층으로 추락하고 있다. 아무런 죄도 없고, 책임져야 할 일도 없지만 그들은 사회구조의 재물이 되어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 사회의 가난이란 단순한 물질적 결핍이 아니다. 이 사회에서 가난이란 차별이며 모멸이다. 지금,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이 서민의 흉내를 내가며 표를 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진짜 서민'이니 '가짜 서민'이니 하고 싸우는 꼴은 그야말로 천민적이고 그 싸움 속에서 정치 전체의 천민근성은 확산되어가고 있다.

치욕

반민족의 문제를 말할 때는 반드시 나이를 밝히고 시작해야 옳을 것 같다. 나는 1948년생으로 올해 55살이다. 더럽고 견딜 수 없는 세월을 살았지만, 그래도 일본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태어난 운명에 나는 감사한다. 나는 내가 체험하지 못한 시대의 고통에 관하여 말해야 하는 일이 두렵다. 이 두려움은 내가 체험한 시대의 두려움에 바탕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명색이 늙은 언론인이고 또 가끔씩 소설도 쓴다. 좋다는 언론사의 편집국장도 해봤다. 내가 지금의 신분과 역할로 일제시대를 살았다면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는 일은 식은땀 난다. 그런 괴로운 질문을 애써 외면한 채, 나는 그저 1948년생의 운명에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회피해버린 그 괴로운 질문은 친일에 관한 나의 생각을 교란시킨다.

나는 인간의 역사 속에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치욕을 긍정한다. 치욕을 도려내버린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언어화된 이념일 것이고, 역사는 치욕과 더불어 비로소 온전할 터이다. 나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그 애달픈 피난 행궁을 긍정한다. 나는 오랑캐 앞에서 땅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빌어서 국토와 백성을 보존한 인조 임금의 고뇌와 그날 천지간에 사무친 궁녀들의 통곡소리를 긍정한다. 나는 패배주의를 정서화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민족의 역사적 현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내 조국의 역사 속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졌던 사대주의의 생존술을 긍정한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긍정과 사랑을 일제 36년의 식민지 조국에 대해서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또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다만, 국망으로부터 한 세기 뒤에 태어나서 아직도 유효한 고통으로부터 살아 있는 과거의 치욕을 추스르려는 한 후인의 마음을 말하려 한다.

나는 1960년대의 그 설화적인 가난 속에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나는 김팔봉이나 임화 같은 선배들의 책을 읽고 그분들의 생애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친일과 항일을 파행적으로 거듭해가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당대의 절망에 좌충우돌했던 그분들의 생애를 읽으면서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삶의 비극성에 전율했다. 나는 당대사의 모순에 짓밟히고 또 일어서고 또 짓밟히는 그분들의 삶의 궤적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전율했고, 삶의 비극 앞에서 경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상해와 중경에서 김구 선생을 모셨던 임정의 청년이었다. 그분의 독립운동은 군사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의 정통성에 대한 그분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분은 김구 일행과 함께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동포들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인들 밑에서 노예처럼 비굴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그 비굴한 대다수의 동포들이 바로 민족과 국토와 언어를 보존한 힘이었다."라고. 그때, 나는 내 아버지의 늙음을 사랑할 수 있었다. 광복 뒤 반세기가 지났다. 세월이 흘렀으므로 나는 내 나이에 관계없이 내 반민족 선배들보다 더 역사 속에서 늙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당대의 사람들이 친일과 반민족의 고통을 말할 때, '늙음'의 바탕 위에서 말해주기 바란다. 내 말은 그 '늙음'의 마음으로 친일파 반민족의 치욕을 뭉개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은, 그 견딜 수 없는 치욕을 치욕으로써 긍정하자는 말이다.

치욕을 긍정하기 위하여서는, 교과서에 그 고통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가장 온당한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아이들이 자라나서 스스로 그 치욕의 역사를 알게 될 때의 혼란과, 제도에 대한 불신과 역사에 대한 환멸이 이 고통스런 논쟁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이미 어른이 되어서 늙어가고 있다. 우리는 사실의 바탕 위에서만 화해하거나 청산할 수 있다.

이념

새 학기가 시작되자 각 대학의 총학생회가 출범했다. 학생회관 건물에는 붉은 글씨로 쓴 대형 현수막들이 걸렸다. 또 다른 한 명문대학 도서관이 발표한 대출도서 순위 목록에는 해리포터와 마법사, 국화꽃 향기, 가시고기, 아버지같은 대중적 읽을거리들이 1위부터 30위까지를 몽땅 차지했고 인문교양 서적이나 전공 서적은 한 권도 끼어 있지 않았다. 나는 대학이 대중문화의 권역에 속해 있는 현상을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풍경에는 내적인 필연성이 있다고 믿는다. 대학이 보여주는 풍경들 중에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 붉은 글씨의 현수막들이다. 총학생회들은 더 이상 지향하지 않거나, 지향할 수 없거나, 힘을 몰아나갈 수 없는 지향점들을 그토록 격렬한 이념적 구호로 내걸어 놓고 있었다.

나는 그 현수막들이 표방하는 지향성들이 이 시대 속에서 모두 이에 무효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지향성은 이념의 깃발로서 여전히 미래를 향해 유효하게 펄럭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그 지향성을 향해서 대학이 과연 가고 있는 것이며, 그 지향성이 일상 속에서 작동되고 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매우 회의적이다.

지금, 이념이란 대체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현실 속에서 작동되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나는 그런 질문을 괴로워할 뿐, 거기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욕망에 정의의 탈을 씌운 은폐물을 이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이 그렇게까지 더러운 곳이어서는 견딜 수가 없다.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터져 나온 이른바 '색깔론'이란 그런 더러움을 여지없이 입증해 주었다. '너는 빨갱이다' 또는 '너는 보수반동이다'라는 공격은 더러운 공격이지만, 발목이 잡히면 끝장이다.

늙은 기자의 노래

나는 1973년에 신문기자 노릇을 시작했다. 1980년 봄부터, 모든 억눌렸던 것들이 폭발했다. 노동조합의 민주화와 근로조건의 인간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시가지를 마비시켰다. 그때, 나는 무력한 기자로서 현장에 있었다. 30년이 지난 후 2002년 봄에 나는 다시 사건기자로서 현장으로 돌아왔다. 현장에 투입된 그날부터 공기업 노조들의 파업과 집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틀 동안 현장을 지켰다.

노동자들은 '민영화 반대''24시간 맞교대 철폐'를 부르짖었다. 24시간 맞교대는 30년 전의 취재 현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24시간 연속근무에 따른 수많은 인간고의 문제도 30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유신시대의 투쟁 구호를 그들은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24시간 맞교대는 인간의 몸의 조건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노동제도이다. 24시간 맞교대는 하루나 이틀이라면 몰라도 그 직업을 생애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동제도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 자명함에는 이념이나 노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토록 분명하게도 부당한 것들의 부당함이 보이지 않도록 가로막는 것이 이른바 이념이라는 것이었을까. 다시 돌아온 취재 현장의 아우성과 흙먼지 속에서 나는 난감하였다. 노선과 지향성을 입에 담지 않더라도, 인간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감수성만이라도 작동되고 있었다면 이 사회는 한 시대의 무지몽매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30년 전의 투쟁 구호를 여전히 외쳤다. 젊은 전경들이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식판을 끌어안고 점심을 먹었다.

30년 동안, 아마도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 이 사회는 앞서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 계속 넘어지고 있구나, 흙먼지 속에서 점심을 먹는 전경들의 모습이 그런 생각들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전경들이 밥을 먹는 거리의 중국식당에서 점심으로 짬뽕을 먹었다. 인간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은 인간에 대한 둔감함이라고, 그 역겨운 짬뽕 국물이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명백히 잘못된 것들을 고쳐나가는데, 이처럼 막대한 손실과 갈등을 대가로 치루어야 하는 것이 이른바 발전의 원리인 것인가. 어째서 인간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인간이 인간의 몸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에 따르지 않고, 아니라고 뻣대어가면서 한 시대를 허송세월하는 것일까. 인간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던 인간들이 어째서 한바탕 '본때'를 보이고 나면 비로소 말을 알아듣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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