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 할머니
때는 1996년도였다. 사업가 황기연 씨는 친구인 캄디아에 살고 있던 교포 광준 씨와 함께 캄보디아 오지 등을 돌아다녔다. 공사연이란 것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한약재 비슷한 것으로 위장병에 특효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히치하이킹을 하던 싯나라는 처녀를 차에 태우게 되고 인연을 맺게 된다. 기연씨가 한국인임을 알게 된 싯나는 그랜드마더 코리언이란 얘기를 한다.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싯나씨는 빨래를 할 때 빨래방망이를 사용해서 빨래를 했다. 또한 사과를 깍을 때 돌려서 사과를 깍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남아와는 다른 한국인만의 특성이었던 것이다. 독특한 한국습관에 의해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훈 할머니를 만나게 된 기연 씨는 할머니의 사연을 듣게 된다. 그녀는 모국어를 잊었다. 기억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가물가물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자신의 이름은 나미였다. 나중에 훈 할머니의 이름으로 확정되어 판명된 것이 이남이였다. 그리고 본관은 인천 이씨였다. 1남 3녀의 차녀였다. 그렇게 알려진 훈 할머니의 사연은 프놈펜 포스트지에 그 사연이 소개된다. 한국언론에서도 훈 할머니를 취재하게 되고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할머니는 각종 사회단체의 도움을 받아 손녀들과 함께 꿈에도 그리워하던 고국을 방문한다. 고국을 떠난 지 55년만인 1997년 7월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고향은 진동이라고 기억했다. 진동이라는 이름과 유사한 지명이 전국에 수백곳이었다. 여러 곳을 수소문하고 탐문하여 마산시 진동면이 그녀의 고향임을 찾아냈고 확인했다. 그녀가 국제공항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보인 모습에는 그녀가 도화지에 자필로 쓴 “내 이름은 나미입니다. 혈육과 고향을 찾아주세요”라는” 문구였다. 진동까지 찾았는데 그녀의 가족을 찾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할머니가 기억해 낸 것은 어린 시절 집 마당에 있던 가마솥이었고 그 가마솥에 엿을 고왔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가마솥을 가지고 유추된 것은 엿장수라는 직업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엿장수였고 어머니는 방물장수였다. 그렇게 탐문해서 찾아낸 가구는 5 가구였다. 최종적으로 밝혀진 것은 그녀의 호적이었다. 어머니(장점이) 아버지(이성호) 그리고 언니(이덕이) 본인 남동생(이태숙) 여동생(이순이)의 가족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언니는 모두 작고했고 훈 할머니가 애지중지했던 남동생도 그녀는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다. 5년 전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한 지방지 기자가 수소문과 73일의 취재와 추적 끝에 그녀의 막내 여동생을 찾아냈다. 기자가 훈 할머니 사진을 보여주자 동생할머니는 사진을 끌어안고 폭풍 울음을 쏟아냈다. 그녀는 합천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올케 조선애 씨는 경상북도 경산에 살고 있었다. 훈 할머니는 기적적으로 가족과 상봉을 했고 한국인으로 국적도 회복하고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았다. 그녀는 여동생 등 가족과 함께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손녀와 함께 경북 경산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투표를 하기도 하고 한국인으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어장벽 그리고 문화적 차이 가족 간의 갈등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한국생활 4개월 만에 캄보디아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 캄보디아에서 생활한 지 5년이5 되던 해에 노환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녀는 아리랑이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 나가 놀았던 추억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가족들과 이별하고 고국을 떠날 때까지 단란하고 행복한 생활을 이어갔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부산항으로 갔고 처음으로 끌려간 곳은 싱가포르였다. 그곳에서 위안소에 거주하며 위안부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한 달 후 캄보디아 프놈펜의 위안소로 옮겨가게 되었다. 일본군 장교 다다 쿠마와 만나 정분을 쌓았다. 그리고 딸을 낳았다. 그러던 중에 다다쿠마는 중국인 현지처를 사귀게 되고 그녀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다쿠마와 작별을 고했다. 취재진이 현재의 다다쿠마를 인터뷰한다. 그는 훈 할머니를 기억했고 그녀와의 관계를 인정했다. 인천이 고향인 것으로 알고 있었고(이는 본관과 고향을 착각한 듯 여겨진다) 두 사람 사이의 자식에 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는 현재 의원 사무실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68년 캄보디아를 방문해서 훈 할머니와 한차례 만나기도 했던 듯하다. 다다쿠마와 헤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패망으로 위안부 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훈 할머니는 캄보디아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1남 2녀의 자식을 두게 된다. 그렇게 살았는데 남편은 술주정뱅이였기에 계속적으로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그렇게 혼자가 된 훈 할머니는 자식들을 키우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75년 폴 포트가 집권하고 캄보디아가 공산화가 되었다. 인구의 1/4인 2백만 명이 학살되는 킬링필드 란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안경을 썼다고 지식인이라 해서 처형되는 형국이니 말할 수 없는 핑계로 수많은 지식인 등이 학살되고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훈 할머니의 하나뿐인 아들이 크메르루주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된다. 일본의 만행으로 되어 있는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미제로 남겨졌다. 한국법원에 의해 손해배상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일본과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현 정부로 인해 제 3자 변제 방식이란 미명하에 우리 기업들의 출연금으로 변제하려는 방식으로 해결책이 시도되고 있다. 훈 할머니처럼 그렇게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외국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 현황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안타까운 실상이다. 범정부 차원에서 이런 부문에 관해 충분한 지원과 사례발굴 작업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리라. 지구 끝까지 제 2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전범을 추적해서 단죄했던 이스라엘 모사드가 해냈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그들은 주범 아이히만을 법정에 세웠고 재판절차를 거쳐 단죄했다. 그 책의 저자 독일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끌어냈다. 언제나 평범한 범부도 최악의 악마로 변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리라. 훈 할머니는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뼈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었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대한 사안이다. 힘이 약한 민족이 겪어야 하는 비극이고 아픔이 아닐 수 없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훈 할머니의 일생은 아픔과 고통과 형극을 삶을 살았던 한국인이었다. 현생에서의 모든 고난 아픔 한을 잊고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지내기를 기원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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